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드디어 서남부 지방이군.”
라엘은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혹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전하?”
자신이 한숨을 내쉬자 물어오는 마리를 보며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 때문만 아니면 다 괜찮아.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며칠간 함께 마차를 타고 오며 자신이 그녀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저 소녀는 모를 것이다. 서류를 보려 해도 끝없이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을 붙드느라, 마차 안에서 우연이 몸이 스칠 때마다 덜컹하는 가슴을 부여잡느라, 그녀가 긴 여행 중 몸이 아프진 않을지 걱정되는 마음을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정말 전혀 모를 것이다.
‘그나마 서남부 지방에 도착해서 다행이군. 돌아갈 때가 걱정이긴 하지만.’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알몬드 자작이 그에게 와서 말했다.
“전하, 시간이 많이 늦어 오늘은 부득이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준비하도록.”
“늘 야영하던 곳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수도가 있는 중부에서 서남부 지방으로 건너는 길목에는 잠자리를 해결할 만한 마을이 없었다. 아니, 원래는 있었으나 내전 당시 불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서남부 지방에 진입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야영을 해야 했다.
“서두르면 내일 안으로 서남부의 주도인 베일 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야 야영해도 상관없다. 신경 쓰지 말도록.”
그렇게 말하던 라엘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자신을 비롯한 기사들이야 숱하게 야영을 해봐서 익숙했지만, 그렇지 않은 존재가 떠올랐던 것이다. 마리였다.
‘이런.’
안색을 굳힌 황태자가 물었다.
“……이 근처에 잠자리를 해결할 만한 곳은 없겠지?”
알몬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람이 살던 곳은 내전 당시 전부 다 불에 타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그렇군.”
“왜 그러십니까?”
라엘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숙영용 침구류는 가져왔겠지?”
“네? 당연히…….”
“푹신하고 따뜻한 걸로?”
알몬드는 그런 것을 왜 물어보는지 몰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알몬드의 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태자는 단호히 명령했다.
“최대한 불편하지 않고 푹신하며 따뜻한 침구를 준비해라. 마치 황궁에서 자는 것처럼 편안한 걸로 말이다.”
“……황궁에서 자는 것 같이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알몬드가 매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황태자는 진지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야영해야 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라엘은 저 멀리서 식사 준비하고 있는 마리를 보며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해 보이는데. 야영하다가 건강이라도 상하면 어떻게 하지?’
마침 겨울이 가까운 시기라 바람도 차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야영하다 저 소녀의 몸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런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무조건 야영을 피할 방법을 생각해야겠군.’
라엘은 근위 기사를 몇 명 남겨 작은 오두막이라도 지어 놓으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그렇게 일행은 야영을 하게 되었다.
“내일이면 방에서 편안히 쉴 수 있을 거다. 오늘 하루만 고생하도록.”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하는 황태자를 보며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침구류는 혹시 전하 것이 아니신지…….”
마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에게 주어진 숙영용 침구를 바라보았다. 두툼하면서 폭신한 감촉, 그러면서 비단같이 부드러운 느낌. 마치 황궁의 침대를 옮겨 온 듯한 최고급 침구였다. 다른 기사들 것과 확연히 다른 고급이었고, 심지어 황태자의 것보다 좋아 보였다.
“내 것이 아니다.”
“……정말입니까?”
“그래, 내 것이 아니다.”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황태자의 침구로 보이는데?
“어쨌든 이 침구는 제가 아니라 전하가 쓰시는 것이…….”
마리는 시녀인 자신이 황태자보다 고급의 침구를 쓰는 게 부담스러워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단호히 말했다.
“난 그런 침구를 싫어한다.”
“네?”
“그런 느낌의 침구는 몸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쓰도록.”
그, 그럴 리가? 불면을 앓고 있어 황태자는 평소 잠자리에 굉장히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런데 그런 그가 좋은 침구가 몸에 맞지 않는다고?
“그러지 마시고…….”
하지만 황태자는 더 듣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난 알몬드와 일정을 이야기해야 해서 가 보겠다. 쉬어라. 바람이 차니 모닥불에서 멀어지지 말고.”
“전하?”
마리는 급히 그를 불렀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뭔가 도망치는 듯한 느낌이어서 마리는 당황했다.
“설마…… 날 신경 써 주는 건가?”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침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 침구는 황태자의 것이 확실했다. 아무래도 야영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신경 써 준 것 같았다.
