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20화 (21/54)

Chapter 5

마리는 생각지도 않게 예작위를 수여받게 되었다. 당연히 주변의 모두가 난리가 났다. 황궁에서 가장 미천했던, 천민이나 다름없었던 전쟁 포로의 신분에서 귀족이 되었으니까.

예작은 남작 밑의, 명예직에 가까운 작위이지만 엄연한 정식 귀족직이다. 일반 기사나 준남작에 비해서도 신분이 높았다. 특히 제국에서 예작은 단순히 작위의 높낮이만으로 고하를 따질 수 없는 상징성이 있었다. 황태자가 가장 아끼는 최측근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축하해, 마리. 이제는 편하게 마리라고 부르지도 못 하겠네.”

제인을 비롯한 이전 하급 시녀 때의 동료들이 와서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그들뿐이 아니었다.

“축하해요, 마리. 아니, 이제 온(Horn) 힐데른이 되었군요.”

총시녀장 에슐린 백작 부인이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참고로 온(Horn)은 예작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

“예작위는 작위의 고하를 떠나 제국의 신하로서 가장 명예로운 작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해요.”

에슐린의 말이 옳았다. 오로지 황제나 황태자만이 수여할 수 있는 예작은 지극히 명예로운 작위였다. 따라서 이전 상급자들, 사자궁에서 일하는 동료들 모두 그녀를 부러워하며 축하해 주었다. 물론 당사자인 마리는…….

‘……울고 싶다.’

절망하고 있었다.

‘명예 따위 하나도 필요 없는데. 귀족 아니어도 되는데. 차라리 그냥 평민이 낫지. 하필 예작이라니! 왜 내 인생은 계속 이렇게 안 풀릴까.’

황태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한탄과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 작위 수여식 날이 되었다. 황태자는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검을 들어 직접 그녀에게 작위를 수여해 주었다.

“이로써 나, 황태자 라엘은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그대에게 예작위를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라엘은 무릎 꿇은 마리의 어깨에 검을 살짝 내려놓았다. 군주가 신하에게 작위를 수여할 때 행하는 예식이었다.

“동시에 그대에게 힐데른이란 성을 내리노라. 앞으로 그대는 마리 폰 힐데른이라 불릴 것이며, 역사에 기록된 성인(聖人) 힐데가르트처럼 주님과 백성을 위해 봉사할 것을 명하노라.”

그 말에 마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가 부여받은 성(姓)인 힐데른. 역시나 수많은 분야에서 압도적인 업적을 남긴 성(St.) 힐데가르트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던 것이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다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이 서로 비슷해 그렇게 지은 것 같았다.

‘황태자가 나한테 나쁜 의도로 작위를 준 것은 아니긴 하지.’

그래, 당연히 안다. 그가 작위를 내린 것은 그녀에게 큰 상을 주기 위해서란 것을. 훌륭한 군주인 그는 수하의 공을 절대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반드시 보상해 주었으니까. 그러니 그녀에게도 작위를 준 것이다. 그녀 같은 낮은 신분의 이가 귀족 작위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상이라 할 수 있었으니.

‘그런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황태자를 보면 참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단순하게 두려워하고 미워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그는 증오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로지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군주. 그게 라엘이었다. 비록 적에게는 냉혹하지만 그건 군주로서 장점이면 장점이지, 단점이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저 차가운 철가면이 무색하게 냉혹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공적인 부분은 칼처럼 엄정했지만, 자신의 사람을 아꼈다. 따라서 황태자의 수하 중에는 그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이가 많았다.

‘나도…… 어느 정도는 존경하는지도.’

만약. 정말 만약에 클로얀 왕국의 왕녀가 아닌, 제국민이었다면 그녀는 황태자를 진정한 주군으로 섬겼을지도 몰랐다.

“마리.”

작위 수여식이 끝난 황태자가 그녀를 불렀다.

“네, 전하.”

그는 철가면 아래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마.”

“……!”

왜일까?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깊은 신뢰를 담고 있어서일까? 마리는 이유 없이 가슴이 흔들려 입술을 깨물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리는 예작이 되었다.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많은 것이 변한 일상이 이어졌다. 시녀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시녀였다. 정확히 말하면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시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녀가 귀족이었다. 에슐린 백작 부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보다 신분 높은 귀족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일을 그대로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업무에 변화가 있었다. 이전과 다르게 황태자의 시중을 주로 들게 된 것이다. 명목상이 아닌, 진정한 전담 시녀가 된 것이다. 시녀들 간의 위계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온 힐데른을 뵙습니다.”

