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황태자는 재상 오른을 비롯해 제국 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의외의 표정으로 말했다.
“동방 교국의 사절단이 오고 있다고?”
“네, 전하. 국경을 통과했고, 곧 수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군. 그놈들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오고 있는 거지?”
반갑지 않은 손님. 황태자의 표현은 정확했다. 이교도들의 동방 교국은 그들 동제국과 수백 년에 걸친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한 대신이 빨개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이교도 놈들을 맞이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혼쭐을 내고 쫓아내 버리시지요.”
“맞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일부 대신들이 동조했다. 모두 이교도에 대한 반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교도 놈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단순하게 대처할 문제는 아니지. 특히 동방 교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 동제국의 입장에서는.”
동방 교국(敎國)! 북아프리카, 서아시아를 사실상 제패한 대제국으로 술탄이 지배하는 이교도들의 나라였다. 그들 동제국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서로의 강대한 힘을 의식해 충돌 없이 견제하며 지내고 있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용무로 오는 것인지.”
오른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어쨌든 그네들이 정식 사절단을 보낸 것은 수백 년 만에 거의 처음인 것 같군.”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다음 문제가 남았다. 동방 교국의 사절들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 원래는 이런 사신의 접대는 황후나 황태자비가 담당하는 내명부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내전 이후로 내명부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황태자가 임의대로 사신들을 대접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러기가 곤란했다.
“이교도의 사절단을 제국의 주인인 전하가 직접 대접하면 나중에 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동제국의 국교는 서방의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이다. 그런 제국의 군주인 황태자가 직접 이교도인들을 대접하면 훗날 교황청에서 말이 나올 수도 있다. 물론, 동제국은 강대한 국력으로 바티칸에 위치한 교황청의 눈치를 보지 않았지만, 굳이 논란이 생길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최고 권력자인 황태자보다는 그 아랫사람이 이교도인들을 대접해야 했다.
“그러면 그들 사절단을 누가 대접하지? 황궁에 담당할 만한 사람이 또 없지 않은가?”
“왜 없습니까? 두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오른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황태자비 후보인 아리엘 공녀, 레이첼 영애. 두 분 중 한 분이 대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두 후보분의 역량을 시험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도 합니다.”
황태자는 오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 경험이 없는 두 후보가 능숙하게 사절단을 맞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법도로 따지면 예비 황태자비인 델피나가 해야 하는 일이 맞긴 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 * *
두 후보 중 한 명이 사절단을 대접하기로 결정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뒤, 아리엘과 레이첼이 머무는 별궁은 발칵 뒤집혔다. 둘 모두 이번 일이 황태자비로서의 역량을 시험하는 중요한 일이란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번 사절단의 대접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다면, 황태자비로서의 역량을 입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중 누가 사절단의 대접을?’
‘이건 황태자 전하의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야. 절대 놓치면 안 돼.’
후보는 두 명이고, 사절단은 하나이다. 그러니 한 명한테밖에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둘은 자신이 그 기회를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리엘은 물론, 레이첼도 그나마 희미하게 중앙 정계에 남아 있는 이스트반 백작가의 끈을 통해 로비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사절단을 대접할 기회는 아리엘 공녀에게로 돌아갔다. 레이첼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정계에서 슐레안 대공가의 입김을 이길 수 없었다.
“호호. 이번에야말로 황태자비는 이 아리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겠어.”
자신이 사절단을 대접하기로 결정된 날, 아리엘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계속 레이첼에게 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이번 한 번으로 만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레이첼, 이 얄미운 년, 이번에야말로 두고 보자.’
아리엘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사절단을 대접해 그 가식적인 레이첼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아리엘이 그렇게 다짐하지 않아도 레이첼은 이미 얼굴을 찡그리고 자신의 별궁에서 초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마리? 아리엘 공녀가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안 되는데.”
레이첼의 얼굴은 차분한 평소와 다르게 불안감에 차 있었다. 그만큼 이번 일의 중요성이 컸던 것이다. 무려 대제국, 동방 교국의 사절단을 대접하는 일이다. 아리엘이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그간 레이첼이 쌓아 놓은 점수는 모조리 물거품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레이첼은 고민했으나, 사신을 대접할 권한을 받은 것은 아리엘이었다. 아리엘이 큰 실수라도 하지 않는 한 그녀로서는 나설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아리엘이 사절단의 대접에 실패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아리엘은 분명 가문의 역량을 동원해 최고의 대접을 하려고 할 테니까.