“난 괜찮은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것을 느낄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문득 그가 자신에게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날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내가 널 아끼니, 곤란한 일이 있다면 나한테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냥 황태자를 모시면서 살 수 있으면 그것도 나름 나쁘진 않을 텐데.”
마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사실 최고의 주군이었다. 능력을 편견 없이 인정해 주며 자신의 사람을 아낀다. 공은 빠짐없이 치하하고 어쩔 수 없는 잘못에는 너그럽다. 이런 주군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그의 곁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 답답했다.
‘클로얀 왕국의 왕녀가 아닌, 이 제국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마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모닥불의 열기와 황태자가 양보한 침구의 부드러운 느낌이 몸에 닿았다.
‘그러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될 텐데.’
문득 마리는 생각했다. 황태자의 곁을 떠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
시간이 지난 후, 모닥불의 열기를 받으며 마리는 잠이 들었다. 마리가 잠이 들자,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찬란한 금발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 황태자 라엘이었다.
“……불편하진 않은 건가.”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라엘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계속 눈에 밟히는데. 아무리 눈을 돌리려 해도 너만 보이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널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
라엘은 결국 속의 마음을 밖으로 내뱉었다. 한탄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부정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때 했던 맹세만 아니었다면…….’
라엘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 황태자 지위에 오를 때, 피에 젖은 철가면에 했던 맹세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그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아.”
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담요를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혹 싸늘한 바람에 몸이 상하지 않도록.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천천히, 희미하게 떨리는 손이 그녀의 머리에 닿기 직전. 그는 손을 흠칫 멈추어 세웠다.
“하아.”
라엘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다시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라엘을 불렀다.
“너무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능사는 아니옵니다.”
“……!”
라엘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충직한 신하 알몬드였다. 황태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알몬드?”
“말씀대로입니다. 신하로서 주제넘은 이야기이긴 하오나…… 감정을 너무 외면하면 훗날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 보다 본인의 솔직한 감정이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
황태자는 잠시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알몬드는 하루 종일 그와 밀착해 있다. 그러니 마리를 향한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경험에 의한 말인가?”
“그렇습니다.”
알몬드는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 저도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다가 후회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저와 같은 실수를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황태자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대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전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어떤 맹세를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대 아닌가?”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 모든 것은 이 제국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어. 그러니…… 내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알몬드는 그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의 목소리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듯, 억지로 내뱉는 듯했다. 하지만 알몬드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못 했다. 황태자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잠시 그곳에 다녀오겠다.”
“호위하겠습니다.”
“됐다. 늘 가는 곳이니. 멀지도 않고. 금방 다녀오겠다.”
알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야영할 때마다 황태자가 방문하는 곳들이 있었다. 그곳들에 갈 때는 꼭 다른 사람을 대동하지 않고 홀로 다녀왔다.
“그래도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래, 알겠다.”
황태자가 숲속으로 난 길로 사라지자, 알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전하.’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황태자도 안타까웠고, 그런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것도 안타까웠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사라진 후 잠시 뒤, 마리는 멍하니 침낭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야영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잠에서 깬 것이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완전히 깨 버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그녀는 잠시 주변이나 산책하려고 일어났다.
“온 힐데른, 어디에 가시려 하십니까?”
“아, 잠이 안 와서 잠시만 주변을 걷다가 오려고요. 위험할까요?”
불침번을 서던 근위 기사가 말했다.
“저쪽에 난 길을 통해 걸으면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이전에 이 근방에 살던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이라서. 하지만 멀리 가지는 마십시오.”
“네, 금방 돌아올게요.”
마리는 근위 기사가 알려 준 길을 통해 숲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밤이지만 만월이고, 잘 닦인 길이라 위험하진 않았다.
‘이렇게 밤에 숲길을 걷는 것도 나쁘진 않네.’
황궁에 갇혀 산 지 3년이 넘었으니, 이런 숲길도 오랜만이었다. 상쾌한 기분이 들어 마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만 걷다가 들어가자.’
그녀는 좀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은 뒤였을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때, 그녀의 눈에 의외의 인물이 들어왔다.
‘어, 왜 전하가?’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저 얼굴은 잘못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왜 여기에 오신 거지? 잠이 안 오셔서 산책을 나오신 건가?”
마리는 별생각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점점 숲이 깊어졌는데, 황태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어딘가 목적지라도 있는 듯, 한 방향으로 쭈욱 나아가고 있었다.