마리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시녀들을 보며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온(Horn)은 예작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자궁의 시녀들은 대부분 명문 귀족가의 영애들이다. 하지만 명문가 출신이라도 작위 후계자가 아니니, 실제로 본인이 작위의 소유자인 마리보다 계급이 낮았다. 따라서 시녀 중 그녀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은 에슐린 백작 부인처럼 가문의 안주인이거나, 본인이 작위를 가진 이여야 했다. 마리는 생각지도 않게 시녀 중에서 굉장히 높은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레이첼 영애와의 관계였다.

‘어색하네.’

워낙 큰일이 지나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황태자비 간택은 끝나지 않았다. 아리엘과 레이첼은 여전히 황태자비 후보로서 황궁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일 때문에 마리는 레이첼을 대하는 것이 어색했다.

“작위 받은 것 축하해요, 마리. 아니, 이제 온 힐데른이군요.”

레이첼은 친절하게 그녀를 대했지만, 마리는 레이첼의 본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레이첼은 분명 마리를 꺼리고 있었다.

‘레이첼 영애와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구나.’

마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계획을 원점에서 검토해야 했다. 물론 아직 간택은 끝나지 않았으니, 레이첼이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첼이 황태자비가 된다 해도 그녀를 도와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와주려고 해도 이미 황태자비가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섰지.’

마리는 생각했다. 단순히 전쟁 포로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면 모를까, 이제 그녀는 귀족이었다. 황태자가 직접 내린 작위이니, 황태자비도 감히 손댈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생각해 보자. 그래도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마리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행히 황태자는 내가 여러 능력을 보이는 것을 크게 수상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건 아마 황태자 본인이 다방면의 천재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뭔가 자신도 그러하니 그녀도 그럴 수 있지, 라는 느낌? 사실 황태자야말로 범재들이 보기에 불공평한 천재였다.

‘어쨌든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의심을 해도 백번은 더 했을 텐데.’

하지만 마리가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황태자만이 아니란 것을. 갑작스레 나타나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재상 오른이었다.

“안녕, 마리.”

마리는 궁에서 발걸음을 옮기다 자신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쾌활한 인상의 미남자.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리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비엔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이는 다름 아닌 오른이었다!

“마리? 아니면 힐데른 경? 어떻게 부르는 게 좋지?”

“편하게 마리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 마리. 날씨가 추운데 어디 가는 중?”

마리는 오른이 계속 친근한 척 말을 걸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시지?’

그녀는 당연히 오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황태자를 전심으로 모시는 충신. 쾌활한 인상과 사교적인 언행으로 여인들에게 인기 많은 바람둥이이지만, 실제로는 의심이 많고, 때로는 정적에게 독한 수법을 쓰는 것도 마다치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내전 당시 붙은 별명이 혈견(血犬).

‘그런 공작이 왜 나에게?’

어쨌든 켕기는 것이 있는 그녀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접근이었다.

“전하의 심부름으로 외무대신에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저를?”

“아는 사람한테 인사를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냥 불러봤어.”

“……네, 그러면 시간이 촉박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래. 수고해.”

마리는 피하듯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른은 친근하게 그녀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오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리. 클로얀 왕국에서 일하던 시녀.”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수상하단 말이야. 정말 수상해.”

사실 오른은 이전부터 마리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그래서 뒤에서 몰래 그녀의 인적 사항을 다시 조사해 보았다.

* * *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전부 사망한 기사 가문 출신의 고아. 가문의 빚으로 클로얀 왕성에 끌려가 모리나 왕녀가 유폐되었던 통원의 궁 근처에서 일하며 지냈다고 했지. 그러다 우리 제국군에 성이 함락될 때 포로로 끌려왔고. 아쉬운 점은 통원의 궁 근처에서 일했을 뿐, 모리나 왕녀와는 접점이 없어 그녀의 신상 파기를 정확히 모른다는 점.”

