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지금…… 뭐라고 했지?”
황태자는 카산에게 반문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희미한 노기가 감돌았다. 그건 황태자뿐이 아니었다. 재상 오른도, 다른 대신들도 모두 얼굴에 분노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산이 꺼낸 용건은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우리 제국보고 너희 동방 교국에 식량을 지원하라고?”
사절단의 대표, 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우리 교국은 벌써 수년째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간 비축된 식량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그것도 한계. 교국 전역에서 백성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술탄께서는 이웃 나라인 동제국에서 식량을 지원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제국의 대신들은 발끈해 소리쳤다. 적국에 와서 식량을 내놓으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전하,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이자들을 당장 국경 밖으로 내쫓아버리십시오!”
“맞습니다. 식량 지원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거칠어지는 알현장의 분위기에 황태자는 손을 들었다.
“그만. 조용히 하도록.”
그는 사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너희가 지금 굉장히 무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식량 지원이라니? 가뭄에 시달리는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웃한 나라로서 넓은 마음으로 베풀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며 카산은 말했다.
“만약 이번에 도움을 준다면, 우리 교국은 제국의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국에 훗날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마치 형제의 일처럼 그 일을 돕겠습니다. 반면, 이번에 도움을 주기를 거절한다면.”
카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굶어 죽어 가는 백성들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술탄께서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황태자를 비롯한 대신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군사를 일으킨다고? 그건 우리 제국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우리도 결코 전쟁을 원하진 않습니다. 전쟁은 정말 최악의 경우, 어쩔 수 없을 때의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카산은 그렇게 말했으나, 결국 식량을 내놓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협박이었다. 알현장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해졌다.
“이제 보니 사절단이 아니라 강도 놈들이었군.”
“다시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우리 교국도 제국과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카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뭄이 닥친 우리와 다르게 제국엔 몇 년째 풍년이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창고에는 식량이 남아 벌레가 꼬일 지경이라 들었고요.”
“…….”
“이웃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식량을 지원해 주면 당연히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교국은 제국에게 받은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고요.”
알현장에는 숨이 막힐 듯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카산은 다음의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양 국가를 위한 전하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알현이 끝난 후, 황궁은 난리가 났다. 대부분의 대신이 분노해 외쳤다.
“이런 무례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칼만 안 들었지, 이게 강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우리 제국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런 협박을!”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당장 저 사신을 매질해 국경 밖으로 쫓아냅시다!”
모두가 그렇게 분노할 만했다. 식량을 지원하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다니. 이건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전쟁이라고요? 쳐들어오라고 하십시오.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
“맞습니다. 이교도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때가 되긴 했습니다.”
대신들은 씩씩거리며 외쳤다. 아무리 교국이 동방을 제패한 대국(大國)이라지만, 제국의 국력도 그에 못지않았다. 교국의 협박에 굴복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교국 놈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합니까? 물론 우리가 패배하지야 않겠지만, 피해가 막심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국과 전쟁을 하면 서쪽에 위치한 또 다른 적국, 요하네프 3세의 서제국이 빈틈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전쟁을 주장하던 대신들이 멈칫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교국이 두렵지는 않았다. 제국의 힘은 결코 그에 못지않았으니까. 하지만 전쟁을 하면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좋아할 사람은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겠지. 생각지도 않은 어부지리이니까.’
회의실 상석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황태자는 생각했다.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군.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일단 대신들의 이야기처럼 교국의 협박에 굴복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제국의 위신상 절대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을 하게 되면? 그 피해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특히 교국과 인접한 국경 지대 백성들의 피해가 어마어마하겠지.’
황태자는 눈을 감았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도 귀족들의 피해는 미미하다. 앞장서 싸우고 피를 흘리는 것은 평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이 전쟁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면도 있었다.
‘전쟁이 두렵진 않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두려워해선 안 돼. 하지만…… 이번 경우엔 전쟁하는 것이 백성을 위한 최선일까?’
그는 군주였다.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그런 그가 판단하기에 이번 전쟁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았다.
‘방법이 없을까? 저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을 피할 방법이.’
라엘은 철가면 안으로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 * *
교국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며 황궁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날벼락처럼 다가온 전쟁의 가능성에 황태자비 간택은 모두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물론 모두가 전쟁의 위기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귀족가의 영애들은 긴장감 없이 떠들어 댔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요?”
“모르죠. 뭐, 일어나면 어떤가요? 저희에게는 황태자 전하가 계시잖아요. 이교도들 따위야 단칼에 물리쳐 주시겠죠.”
“그나저나 이번 일 때문에 수도 내에 연회가 모두 취소되어서 짜증 나요. 연회용 드레스도 모두 새로 맞추었는데.”
마리는 황궁을 걷다 들은 귀족 영애들의 수다에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구나. 하긴 전쟁이 일어나도 피를 흘리는 것은 백성들이니.’
마리는 씁쓸히 생각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도 그 전란의 여파가 수도에까지 미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니 저 영애들이 저렇게 속 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직접 전란을 겪어 본 마리는 도저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나면 또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게 되겠지.’
마리는 눈을 감았다. 끔찍했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황태자 전하도 가급적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전쟁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매일 밤마다 황태자를 만나기 때문에 마리는 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민이 얼마나 심한지 그는 최근 다시 불면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야. 교국의 협박에 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마리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늦은 밤이 되었다. 그녀는 늘 해왔던 대로 황태자의 침소로 향했다. 워낙 중대한 일이 생긴지라 간택과 관련된 일정은 전부 취소된 상태였지만, 그녀가 황태자를 밤늦게 찾아가 불면을 달래는 것은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침소에 도착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황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하께서는 아직 집무실에 계신다.”