‘이전에 여기에 와 보신 적이 있나?’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그냥 돌아갈까 고민하다 조금만 더 가 보기로 했다. 황태자가 이 외진 곳에 무슨 볼일이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녀는 라엘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숲길의 끝에는 마을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을이었던 잔해’가 놓여 있었다. 완전히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폐허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폐허 옆에는 수많은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적게 봐도 수백은 훨씬 넘을 것 같은 수의 묘지였다.
“…….”
황태자 라엘은 아무런 말 없이 그 폐허와 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평소처럼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마리는 황태자가 왜 이 마을에 온 것인지 깨달았다. 이 마을은 내전 당시 2황자와 4황자의 다툼으로 불타올랐던 마을이다. 그리고 4황자는 지금의 황태자 라엘이었다. 즉, 이 마을은 황태자와 2황자와의 싸움으로 희생된 마을이었다.
* * *
야영을 끝내고, 그들 일행은 서남부의 주도인 베일 성으로 다시 마차를 달렸다.
“…….”
좁은 마차 안에서 마리는 황태자를 훔쳐보았다. 어제 의도치 않게 뜻밖의 광경을 본 뒤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황태자가 서류를 보며 묻자 마리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는 늘 그렇듯 평소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가면을 쓰지 않고 있음에도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곧 베일 성에 도착할 거다. 성에서 하루를 머문 후, 다음 날 바로 사탕수수를 재배할 곳을 시찰할 것이다.”
“이번 시찰의 목적은 사탕수수를 재배할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래, 어떤 토지가 적합할지, 어떻게 노동력을 수급할 것인지 등을 살피기 위함이다.”
그 말에 마리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행정관을 파견하셔도 되는 일 아닌지요?”
수도에서 이곳 서남부까지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황태자처럼 존귀한 위치의 인물이 말이다. 이런 일의 경우엔 서류를 받아 처리하는 편이 편할 텐데?
“중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이렇게 답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은 제국 전체에 이득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서남부 자체에도 굉장히 의미가 큰 일이다.”
라엘은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서남부의 들판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하면 서남부 지역은 오랜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테니까.”
“아…….”
“서남부 지역민들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보고서 몇 장만 보고 일을 진행할 수 있겠느냐.”
그 대답에 마리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지극히 황태자다운 생각이었다. 황태자는 잠시 옅게 웃더니 말했다.
“그래서 마리, 너한테는 참 고맙다.”
“네?”
“네 덕분에 사탕수수를 들여올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나와 오른은 교국과 거래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탕수수의 종자를 들여온다는 생각은 못 했어. 서남부 지방이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리라 생각지 못했으니까.”
“아, 아닙니다.”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꿈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늘 궁핍에 시달리던 서남부 지역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 만약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하게 된다면, 나는 단순히 설탕을 재배하는 것을 넘어 이곳 서남부를 교역 도시로 탈바꿈시킬 생각이다.”
“교역 도시 말입니까?”
“그래, 바다에 인접한 곳에는 서유럽으로 향하는 교역항을 만들고, 서남부의 북부에는 북유럽의 한자(Hansa) 동맹의 상인들이 와서 거래할 시장을 만들 것이다. 제2의 샹파뉴를 만드는 것이지.”
황태자는 자신이 서남부에 그리고 있는 청사진을 설명하였다. 일차적으로 사탕수수 재배를 통해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고, 생산해 낸 설탕을 바탕으로 서남부 지방을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킨다. 성공만 한다면 서남부 지방은 어마어마하게 부유해지리라.
‘즐거워 보이시는구나.’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평소처럼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마리는 황태자가 즐거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황태자는 서남부 지방이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전하…….’
마리는 어젯밤 폐허가 된 마을을 바라보던 라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황태자는 폐허가 된 그 마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 마차 밖에서 말을 몰던 알몬드가 창가로 다가왔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그래?”
“네, 베일 성입니다.”
그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기저기 불에 그슬린 흔적이 있는 커다란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서남부의 주도인 베일 성이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 * *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행정관인 지브롤 자작입니다.”
서남부 지방은 황태자의 직할령으로, 영주가 아닌 황실에서 보낸 행정관이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행정관 지브롤 자작은 성문 밖까지 나와 황태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자작.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전하. 먼 길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따뜻한 물과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먼저 그간의 보고를 듣고 싶군. 식사하면서 듣도록 하지.”
그들은 지브롤 자작의 안내에 따라 내성으로 향했다. 내성으로 향하는 중, 마리는 마차 밖의 풍경을 보고 신음을 삼켰다.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구나.’
