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시끌벅적했던 간택 연회가 끝나고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간택 연회 이후 두 후보 아리엘과 레이첼의 관계는 갈수록 냉랭해졌다. 황궁에서 우연히 마주칠 경우 냉랭한 기운에 등골이 시릴 정도였다.
특히 아리엘이 노골적으로 레이첼을 핍박하려 들었는데, 레이첼도 만만치 않았다. 고분고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던지는데, 늘 비수를 꽂는 반격이어서 아리엘은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화를 내고 떠나기 일쑤였다.
‘정말 보통이 아니시구나.’
마리는 차분한 태도로 차를 마시고 있는 레이첼을 보며 고개를 내둘렀다. 저 인형같이 예쁜 절세의 미소녀는 다소곳한 얼굴로 속을 긁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었다. 당하는 아리엘 공녀는 얼마나 화가 날까. 조금 불쌍할 정도였다.
‘괜찮을까? 이번에는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닌 것 같던데.’
마리는 걱정이 되었다. 방금 아리엘은 가문의 역사 문제로 다투다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찼는데,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겠지?’
마리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아리엘이 또 레이첼을 향해 수작을 걸어 온 것이다. 황태자와의 중요한 공식 행사, ‘파티시에와의 만남’에서였다.
* * *
“뭐라고요? 약속했던 파티시에가 못 오게 되었다고요?”
“네, 영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레이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면 제가 직접 황태자 전하께 과자를 구워 줘야 한다고요?”
파티시에와의 만남. 이것은 간택 일정 중 하나로 후보들이 황태자에게 직접 과자를 만들어 대접하는 행사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과자를 어떻게 구워?’
하지만 이 전통에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대귀족가의 영애들이 과자를 구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몰래몰래 유명 파티시에를 들여와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작금에 와서는 직접 과자를 만들어 대접하는 후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누가 최고의 파티시에를 초청해 오는가를 겨루는 행사로 변질한 상태.
“안 돼. 나는 과자는커녕 밀가루도 만져 본 적이 없는데.”
레이첼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도 당연히 제도의 가장 유명한 파티시에를 섭외해 놨었는데,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어째서? 도대체 무슨 급한 볼일이라는 거죠?”
“그…… 슐레안 대공가에 가서 급하게 요리할 일이 생겼다고.”
“……!”
레이첼과 마리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번에도 아리엘 공녀의 수작인 것이다. 이번엔 간택 연회 때와 다르게 아예 대놓고 방해하고 있었다.
‘또 이런 치졸한 수작을.’
마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예상대로여서 한숨이 나왔다.
“다른 파티시에를 섭외할 수는 없을까?”
“그게……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전하와의 약속이 당장 오늘 오후 2시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레이첼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리엘 공녀는 분명 최고의 파티시에를 고용해 전하를 대접할 텐데, 너무 비교당하게 돼. 성의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 그건 절대 안 돼.’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행사일 수도 있지만, 고작 이런 걸로 황태자에게 점수를 잃을 수는 없었다.
“너희는? 너희 중에는 과자를 잘 굽는 사람 없어?”
레이첼은 남부에서 데려온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시녀들도 난색을 보였다. 그녀들도 모두 남부 귀족가의 자제들인지라 과자 같은 것을 직접 만들어 봤을 리가 없었다. 레이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비밀 병기, 마리를 돌아보았다.
“마리, 너는?”
마리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하지만, 과자를 구울 줄은 압니다.”
그 말에 레이첼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행이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넌 정말 날 위해 내려온 천사야!”
레이첼은 마리가 탄신 축제 때 놀라운 요리 실력을 발휘해 타국의 대신들을 대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 보인 실력은 황궁 주방장 못지않았다. 그런 만큼 과자 굽는 솜씨도 수준급일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얼마 없으니 바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 * *
일정에 맞춰 황태자 라엘은 레이첼의 별궁에 방문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곳까지 힘든 발걸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까 초조해하던 것과 다르게 레이첼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마리가 구워준 과자의 맛을 본 덕이었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과자 굽는 솜씨까지.’
마리가 구운 과자는 정말로 굉장히 맛있었다. 설마 이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할지는 몰랐기 때문에 레이첼은 깜짝 놀랐다.