‘안 돼.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어. 어떻게 해야 하지?’
옆에서 전전긍긍하는 레이첼을 지켜보고 있는 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황태자비 간택을 떠나, 제국의 국익이 걸린 일인데. 무작정 사절단의 대접이 엉망이 되길 바라다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리는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아리엘 공녀가 동방 교국의 사절단을 잘 대접할 수 있을까?’
순간 그녀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야 어려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동방 교국과 제국의 문화 차이였다.
‘이교도의 사절단을 접대하는 일은 다른 서방 국가들의 사절단을 접대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 그저 융숭히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차이를 다 고려해야 하는데, 아리엘 공녀가 그런 일을 실수 없이 해낼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톨릭 문화인 서방과 다르게 동방 교국은 아예 문화권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설마 식사로 돼지고기를 대접하거나 하는 실수를 하지는 않겠지?’
마리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 이교도의 사절단이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제국의 사람들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구릿빛 피부의 이교도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이교도인들은 기름과 물 같은 관계였다. 절대 섞일 수 없는.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특히 과거에는 그들 동제국은 이교도들과 곧잘 피를 흘리며 싸워 왔었다. 그런 만큼 제국민들에게 동방 교국의 사절단은 낯설고 꺼림칙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불편한 눈빛으로 제국민들을 보는 것은 동방 교국의 사절단도 마찬가지였다.
‘온통 이교도들이군.’
사절단의 대표 카산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제국민을 보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내가 이교도들의 땅에.’
그는 동방의 지배자, 술탄의 친척으로 교국 내에서도 지고한 위치의 인물이었다. 원래는 이런 이교도들(그들 입장에서는 동제국이 이교도였다)의 땅에 올 이유가 없는 인물이다. 교국 내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면 결코 발걸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빨리 마무리하고 돌아가고 싶군.’
카산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오시길.”
미리 마중 나와 있던 근위 기사단이 그들을 황궁으로 안내했다. 시가지를 지나자, 드높은 건물들이 치솟은 황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절단의 대표, 카산은 황궁의 모습을 보고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이교도의 도시라 무시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웅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황궁의 입구에서는 궁내부장인 길버트 백작과 외무대신이 나와 있었다.
“본인은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이오. 우리 동제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동방어를 아는 통역이 그들의 말을 전달해 주었다. 카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방 교국의 카산이라고 하오. 술탄의 명에 따라 제국의 군주인 황태자와 긴밀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찾아왔소.”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이 그를 안내했다.
“전하께 기별하겠소.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오.”
‘의외군. 이런 대접이라니.’
카산은 따뜻하게 준비된 목욕물에 몸을 씻고 나오며 생각했다. 이곳은 이교도의 땅이다. 그런 만큼 형편없는 대접을 받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꽤 세심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모두 대접을 담당한 아리엘 공녀가 온 힘을 다해 준비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카산은 만족스럽게 최고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씻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시중을 드는 시종의 물음에 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다.”
“아리엘 공녀께서 저녁에 사절단 여러분을 환영하는 만찬회를 준비하였습니다.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카산은 그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위해 만찬회를 준비했다고?
“기꺼이 참석하지. 아리엘 공녀라고? 고맙다고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찬회에는 황태자도 참석하는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신 델피나이신 아리엘 공녀가 참석할 예정입니다.”
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가급적 황태자를 빨리 만나 보고 싶었지만, 사절단이 상대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군주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느 정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인 예였다.
“알겠네. 먼 길을 오느라 많이 피로하니 만찬회를 기대하지.”
그리고 시간이 금방 지나고 만찬회가 다가왔다. 카산을 비롯한 사절단의 인물들은 황궁에 온 귀빈을 접대하는 백합궁으로 안내받았다. 이번엔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과 외무대신과 더불어 아리엘 공녀가 그들을 맞았다.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이라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를 대신하여 교국의 사절단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카산은 지극히 아름다운 미인인 아리엘에게 속으로 감탄했다. 교국인의 시선으로 볼 때 옷차림이 지나치게 가벼웠으나, 어쨌든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미인과 함께하니 식사가 즐겁겠구려. 교국의 카산이라고 하오.”