사람들의 상태가 수도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옷차림도 전체적으로 남루해 보였고, 굶주려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사람들의 눈빛. 오랜 궁핍 탓일까, 퀭한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황태자가 본인의 사비를 들여 계속 구휼미를 베풀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로도 해결되지 않나 보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는 내성에 도착했다. 황태자 일행은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행정관이 준비한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성의 사정이 좋지 않아 준비한 것이 부족합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지브롤 자작이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서남부 지방의 어려운 사정이야 익히 알고 있으니. 백성들의 굶주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미를 내왔으면 오히려 화냈을 것이다.”
그 말에 자작은 감사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자작. 이야기는 대충 들었겠지?”
“네, 전하. 교국과의 거래에 따라 이곳 서남부 지방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신다고…….”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목소리에 석연치 않은 빛이 섞여 있어서 황태자와 마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닙니다. 당연히 진행해야지요. 성공만 하면 이 서남부 지방을 크게 부흥시킬 방법이니까요. 다만…….”
“다만?”
지브롤 자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이야기를 돌리는 것을 싫어한다. 괜찮으니 말해봐라. 가감 없이 정확하게.”
자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남부 지방 백성들의 반발이 심할 것 같습니다.”
“반발? 그게 무슨 말이지? 사탕수수 재배는 서남부 지방에 큰 이득을 줄 일인데?”
“그건 백성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작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털어놓았다.
“황실이…… 아니, 정확히는 황태자 전하께서 진행하시는 일이라 반발하고 있습니다.”
자작의 말에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마리는 깜짝 놀랐다.
‘황태자가 진행하는 일이라 반발하고 있다니?’
하지만 황태자는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그런가? 하긴 그렇겠군.”
“네, 전하.”
지브롤 자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 서남부 지방의 사람들은 내전 당시 침략군이었던 전하께 큰 반감을 품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전하의 명으로 진행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일단 색안경을 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손가락으로 철가면을 두드렸다.
“그러면? 인력 수급은 문제가 없는가?”
자작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래서 인력을 수급하는 문제도 큰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강제로 동원하지 않는 한 인력 수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작과의 대화가 끝난 후, 황태자와 일행은 고민에 빠졌다.
“곤란하군. 사탕수수 재배에는 적합한 토지뿐 아니라, 대규모 노동력도 필요한데.”
누군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강제로 동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반발해도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테니.”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노예가 아니야.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것은 옳지 않아. 더구나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효율이 나지 않는다. 사탕수수 재배는 다른 농사에 비해 굉장히 고강도의 노동력이 필요한데, 잘못하다가는 일을 망칠 수도 있다.”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사탕수수의 재배는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어설프게 노역을 시켰다가는 재배를 망쳐 버릴 수도 있다.생각지도 못 한 부분에서 난관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마리는 가만히 고민에 빠졌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을까? 이대로라면 사탕수수 재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그녀는 골똘히 고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었다.
‘혹시…… 지난번 꾼 꿈이 이번 일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시찰을 떠나기 전, 그녀는 꿈을 하나 꾸었었다. 바로 ‘파티시에의 왕’이 되는 꿈을. 혹시 그 꿈이 이번 일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천재 파티시에와 성난 민심. 연관이 없어 보였다. 그때, 황태자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고민해도 해결책이 당장 나올 것 같지는 않군. 일단 거리로 나가 백성들을 살펴보지.”
그들은 암행을 나와 거리의 분위기를 살폈다. 사탕수수 재배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냉랭했다.
“내년부터 우리 지방에 사탕수수를 재배할 것이라 그러던데?”
“사탕수수, 그게 뭔데?”
“그, 뭐 있지 않나. 높으신 양반들이 먹는 설탕이라던가?”
“그래? 그거 재배하면 밀보다 조금 나으려나?”
“나아질 리가 있어? 보나 마나 높은 놈들 배만 불리겠지. 우린 죽도록 고생만 하고.”
냉소적인 반응에 마리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은 황태자에 대한 반감 때문에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긴. 이번 일을 추진하는 게 그 악마 같은 황태자라고 했지?”
“그래, 그 악마 같은 놈이 하는 일이니 우리한테 좋을 게 있겠어?”
“하늘은 뭐 하나? 그 악마 같은 놈 안 데려가고.”
“그러게, 콱 죽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내전 때 2황자 전하가 아니라, 그놈이 죽었어야 했는데.”
