Chapter 7
황궁에 돌아온 이후로, 마리와 황태자의 관계에는 조금 변화가 생겼다. 황태자의 전담 시녀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단순히 시중드는 것을 넘어 업무를 도와주는 여관(女官)의 일까지 하게 되었다. 일부 지체 높은 시녀들이 맡는 비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보면 되었다.
“오후 2시경에 내무대신의 알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래, 어떤 용무지?”
“얼마 전 발생했던 동부 지방의 소요를 상의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돌아온 그는 이전처럼 딱딱한 철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리는 황태자에게 가지런히 정리한 서류를 내밀었다.
“결제 대기 중인 서류들입니다. 일의 경중을 따져 시급을 요하는 것과 깊은 검토가 필요한 것, 급하지 않은 것 등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마리가 분류한 서류를 쓰윽 살피고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모든 서류가 그녀가 이야기한 대로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하려면 단순히 글을 읽는 수준이 아닌,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식견이 필요했다.
“대단하군. 훌륭해. 이렇게 정리하면 확실히 일의 효율이 늘겠어.”
“감사합니다.”
마리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가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맨날 구박만 받고 살아, 나도 내가 아무런 재능 없는 못난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죽했으면 과거 죄수에게 소원을 빌 때,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을까. 자신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때, 황태자가 잠시 주저하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하니 좋구나.”
마리는 자신의 능력을 칭찬해 준 것으로 여기고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전하.”
* * *
마리는 순조롭게 새로운 황궁 생활을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난관이 밀려오고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두 황태자비 후보, 아리엘과 레이첼이었다.
“두 델피나분을 뵙습니다.”
마리는 황태자의 명을 받아 행정부로 향하는 중, 정원에서 낯익은 두 사람을 마주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리엘과 레이첼이었다.
‘앙숙인 두 분이 왜 한자리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찻잔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을 보니 그냥 우연히 만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온 힐데른. 잘 지내셨나요?”
레이첼이 평소처럼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반면 아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치고 마리를 무시했다.
“특별한 일은 없으셨죠?”
“네, 레이첼 님.”
“오랫동안 못 뵌 것 같은데, 가끔 별궁으로도 놀러 오세요.”
마리는 그 말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레이첼은 그날의 일 이후 대하기 편하지 않았다. 레이첼도 예의상 저렇게 이야기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초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짧은 사교적 대화를 나눈 후, 마리는 황태자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 전 이만 전하의 명을 수행하러…….”
“아, 그래요. 바쁘신데 제가 눈치 없이 붙잡고 있었네요. 수고하세요.”
그렇게 길을 가며 마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두 분 중 과연 누가 황태자비가 되실까?’
이런저런 일로 관심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황태자비 간택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모르겠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전하도 전혀 말씀이 없으셔서.’
서남부를 다녀오며 황태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는 간택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의아할 정도로 말이다.
‘뭐, 내가 관심 가질 일은 아니니까. 전하께서 알아서 현명하게 결정하시겠지.’
마리는 간택에 대해서는 신경을 껐다. 간택은 더 이상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미 그를 모시기로 결정한 후였고, 무엇보다,
‘나와 황태자 전하는 그런 남녀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관계니까.’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황태자와 그녀와의 사이에 남녀 간의 감정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마리 혼자뿐이란 것을. 남몰래 홀로 괴로워하고 있는 황태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둘의 관계를 조금씩 의심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러다 정말 마리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대부분은 그럴 리 없다고 여겼지만 남녀 간의 일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의심을 하는 이 중, 황태자비 후보인 아리엘과 레이첼도 있었다.
“대단하죠?”
레이첼이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말했다.
“‘전 이만 전하의 명을 수행하러’라니, 전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정말 대단해요. 우리 같은 델피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나 봐요.”
아리엘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레이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전하께서 이번에 서남부 지방을 시찰 가셨을 때 온 힐데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공녀 저하?”
“그게 무슨 뜻이죠, 영애?”
“조금 이상해서요.”
레이첼은 요정처럼 청초한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둘이서 서남부 지방에 다녀온 뒤로 힐데른 예작과 황태자 전하가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아서요. 단순히 시녀로서 시중을 드는 것을 넘어 중요한 일도 많이 맡는 것 같고.”
“…….”
“물론 지체 높은 시녀가 여관(女官)으로서 비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없는 일은 아니지만, 온 힐데른이 아직 그 정도 직책은 아니잖아요?”