그 뒤 만찬회는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아리엘이 그들 사절단을 대접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재료는 최고급으로만 사용했고, 가문의 힘을 빌려 따로 최고의 요리사를 수배했다. 그런 만큼 만찬회에 나오는 요리는 하나하나가 혀에 닿으면 녹을 정도로 최고의 진미였다. 그리고 또 신경 쓴 것은 돼지고기와 술을 내지 않은 것.
‘교국인들은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는다고 했지.’
아리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들 동제국과 동방 교국은 공식적 교류가 전혀 없었다. 그런 만큼 서로 이교도로 적대시만 할 뿐, 실제로 그들이 어떤 문화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당연히 일반적인 만찬회처럼 돼지를 재료로 만든 요리와 최고급 포도주를 대접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교국인들이 돼지고기와 술을 안 먹는다는 사실을 누군가 충고해 주었고, 급히 그것들을 빼게 되었다.
“술을 드시지 않는다고 하여 대신 음료를 준비하였습니다.”
“감사하오.”
그렇게 만찬회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별다른 문제 없이 마무리될 것 같았다. 아리엘은 속으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번 일로 전하께서도 나를 다시 보게 되시겠지.’
사절단을 대접하는 업무는 그간 레이첼이 두각을 드러내던 사소한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실제로 황태자비가 해야 하는 업무에 대한 역량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아리엘은 이번 일로 가증스러운 레이첼의 코를 눌러 주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만찬회의 메인인 그로스피에스입니다. 어린 송아지를 구운 스테이크 요리로, 입맛에 맞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수프, 오르되브르, 차가운 앙트레 등을 거치고 만찬회의 하이라이트인 송아지 요리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화기애애해하던 만찬회장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싸늘해졌다!
쨍그랑!
카산이 식기를 접시에 거칠게 내려놓은 것이다. 카산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지금 날 우롱하는 건가?”
아리엘과 궁내부장, 외무대신은 깜짝 놀라서 카산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이건 하람이 아닌가!”
하람(Haram). ‘허용되지 않은’이란 뜻으로, 종교적 율법상 금지된 음식을 뜻한다. 통역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리엘은 당황해 말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송아지 요리로, 돼지고기가 아니라…….”
그녀가 전해 듣기로 교국에서도 소고기는 금지된 음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겨 먹는 음식으로 들었는데? 하지만 카산은 핏물이 잔뜩 배어 나오는 레어 스테이크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나에게 다비하(Dhabihah)식으로 도축하지 않은 고기를 먹으라고?”
“아, 아니.”
아리엘은 완전히 당황했다. 다비하? 이게 무슨 말이지?
“무, 무언가 오해가…….”
하지만 카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리 교국을 어떻게 보기에, 나에게 이런 모욕을 주는 것인지 모르겠군.”
카산은 지극히 불쾌한 얼굴로 만찬회장을 벗어나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가 제국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 사절단으로 왔다지만, 이런 모욕이라니. 나와 대(大)동방 교국은 오늘의 무례를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다.”
“자, 잠깐만요!”
아리엘이 급하게 불렀으나, 카산은 듣지 않고 거칠게 만찬회장을 빠져나갔다.
“이, 이게 무슨?”
아리엘과 길버트 백작, 외무대신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이교도인이 무엇에 불쾌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날의 만찬회는 엉망으로 막을 내렸고, 카산을 비롯한 교국의 사절단은 황태자에게 그날의 일을 정식으로 항의했다.
* * *
“교국의 사절단이 만찬회장을 박차고 나갔다고?”
“네, 율법을 어긴 음식을 내왔다고 강력히 항의한 후 율법에 맞는 할랄 음식을 내오지 않을 경우, 입도 대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황태자는 재상 오른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초청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사절단으로 왔으면서 굉장히 까다롭게 구는군.”
재상 오른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교도들에게 종교적 율법은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하니,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지? 돼지고기와 술을 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부패한 고기를 낸 것도 아니고.”
황태자도 이교도의 율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고자 사전에 아리엘 공녀가 준비한 음식 명단을 검토했는데, 돼지고기나 술, 그 밖에 종교적으로 금지된 음식은 없었다.
“송아지가 다비하(Dhabihah) 식으로 도축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고 하더군요.”
“다비하?”
“네, 이교도들의 도축 방식으로, 이번에 따로 조사를 해보니…….”