‘혹시 마리가 황궁의 천사인 것은 아닐까?’
축제 전부터 은밀히 황궁에 떠돌던 이야기. 황궁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있어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곤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천사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레이첼은 그 천사가 마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지난번 간택 연회도 마리 덕분에 위기를 대성공으로 바꾸었는데, 이번에도 그녀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습니다. 정원에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었더군요.”
“그렇군.”
“정무에 늘 바쁘신 것 같은데, 잠시 단풍을 보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과자를 먹기에 앞서,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황태자가 의외의 말을 꺼내었다.
“마리는 어디에 갔는가?”
레이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마리를 찾지? 물론 그녀가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능력으로 황태자의 불면을 치료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황태자가 그런 그녀를 나름대로 총애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그래 봤자 전쟁 포로, 천민일 뿐인데 이렇게 따로 찾다니?
“잠시 심부름을 내보냈습니다.”
사실 심부름이 아니라, 마리가 과자를 구운 것을 들킬까 봐 잠시 내보냈다. 물론 마리가 과자를 구운 것은 레이첼과 그녀의 시녀들만 아는 사실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이다.
“……그렇군.”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하고,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부족하지만 과자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황태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레이첼의 시녀들이 마리가 준비해 놓은 과자를 내왔다. 아무런 감흥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엘은 천을 벗긴 바구니를 보고 살짝 놀란 눈을 했다.
“이건?”
“버터에 구운 브르고뉴 쿠키와 계란 흰자를 이용한 비지탕딘, 그리고 다쿠아즈와 타르트입니다.”
레이첼은 과자의 구성이 단순해 황태자가 놀란 것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마리가 만들어 놓은 과자는 굉장히 간단했다. 전문 파티시에라면 결단코 내지 않았을.
‘아리엘 공녀는 분명 생크림과 여러 재료를 잔뜩 사용한 최고급 과자를 내왔겠지.’
레이첼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봐도 전문 파티시에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그런 과자보다는 이런 과자가 훨씬 나아. 이런 과자 정도는 취미 삼아 만드는 귀부인도 많으니까. 황태자 전하도 내가 만든 것으로 믿을 거야.’
무엇보다 이 과자들은 맛있었다. 레이첼이 맛봐도 깜짝 놀랄 만큼.
“제가 솜씨가 미욱해 화려한 과자를 준비하지는 못 했습니다. 부족하지만, 부디 전하의 입맛에 맞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레이첼이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황태자가 놀란 것은 과자의 구성이 생각보다 단순해서가 아니란 것을.
‘이 과자들은…… 오랜만이군.’
저 과자들은 그의 추억에 들어 있는 과자들이다. 억울하게 독살당했던 그의 누이, 7황녀가 종종 만들어주던 과자이자, 7황녀가 죽은 백조 정원에서 우연히 만난 마리가 그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해주었던 과자가 저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자를 마리에게 선물 받은 것도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이군. 그 뒤로도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왠지 추억에 잠겨 황태자는 생각했다.
‘그러면 저 과자는 마리가 조언을 준 것인가? 아니면 아예 마리가 한 것인가?’
누가 한 것인지는 먹어 보면 구분할 수 있으리라. 그때 마리가 해준 과자의 맛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인상이 강했으니까.
“전하, 조금 드셔 보시지요.”
“그래.”
황태자는 손가락으로 브르고뉴 쿠기를 들어 조금 깨서 물었다. 곧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느낌. 그리고 그 맛을 느낀 순간 황태자는 이 과자를 요리한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훌륭하군.”
진심이 섞인 그 찬사에 레이첼은 크게 기뻐했다. 그 뒤로도 황태자는 하나하나 종류별로 과자를 먹어 보았고,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칭찬을 해주었다. 물론 저 요리의 주인공은 마리이지만, 레이첼은 마치 정말로 자신이 한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 직접 과자를 굽느라 많이 걱정했었는데, 기뻐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과자에 손가락을 가져가던 황태자가 멈칫했다.
“……그대가 직접 구운 거라고?”
“……?”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족하지만 제 손으로 전하께 드릴 과자를 만들고 싶어 직접 과자를 구웠습니다.”
“그래?”