“이곳 서남부 지방이 황태자의 직할령이 된 뒤로 흉년이 끊이질 않아. 피의 황태자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게 틀림없어.”
마리는 깜짝 놀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에 대해 저렇게 욕을 하다니. 목을 베어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저놈들이 감히 전하께…….”
과연 알몬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황태자가 그를 말렸다.
“됐다.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지만 전하!”
“그만. 명령이다.”
황태자의 명에 알몬드는 씩씩거리며 분노를 다스렸다. 황태자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어쨌든 백성들의 생각은 충분히 들은 것 같군. 이제 그만 돌아가지.”
“……네, 전하.”
그렇게 내성으로 돌아온 황태자와 일행은 각자의 숙소로 헤어졌다.
“내일 다시 만나 인력을 어떻게 수급할지 고민해 보도록 하지. 오늘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푹 쉬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온 마리는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렇게 안 좋은 말을 들었는데?’
그녀라면 많이 화가 났을 것 같다. 이곳 서남부 지방을 위해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를 저주하고만 있으니까.
‘그도 분명 기분이 나쁘겠지. 단지 티를 안 낼 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은 말을 들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남부 지방을 위해 노력하는 황태자를 보니, 알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황태자를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그의 짐을 조금은 덜어주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까?’
그녀는 생각에 빠져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사탕수수 재배에 나서려면 일단 황태자를 향한 응어리가 풀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태자를 향한 증오는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결국, 벽에 막힌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 밤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혹시 방법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그 바람 때문이었을까? 잠이 든 마리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그래, 그대가 이런 대단한 요리 솜씨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번 꿈의 연속이었다.
지체 높은 남자는 카렘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요리사가 되었는지 물었고, 카렘은 고민하다가 답했다.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응?」
카렘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가난해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설탕을 항상 동경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이 귀중한 설탕을 더 맛있게, 더 값지게 다룰 수 있을까 늘 고민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설탕은 정말로 행복의 가루니까요. 어떻게 하면 설탕으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할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파티시에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리는 퍼뜩 눈을 떴다.
“또…… 꿈이구나.”
그녀는 왜 또 천재 파티시에의 꿈을 꾸게 된 것인지 고민했다.
‘백성들, 파티시에, 사탕수수 재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이 꾼 꿈과 이번 일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꿈속의 내용과 관련하여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설탕은 정말로 행복의 가루니까요.」
‘사람들에게 사탕수수, 즉, 설탕의 가치를 알려 주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획기적인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반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설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야. 그러니 설탕의 가치에 대해 알려 주면 생각을 바꿀지도 몰라.’
물론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능성만으로도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시도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생각을 정리한 마리는 황태자를 찾아갔다.
“마리? 무슨 일이지?”
황태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역시 그는 침대에 들지 않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마리의 말에 황태자는 눈을 빛냈다. 지금껏 그녀의 능력을 봐온 그이니, 이번에도 무슨 방책을 마련한 것이라 여긴 것이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는가? 이야기해 봐라.”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만…….”
마리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떠올린 계획을 이야기했다. 끝까지 그녀의 말을 들은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확실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잘되면 사탕수수 재배는 물론, 민심도 달랠 수 있을 테니.”
“감사합니다.”
다행히 황태자는 그녀의 계획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다만 그는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네 계획에는 문제점이 있다. 알고 있겠지?”
“네, 전하.”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탕이야 인근 오레 항에서 수급할 수 있지만, 설탕을 다루는 것은 누가 할 거지? 너도 알겠지만. 설탕을 다루는 것은 수도의 전문 파티시에도 어려워하는 일이다. 이곳 서남부 지방에는 설탕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파티시에가 없어.”
황태자의 지적이 옳았다. 그녀의 계획에는 설탕을 다룰 줄 아는 파티시에가 필요한데, 가난한 서남부 지방에 그런 파티시에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마리는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있었다.
“설탕은 제가 다룰 수 있습니다.”
황태자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물론 그도 그녀가 제과에 상당한 재주가 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설탕을 다룰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네, 이전에…… 우연히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단하군.”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도 아닌 마리였다. 그녀가 할 수 있다면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그녀의 능력을 믿었다.
“알겠다. 그러면 당장 설탕을 수급해 올 테니, 그 계획을 진행하도록 하지.”
그렇게 마리가 제안한 계획, 이른바 ‘행복 설탕 마차 계획’이 시작되었다.