오른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설명하였다. 황태자 라엘은 오른이 설명을 끝내자 눈썹을 찌푸렸다.
“가축의 머리를 성지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게 한 후, 목의 식도와 기도, 정맥, 동맥을 한 번에 잘라 내서 피를 전부 빼내야 한다고?”
“네, 이교도들은 그렇게 도축하지 않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동방 교국과 제국의 공식적 교류가 끊긴 지 수백 년이다. 그런 만큼 서로의 세세한 문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자가 드물었다. 황태자도 다양한 분야에서 굉장히 박식했지만, 저런 방식으로 도축해야 한다는 것은 몰랐다.
“돼지고기, 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네발짐승, 송곳니가 날카로운 육식동물 같은 것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굉장히 어렵군.”
“네,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 교국 사절단의 반응은 어떻지?”
“강력히 항의 후 단식을 선언했습니다. 단단히 화가 나서 율법에 맞춘 제대로 된 음식을 내오기 전에는 전하를 만나러 온 용무를 꺼내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오른이 황태자의 뜻을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우리가 이교도의 율법에 온전히 맞추어 대접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네들의 율법이지, 우리의 율법이 아니니까요.”
황태자도 동의했다.
“그렇지. 그들이 피하고 싶은 음식을 빼줄 수는 있어도, 그네들의 율법에 맞춘 도축까지 해달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단순한 고집은 아니었다. 이건 국가 대 국가의 위신의 문제였다. 그들 동제국이 동방 교국의 속국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굽히면 분명 훗날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교황청은 무조건 문제를 삼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다는 것인데.’
황태자는 속으로 고민했다. 솔직히 놈들의 요구고 뭐고 그냥 쫓아내 버리면 간단하기야 하겠지만,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교국 놈들이 수백 년 동안 보내지 않은 공식 사절단을 보낸 것은 분명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다. 그 용무를 들어 보지도 않고,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쫓아내서는 곤란해.’
물론 교국이 두려워서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교국이 동방을 제패한 패자라 해도, 제국의 힘도 그에 못지않았으니까. 문제는 제국에 도움이 될지도, 아니면 피해가 올지도 모르는 이야기일 텐데 들어 보지도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곤란하군. 그네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고, 무시하고 쫓아낼 수도 없고.’
황태자는 손가락으로 가만히 철가면을 두드렸다. 고민이 있을 때의 그의 버릇이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사절단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풀 방법이 필요했다. 어떤 방법이어야 할까? 그런데 순간 고민에 잠긴 그의 머릿속에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시녀 마리.
지금까지 언제나 상상도 못 할 능력을 보여 주어 왔던 작은 소녀. 그녀라면 이 난관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을까?
‘아니야. 아무리 마리라도 알고 있을 리가 없겠지.’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마리가 다재다능하다고 해도 지금껏 그녀가 보여준 능력과 이번 일은 종류가 달랐다. 깊은 지식과 넓은 정치적 식견이 있어야 해결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이번 일은 내가 담당해야겠군. 이스트반 영애가 맡을 만한 일이 아니야.’
원래는 아리엘 영애가 접대에 실패했으니, 다른 황태자비 후보인 레이첼 영애가 사절단을 대접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레이첼의 능력을 냉정히 파악하고 있었다. 레이첼에게 이런 곤란한 상황을 해결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일단 동방 교국의 사정에 밝은 상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군. 그네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풀 만한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그렇게 결론을 내린 황태자가 오른에게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호위 기사 알몬드 자작이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레이첼 영애가 방문하였습니다.”
“이스트반 영애가? 지금은 국정으로 바쁘니 따로 연락을 준다고 전하여라.”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알몬드가 의외의 말을 전하였다.
“그게…… 이번 동방 교국의 사절단의 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그러며 알몬드는 놀라운 말을 하였다.
“레이첼 영애께서 자신에게 사절단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
곧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스트반 가문의 레이첼이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너에게 이번 사절단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다고?”
레이첼은 공손한,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부족한 지혜이나 아리엘 공녀 저하로 생긴 문제에 대해 전하께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은근슬쩍 아리엘 공녀를 폄훼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문제의 요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가?”
“네, 사절단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화를 달래는 것이 요점이라 생각됩니다.”
레이첼은 설명을 이었다.