마침 침소 주위에 있던 호위 기사 알몬드 자작이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아…… 그러면…….”
마리는 황태자가 집무실에 있다는 말에 그냥 돌아갈지 말지 고민했다. 그때 알몬드 자작이 말했다.
“집무실에 가 봐라.”
“네? 하지만……”
“전하께서 고민이 깊으시다.”
알몬드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가면 좋아하실 거다.”
마리는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제가 가면요?”
“전하께서 널 특별히 아끼지 않느냐. 가서 격려의 말이라도 해드려라.”
뭔가 그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 좋은 차라도 끓여 드려야겠다.’
마리는 곧 차를 한 잔 끓인 후 집무실로 향했다.
“전하, 시녀 마리입니다.”
곧 철문이 끼익 하고 열리며 집무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딱딱한 나무 책상에 철가면을 쓴 황태자가 정무를 보는 모습.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마리인가?”
“네, 전하. 따뜻한 차를 내왔습니다.”
“고맙군.”
황태자는 철가면 밑으로 입꼬리를 옅게 들어 올렸다. 황태자가 가끔씩 보여 주는 옅은 미소였는데, 오늘따라 마리는 그의 미소에 피로가 담겨 있다고 느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미소뿐이 아니었다. 철가면 밑의 눈동자도 피로가 가득했다. 생각해 보니 최근에 자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옥체가 상할까 염려되옵니다.”
“괜찮다. 지금은 내 몸보다도 훨씬 중요한 일을 마주하고 있으니까.”
그 말에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떻게 저런 군주가 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보면 황태자는 제국과 백성을 위해 자신을 학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네가 끓여 주는 차는 언제나 좋구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는 오히려 그녀를 배려해 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너야말로 들어가서 쉬도록 하여라. 피곤할 터이니.”
“……!”
그 염려를 듣는 순간 마리는 가슴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황태자를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그래, 그를 돕고 싶었다. 백성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고민하는 그를 도와 조금이라도 좋은 결과가 나오게 했으면 좋겠다. 비록 자신의 나라는 아니더라도, 불필요한 전란으로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머릿속에서 고민했다.
‘생각해 봐, 마리. 분명 무슨 해결책이 있을 거야.’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간단한 해결책이 한 가지 떠올랐다.
‘잠깐? 이러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그녀를 보며 황태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혹시 할 말이 있다면 편히 해도 좋다.”
마리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 혹시 미천한 것이 최근 일과 관련하여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꾸짖듯 말했다.
“넌 나의 것이다. 그러니 절대 미천하지 않아.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천하다느니, 그런 말 따위는 입 밖에도 내지 말도록.”
그 말에 마리는 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저 황태자는 확실히 자신을 아끼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아끼는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마리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교국에 식량을 내어주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옵니까?”
“불가하다.”
황태자는 곧바로 대답했다.
“우리는 교국의 속국이 아니야. 아무리 전쟁을 피하고 싶다 해도, 그런 협박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어.”
당연한 이야기였다. 교국에 고개를 숙일 바엔 어떤 피해를 입어도 전쟁을 하는 것이 나았다. 물론 마리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태자에게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전하의 말대로 교국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교국과 거래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거래?”
그 말에 황태자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네, 식량을 내어주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평한 상호 교역이 되니 제국의 위신도 상하지 않고, 교국도 원하는 것을 얻게 되니 전쟁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태자는 마리의 말에 감탄의 빛을 보였다.
“훌륭한 생각이다. 마리, 네가 한 생각인가?”
마리는 그 말에 아차 싶었다. 허드렛일을 하던 평범한 시녀가 떠올리기에는 너무 깊은 식견이었다.
‘됐어.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내 정체야 레이첼 영애의 도움으로 황궁을 떠날 때까지만 안 들키면 돼.’
지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보다 황태자를 도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
라엘은 부드러운 차향을 맡으며 칭찬하듯 말했다.
“사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고 식량을 팔면 서로가 이득인 거래가 될 테니까.”
“그러면…….”
“하지만 이 거래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단언하는 듯한 목소리.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마리에게 황태자가 짧게 말했다.
“저들이 이교도이기 때문이다.”
마리는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 말씀은…….”
“그래, 우리 제국을 비롯한 서방의 국가들은 원칙적으로 이교도들과 금, 은 등의 금품을 거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 물론 민간의 거래까지 막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 단위의 교역은 안 돼.”
“아…….”
마리는 자신이 조금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반성했다.
‘하긴 저 명민한 황태자가 이런 간단한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겠지.’
원칙적으로 서방 국가들은 동방 교국과 금품을 사용한 교역이 금지되어 있다. 물론 여러 허술한 점이 많은 원칙이라 잘 지켜지지는 않으나, 금번의 일처럼 대규모 거래는 당연히 금지된다.
“혹시 금품을 제외한 다른 물품으로 대가를 지불받으면 안 되는지요?”
“가능은 하다. 하지만 금전적 가치가 있는 후추나 향신료, 염료, 보석 같은 것들은 모두 원칙적으로는 금지된 품목이다.”
그러며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 품목을 제외한 물품이면 어떻게든 거래가 가능하긴 하지만, 저 품목이 아니면 사실 아무런 가치가 없지.”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의 말이 모두 옳았다. 금지되지 않은 품목이면 어떻게든 거래를 해볼 수야 있겠지만, 저 품목을 제외하고 무엇을 거래의 대가로 받는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로 전하의 귀만 어지럽혔습니다.”