* * *
며칠 뒤, 정오에 가까운 시간 베일성의 동쪽 지구. 시커멓게 꺼진 눈으로 하루를 보내던 성민들 사이로 커다란 마차가 도착했다.
“뭐지?”
“웬 마차가?”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에서 나온 건가?”
“그러게?”
그들이 말하는 성이란 성주가 거하는 내성을 뜻한다. 최근에는 황태자가 머물고 있다.
“황태자는 빨리 수도로 돌아가지. 왜 이렇게 우리 지방에서 뭉개고 있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사람들은 마차에 들리지 않게 속닥거렸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렸다.
“소녀?”
사람들은 마차에서 내린 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에서 내린 이는 성주인 지브롤 자작이나 황태자가 아니라, 착한 인상의 귀여운 소녀였다. 웬 작은 소녀가 내린 것도 의아한데,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소녀가 하얀 요리사 복장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요리사인가?”
“요리사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아니, 그것보다 이곳에 웬 요리사가?”
모두가 혼란스러워할 때 마차에서 사람이 더 내려왔다.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기사였는데, 무언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뭐지, 저 상자는?”
기사가 소녀 앞에서 상자를 펼치자 모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상자 안에는 빵과 과자가 수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과자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딱 허기가 질 시간이었는데, 먹을 것을 보니 식욕이 돌았다. 더구나 구운 지 얼마 안 됐는지 상자를 여니 멀리서도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모양도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이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왜 여기에 과자를 가져온 거지?’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리사 복장을 한 소녀가 왜 과자와 빵을 이곳에 가져온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뭐 하려는 거지?’
그때, 소녀가 생각지도 못 한 행동을 하였다. 빵과 과자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성에서 나왔습니다. 일하는 와중에 요기하시라고 이렇게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맛있게 드셔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맛나 보이는 과자가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빵과 과자를 받았다.
“정말 먹어도 되는 건가요?”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딱 봐도 대단한 솜씨의 요리사가 정성을 다해 만든 과자였다. 이런 귀한 음식을 무상으로 나누어준다니 믿을 수 없었다.
“네, 황태자 전하의 명입니다.”
“……!”
황태자란 단어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노골적인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작은 소녀, 마리는 꿋꿋이 빵과 과자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맛있게 드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상자에 들어 있던 빵과 과자를 다 나누어준 후, 마리는 그곳을 떠났다. 성민들은 양손에 빵과 과자를 들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가 준 거라고? 왠지 기분 나쁜데.”
사람들은 투덜거렸다. 반감이 깊어 이런 선물로 풀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빵과 과자를 버리진 않았다. 워낙 배가 고팠고, 버리기에는 너무나 먹음직스럽게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빵과 과자를 입에 물었고, 그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 맛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달콤한 맛이었다. 지금까지 알던 단맛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마치 천상의 것을 맛본다는 듯한 느낌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마, 맛있어!”
“이게 황태자가 내린 거라고?”
사람들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고작 과자에 불과할 뿐인데, 먹는 순간 달콤한 행복이 온몸에 퍼졌다.
“자네, 손에 든 그거 안 먹을 건가? 안 먹으면 나 주게.”
“아, 아니! 먹을 거야! 탐내지 마!”
넉넉히 받았건만 순식간에 빵과 과자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황태자에 대한 반감도 잊고, 서로의 과자에 욕심을 내었다.
“아쉽네. 조금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더 먹고 싶다.”
“웬일로 황태자가 우리에게 이런 것을 준 거지?”
사람들은 중얼거렸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큼 과자의 맛은 놀라웠다. 달콤함을 넘어 황홀한 맛이었다.
“더 줄 일은 없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과자를 담은 마차가 그날뿐 아니라 다른 날에도 왔던 것이다. 거기다 과자를 실은 마차는 동쪽 지구뿐이 아니라 여러 구역을 번갈아 가며 방문했다. 곧 베일성을 넘어, 인근까지 천상의 맛을 가진 과자를 나누어주는 마차가 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사람들은 과자가 황태자가 선물한 것이란 반감을 조금씩 잊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마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과자의 맛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 과자를 맛보기 위해 마차를 기다렸고,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천상의 맛일까 기대하여 마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디서 퍼진 것인지, 과자가 어째서 천상의 맛을 내는지도 밝혀졌다.
“그 과자에는 벌꿀이 아니라, 설탕이란 것이 들어 있다고 하던데?”
“설탕? 그게 뭐야?”
“그, 뭐 있잖아. 이번에 황태자가 우리 서남부 지방에서 재배하려는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거.”