“종교적 율법에 민감한 교국인들의 특성상 모욕을 느꼈다 생각하면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교국으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이 어떤 용건으로 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그들이 돌아가면 제국의 입장에서도 기쁜 일은 아니라 판단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영애.”
오른은 옆에서 감탄하며 말했다. 레이첼 영애가 문제의 맥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레이첼은 철가면 아래로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살짝 웃음을 지었다. 황태자의 눈빛은 늘 차가워 마주하기 어려웠으나, 오늘만큼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녀에겐 정말로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이런 지식을.’
레이첼은 자신에게 방법을 알려 준 이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황태자 전하가 방법을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십시오.”
작은 체구, 자신과 다르게 천하디천한 신분. 하지만 알면 알수록 놀라운 소녀. 그녀에게 방법을 알려 준 이는 놀랍게도 시녀 마리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알고 있는지 감탄만 나오지만…….’
“간단합니다. 그 방법은…….”
마리가 일러 준 내용을 떠올리며 레이첼은 마리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사절단이 만족할 음식을 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도축된 요리를 제외한 만찬을 준비하면 됩니다.”
“……!”
레이첼은 놀란 그들의 표정을 보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즉, 일체의 육류를 제외하고 음식을 준비하면 됩니다.”
* * *
레이첼은 방금 자신의 별궁에서 마리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레이첼은 아리엘 공녀가 접대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교국의 사절단을 대접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적 율법 문제가 그렇게나 까다롭다니. 괜히 잘못 나섰다가는 오히려 망신만 당할 수도 있어.’
전해 듣기로는 아리엘 공녀가 바보 같은 실책을 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문화적 차이가 컸을 뿐. 아마 그 자리에 레이첼이 있었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차라리 나 대신 아리엘 공녀가 대접해서 다행인 것일지도. 만약 내가 나섰으면 망신당한 것은 아리엘 공녀가 아닌 나였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첼은 이번 일은 한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잘 해결만 한다면 어마어마한 점수를 따겠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동방 교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사실 레이첼에게는 반드시 황태자비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문의 부흥이란 표면적인 목표와는 다른 ‘진정한 이유’.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간택에서 선택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은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그녀는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마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첼 영애.”
“응? 왜, 마리?”
“혹시 이번 사절단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야 하고는 싶지만, 나는 교국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그렇게 이야기하던 레이첼은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너…… 혹시?”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레이첼은 깜짝 놀라 마리를 바라보았다.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동방 교국의 문화에도 능통하다고?
“뭔데? 말해줘.”
“간단합니다. 그 방법은…….”
마리는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레이첼의 얼굴이 시시각각 놀람으로 물들어 갔다.
* * *
레이첼이 제시한 의견에 오른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육류를 제외하고 만찬회를 준비하자고? 그러면 야채로만 된 정찬을 준비한단 거요? 그건 타국 사절단을 맞는 제대로 된 대접이라고 할 수 없소.”
그는 소비엔 공작가의 공작이니만큼 원래 일개 영애인 레이첼에게 하대를 해야 했지만, 현재 그녀가 황태자비 후보인 점을 고려하여 반공대를 하였다. 어쨌든 타당한 지적이었다. 레이첼도 마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같은 의문을 떠올렸으니까. 하지만 레이첼은 마리가 알려 준 내용을 다시금 떠올리며 말했다.
“야채로만 이루어진 정찬은 아닙니다. 이교도의 종교적 율법은 야채, 과일, 곡류뿐 아니라 어류, 즉, 생선 요리도 허용하고 있으니까요.”
“생선 요리를 허용한다는 것은 확실한 이야기이오, 영애? 또 실수가 있으면 안 됩니다.”
오른의 걱정에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외로 그들은 육류와 다르게 바다에서 난 물고기에 대해서는 대부분 허용한다고 합니다. 물론 학파에 따라 조금씩 의견이 달라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데,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전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그녀의 구체적인 말에 오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추가적으로 확인해 봐야겠지만, 근거 없이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나도 이교도의 풍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는데 이렇게나 소상히 알고 있다니 대단합니다, 영애.”
“과찬이십니다. 그저 책을 읽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이첼은 오른의 칭찬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겸손이 섞인 말이었지만, 오른은 더욱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이교도의 풍습을 기술한 책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독서량으로는 이런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한편 레이첼은 오른의 감탄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역시 감탄하는구나. 사실 난 책 같은 것은 거의 안 읽는데.’