별달리 이상할 것 없는 신상 명세였다. 그래서 조사를 하고 오른은 그녀에게 신경을 껐다. 하지만 이번 교국 사절단의 일을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일개 시녀가 그런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사탕수수 종자를 서남부로 가져와 설탕을 생산해 낸다. 간단해 보이는 발상이지만, 이 방법을 생각해 내려면 서방과 동방의 복잡 미묘한 관계와 밀수 무역의 상관관계, 서남부 지방의 기후 환경, 사탕수수에 대한 박식한 지식 등이 모두 필요했다.

“레이첼 영애가 이교도 사절단을 대접할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저 시녀가 조언해 준 덕분이라고 했지.”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동방인의 생활 문화까지 자세히 알고 있다니. 학자도 아닌, 고작 일개 시녀가 말이다.

“본인의 말로는 클로얀 왕성의 시녀로 있을 당시 일이 워낙 없어서 도서관의 책을 읽으며 지냈다고 하지만…….”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상했다. 더구나 저 시녀가 잘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오른은 다시 한번 그녀의 신상명세를 살폈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없어. 아무도. 저 시녀를 아는 사람이.”

클로얀 왕성의 인적 기록부에 마리란 이름은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녀가 통원의 궁 근처에서 일했던 것도 맞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아무도 저 시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오른은 클로얀 왕국 출신의 인물 중 그런 존재를 한 명 더 알고 있었다.

“……모리나 왕녀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오른은 낮게 중얼거렸다.

“한 번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군.”

그리고 오른 말고도 마리를 주목하고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굉장히 뜻밖의 인물이었다. 흑발에 흑안. 지적인 인상의 대단한 미남자가 안경을 들어 올리며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였다.

“교국의 일은 아쉽게도 실패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굉장히 놀라웠다.

“동제국 쪽으로 화살을 돌리기 위해 술탄 근처에 인물들에게 어마어마한 뇌물을 투자했는데, 다 공으로 날렸군.”

그는 이번 동제국이 겪은 교국 사절단의 일이 마치 자신의 획책한 계략처럼 이야기했던 것이다. 여인처럼 아름다운 인상의 서제국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아쉽게 되었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게 대처했군. 더구나 사탕수수 종자라니.”

요하네프 3세는 혀를 찼다.

“이건 뭐, 동쪽 놈들에게 보석을 가져다준 꼴 아닌가. 그것도 마르지 않는 보석을.”

유럽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환경은 몇 곳 되지 않는다.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 지중해에 위치한 일부 섬 정도. 그리고 이번에 동제국의 서남부 지역이 가능하단 것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뭐, 이번 일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건 일이니까. 그리고 동제국이 설탕을 생산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보면 나쁜 일은 아니지. 머지않은 시기에 동제국과 우리 서제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질 것이니까.”

황제 요하네프 3세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말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스트반 백작가는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백작가의 영애가 지금 황태자비 간택을 위해 황궁에 들어가 있다고 했지? 레이첼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그것도 잘되었으면 좋겠군. 이스트반 백작가의 영애가 황태자비가 되면 계획은 그만큼 쉬워질 테니.”

요한과 재상이 나누는 대화는 동제국의 인물들이 들으면 경악할 이야기였다. 황태자비 간택을 위해 들어온 레이첼과 그녀의 이스트반 백작가가 요한의 서제국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요한과 재상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모리나 왕녀에 대해서는? 조만간 계획을 위해 짐이 동제국으로 다시 행차할 텐데 그때까지는 누가 그녀인지 알아냈으면 좋겠군.”

요하네프 3세가 그리고 있는 원대한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모리나 왕녀의 존재는 필수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만간 성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요한은 눈을 빛냈다. 그의 재상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조만간 성과가 있을 것 같다면 정말로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래, 기대하지.”

“아, 폐하. 그리고 지난번 말씀하셨던 건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마리란 시녀에 대해서입니다.”

요한은 흥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몰래 동제국의 황성에 다녀온 후 끝없이 그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는 소녀였다.

‘이번에 교국을 이용한 내 계획을 좌초시킨 것도 그 소녀라고 했지.’

역시 그때 납치라도 해서 자신의 궁으로 데려왔어야 했나, 하고 요한은 생각하며 물었다.

“어떤 것이지? 말해봐라.”

“시녀 마리에 대해 조사해 보았는데, 없습니다.”

“뭐?”

“아무도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가 있나? 모리나 왕녀야 통원의 궁에 홀로 유폐되어 있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시녀로 일하고 있었으면 아무리 외진 곳에서 일했어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가 없을 텐데?”