지금껏 막연히 사탕수수 재배에 대해 반대하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탕 덕분에 이런 맛이 나는 거라고? 설탕이 이렇게나 대단한 거였어?”
“그러게? 몰랐네. 이렇게 천상의 맛을 내는 양념이라면, 사탕수수 재배도 나쁘지 않은 것 아닌가?”
모두 사탕수수가 설탕을 만들기 위한 작물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알고 있는 것과 이렇게 직접 설탕의 맛을 본 것은 천지 차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그렇게 사탕수수 재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놀라운 공고가 성안에 붙었다.
“이봐! 다들 들었어?”
“무엇 말인가?”
“저녁에 대광장에서 음악회를 한대?”
“음악회?”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시대에 음악은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요리사 소녀가 연주한다더군.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한텐 설탕 과자도 준대!”
“정말? 그러면 꼭 가 봐야겠군.”
사람들은 화색을 띠며 말했다. 쉽게 들을 수 없는 음악에다가 설탕 과자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부푼 기대를 안고 대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마리가 계획한 대로였다.
* * *
대광장에 사람이 가득 몰려들었다. 모닥불이 광장을 밝혔고, 광장 한가운데에는 내성에서 옮겨 온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모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솜씨지만 즐거운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꾸벅 인사한 마리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사람들은 광장에 들어오면서 건네받은 과자를 들고 연주를 기다렸다. 이윽고 숨을 짧게 들이쉰 마리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렀고, 곧 맑은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기교가 현란하기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곡이었다. 연주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선율. 모닥불 주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녀를 보며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좋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저 한줄기 멜로디에 불과하지만 마음속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음악을 듣는 이 순간만큼은 평온하고, 현실의 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마리는 연주를 이어갔다. 곡은 계속해서 바뀌어 갔지만, 모두 마음에 위안을 주는 곡들이었다.
“와아!”
“최고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연주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자, 사람들은 감동의 박수를 쳤다.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음악회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사람들이 연주의 여운에 잠겨 있을 때, 단상으로 의외의 인물이 올라왔다.
황태자였다! 철가면을 쓴 황태자가 나타나자 연주의 여운에 잠겨 있던 사람들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고 없는 등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처럼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황태자의 뒤에 있는 기사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번 연주회를 비롯한 여러 일이 모두 저 황태자의 뜻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응어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전처럼 계속 증오를 내보내기도 모호한 상태랄까?
단상에 오른 황태자가 말없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상처를 남긴 내전 이후 이렇게 서로가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광장에 긴장감이 돌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황태자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황태자가 철가면 밑으로 입을 열었다.
“이전의 일을 미안하다고 하지는 않겠다.”
“……!”
황태자의 말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저 황태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서남부의 사람이 피를 흘렸는데?
그때,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전쟁 중이니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하지 않겠다. 고작 몇 마디의 말로 그때의 상처를 잊어 달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니까.”
사람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황태자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자다르, 스프리트, 트로기르, 크닌, 샤바츠, 루마, 노비사드…….”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두 2황자와 황태자 간의 내전 중 피를 흘린 마을들이었다. 그 뒤로도 많은 지명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두, 한 곳도 잊지 않고 있다.”
“…….”
“황태자인 내가 이곳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바로 서남부 지방을 일으켜 세우는 것!”
그의 말을 듣는 백성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난 이곳 서남부 지방을 일으켜 세우고 싶다. 하지만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바로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를 용서하라고 말하진 않겠다. 그건 염치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그대들이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야기한 황태자는 등을 돌려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면 즐거운 밤 되도록.”
마리도 황태자를 따라 광장에서 사라졌고, 남은 서남부 지방의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들이 황태자에 대한 반감이 크다 해도, 그의 방금 말이 진심이 담긴 이야기란 것을 모르진 않았다. 무언가 이전과 다른 감정이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 * *
내성으로 돌아온 황태자는 마리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정말로. 너무 많이 고생했어. 이번 일은 모두 그대가 해냈다.”
“아닙니다. 결과가 좋아야 할 텐데…….”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주어진 짧은 시간, 최선을 다했다. 먼저 파티시에의 요리 실력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설탕의 가치를 알렸고, 이후 황태자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차를 이용해 조금씩, 조금씩 시간을 두어 접근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릴 때를 맞추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음악회까지.
‘만약 이런 과정 없이 광장에 사람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해봤자,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겠지.’