그녀는 책에서 이런 지식을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마리의 덕이었다. 물론 레이첼은 그러한 사실을 입 밖에 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황태자비 후보인 자신의 공이 되어야 했으니까.
‘내가 잘되는 것이 마리가 잘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첼은 말을 이었다.
“수프, 오르되브르, 앙트레 등은 고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야채, 곡류만으로도 훌륭한 음식을 만들 수 있지요. 문제는 정찬의 메인인 그로스피에스인데, 육류 요리 대신 생선을 내면 그것도 해결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재상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해결책으로 보였다. 과연 그렇게 대접하면 큰 문제 없으리라.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서 물었다.
“채소와 생선으로만 음식을 하면 너무 구성이 단조롭지는 않겠소?”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레이첼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질문도 마리가 답을 미리 해주었다. 지금껏 마리가 해준 이야기 중 가장 압권인 답변이었다.
“그건 그들이 감수할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감수할 문제라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레이첼은 최대한 강건한 느낌이 드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우리 제국이 저들 사절단에게 그렇게까지 큰 환대를 해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
레이첼은 마리가 일러 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최근 큰 충돌은 없었으나 동방 교국은 우리의 엄연한 적국.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속국도 아니고,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거한 환대를 해줄 필요는 없지요. 그러니 이 정도 대접이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명쾌한 대답이었다. 그들 제국이 동방 제국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 정도 배려만으로도 충분한 예의를 차렸다고 할 수 있었다.
“훌륭하오, 영애.”
“아닙니다. 제 부족한 이야기가 괜히 두 분의 귀를 어지럽히지 않았는지 걱정스럽습니다.”
“어지럽히기는…… 이스트반 영애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오른은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레이첼의 말을 듣던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으로 보이는군.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레이첼은 황태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의견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첼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삼켰다. 드디어 황태자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면 남은 일정 동안 사절단을 대하는 일은 그대에게 맡기지. 혹시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바로 고하도록.”
“네,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이첼은 기쁜 웃음을 삼키며 집무실에서 물러나려는데, 황태자가 그녀를 불렀다.
“아, 한 가지만 묻지.”
그 순간 황태자의 눈동자가 다시금 그녀에게로 향했다. 레이첼은 그 눈동자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전 몇 번이나 마주한 적 있는, 마음을 꿰뚫는 듯한 깊은 눈동자였다. 저 눈동자만 마주하면 속마음 깊은 곳이 파헤쳐지는 듯해 레이첼은 몹시 긴장되었다.
“방금 말한 것들을 책에서 읽었다고 했느냐?”
“네, 전하.”
“그 책의 제목이 무엇이지?”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레이첼은 책을 읽지 않았다. 책을 읽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시녀 마리였다.
“마리, 너는 어떻게 이런 내용들을 알고 있는 거야?”
레이첼이 물었을 때, 마리는 놀랍게도 이렇게 답했다.
“책에서 읽었습니다.”
“책에서?”
“네, 예전 클로얀 왕성에서 시녀로 있을 때 도서관의 책을 자유롭게 접할 기회가 있어서, 그때 읽었습니다.”
그러며 마리는 왜인지 모르지만 무언가 씁쓸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왕성에서 지내며 책을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어쨌든 자신은 안 읽었지만, 마리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레이첼은 마리가 읽은 책의 제목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이런 질문을 받을 때를 대비해서 확인했던 것이다.
“도레인 남작의 <이교도 생활기>란 저서에서 봤습니다.”
다행히 황태자는 지난번과 다르게 재차 묻지 않았다.
“알았다. 앞으로 수고해 주도록.”
“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녀가 물러간 후, 재상 오른이 황태자에게 말했다.
“정말 현명하지 않습니까? 황태자비 후보인 델피나께서 저리 명민하시니 제국의 흥복입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할 뿐, 오른의 말에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오른이 그런 그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황태자가 물었다.
“오른.”
“네, 전하.”
“이교도 생활기를 쓴 도레인 남작이 누구인지 아나?”
“네, 압니다. 십 년 전, 지중해에서 이교도 해적에게 납치당했다가 풀려난 클로얀 왕국의 귀족 아닙니까? 책을 따로 썼는지는 몰랐군요. 아마 그때 수년간의 포로 생활을 바탕으로 저술한 모양입니다.”