아리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 말은? 영애는 지금 서남부 지방에서 저 천한 시녀와 황태자 전하 간에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레이첼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어떻게 그런 망측한 생각을 하겠느냐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알겠어요. 다만…….”
“다만?”
“오랫동안 같이 여행했으니까. 같이 있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레이첼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전하께서 그러지는 않으셨겠죠. 전하는 올곧으시니까. 그래도…… 혹시나 전하도 남자이시니 유혹이 있었으면…….”
레이첼은 조심조심 말하다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니겠죠. 아무리 유혹이 있었어도 아닐 거예요.”
“…….”
하지만 이미 아리엘의 안색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상태였다. 아리엘은 분노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움켜쥐었다.
‘그 천한 시녀가 설마 전하를?’
아리엘도 설마 그건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최근 그 시녀와 전하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설마 정말로? 그 천한 년이?’
아리엘의 머릿속에 마리가 황태자를 유혹하는 모습이 자꾸 상상이 되었다. 그때, 레이첼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죠?”
“……?”
“전 사실 저보다는 아리엘 공녀가 황태자비로 최종 지명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물론 저도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가문의 격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 말에 아리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사실 그래도 큰 상관은 없어요. 아리엘 공녀같이 훌륭한 분께 지는 것은 전혀 수치가 아니니까요.”
레이첼은 속상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 저 근본 없는 시녀에게 밀려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다면 그때는 정말 수치스러울 것 같아요. 자살하고 싶을 만큼.”
아리엘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영애? 본 공녀도 영애도 아닌, 저 시녀가 황태자비가 된다니.”
“아, 불쾌하셨으면 죄송해요. 저도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레이첼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남녀 간의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요. 만약 저 시녀가 정말로 황태자비가 되면, 저야 그렇다 치지만 제국 최고의 대귀족인 슐레안 대공가의 공녀께서는 입장이 어떻게 되실지…….”
거기까지 이야기한 순간, 아리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리엘은 표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 천한 년에게 본인의 주제를 똑똑히 교육시킬 테니.”
아리엘은 이를 바득 갈고 정원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게 된 레이첼은 아리엘에게 보였던 연약한 표정을 풀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쉽네.”
식어버린 차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 * *
그 뒤 아리엘은 이를 갈며 마리를 노려보았다.
‘저 천한 시녀가 황태자비가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레이첼에게 밀리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저 시녀에게?
아리엘은 주변 시녀들을 추궁하였고, 실제로 일부 궁인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가만두지 않겠어.”
아리엘은 분노로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녀도 소문이 진짜일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불쾌했다.
‘제대로 혼찌검을 내줘야겠어. 천한 본인의 주제를 똑똑히 가르쳐 줘야지.’
아리엘은 원래부터 마리가 마음에 안 들었었다. 이번 기회에 단단히 혼찌검을 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고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한 가지 난관에 아리엘은 몸을 멈칫했다.
‘그런데 무슨 핑계로 혼찌검을 내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지만 막상 혼낼 핑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근거 없는 소문을 핑계 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리가 평소에 특별히 잘못하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칭찬을 받을 만한 일만 가득했지.
‘이익! 분명 무언가 잘못하는 것이 있을 거야. 두고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눈에 불을 켜고 마리를 한참이나 노려본 다음이었다. 아리엘은 마리를 혼내 줄 핑계를 발견했다. 시녀인 그녀가 지엄한 황족에게 실례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정확히는 마리가 상대 황족에게 마술 쇼를 하고 있었는데, 살짝 무례해 보이는 동작이 있었다.
‘이는 황족모독죄에 해당하는 중죄!’
그렇게 생각한 아리엘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마리를 혼내 주기 위해 나섰다.
“시녀 마리!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감히 지엄한 황자 전하께!”
마리는 마술 쇼를 하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아리엘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
“당장 무례를 멈추지 못할까?!”
아리엘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것은 마리만이 아니었다. 같이 있던 황자가 황당한 목소리로 마리에게 물었다.
“얜 누구야?”
황자의 이름은 오스카. 황후 소생의 적통으로 이제 갓 7살이 된 꼬마 황자였다. 라엘이 황태자가 된 후, 숙청의 위협을 겪고 있으며, 지난번 수정궁 지하 창고에서 화재를 낸 후 중벌을 받을 뻔하다가 마리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후 자신의 궁에서 감금되어 있다가 얼마 전 풀려나 마리를 보러 왔던 것이다.