“아니다. 마리, 네가 말한 이야기는 나도 고려했던 것이니까. 다음에도 좋은 생각이 있다면 말해주도록.”
그렇게 마리는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왔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마리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집무실 밖에서 계속 고민했다.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황태자를 도와 이번 일을 잘 해결하고 싶었다.
‘이교도와의 거래가 금지된 품목 말고 대가로 받을 만한 물건은 없을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 물건을 대가로 받고 식량을 파는 것으로 처리하면 제국의 위신도 상하지 않고, 서로가 이득인 거래가 될 텐데. 생각해 봐, 마리!’
마리는 과거 클로얀 왕성에서 유폐되어 지낼 때 읽었던 수많은 책을 떠올렸다. 당시 클로얀 왕성에서 지낼 때 그녀는 책을 읽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정말 많은 책을 읽었었고, 덕분에 나름대로 깊은 식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시녀로 지내면서도 지금껏 간간이 뛰어난 판단력이나 식견을 보인 것은 모두 그때의 독서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어. 거래할 만한 품목이.’
애초에 금지된 품목 자체가 어떤 품목을 특정했다기보다는 이교도와의 교역을 금지하기 위해 거래할 만한 품목을 모조리 지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외하고 나니 대가로 받을 만한 것이 없었다. 민간 상인들이야 금지된 품목도 눈치를 보며 거래하지만, 제국같이 거대한 국가의 경우에는 불가능했다.
‘어떻게 하지? 정말 방법이 없을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마리는 숙소에 돌아가서도 고민을 거듭하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밤새 깊은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든 탓일까? 그녀는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마리는 꿈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마치 현실처럼 선명한 감각, 뚜렷한 시야. 자신에게 능력을 주는 그 신비한 자각몽이 분명했다.
‘혹시 이번 교국의 일과 관련한 꿈을?’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각몽을 꾸기만 하면 꼭 관련된 사건 사고가 발생해 싫었는데,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어쩌면 이 자각몽이 금번 난관을 해결할 열쇠가 되어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 정신을 집중해 꿈속의 내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꿈속의 내용이 무언가 이상했다.
「오늘은 또 무얼로 끼니를 때우지?」
「황태자 전하께서 내려 준 배급도 거의 다 떨어졌어요.」
제국어였다. 신기하게 이번 꿈은 다른 곳이 아닌,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꿈인 것이다. 억양을 보니 제국에서 가장 못 사는 서남부 지방의 사람들 같았다. 꿈속 사람들은 남루한 옷을 입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지역은 다 풍년이라는데, 우리 지방은 또 흉년이구려.」
「이번에도 또 기온이 너무 뜨겁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렸어요. 문제는 매년 이게 반복되니…….」
「땅도 기름지지 않고, 척박하니…….」
사람들은 절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해에는 또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마리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이건 또 무슨 꿈이지?”
이번에도 무슨 의미의 꿈인지 모르겠다.
“농민이 되는 꿈이라니? 그것도 제국 서남부 지역의?”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꿈속 남루한 인물들은 분명 서남부 지역의 제국 농민이었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서남부 지역은 매해 흉년이라고 그랬지. 꿈속의 내용처럼.’
비옥한 땅으로 풍년일 때가 많은 다른 지역과 다르게 바다와 인접한 서남부 지역은 아열대 기후에 가까웠고, 강수량이 많으며, 심지어 땅도 비옥하지 않아 밀을 심어도 수확량이 형편없을 때가 많았다.
‘서남부 지방은 황태자가 직접 관리하는 황실 직할지이긴 하지만…….’
마리는 서남부 지방에 대해 아는 바를 떠올렸다. 황실 직할지이지만, 실제로 황실에 도움이 되는 직할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전이 끝난 후 주인이 비게 되었는데, 아무도 그 땅을 받으려 하지 않아 황태자가 황실 직할지로 거둔 것이다. 매번 흉년만 거듭되니, 세금이 걷히기보다는 구휼로 빠져나가는 금액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특별히 능력이 주어진 것도 아닌데?’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의미 없는 꿈은 아닐 것이다. 이번 사절단의 일과 연관이 있는 꿈일 가능성이 높았다.
‘꼭 생각해 내자. 꿈속에 분명 단서가 있을 거야.’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사자궁에서 일을 하고, 레이첼의 별궁으로 가 시중을 들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 황태자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피가 흐르는 것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특별히 짚이는 바가 없었다. 왜 그런 꿈을 꾼 것인지, 아니, 실제로 의미가 있는 꿈이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이거 아무런 의미 없는 개꿈인가?’
마리는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국 사절단의 일과 서남부 농민의 삶이 연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도대체 뭐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고, 곁에 있던 레이첼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 왜 한숨이야? 무슨 생각해?”
“아…… 그냥 이번 사절단의 일로 걱정이 되어서 그랬습니다.”
마리의 말에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번 일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간택 일정도 다 취소되고, 뭐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네.”
갑작스러운 비상사태에 레이첼도, 아리엘도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별궁에 칩거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불만스러운지, 레이첼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내 진짜 목표를 위해선 반드시 황태자비가 되어야 하는데.’
레이첼은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떠올렸다. 그 목표를 위해선 황태자비가 되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황궁에 이런 문제가 생기다니. 그러다 그녀는 매번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마술사처럼 해결해 낸 마리의 능력을 떠올리고 물었다.
“마리, 혹시 이번 문제를 잘 해결할 방법은 없어? 너라면 뭐라도 좋은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워낙 어려운 문제라.”
“그렇지? 그래도 아쉽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려 큰 점수를 딸 수 있을 텐데.”