“소신도 같은 생각입니다.”

재상의 말을 듣고 요한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설마?’

“재상.”

“네, 폐하.”

“시녀 마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조사해 보도록.”

요한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언가 흥미로운 냄새가 나는군.”

그렇게 마리에 대해 동제국의 재상 오른, 서제국의 황제 요한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 * *

그녀가 자신의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하고, 바뀐 일상에 적응하며 살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생각지도 않은 임무를 받게 되었다.

“……전하가 외유를 나가시는데 수행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래, 전하가 외유를 나가는데 그대가 아니면 누가 전하를 모시겠나?”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마리는 황태자의 전담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외유를 나가면 따라가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저와 전하, 두 명만 간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다른 일행 없이 오로지 그녀와 그만 떠나는 외유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왕복 보름은 넘게 걸릴 서남부까지!

“어차피 서남부의 사정을 살피러 시찰을 가는 것이니 많은 인원이 필요 없다 하시더군. 물론 호위할 근위 기사단도 일부 동행할 것이다.”

마리는 혹시나 물었다.

“다른 황태자비 후보분들은 동행하지 않으십니까?”

원래 간택 기간 중 장기간 외유할 일이 생기면 보통 후보들이 동행하곤 했다. 장기간 여행을 같이하며 정을 쌓으라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길버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거절하셨다. 거창하게 일행을 늘려 서남부 지방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군.”

마리는 황태자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후보들이 합류하면 행렬의 규모가 커진다. 그러면 황태자 일행을 맞아야 하는 서남부의 부담도 커지리라.

‘황태자다운 생각이긴 한데…….’

문제는 덕분에 자신 혼자서 황태자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먼 길을! 그러며 길버트 백작은 당부하듯 말했다.

“전하께서 불편함이 없도록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리는 생각지도 않게 황태자와 둘이서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곧 그녀가 황태자와 같이 외유를 간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사자궁의 시녀들이 묘한 눈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뒤에서 속닥거렸다.

“서남부까지면 꽤 먼데. 오가면서 서로 정이라도 드는 것 아닐까요?”

“에이, 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분인데.”

“하지만 전하께서 원래 힐데른 경을 각별하게 아끼긴 하셨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먼 거리를 둘이서 오가는데 설마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요.”

일리가 있는 말이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같이 붙어 지내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게 마련이다. 애초에 둘의 관계가 조금 묘하지 않았는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황태자가 마리를 대하는 게 범상치 않긴 했다.

“음…… 이러다 힐데른 경이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누군가 조심스럽게 한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리엘 공녀와 레이첼 영애가 계시는데.”

“하지만 전하는 두 분 모두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으시는걸요.”

“그래도 전하는 두 후보 중 한 분을 선택하실 거야.”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비는 당연히 대귀족인 아리엘 공녀나 레이첼 영애가 될 것이다. 다만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시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레시아로 다른 이들보다 자주 황태자와 마리를 가깝게 지켜본 시녀다.

‘정말 그럴까? 난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지는 않는데.’

어쨌든 사람들의 호기심 속에 외유를 떠날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마리는 외유 전날 밤, 또 꿈을 꾸었다.

꿈의 배경은 화려한 샹들리에가 놓인 만찬장이었다.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가 음식을 들며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훌륭하군.」

「과찬이십니다, 전하.」

「아니야, 역시 ‘파티시에의 왕’이라 불릴 만한 솜씨야. 그대의 명성이 짐보다 높다고 하더니, 과찬이 아니었군.」

마리는 꿈의 내용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요리사를 부르는 호칭이 무언가 굉장히 거창했다.

‘파티시에의 왕…… 이라고?’

꿈속, 화려한 옷을 입은 인물은 거창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도 그대의 만찬에 극히 흡족했다고 들었네. 자네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짐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야.」

「그래도 지나친 과식은 좋지 않습니다, 전하.」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놓고 소식하란 말인가? 참, 고약한 말이군.」

꿈속의 왕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 접시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얀 생크림 케이크는 단정하면서 고풍스러운 기풍이 느껴지는 게, 요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참, 궁금하군. 그대는 가난한 빈민가에서 불행하게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훌륭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인가?」

그 물음에 요리사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빈민가 출신이기에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요리사, 카렘은 대답했다.

「그건…….」

거기서 꿈은 끝이 났다.