“마리!”
“오스카 전하!”
오랜만에 나타난 꼬마 황자를 보고 마리는 반가워했다.
“잘 지내셨나요, 전하?”
“응, 난 잘 지냈어. 넌? 나 안 잊어 먹고 있었지? 잊었으면 혼내줄 거야!”
꼬마 황자의 으름장에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안 잊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귀여우신 황자님을 잊었겠어요?”
“나 안 귀여워! 난 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야!”
“아, 죄송해요. 멋진 황자님.”
오스카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마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귀여웠다. 꾸밈없는 꼬마여서일까. 몇 번 만난 적 없고, 이번에도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친근감이 들었다.
“참, 마리. 마리!”
“네?”
“나 너한테 보여 줄 마술 연습해 왔어!”
마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마술이요?”
“응, 오늘도 마술로 누가 이길지 내기하자. 이번엔 꼭 내가 이길 테니 각오해!”
오스카는 감금당해 있는 동안 할 것이 없어 마술을 절치부심으로 익힌 모양이다. 마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한번 볼까요?”
그들은 이런저런 마술을 서로 선보이며 놀이를 한창 하였다. 마리가 마술을 펼치기 위해 오스카의 눈가를 자신의 손으로 가릴 때였다. 갑작스레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녀 마리!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감히 지엄한 황자 전하의 얼굴을 함부로 만지다니!”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난데없이 아리엘이 나타나 씩씩거리고 있었다.
“……네?”
“당장 무례를 멈추지 못할까?!”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리와 오스카의 머릿속으로 동시에 ‘갑자기 이건 뭐지?’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오스카가 황당한 목소리로 마리에게 물었다.
“얜 누구야?”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 저하이십니다.”
“아니, 그것 말고.”
오스카는 귀여운 얼굴로 짜증을 내며 말했다.
“얜 뭔데 우리가 노는데 갑자기 끼어든 거냐고. 마리, 네 친구야?”
“……친구는 아닙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오스카는 아리엘을 노려보았다.
“넌 뭐야?”
오스카가 되레 자신을 노려보자 아리엘은 일순 주춤거렸다. 하지만 곧 가슴을 쫙 펴며 말했다.
“저 천한 시녀가 전하께 무례를 범하고 있기에 버릇을 고쳐 주려 나서게 되었습니다, 전하.”
“무례는 네가 범하고 있잖아.”
“네?”
“너 제대로 나한테 예 안 표했잖아. 대공가의 일원이면 인사 안 해도 돼? 무릎 안 꿇어?”
“……!”
아리엘은 다시 한번 당황했다. 상대가 원체 꼬마이기도 했고, 마리를 혼내 줄 꼬투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제대로 예를 표하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이 10황자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오스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받았다. 일부러 오만해 보이려는 행동이었다.
“그래, 왜 왔다고?”
“저 천한 시녀가 전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무례?”
아리엘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 시녀가 전하의 얼굴을 함부로 만진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죄로…….”
“내가 해달라고 한 건데?”
“네?”
“내가 마술 보여 달라고 부탁해서 한 거야.”
아리엘은 순간 말문이 막혀 떠듬거렸다.
“하, 하지만 전하…… 마술은 저잣거리의 천민들이나 즐기는 놀이로, 전하께 그런 잡스러운 놀이를 보여 주는 것도 궁중의 예법상 맞지 않고…….”
그녀가 떠듬떠듬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오스카가 버럭 화를 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네?”
“이 마술 놀이는 마리가 아니라 내가 하자고 한 건데. 그러면 내가 지금 잘못했다는 거야?!”
황자가 자신을 향해 화를 내자 아리엘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른 전개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리고 마술이 어때서? 백성들이 즐기는 놀이는 황족이 즐기면 안 된다는 제국법이라도 있나? 오히려 높은 사람일수록 백성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도 체험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옆에서 듣던 마리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황태자 형제 아니랄까 봐, 어린 꼬마인데도 말발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리엘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이런 전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무슨 7살짜리 꼬마가…….
그때, 오스카가 말했다.
“사과해.”
“네?”
“함부로 이야기한 것 사과하라고.”
아리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게 무슨 수모란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힘없는 꼬마라도 황족은 황족. 이런 상황에서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좋아, 사과를 받아들이지.”