점수를 얻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 비상상태를 슬기롭게 해결할 만한 방법을 레이첼이 말해주면, 황태자는 그 답례로 그녀를 황태자비로 책봉할지도 몰랐다. 이번 일은 그 정도로 제국에 큰 문제였다.
“케이크나 먹자. 너도 조금 먹을래, 마리?”
“아, 괜찮습니다.”
“그래? 이번 케이크는 벌꿀이 아니라 설탕을 넣은 거라 맛이 굉장히 좋은데.”
마리는 레이첼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탕은 유럽에서 거의 재배되지 않고, 대부분 동방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굉장히 귀한 기호 식품이다. 워낙 값이 비싸 돈 많은 귀족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들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단맛을 내기 위해 설탕이 아닌 벌꿀을 사용했다.
‘식량을 주는 대가로 저 설탕을 받아도 좋을 텐데.’
설탕은 거의 같은 무게의 금값에 육박할 정도의 고가였다. 지원해 주는 식량 이상의 가치를 충분히 지닌다.
‘하지만 설탕도 마찬가지로 교역 금지 품목이야. 민간 상인이라면 모를까, 제국은 교역할 수 없어.’
그때, 케이크를 먹던 레이첼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설탕은 맛있는데, 왜 이렇게 비쌀까? 우리 제국도 설탕을 재배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리는 화들짝 놀라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잠깐! 지금 뭐라고?’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첼 영애,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응? 우리 제국도 설탕을 재배하면 좋겠다고. 그러면 조금 더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아니야.”
그러며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차피 설탕은 동방에서밖에 안 나는 것 아니었어? 왜 그렇게 봐, 마리?”
하지만 마리는 레이첼의 말에 답할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떠올렸던 것이다.
‘내가 왜 이걸 떠올리지 못했지? 식량을 주는 대가로 꼭 완성된 물품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사탕수수의 종자를 받으면 돼! 그래서 그 종자로 제국에서 설탕을 생산해 내는 거야!’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마어마한 생각이었다. 제국에서 설탕을 생산해 낸다! 식량 지원의 대가로 충분했다. 아니,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물론 유럽은 기후 조건이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제국에는 마침 조건에 맞는 곳이 있어.’
마리는 사탕수수의 재배 조건을 떠올렸다. 연중 기온이 내내 뜨겁고, 강수량이 많아야 한다. 대부분의 유럽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제국에는 가능한 곳이 있었다. 늘 흉작을 거듭하는, 꿈속에서 본 서남부 지역이었다!
‘서남부 지역은 밀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후이지만, 사탕수수 재배에는 오히려 나아.’
그러며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설탕 무역은 베네치아 상인이 독점하고 있어. 그런데 제국이 자체적으로 설탕을 생산하여 유럽에 유통한다면?’
거기에서 창출되는 부는 어마어마하리라. 얼마나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황태자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 주자.’
황태자도 크게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황태자 전하도 오늘은 잠을 잘 수 있겠지.’
왜일까? 문득 마리는 그가 편안히 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너무 무리하는 모습만 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사자궁으로 가자.’
그런데 마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가만히 마리의 얼굴을 보고 있던 레이첼이 불쑥 말했다.
“마리. 너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 냈구나?”
“……!”
마리는 흠칫 놀라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마리가 무언가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에 기쁜 얼굴을 했다.
“나에게 네가 생각해 낸 것을 이야기해 줘. 황태자 전하께 고하는 것은 지난번처럼 내가 할게.”
레이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잘되는 것이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
* * *
그날 레이첼은 황태자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황태자는 사절단의 일로 두 후보에게 소홀하다는 주변의 의견을 듣고, 아예 간단히 저녁을 같이하기로 했다. 다만 소홀했던 것은 레이첼뿐 아니라, 아리엘 공녀에게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아리엘과도 같이 식사하게 되었다.
“공녀 저하를 뵙습니다.”
마리를 대동하고 식사 장소에 도착한 레이첼은 아리엘을 보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최근 연이은 레이첼의 두각으로 초조함에 휩싸여 있는 아리엘은 코웃음을 치며 인사를 제대로 받지도 않았다. 널따란 식사 테이블에 앉은 아리엘은 레이첼의 뒤편에 서서 식사 시중을 들 준비를 하는 마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하와의 식사 자리에 저런 천한 신분의 시녀를 데려오다니.’
같은 표정이었다. 레이첼은 그런 아리엘의 표정에 웃음을 지었다. 평소라면 넌지시 트집을 잡았겠지만, 이번엔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곧 있을 황태자와의 대화가 너무나 기대되었던 탓이다.
‘아리엘 공녀도 같이 식사하게 되어 좋네.’
레이첼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오늘로써 이 경쟁도 끝이니까. 황태자비로 간택되는 이는 바로 나야.’
그녀는 마리가 아까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식량을 지원해 주는 대신, 사탕수수의 종자를 얻어 내 설탕을 자체 생산한다! 정말 어마어마한 생각이었다. 단순히 환란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차후 제국에 어마어마한 부를 안겨 줄 방법.
‘이 방법을 떠올린 것은 정말 대단한 공이야. 상벌이 명확한 황태자 전하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분명 큰 상을 내려 줄 거야.’
그리고 황태자비 후보인 그녀에게 내려 줄 상은 단 하나였다. 바로 황태자비로 책봉하는 것.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간택도 오늘로서 끝이야.’
레이첼은 자신이 황태자에게 의견을 말할 때 아리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레이첼은 문득 자신이 마리의 공을 낚아채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되어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마리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레이첼은 이런 생각도 하였다.