마리는 번뜩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웬 요리사의 꿈?”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남서부 시찰을 가는 날 밤 웬 요리사의 꿈이란 말인가? 가서 요리할 일도 없을 텐데. 고개를 갸웃한 그녀는 나갈 채비를 하였다. 깊게 생각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조금 늦게 일어나 서둘러 나가야 했다. 그녀는 짐을 챙겨 출발 장소로 향했다. 출발 장소에는 황태자가 탈 마차를 비롯해 몇 대의 마차가 더 있었다.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구나.’

단출하게 떠난다 해서 경호 인원을 동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알몬드 자작님이랑 그 밖에 근위 기사단의 기사들…….’

마리는 경호를 맡은 기사들을 살피다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어, 저분은?’

마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찬란한 금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얼굴. 지난번 거리 축제 때 불한당들에게서 그녀를 구해 주었던 ‘란’ 님이었다!

‘검 실력이 뛰어나다 했더니, 역시 근위 기사였구나.’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반갑게 그를 불렀다.

“란 님!”

“……!”

그가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살짝 당황한 눈치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반가워요. 마리예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래, 잘 지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의 반응도 조금 어색했고, 주변을 둘러싼 근위 기사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그녀를 바라봤던 것이다. 특히 알몬드는 입까지 쩌억 벌린 것이 경악한 눈빛이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그때 알몬드가 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힐데른 경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따로 이야기한 적이 없군.”

그들의 대화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지? 알몬드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전하시다.”

“……네?”

“저분이 황태자 전하시라고.”

“…….”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뭐라고? 너무 엄청난 말이어서 그런지 머릿속에서 해석이 안 되었다. 마리는 그림 같은 란의 얼굴과 알몬드를 마치 농담이시죠, 란 눈빛으로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당연히 알몬드의 얼굴에는 전혀 농담의 빛이 없었다. 그때, 란, 아니, 황태자 라엘이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안 했군. 속이려 한 것은 아니다.”

그 말을 들은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정말로 란이 황태자였던 것이다.

‘란 님이 황태자였다고?’

마리는 패닉에 빠져 생각했다. 아니, 왜? 어째서?

‘그러고 보니…….’

마리는 이전에 레시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외모이셔.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꼽으면 그건 아마 황태자 전하일 거야.”

그것 말고도 란은 황태자와 닮은 점이 많았다. 무뚝뚝한 음성이나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 따지고 보면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는 일이었는데 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언질이라도 해주시지.’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 축제 때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당시 축제 분위기에 휘말려 엄청 편하게 대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불경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이었다.

‘불쾌하셨을까?’

워낙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황태자이다 보니 알 수가 없었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태자를 훔쳐보았다. 가면을 벗어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름답긴 정말 아름답구나.’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마치 신이 직접 빚은 듯했다. 이 제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사람은 아리엘도, 레이첼도 아닌, 황태자라는 레시아의 말이 공감이 갔다. 물론 그녀의 소중한 친구인 키에르한도 마찬가지로 아름답긴 했다. 황태자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키에르한이 강인한 조각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라엘은 그림처럼 예쁜 아름다움이었다.

그때, 서류를 보고 있던 라엘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편하지는 않은가?”

“네?”

“마차 타는 것이 힘들진 않은가?”

그 말에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미안하게 됐군. 원래는 나 혼자 조용히 다녀오려 했는데, 길버트 백작과 에슐린 백작 부인이 혼자 다녀오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만약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이야기하도록.”

“……네, 감사합니다.”

마리는 그 말에 묘한 얼굴을 했다. 무뚝뚝한 배려. 가면을 벗었지만 역시나 똑같은 황태자이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무슨 말이지?”

“일전, 거리 축제 때 전하임을 모르고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불쾌하셨던 점 모두 용서해 주십시오.”

그 말에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워낙 아름다운 얼굴이어서 인상을 찌푸리니 티가 확 났다.

“뭐가 실례했다는 거지?”

“네?”

마리는 당황해 말했다.

“그야…… 제가 전하께 실례를 범해…….”

라엘이 미간을 좁혔다. 그 반응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시지?

“……않았다.”

“네?”

“불쾌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그런 사과는 하지 말도록.”

강한 목소리에 마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마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따가닥따가닥.

마차 바퀴가 도로와 부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몬드 자작과 호위 기사들은 직접 말을 타고 곁에서 그들을 따르고 있는 중이라 마차 안에는 황태자와 그녀밖에 없었다.