오스카는 턱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근엄해 보이려는 제스처였는데, 어린 외견 탓에 굉장히 귀여워 보여 마리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 그러면 저는 이만.”
아리엘은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오스카가 그녀를 붙들었다.
“어디 가? 사과마저 하고 가야지.”
“네? 사과는 이미…….”
“마리한테 안 했잖아.”
“……!”
오스카가 성질을 내며 말했다.
“너 방금 마리한테 천하다고 했지. 너 마리가 누구인지는 알아?”
“네? 시녀…….”
“그래, 시녀지. 내가 나중에 결혼할 시녀.”
그 말에 아리엘은 물론이고, 마리도 깜짝 놀랐다.
“전하?”
누구 마음대로 결혼이란 말인가?! 하지만 오스카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조막만 한 가슴을 당당하게 펼치며 외쳤다.
“마리는 나중에 이 오스카와 결혼할 예정이니, 마리를 모욕한 것 당장 사과해!”
결국 꼬마 황자 오스카 때문에 아리엘은 본전도 못 찾고 쫓겨났다. 오스카가 강짜를 부린 탓에 결국 마리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아악! 빌어먹을!”
와장창!
자신의 별궁으로 돌아온 아리엘은 있는 대로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거울이 깨지고, 찻잔이 박살 나고, 가구가 뒤집혔다.
“공녀 저하. 고정을…….”
시녀들이 말렸으나 아리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쌓여 있던 것이 폭발해 이성을 반쯤 잃은 것이다.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아리엘은 이를 빠득 갈았다.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번득였다.
“마틸다.”
“네, 저하.”
“시녀 마리를 정원으로 불러와.”
아리엘의 전담 시녀 마틸다는 조심스럽게 말렸다.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부르는 것이 어떨지요?”
“지금 당장 부르라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
하지만 아리엘은 버럭 소리 질렀다. 어쩔 수 없이 마틸다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아리엘은 별궁 근처의 정원에서 마리를 기다렸다.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어.’
그녀는 찻잔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마틸다, 그 시녀는 언제 온다고 했지?”
“정확한 시간은…… 보던 업무가 끝나고 온다고 했으니, 아마 곧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아리엘은 분노를 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보자.’
그런데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마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아리엘은 다시 한번 폭발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지금 당장 끌고 와!”
“그, 그게…… 황태자 전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는 거라…….”
마틸다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아리엘을 말렸다.
“공녀 저하, 조금만 진정을…….”
그때였다. 드디어 저 정원 끝에서 작은 소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리엘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마리였다!
“크흠!”
마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리엘은 최대한 위엄 있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야 대화를 나눌 것도 없이 치도곤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저 천한 것에게 자신의 위엄을 보이고 잘못을 시인하게 해야 했다.
“아리엘 공녀 저하를 뵙습니다.”
마리는 먼저 예를 표했다. 공손한 태도였지만, 아리엘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이 꼬이니 다 고깝게 보였다.
‘가증스럽긴. 저 순진한 얼굴로 전하를 유혹했다고?’
물론 마리가 황태자를 유혹했다는 소문은 떠들기 좋아하는 궁인들의 낭설일 뿐이었으나, 아리엘은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모르겠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은 목소리에 최대한 서릿발 같은 위엄을 담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네가 주제도 모르고 황궁의 기강을 난잡하게 흐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바. 차후 황태자비가 될 델피나로서 이를 책하기 위해 너를 불렀다.”
마리는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 너무 난데없는 이야기라 마리는 당황했다.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발뺌하는 거냐?”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아리엘이 꾸짖듯 말했다.
“네가 전하를 유혹하며 혜안을 흐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죄를 감해 주겠다.”
“유혹…… 이요? 제가요?”
마리는 당황해 반문했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 화가 나기보다는 그냥 당황스럽기만 했다.
“저는 전하를 유혹한 적이…….”
“어디서 거짓말을?! 혼쭐이 나야 정신 차릴 것이냐?!”
버럭 화를 내는 아리엘을 보며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말이 통해야 상대하지.’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뭐라고 이야기를 정정해 줄 생각도 안 들었다.
‘그나저나 빨리 재무대신한테 가 봐야 하는데.’
마리는 황태자가 자신에게 내린 일을 떠올렸다. 이런 이야기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원래는 이렇게 찾아오기도 곤란했었지만, 아리엘의 시녀 마틸다가 반드시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그녀를 불러 심부름 가는 길에 잠시 들렀던 것이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 저하, 죄송하지만 제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볼일이 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일이 끝난 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마리는 최대한 예의를 잃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행정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그런 마리를 보며 아리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쟁 포로였던 천한 년이 황태자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나를 무시해?’