‘그나저나 마리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황태자비가 되고 난 후에도 놔주지 않고 계속 옆에 둘까?’
마리의 능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옆에서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레이첼은 황태자비가 되고 난 뒤에도 마리를 자신의 그림자로 삼아 계속 그 능력을 사용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아니야. 그러다가 지금껏 내가 했다고 소문난 일들이 사실 마리가 한 것이라고 밝혀지면 곤란해.’
레이첼의 예쁜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안 보는 사이, 찰나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간택이 끝나면 입을 막기 위해 황궁 밖으로 내보내야 해. 가급적 멀리. 제국 밖으로.’
마리도 이 제국을 떠나길 바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마리가 계속 제국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면, 상황이 곤란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레이첼은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 내 손수건을 좀 줄래?”
“네, 레이첼 님. 여기 있습니다.”
“응, 고마워.”
레이첼이 손수건을 받아 펼치는 순간이었다. 서늘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렸다.
“내가 늦었군. 많이 기다렸느냐?”
황태자 라엘이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앉지. 시간이 많이 없으니 바로 음식을 내오너라.”
황태자는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 일렀다. 시종은 고개를 숙인 후, 곧바로 준비해 놓았던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만찬을 하기로 한 것은 아니어서, 간단한 요리 위주로 나왔다.
“국정으로 다망한 와중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레이첼이 먼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는 고개를 젓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래. 나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뭐지, 이스트반 영애?”
철가면 아래로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가 레이첼을 응시했다. 저 철가면을 마주하는 모든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레이첼은 서늘한 한기를 느꼈으나, 당당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지금부터 말할, 마리가 알려 준 방법은 저 황태자조차 크게 감탄하게 만들 방법임이 틀림없었으니까.
“교국의 무례한 요구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려 감히 이렇게 전하를 뵙고자 청했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래?”
“네, 전하.”
그런데 레이첼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방법을 떠올렸다는데, 황태자는 눈에 이채를 띠며 자신이 아닌, 뒤에 시립해 있는 마리를 바라본 것이다.
“말해봐라.”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한 후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은…….”
그녀는 마리가 자신에게 일러 준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옆에서 듣고 있던 아리엘 공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치, 외교에 식견이 깊지 않은 아리엘이지만, 지금 레이첼이 하고 있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진 이야기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아리엘로서는 상상도 못 한, 제국의 곤란을 극복하며 동시에 어마어마한 이득을 가져다줄 방법.
황태자의 눈에도 놀람이 깃들었다. 그 놀람을 보며 레이첼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분명 자신이 한 이야기에 황태자도 감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상입니다.”
그녀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장내가 고요해졌다. 레이첼이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음을 직감한 아리엘은 창백하게 얼굴이 질린 채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철가면에 가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분명 감탄하고 있겠지.’
레이첼은 속으로 그렇게 확신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황태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훌륭한 생각이다.”
레이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겸손히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
그런데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 황태자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지?”
“……!”
레이첼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물음이란 말인가?
“그야 당연히 제가…….”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가만히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은 듯 차가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긴장이 되었다.
“이스트반 영애, 그대가 생각한 거라고?”
“……네, 전하.”
레이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긴장하지 마, 레이첼. 마리가 떠올린 생각인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 사실을 떠올리자, 레이첼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그녀는 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족함이 많아 부끄럽지만 제가 떠올린 생각입니다, 전하.”
“그런가?”
황태자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뒤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리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황태자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대가 떠올린 생각이면 이것에 대한 해결책도 생각하고 있겠군. 식량 지원에 대한 주변국의 반발은 어떻게 대처할 거지?”
“……네?”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반문했다. 이게 무슨 물음이지? 대답은커녕 황태자가 묻는 질문의 요지도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 설탕과 다르게 사탕수수 종자는 이교도와 거래 금지 품목이 아니니…….”
“영애. 난 종자가 아니라, 식량을 지원하는 문제를 묻는 것이야.”
황태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인도적인 이유가 있다지만, 이교도들에게 대규모의 식량을 내주면 다른 서방 국가들이 비난할 것은 당연한 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묻는 것이다.”
레이첼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런 문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 그…….”
뒤를 돌아 마리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한편 뒤에 서 있던 마리의 얼굴도 하얗게 질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는 황태자가 이야기한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서방과 동방 교국과의 교역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원리만 알고 있으면 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답을 레이첼에게 알려 줄 수가 없으니 문제였다.
‘어떻게 하지?’
황태자의 눈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 순간이었다. 마리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황태자의 눈이 마리와 정확히 마주쳤다.
“……!”
마리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황태자의 눈동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리, 네가 떠올린 생각이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황태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뿐이 아니야. 저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황태자도 나와 똑같은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는 뜻이야.’
황태자가 다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속으로 끙끙대며 황태자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우리 제국의 힘은 강대하니, 타국의 반발 같은 것은 무시해도…….”
“무시? 이교도와 공식적으로 거래하는 국가로 낙인찍혀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는데, 무시?”
황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식견으로 어떻게 방금 말한 방법을 떠올린 것인지 모르겠군. 꿈속에서 계시라도 받은 건가?”
“……!”
레이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황태자 라엘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스트반 영애.”
“……네, 전하.”
“내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알고 있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 자리의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황궁의 암투를 겪으며 살았지. 당시 황궁의 모든 이는 가면을 쓰고 서로의 등 뒤에 칼을 꽂을 생각만 하면서 살았어. 내 어머니도, 누이도 모두 그렇게 죽었고.”
“…….”