“그렇지. 자네의 말이 맞아.”
“그런데 그건 왜?”
“아니네. 자네도 이만 돌아가서 일을 보도록.”
오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황태자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오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홀로 남은 황태자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도레인 남작은 클로얀 왕국의 귀족이지. 우리 제국의 귀족이 아니라.”
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우리 제국에는 출간된 적이 없어. 클로얀 왕국에서만 출간됐지.”
그걸 황태자가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클로얀 왕성을 점령한 후 중요한 책들을 제국의 황궁으로 가져오려 도서관을 살피던 중 우연히 봤던 책이기 때문이다. <이교도 생활기>라는 워낙 특이한 제목이라 눈에 똑똑히 박혔었다. 당시에는 그리 관심이 있는 내용이 아니어서 그냥 놔두고 왔었는데, 황궁에 돌아온 후 그 책을 구해 읽어 보려다 제국에는 없는 책이란 것을 알고 관둔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첼이 클로얀 왕국에만 출간된 책을 읽어 봤다는 뜻은 무엇일까. 그녀가 타국에만 출간된 책까지 찾아 읽을 정도로 독서에 관심이 많다는 뜻일까.
“그렇다기보다는…… 이것도 마리가 생각해 낸 것이겠지.”
황태자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리. 끝없이 그에게 와서 박히는 이름이었다. 믿을 수 없게 이번 일도 또 그녀가 해결책을 마련한 것이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그 소녀의 능력의 끝은 어디일까?
‘물론 마리, 네가 아니라 레이첼이 해낸 일처럼 꾸미려 하고 있지만…….’
황태자의 눈에는 모두 빤히 보였다. 마리가 해낸 일을 매번 레이첼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따라서 레이첼이 공을 세우려 하면 할수록 간택 기간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이는, 아리엘도 레이첼도 아닌 시녀 마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간택 기간 중 두 영애가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자꾸 너만 내 눈에 박히는 것이냐.’
* * *
그렇게 레이첼은 마리의 도움을 받아 교국의 사절단을 대접하였다. 오른이 지적했던 것처럼 레이첼이 준비한 만찬회는 화려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았다. 육류를 모조리 배제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교국의 율법을 비추어 봐도 흠잡을 것은 전혀 없었다.
“크흠.”
카산은 헛기침을 하며 음식을 먹었다. 썩 마음에 드는 대접은 아니었지만,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카산을 비롯한 사절단은 아무런 군소리 못 하고 식사를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궁내부장과 외무대신을 비롯한 사람들은 레이첼의 지혜를 칭찬했다.
“대단합니다. 그놈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서도, 군소리 못 하게 하다니.”
“굉장히 지혜로운 처사였습니다.”
“암요. 우리 제국이 교국 놈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레이첼 영애가 참 잘 처신하였습니다.”
당연히 레이첼의 위상이 높아졌다. 아리엘 공녀는 조금 더 초조해졌고.
한편, 아무도 모르는 이번 일의 일등 공신 마리는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사절단의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야. 황태자도 레이첼 영애를 좋게 보셨겠지.’
최근 레이첼의 행보는 굉장히 순탄했다. 연일 실수만 거듭하는 아리엘과 다르게 늘 좋은 모습만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뒷면에는 모두 마리의 도움이 있었다. 만약 레이첼이 황태자비가 된다면 그녀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레이첼 영애가 정말로 황태자비가 되면 난 자유인의 신분을 얻고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 하지만 정작 마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레이첼 영애는 분명 잘하고 있는데…… 왜 황태자는 요지부동이지?’
그게 문제였다. 레이첼은 아리엘에 비해 분명 현명히 잘하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황태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늘 무심한 눈빛을 보일 뿐이었다.
‘레이첼 영애가 취향이 아니신가?’
그렇다고 아리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똑같았다.
‘어떻게 하지? 황궁을 벗어나려면 레이첼 영애가 황태자비로 간택되어야 하는데. 이대로는 간택받는다는 보장이 없어. 불안해.’
마리는 어떻게 하면 레이첼과 황태자 간의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까마득하게 잊게 하는 중대한 일이 황궁에서 일어났다. 동방 교국의 사절단이 드디어 황태자 라엘을 알현한 것이다. 사절단의 대표, 카산은 황태자에게 생각지도 못 한, 청천벽력 같은 용건을 꺼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