사실 마리는 아리엘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황태자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떠난 것이지만, 화가 치밀어 올라 있었던 아리엘에게는 무시로만 여겨졌다.
‘이익! 가만히 두지 않겠어.’
최근 레이첼과 비교당하며 받은 스트레스까지 더하여 아리엘은 씩씩거리며 마리에게 다가갔다.
“너, 마리!”
“……!”
고개를 돌린 마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다가온 아리엘이 그녀의 어깻죽지를 잡더니 한쪽 손을 번뜩 치든 것이다. 마치 따귀라도 때리려는 것처럼.
‘아.’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마리는 얼굴에 전해질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덥석.
무언가 가로막는 느낌과 더불어 낮은 음성이 들렸다.
“오랜만에 친구나 만날까 하여 지나가던 중이었는데, 큰일 날 뻔했군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뜬 마리의 시야에 조각 같은 은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후작 각하?”
키에르한 후작. 그가 평소와 전혀 다른 차가운 눈빛으로 아리엘 공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를 때리려던 그녀의 팔을 붙든 채.
“제 친구에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공녀?”
키에르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
아리엘은 황실 친위대 단장인 키에르한 후작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후작 각하? 이곳엔 왜?”
하지만 키에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탁, 하고 아리엘의 손을 놓더니 고개를 돌려 마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 네.”
마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에르한은 다행이라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공녀?”
“그…….”
“설마 제 친구에게 손찌검하려고 했었던 것입니까?”
아리엘은 당황해 생각했다.
‘왜 키에르한 후작님이?’
키에르한 후작! 황실친위대의 단장이자 제국 3대 대귀족 중 하나인 세이튼가의 당주! 작위는 후작으로 슐레안 대공가에 비해 다소 낮지만, 지니고 있는 저력은 결단코 그에 못지않았다. 오히려 변경백으로서의 군사력은 제국 최강. 그런 세이튼가의 키에르한 후작이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더구나 저 눈빛은?’
아리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키에르한 후작은 타인에게 친절하기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벽이 있어 사람들은 그를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어쨌든 키에르한은 늘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친절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싸늘함만이 가득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공녀.”
“…….”
아리엘은 마리를 대할 때의 당당함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키에르한의 싸늘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 그…… 교육을 하려고 했어요.”
“교육 말입니까?”
“네, 저 시녀가 건방져서…….”
아리엘이 떠듬떠듬 내뱉은 말에 키에르한의 얼굴이 더욱더 차가워졌다.
“슐레안 대공가에서는 교육을 그런 식으로 하나 보군요.”
아리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황궁 어디에서나 칭찬이 자자한 온 힐데른인데,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인지 의아하군요.”
키에르한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낮지만 무거운, 그래서 듣는 사람의 가슴이 서늘해지는 한숨이었다.
“마리 양.”
“네, 각하?”
마리는 키엘이 보여 주는 뜻밖의 모습에 놀라 멍하니 있다가 답했다. 키엘은 평소와 똑같은 부드러운 말투로 마리에게 말했다.
“바쁘신 것 같은데, 먼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아, 아니, 전…….”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왠지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웃음을 띤 채 강하게 거절할 수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세이튼가의 당주로서 아리엘 공녀에게 할 말이 있거든요. 개인적인 이야기이니 부탁합니다.”
그 말에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가주로서 할 말이 있다니? 어쨌든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어서 마리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리가 사라진 후, 아리엘은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맹수 앞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 무슨 말씀이시죠, 각하? 세이튼가의 당주로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니?”
“아아, 그 말 그대로입니다.”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있는 은발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조각 같은 얼굴이 그대도 드러나며 아리엘을 주시했다.
“아리엘 공녀. 아니, 아리엘. 우리 세이튼가가 어떤 가문인지 알고 있나?”
갑작스러운 하대. 하지만 뻣뻣이 굳은 아리엘은 반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황실의 수호 가문, 제국의 방패 등. 이런저런 호칭이 많지만 쉽게 이야기해 피로 얼룩진 전투 가문이지. 지극히 호전적인. 물론 아무 때나 그 호전성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어.”
나직이 말을 잊는 키에르한을 보며 아리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소중한 것이 침범당했을 때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때.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둘 다 해당이 되지.”