“그런 과거를 보냈기에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황태자가 차갑게 말했다.
“날 기만하는 것이야.”
“……!”
레이첼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황태자가 무슨 뜻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황태자는 마리가 해낸 일을 레이첼 본인이 한 것처럼 속이려 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저, 저는…… 전하를 기만하려고 한 적이…….”
그녀는 떠듬떠듬 변명했으나 황태자의 얼굴은 더욱더 차가워졌다.
“그만. 더는 듣고 싶지 않군. 이번 일이 처음도 아니야. 명민한 영애이니 내가 어떤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겠지.”
“…….”
레이첼의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파리해졌다.
“더 식사할 분위기가 아니군. 그만 일어나도록.”
그렇게 식사 자리가 파했다. 아리엘은 황태자가 레이첼에게 정확히 어떤 이유로 화난 것인지 몰라 얼떨떨한 얼굴이었고, 레이첼은 충격에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들이 식당에서 나가려는 순간, 황태자가 말했다.
“마리, 너는 나를 따라오도록.”
“……!”
황태자가 마리를 데려간 곳은 사자궁의 테라스였다. 테이블 의자에 앉은 황태자는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지.”
“제,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앞에…….”
마리는 당황해 거절했으나,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 앉아. 아까 전부터 계속 서 있지 않았느냐?”
그가 거듭 권하자 마리는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 대기 중이던 다른 시녀가 차를 내왔다.
“먼저 마시지.”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마리는 감히 황태자의 앞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생각은 못 하고,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분노하시진 않은 것 같구나.’
아까 전 분위기가 워낙 싸늘해서 잔뜩 겁먹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화내실 만도 하지. 이유야 어쨌든 계속 황태자를 속이려고 한 것이니까.’
사실 레이첼이 마리의 능력을 빌리는 것은 잘못한 일이 아니었다. 밑의 사람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도 능력인 법이니까. 다만 레이첼은 마리가 해낸 일을 마치 자신이 해낸 것처럼 황태자를 속이려고 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그건 명백한 잘못이라 할 수 있었다.
“레이첼이 시킨 것이냐?”
그 말에 마리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어쨌든 그녀도 레이첼의 거짓에 일조한 셈이니까. 황태자에게 죄를 지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큰 죄를 지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죄를 지었으니,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의자에서 내려온 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며 황태자는 말했다.
“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간 네가 많은 공을 세운 것은 맞으니까. 그 공으로 이번 잘못은 없던 일로 쳐주겠다. 하지만 마리.”
“……네, 전하.”
“네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이스트반 영애를 도운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너도 곤란한 사정이 있었겠지.”
황태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만 난 너를 아끼니, 혹시나 너에게 곤란한 사정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내가 모두 해결해 주겠다.”
“……!”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딱딱한 어조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 저 피의 황태자는 자신을 아낀다.
그리고 그 마음을 느낀 순간 마리는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저렇게 자신을 아끼는데, 자신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만 하고 있었다. 물론 정체를 들켜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냥 전부 다 미안하단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정말로…….”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끝난 이야기니 그만 이야기하지.”
그는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까 레이첼 영애가 말한 의견은 네 생각이겠지?”
“……네, 전하.”
마리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는 감탄의 빛을 보였다.
“대단하군. 훌륭해. 사실 나도 고민 끝에 비슷한 결론을 내렸었다. 다만 사탕수수의 종자를 들여온다는 생각은 못 했지. 서남부 지역에서 재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과찬이십니다.”
역시 명민한 황태자답게 자신과 비슷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리는 다만 거기에 설탕을 생산한다는 생각을 추가로 한 것이고.
“아니야. 정말 훌륭한 방법이지. 설탕을 생산해 낼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할 수 있으니까. 이번 위기가 역으로 엄청난 기회가 된 셈이야.”
그런데 감탄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황태자가 돌연 이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어. 너도 알고 있겠지?”
마리는 황태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신뢰가 담겨 있어, ‘너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결국, 마리는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아까 이스트반 영애에게 물어본 다른 서방 국가들의 반발은 어떻게 무마할 거지?”
황태자의 물음은 답을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듯한 느낌이었다. 마리는 짧게 답했다.
“중개상을 이용하면 됩니다.”
그 답에 황태자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리의 생각이 자신과 일치했던 것이다.
“정확히 설명해 보겠나?”
“우리 제국이 공식적으로 이교도에게 식량을 파는 것은 곤란합니다. 거래 금지 품목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대규모 교역이니까요.”
마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삼의 중개상이 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우리 제국은 중개상에게 식량을 팔고, ‘공식적으로는’ 손을 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리 이야기해 둔 대로 교국이 그 중개상에게 수수료를 주고 식량을 다시 사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제국은 공식적으로 교국에 식량을 판 적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네 말이 정확하다. 우리 서방 국가들이 교국과 거래할 일이 있을 때 흔하게 사용하는 방법이지.”
황태자는 마리의 대답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문제가 여럿 있지. 만약 교국이 사탕수수 종자의 반출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껏 교국은 커피의 경우는 종자의 반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지만, 사탕수수 종자의 반출은 그렇게까지 엄격히 관리하지는 않아 왔으니까요.”
그러며 마리는 말했다.
“그리고 만약 거부한다면, 그때는 우리 제국도 강하게 나가면 됩니다. 어차피 지금 아쉬운 측은 교국이니까요.”
그 대답에 황태자는 다시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리의 생각이 다시금 자신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대단해. 어떻게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지?’