‘……이렇게 있으니 어색하네.’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타고 있는 마차는 외유를 나갈 때 황태자가 이용하는 마차였는데, 황족의 마차답지 않게 화려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조금 좁았다. 황태자의 검소한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황태자와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앉아 있어야 했다. 살짝 잘못 움직이면 서로의 무릎이 스칠 정도의 거리.

‘최대한 조심하자.’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다시 황태자를 훔쳐보았다. 좁은 공간에 둘밖에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계속 갔다.

‘또 서류네. 마차 안에서는 조금 쉬셔도 괜찮을 텐데.’

라엘은 집무실에서 서류를 산더미처럼 챙겨 와서 검토하고 있었다. 애초에 정무를 보며 이동하려 만든 마차인지, 그가 앉은 문 쪽에는 접이식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때, 라엘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피곤하면 조금 눈을 붙여도 된다.”

“괜찮습니다.”

“사양할 것 없다. 어차피 지금 네가 할 일도 없으니.”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의 몸이나 신경 쓰시지.

‘그나저나 전하는 왜 가면을 쓰고 계신 걸까?’

마리는 이전부터 생각했던 의문을 떠올렸다.

‘용모가 흉한 것도 아니신데.’

늘 쓰고 다니는 철가면 때문에 그에게는 온갖 흉험한 소문이 떠돌았다. 외모가 추악하다느니, 잔인한 폭군이라느니, 처녀의 피를 마신다느니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철가면을 쓰고 다닐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열어 물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왠지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덜컹. 덜컹.

험한 길에 접어들었는지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마리는 갑작스레 흔들리는 마차에 균형을 못 잡고 확 하고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악!’

그녀는 강하게 부닥칠 것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무언가에 부닥치긴 부닥쳤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느낌이…….

‘헉?’

마리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서 하얀 얼굴이 보였다. 라엘이었다!

“……괜찮나?”

라엘은 어딘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마리는 잠시 상황 판단이 안 되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곧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단단한 그의 몸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다치진 않았나?”

마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마 자신이 갑작스럽게 앞으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 다치지 않게 막아주려고 했던 것 같다. 문제는 자신이 너무 심하게 넘어져 그의 품에 완전히 안겨 버린 것이다.

‘어쩌다 황태자에게 이런 실수를.’

마리는 창백한 얼굴로 생각했다. 황태자의 품에 안겨 버리다니. 백번 사죄해도 모자랄 중죄다. 그녀가 급히 그의 품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덜컹!

마차가 다시 한번 거세게 흔들렸고, 그녀는 또 균형을 잃었다.

“꺅!”

마리는 황태자의 품 안으로 다시 쓰러졌다. 그것도 아까보다 더욱 깊이.

“…….”

시간이 멎은 듯했다. 완전히 그의 품에 안겨 버린 마리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생각이 정지했다.

두근두근.

그녀의 가슴일까, 아니면 귀에 닿은 그의 가슴 속에서 나는 소리일까? 조용한 마차 속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 울려 퍼졌다.

“……괜찮나?”

그제야 마리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마리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품에서 벌떡 멀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안 다쳤으면 됐다.”

라엘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져 있었지만, 완전히 당황한 상태인 마리는 그걸 보지 못했다. 마리는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황태자의 품에 안기다니.’

그녀의 가슴이 계속해서 뛰었다. 가슴이 뛰는 이유가 생각지도 않게 황태자에게 불경죄를 저질러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위험하니 조심하도록.”

“……네.”

황태자는 다시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자신과 다르게 전혀 흔들림 없는 그 모습에 마리의 가슴도 조금씩 안정되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가자.’

하지만 마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황태자는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 아니란 것을. 그는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서류로 가리며 생각했다.

‘미치겠군.’

자꾸만 방금 자신에게 닿았던 그녀의 느낌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한참 전부터 마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어떻게 안 그러겠는가? 이렇게 좁은 공간 안에 단둘이 있는데. 애꿎은 서류를 노려보며 잡념을 떨치고 있었는데, 방금 불의의 사고(?)를 겪으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래서 혼자 오려고 했었던 것인데.’

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그녀와 단둘이 마주해야 할 텐데, 어떻게 그 시간을 버텨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황태자의 복잡한 마음과 함께 마차는 서남부 지방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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