“그, 그게 무슨……?”
아리엘은 떠듬떠듬 말했다.
“저 소녀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다.”
“……!”
“그리고 난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고.”
창백하게 질리는 아리엘을 보며 키에르한은 낮게 일갈했다.
“너희 델피나 중 누가 황태자비가 되는지 따위는 내 관심사가 아니야. 하지만 명심하도록. 저 소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생각하지 마. 또 이런 일이 있다면 다음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 * *
그날 밤, 아리엘은 자신의 별궁에서 하얗게 질려 가만히 있었다. 키에르한 후작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 소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생각하지 마.”
“말도 안 돼.”
아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못난 시녀가 키에르한 후작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녀를 방문한 것이다.
“공녀 저하, 손님이 왔습니다.”
“이 시간에? 돌려보내.”
아리엘은 버럭 성질을 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이 시간에 무슨 손님이란 말인가. 하지만 시녀 마틸다는 우물쭈물 말했다.
“그게 돌려보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
곧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아리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비단 같은 금발,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 황태자 라엘이었다!
“저, 전하? 어떻게 기별도 없이 이곳에?”
“아아. 지나가다 할 말이 있어서 들렀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뭐 하느냐? 빨리 다과와 차를 내오너라!”
아리엘은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방문에 너무나 놀라 허겁지겁 외쳤다. 도대체 황태자가 이 시간에 왜? 더구나 늘상 착용하던 가면도 쓰지 않고 있다. 혹시나 밤을 함께 보내려 온 것인가 싶었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 자신이 비로 확정된 것도 아닌데 몸을 탐할 황태자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황태자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무언가 불쾌한 모습?
“전하? 무슨 일이신지…….”
아리엘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태자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아리엘의 가슴은 더욱더 조마조마해져 갔다.
이윽고 황태자가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그대는 이 제국 황실에서 예작(禮爵)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
아리엘의 얼굴이 하얘졌다.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황제나 황태자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권속에게 내리는 명예 작위. 그녀는 황태자가 왜 이 늦은 밤에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깨달았다. 지금 이 황실에서 예작위를 받은 인물은 단 한 명이었으니까.
“힐데른은 내가 가장 아끼는 존재이다. 오늘 같은 일이 또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라엘은 아리엘의 방에서 나온 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늘 별궁에서 아리엘이 마리에게 했던 일을 우연히 전해 들은 순간 라엘은 아찔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아리엘을 대령하라고 하고 싶었던 걸 참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만약 그대로 그녀를 만났다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큰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 간신히 자제했다.
“이제 또 이럴 일은 없겠지.”
알아듣게 일렀으니 그녀가 또 마리에게 해코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걱정이 없었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황태자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황태자비 간택이 끝나는 순간이 온다. 아리엘과 레이첼,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아내로 맞아야 한다. 하지만 그래야 하는데…….
“왜 나는 계속 너만 떠오르는 것이냐.”
그를 끝없이 괴롭히는 마음. 이 문제를 떠올릴 때마다 마리의 얼굴만 생각났다.
“그저 이렇게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황태자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마리와 서남부 지방을 다녀오며 생각했다.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그저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는 이 갈망을 채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같이 있을수록 타오르는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런 허울뿐인 소유가 아닌, 그녀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품고 싶었다.
‘그러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잖아?’란 생각이 들었지만 곧 라엘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단지 신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 제국의 지배자. 그의 모든 삶은 오로지 이 제국만을 위한 것이다. 수많은 피로 물든 내전을 끝내며 그렇게 맹세했다.
‘내 결혼은 가장 훌륭한 정치적 도구다. 난 제국에 이득이 될 결혼을 할 의무가 있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왜 자꾸 알몬드의 말이 떠오르는 것일까?
“때로는 복잡한 사정보다 본인의 솔직한 감정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라엘이 다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낮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라엘은 흠칫 표정을 굳혔다. 익숙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키엘?”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키에르한 후작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이곳엔 무슨 일이지?”
황제가 누워 있는 자운궁과 이곳 별궁은 거리가 상당해 우연하게 마주칠 장소는 아니었다. 과연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게 되었습니다.”
“무엇이지?”
“마리 양에 대해서입니다.”
“……?!”
키에르한은 푸른 눈을 들어 라엘을 바라보았다.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에는 옅은 분노가 섞여 있었다.
“마리 양에 대해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면 그만둬 주십시오.”