황태자는 속으로 감탄했다. 고작 시녀에 불과한 소녀일 뿐인데, 정말 대단한 식견이었다. 머리 빈 일부 대신들보다도 훨씬 나았다. 하지만 라엘은 감탄을 숨기며 짐짓 매섭게 물어봤다. 저 소녀의 생각이 어디까지 자신과 일치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만약 강하게 나갔다가? 그러다 저들 이교도인들이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그 물음에 대한 마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쟁을 하면 됩니다.”
“……!”
“우리 제국이 저들에게 어디까지나 양보해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만해도 충분히 양보해 준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제국을 핍박하려 든다면, 그때는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며 마리는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 제국은 약하지 않습니다. 그저 필요 없는 피해가 우려되어 전쟁을 피하려 한 것일 뿐, 실제로 싸우게 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을 듣자 황태자는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유쾌했다.
‘즐겁군. 저 소녀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뜻이 통해서일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황태자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만약 전쟁을 하게 되면 또 다른 적국인 서제국은 어떻게 할 것이지?”
어려운 물음이다.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는 충분히 하이에나처럼 등 뒤를 노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리는 그것도 거침없이 답했다.
“교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모집하는 서신을 보내면 됩니다.”
“……!”
“십자군을 모집하는 순간, 우리 제국과 교국의 싸움은 단순한 국가 간의 분쟁이 아닌, 성전(聖戰)이 됩니다. 아무리 서제국이 적국이라도 성전을 벌이는 우리의 뒤를 공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리가 말을 끝맺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나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저 피의 황태자가 웃음을?’
더군다나 유쾌한 듯한 웃음소리였다. 지금껏 지내며 황태자가 저런 웃음소리를 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웃음을 멈춘 황태자는 마리에게 말했다.
“마리. 네 말은 잘 들었다. 하나도 거를 것 없는, 모두 훌륭한 의견이었다.”
“과찬이십니다.”
“너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황태자는 진정 궁금하여 물었다. 라엘, 그도 사실 다방면의 분야에 걸친 천재였다. 검이면 검, 음악이면 음악, 그 밖의 미술, 군사 전략, 정치할 것 없이 손만 대면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오죽하면 역사에 남은 규격 외의 천재, 성인(聖人) 힐데가르트의 재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까. 어린 시절 그런 천재성 때문에 형제들에게 숱한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한 라엘이었다.
하지만 저 소녀는 그런 그조차도 뛰어넘는 것 같았다.
‘저 소녀야말로 역사적 천재 성인 힐데가르트가 다시 태어난 것 같지 않은가?’
참고로 힐데가르트는 독일 빙엔(Bingen) 지방의 성녀(聖女)로 예술, 언어학, 의학, 예언, 자연과학, 철학, 약초학, 작곡 등의 분야에 걸쳐 어마어마한 업적을 쌓은 인물이었다. 한 인물이 해낸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방면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그녀는 역사에 분명히 실존하는 인물이었다.
‘……뭐라고 하지?’
어쨌든 마리는 황태자가 경탄하여 자신을 바라보자 곤란했다. 그에게 더 주목받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눈에 안 띄려고 해봤자, 그게 도리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솔직히 대답했다.
“책에서 읽었습니다.”
“책에서?”
“네, 전하.”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클로얀 왕성에서 시녀로 일할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자유로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 당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왕성에서 유폐되어 지낼 때 할 수 있었던 것이 책을 읽는 것밖에 없어서 하루 종일 책만 읽으며 지냈었다. 덕분에 굉장한 양의 독서를 할 수 있었고, 그녀가 다른 일에는 모두 서툴렀지만, 식견만은 뛰어났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황태자는 그녀의 답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서라. 그렇군.”
다행히 보통 왕국의 왕성은 도서관을 시녀들에게도 개방했었으니, 특별히 의문점을 가지지 않은 듯했다.
“어쨌든 마리, 네 의견은 모두 잘 들었다. 훌륭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교국의 사절단에게 네가 이야기한 방법을 제안할 것이다. 그래서 만약 협상이 잘 풀리게 된다면, 그때는 너에게 상을 내리도록 하마.”
마리는 황태자가 예상치 않게 상을 내린다고 하자 살짝 당황했다.
“상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면 너는 제국에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니, 당연히 상을 내려야지. 혹시 따로 바라는 상이 있느냐?”
마리는 순간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이 부탁을 해도 될까?’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바로 전쟁 포로의 신분을 벗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자유인이 되면 원하는 대로 시녀를 그만둘 수 있다. 즉, 황궁을 떠나 정체를 들킬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여졌다. 바로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마리, 너는 나, 라엘의 것이다.”
그가 과거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저 황태자는 자신을 아낌과 동시에 소유욕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을 그냥 놓아줄까? 고민되었으나 마리는 일단 말하였다.
“……자유인의 신분이 되고 싶습니다.”
“자유인?”
“……네, 전하.”
마리는 조마조마하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의외였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시원하게 답한 것이다.
“대단할 것도 없는 부탁이군.”
“……!”
마리는 그가 진심인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황태자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자유인이라. 알겠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네 공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했다 할 수 없으니, 그 이상의 상을 내려 주지.”
마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쉽게 자유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다니? 황태자는 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알았으니, 네가 바라는 것 이상의 상을 주도록 하마.”
* * *
그렇게 마리와 황태자와의 면담이 끝났고, 황태자는 곧바로 교국인들과 교섭을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마리와 황태자가 의도했던 대로 교국인들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식량을 내주는 대신 제국은 사탕수수의 종자를 가져와 설탕을 생산하기로 결정하였다.
“대단하십니다, 전하!”