황태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백성들의 마음이 누그러진다면, 그건 모두 마리 덕분이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아직 모른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냉랭할지도. 그래도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 해도 황태자는 추후 마리의 공을 치하하기로 했다. 이번 일로 마리는 정말 많은 고생을 했으니까. 포상을 받을 만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전하!”
베일성의 책임자인 지브롤 자작이 숨을 헐떡이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황태자와 마리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혹시 무슨 변고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니, 큰일이 일어나긴 했으나……!”
지브롤 자작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천천히 말해봐라. 무슨 일이지?”
“광장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백성들이?”
“모두 전하의 뜻에 따르겠다고 의견을 전해 왔습니다!”
황태자와 마리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전하.”
마리가 기쁜 얼굴을 했다. 황태자도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모두 그대 덕분이군. 고맙다, 마리.”
* * *
그날 황태자가 베일성에서 했던 말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서남부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내전의 상처가 한순간에 씻겨 나갈 순 없었지만, 서남부 지방의 사람들은 진심을 보여 준 황태자를 따르기로 하였다. 그렇게 사탕수수 재배의 인력을 확충하는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잘 해결되어 다행이군. 정말로.”
“네, 전하.”
“이제 다 끝났으니 수도로 돌아갈 때가 되었군.”
인력을 수급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은 모두 마무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황태자와 일행들은 서남부 지방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베일성을 떠나기 직전. 황태자와 마리는 서남부 지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첨탑에 올라섰다.
“이제 저 들판은 사탕수수로 채워지겠군.”
마리는 황태자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라엘의 말처럼 저 들판은 사탕수수로 가득 메워질 것이다.
“어떤가? 소감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서남부 지방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된 것은 모두 그대의 공이다. 시작부터, 마무리 단계까지 모두 그대가 공을 세웠지. 그대 덕에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야.”
황태자의 극찬에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까지 곰곰이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냥……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단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리를 잔잔히 바라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마리,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느냐?”
“예, 전하.”
황태자는 평소답지 않게 주저하는 기색으로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마리가 의아한 기색을 보일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저 들판에 새로운 작물들이 자랄 때, 다시 한번 나와 함께 와서 그 모습을 보지 않겠느냐?”
마리는 흠칫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저 들판에 사탕수수가 가득 메워지려면 몇 년의 세월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과연 자신이 그때까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황태자가 말했다.
“난 내 앞으로의 길에 네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네가 내 옆에서 내가 걸을 길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마리는 그 말에 알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클로얀 왕국의 왕녀만 아니었다면…….’
문득 그런 욕심이 들었다. 저 황태자의 옆에 서고 싶다는 욕심이, 그가 걷는 길을 옆에서 도우며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정말 방법이 없을까?’
그때였다. 황태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되겠느냐?”
자신을 바라는 그의 목소리에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겠어.’
사실은 그녀도 그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진정한 신하가 되어 그와 함께 걸으며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정말 안 되는 것일까?’
이성적으로 따지면 그녀는 황태자의 곁에 머물면 안 된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황태자는 제국을 위해 그녀의 목을 벨 테니까.
‘하지만…… 정말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자신이 그의 곁에 머물며 그에게 신하로서 정말 정말 많은 도움을 주고, 그래서 그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무모한 도박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자신이 모리나 왕녀인 것을 알아도 목을 베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도박을 해볼 수는 없을까?’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본, 황태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역시…… 어려운 건가?”
그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마리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황태자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마리는 조심히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
“전하.”
마리는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훗날, 가능하다면 저에게 단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황태자의 얼굴이 굳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해 주신다면 앞으로 전하를 진정한 저의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마리의 말에 황태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황태자는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은 들어줄 수 없다.”
“……!”
마리의 가슴이 실망으로 내려앉는 순간, 황태자가 말했다.
“한 번이 무엇이냐. 날 도대체 무엇으로 보고. 몇 번이어도 좋으니, 넌 걱정하지 말아라.”
그 말에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저렇게 이야기했어도, 만약 자신의 목을 베는 것이 제국에 이득이 되면 그렇게 할 것임을. 그게 바로 제국을 위해 악귀라도 될 수 있는 황태자 라엘이었으니까. 하지만.
‘설사 도박에 불과할지라도 노력해 보자. 수많은 공을 세워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 그가 내 정체를 눈치채도 날 죽일 수 없도록 만들어 보자.’
그녀는 굳게 다짐하며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렇게 그와 그녀는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다. 그날의 맞잡음 이후, 마리의 마음속 어딘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