“뭣이?”
“마리 양이 전하께는 가벼울지 모르나,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존재일 수 있으니까요.”
라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키에르한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누군가란 너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키에르한은 부정하지 않았다. 라엘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를 아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절대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야.”
“그렇습니까?”
키에르한이 물었다.
“그러면 왜 오늘 같은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
라엘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만약 진정으로 마리 양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면 모호한 태도는 그만두어주십시오.”
키에르한은 결례를 범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오늘 무례한 말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은 진지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말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키에르한은 몸을 돌려 별궁에서 멀어져 갔다. 라엘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그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 뒤, 황궁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일단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아리엘 공녀의 기세가 팍 하고 꺾여 버렸다. 마리에게 이전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은 물론, 굉장히 조용해진 것이 무언가 기가 죽은 느낌이었다. 그런 아리엘을 보며 레이첼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네. 어쨌든 계획대로 잘됐어.’
그때 그녀가 정원에서 아리엘을 부추긴 것은 마리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엘을 노린 음모였다. 마리를 건드리려 하면 황태자가 가만히 안 있을 것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가문의 위세만 빼면 아리엘 공녀는 내 상대가 아니야. 문제는 마리인데.’
레이첼은 고민에 잠겼다.
‘분명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어.’
단순히 황궁에 도는 민망한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전부터 그녀는 마리와 황태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서남부 지방에서의 일뿐이 아니라도, 둘은 무언가 이상했다. 단순한 주인과 시녀의 관계라 보기는 어려웠다.
‘……정확히는 황태자가 마리를 보는 게 이상해.’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가만히 주의 깊게 살펴보면 마리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빛은 다른 이를 바라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어쩌면 황태자가 우리 두 후보 중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마리 때문일지도.’
레이첼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황태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 관심 없지만.’
사실 그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레이첼이 바라는 것도 그의 마음이 아니라, 황태자비 자리였으니까. 그가 마음속에 누구를 담고 있든 그녀로서는 황태자비만 될 수 있다면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마리 때문에 간택전에서 선택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자꾸 든단 말이지.”
레이첼은 자신의 생각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근본도 없는 전쟁 포로 출신 따위가 경쟁자라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예 근거 없는 불안도 아니다. 황태자비를 선택할 권한은 오로지 황태자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냉철하고 지극히 계산적인 황태자가 마리를 선택하는 ‘사고’를 치지야 않겠지만 남녀 간의 일은 모르는 것이다.
‘정말 나도 아리엘도 아닌, 저 시녀 마리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
레이첼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안 돼. 난 무조건 황태자비가 되어야 해. 우리 이스트반 백작가의 ‘진정한 목적’을 위해서.”
그녀가 숨기고 있는 가문의 ‘진정한 목적’.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와 연관된 그 목적을 위해서 그녀는 반드시 황태자비가 되어야 한다.
“불확실한 요소가 있다면.”
레이첼은 조용히 읊조렸다.
“손을 써야겠지.”
슐레안 대공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아리엘과 다르게, 마리는 손쓰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요하네프 3세 폐하가 부탁한 일이 있었지. 그 일과 엮으면 되겠어.’
레이첼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요하네프 3세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동시에 마리를 몰락시킬. 그녀는 종이 위에 잉크로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은밀히 어느 곳으로 보냈다.
* * *
한편,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두 황태자비 후보만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분위기도 이상했다.
“전하? 혹시 안 좋은 일이시라도 있으신지요?”
“아니다.”
마리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을 뿐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뭐지? 특별히 국정에 안 좋은 일은 없는데?’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황태자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그녀 때문이란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키에르한이 남기고 간 말 때문이었다.
“만약 진정으로 마리 양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면 모호한 태도는 그만두어주십시오.”
그가 남기고 간 말이 라엘의 마음을 끝없이 헤집어 놓았다.
“……나도 절대 가벼운 마음이 아니야.”
황태자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마리가 물었다.
“네, 전하?”
“아, 아니다. 신경 쓰지 말도록.”
당황해 고개를 젓는 그를 보며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그렇게 며칠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밤. 마리는 꿈을 꾸었다. 그녀에게 능력을 주는 신비한 자각몽을.
「서두르게! 경찰이 오겠어!」
「허허. 뭘, 그렇게 초조한가? 다 됐네. 이 금고 참 튼튼하게 만들었군. 어쨌든 거의 다 풀었어.」
금고를 터는 도둑의 꿈이었다.