“설탕이라니! 제국에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와 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황태자의 현명한 처사를 칭송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그저 조언을 받아들였을 뿐,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 아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묘책을?”
“시녀 마리다.”
“……네?”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 그게 누구야? 시녀? 하지만 황태자는 묵묵한 어조로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 내가 아니라 그녀가 생각해 낸 묘책이다.”
그 대답에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고작 시녀가 이런 묘책을 생각해 냈다고? 원래부터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놀람은 더욱 대단했다.
“마리면 그 마리 맞지? 원래 백합궁에서 허드렛일하던?”
“맞는 것 같은데? 최근 황태자 전하가 계신 사자궁으로 옮겼잖아.”
“그런데 마리가 이런 묘책을 생각해 냈다고?”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황태자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더니…….”
다들 놀라 웅성거렸다. 원래 그녀가 유능함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마리가 생각해 낸 방법은 제국에 크게 3가지 이득을 가져다주는 방법이었다. 첫째로 교국과의 마찰을 슬기롭게 피하며, 둘째로는 설탕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고, 셋째로 늘 빈곤에 시달리던 서남부 지역을 새롭게 부흥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묘책을 일개 시녀가 생각해 냈다니. 모두가 너 나 할 것 없이 마리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화재의 주인공 마리는…….
‘……망했다. 이렇게나 소문이 나다니.’
절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설마 황태자가 대놓고 자신의 이름을 거론할 줄은 몰랐다.
‘황태자의 성격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마리는 뒤늦게 후회했다. 황태자는 상벌이 명확하며, 수하의 공을 절대 넘기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공을 세운 이를 숨기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공을 세웠다면 널리 알려, 그 이름을 명예롭게 높여 주어야 한다. 그것이 황태자의 당연한 생각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이름이 명예롭게 퍼지는 것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니라고.’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지금까지야 황궁에서 많은 일을 해왔어도, 남들의 시선을 피했기에 그녀가 대단한 일들을 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이제 곧 황궁을 떠날 수 있으니 다행이야. 상을 받아 자유인이 되면 바로 황궁을 나가자. 더는 미루면 안 되겠어.’
마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모아 둔 돈이 없어 걱정되었지만, 여러 재주가 많으니 그거야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황궁을 떠나면 이제 걱정도 끝이야. 그때까지만 조금만 더 버티자.’
마리는 의지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녀는 문득 황태자 생각이 났다.
‘그래도 날 이리저리 아껴 주긴 했는데…….’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상을 내리자마자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니.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감사의 편지라도 남겨야겠구나.’
그리고 또 다른 소중한 이. 키에르한도 떠올렸다. 이 황궁을 떠나면 언제고 그의 영지를 방문할 생각이었으니,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그 뒤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교국의 사절단과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하느라 대신들은 바쁜 시간을 보냈고, 대충 이런저런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마리는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의 부름을 받았다.
‘약속했던 상을 주려고 하는구나.’
마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전쟁 포로의 신분을 벗어 이 황궁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간절히 바라왔었는데, 생각지도 못 하게 쉽게 받게 되어 얼떨떨한 기분마저 들었다. 곧 완고한 인상의 길버트 백작이 말했다.
“시녀 마리에게 전하의 말씀을 전하겠다.”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일단 먼저 축하하마. 이번 교국 사절단의 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전하께서 너에게 상을 내리기로 하셨다.”
드디어! 마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먼저 전하께서는 널 전쟁 포로의 신분에서 사면하기로 결정했다.”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전 자유인이 된 건가요?”
자유인!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길버트 백작의 반응이 이상했다.
“응, 자유인? 아닌데?”
“……네?”
마리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전쟁 포로에서 벗어났는데 자유인이 아니라고? 길버트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냐. 너 설마 전하께 아무런 언질도 전해 듣지 못했던 것이냐?”
대단히 축하한다는 듯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알 수 없이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들어 반문했다.
“……예?”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왠지 불안했다.
“전하께서는 너를 전쟁 포로의 신분에서 사해 줌과 동시에 공로를 인정해 예작(禮爵, Honorise)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하셨다.”
마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예작위라고 하시면?”
“그래, 너도 예작위의 의미를 잘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녀는 막막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라고 했더니. 하필 예작이라니!’
예작(禮爵), 아너리스(Honorise). 공후백자남의 오등작 밑의 작위로, 엄연한 귀족의 작위였다. 물론 귀족 작위를 받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하지만 문제는 예작위의 의미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예작위는 단순히 남작 밑의 명예 작위를 의미하지만 제국에서는 전혀 달랐다.
마리는 컴컴한 눈으로 생각했다.
‘제국에서 예작위는 황제가 옆에 두고 가장 아끼는 권속에게 내리는 작위이잖아!’
이 제국에서 예작은 굉장히 독특한 작위였다. 황제나 황태자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평생을 두고 옆에 두고 싶은 총애하는 이에게 내리는 명예 작위였다. 그런 만큼 예작위를 받은 사람은 귀족임에도 황제에게 속박되었다. 황제에게 예속되는 것이다. 물론 명예로운 예속이었다. 마리의 경우엔 당연히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에게 예속되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에 라엘의 말이 떠올랐다.
“마리, 넌 나, 라엘의 것이다.”
그녀를 옭아매는 그의 목소리.
그때, 길버트가 말했다.
“전하께서 너에게 특별히 직접 성을 지어주셨다.”
“……!”
“힐데른. 앞으로 네 이름은 마리 폰 힐데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마리의 황궁 탈출 계획은 또다시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녀는 전쟁 포로의 신분에서 벗어나 귀족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황태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