‘웬 도둑?’
마리는 꿈을 바라보며 당황했다. 아니, 지금까지 별의별 꿈을 다 꾸긴 했지만 거짓말도 잘 못 하는 내가 도둑이라니!
‘나 도둑 안 해! 내가 무슨 도둑이야!’
꿈을 꾸면 꼭 관련된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 그녀가 이번엔 도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일어나자! 꿈에서 깨면!’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노력과 상관없이 꿈의 내용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흠, 이번 금고는 쉽지 않군. 굉장히 튼튼하게 잘 만들었어.」
「아니, 그게 할 이야기인가? 경찰이 거의 다 왔다고! 곧 저택 안으로 들어올 거야!」
「기다려 보게. 뭘, 그렇게 초조한가? 아, 거의 다 됐네.」
금고를 따는 꿈속의 인물은 굉장히 특이했는데, 훤칠한 키에 매혹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롭게 금고를 해체했다.
딸칵!
이윽고 금고의 문이 열리고 안에 들어 있던 기이한 문양의 목걸이를 도둑이 챙겼을 때, 저택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끝났어! 우린 체포될 거야.」
동료 도둑은 창백하게 질려 외쳤지만,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가?」
「겨, 경찰이.」
남자는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땅속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사라지면 되니까. 우린 방법을 알고 있잖나?」
그러며 대괴도라 불리는 남자가 손을 뻗었다.
「나를 믿게.」
마리는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해. 안 해. 도둑질이라니. 그건 아니지.”
그녀는 다짜고짜 중얼거렸다. 이제는 꿈에 대해 순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다. 도둑질이라니!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몰라. 어쨌든 도둑질이라니. 절대로 안 해.”
그렇게 다짐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황태자의 일정에 맞추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바빴다. 개인 숙소에서 서둘러 준비를 마친 그녀는 사자궁으로 출근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지만 황태자가 기침하기 전에 그날의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기 위해서였다.
‘오늘 하루도 힘내자!’
마리는 사자궁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에 들어간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황태자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전하?”
“아, 마리. 왔군.”
황태자뿐이 아니었다. 알몬드 자작은 물론, 재상 오른도, 심지어 키에르한 후작도 있었다.
‘키에르한 각하께서 왜?’
마리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친위대의 단장인 키에르한은 황태자의 집무실에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다들 표정이 심각했다. 키에르한은 마리를 보고 살짝 반가운 티를 내었지만, 어두운 낯빛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말이지, 알몬드 자작?”
“네, 전하.”
“간밤에 수상한 기색도 없었고?”
“네, 경비병들에게 확인해 보았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리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등줄기에 싸한 느낌을 받았다. 간밤에 꾼 꿈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 순간, 황태자가 말했다.
“큰일이군. 국보인 성배가 사라졌다니.”
“……!”
생각지도 못 한 이야기에 마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른 새벽부터 이들이 모여 있었던 이유. 지난밤 사이 제국의 국보인 성배가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맙소사. 말도 안 돼.’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배(聖杯)는 클로얀 왕국의 성인(聖人) 리하르트의 유품으로, 대대로 클로얀 왕성에 보관되어 전해지다 50년 전 모종의 이유로 제국으로 넘어온 보물이다. 클로얀 왕국의 건국과 연관이 있었기에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고, 그런 만큼 황궁 대성당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었는데, 도난당했다고?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지라 장내의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큰일이군. 다른 보물도 아닌 성배를 도둑맞다니.”
“네, 클로얀 왕국의 건국과 연관된 보물인 만큼 도난 사실이 퍼지면 클로얀 지방에서 큰 동요가 일어날 것입니다.”
황태자와 재상 오른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클로얀 지방은 제국에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 요소가 많았다. 오죽했으면 황태자가 모리나 왕녀를 찾아 자신의 비로 삼으려 했겠는가? 최근 들어서 여러 이유로 클로얀 지방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데, 성배까지 도난당하다니.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모두 제 책임입니다.”
황궁의 경비를 책임지는 근위 기사단의 단장, 알몬드가 무릎을 꿇었다.
“됐다. 이미 일어난 일. 지금은 성배를 찾는 것이 우선이다. 황궁의 출입은 모두 폐쇄했겠지?”
“네, 전하.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직접 현장을 봐야겠군. 대성당으로 가자.”
그렇게 그들은 대성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능력 있는 시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