재차 묻는 황태자에게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묻는 거지? 더구나 갑자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신다.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하지만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마리가 구웠다는 것을 아는 이는 자신밖에 없다. 만약을 대비해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 과자를 다 굽자마자 밖으로 내보냈고.
“네, 전하. 제가 직접 구웠습니다.”
“…….”
황태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점점 더 그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레이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 착각인가? 기분이 나쁘실 이유가 없는데.’
그가 왜 저러는 것인지 몰라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이 과자, 정말 그대가 한 것이 맞는가?”
한편 그때, 마리는 황궁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게 자유 시간이 생겨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좋네. 이렇게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녀는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질이는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황궁에서 오랫동안 있었지만, 이렇게 대낮에 자유 시간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레이첼 영애는 잘하고 있으려나.’
뭐, 여린 외모와 다르게 사교술은 엄청나게 능숙하니 알아서 잘하고 있을 것이다. 마리는 뜻하지 않게 주어진 자유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로 다짐했다.
‘저녁까지 돌아가야 하니, 황궁 안이나 산책하자.’
사실 시내로 나가고 싶었지만 마차를 이용할 수도 없고, 혼자 걸어 나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황궁도 단풍이 물들어 여기저기 예쁜 곳이 많으니 그거나 구경하자고 마음먹었다.
‘좋구나. 이렇게 여유가 있으니.’
마리는 정원을 산책하며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이 능력은 어떻게 된 것일까? 계속해서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여유가 생겨서일까? 마리는 그간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능력에 대해 고민했다.
‘이 능력은 분명 그때 죄수의 기도로 인해 생긴 거야. 확실해.’
그녀는 과거 죽어 가는 죄수를 간병하고 축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 이 신비한 능력이 생겨났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그녀는 당시 자신이 바랐던 바를 떠올렸다.
“미술도 잘했으면 좋겠고, 음악도 잘했으면 좋겠고, 공예도 잘했으면 좋겠고, 요리도 잘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기사님처럼 검도 잘 다루었으면 좋겠고, 춤도 잘 췄으면 좋겠고, 카드 게임도 잘했으면 좋겠어요. 아, 의사 선생님처럼 사람을 고치는 의술도 있었으면 좋겠고, 나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능력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정말 많이 바라긴 했었다. 정말 그때 바랐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걸까?
‘아니야. 그건 아닐 것 같아.’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당시 죄수와 했던 대화 때문이었다.
“너에게 정말 그런 능력들이 생긴다면 너는 그 능력들로 무엇을 할 생각이니?”
죄수의 물음에 마리는 이렇게 답했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죄수는 그녀의 소원을 그대로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능력이 내려진 것들을 보면 그때 내가 바랐던 것처럼, 남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만 능력이 생겨났어.’
처음 조각사의 일부터 음악, 과자, 요리, 응급처치, 마술 등등. 그 능력은 모두 남을 도와주는 일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녀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어진 능력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거리 축제 때 강도들에게 살해당할 뻔했을 때도 아무런 능력도 주어지지 않았어.’
그녀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면 능력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능력들로 더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서일까?’
이게 조금 모호했다. 모든 능력이 계속 지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 요리 같은 것은 지금도 꿈을 꾼 다음 날처럼 능숙한데, 그렇지 않은 능력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청소 능력이야. 중급 시녀로 승급해 청소할 일이 없어진 다음부터 이전처럼 마스터급으로 하지는 못 하게 됐어.’
물론 과거의 구제불능의 못난이 때처럼 못하진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청소 실력은 꼼꼼하고 뛰어난 편에 속했다. 하지만 꿈을 꾸고 난 직후의 하녀 마스터급의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면 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시간이 많아서일까. 그녀는 지금껏 하지 못했던 고민을 하였다.
‘일단 이 황궁에서는 나갈 거야. 황태자의 곁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물론 마리는 이제 그를 이전처럼 싫어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그는 존경받을 만한 군주였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는 그를 떠나야 했다. 계속 그의 곁에 있다가는 언젠가는 정체를 들킬 것이고, 그는 제국과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을 벨 것이다.
‘아무리 나를 아껴도 그렇게 하겠지. 본인의 감정보다 군주로서의 의무를 훨씬 중시하시는 분이니까.’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난 이 황궁을 떠나야 해. 하지만 이 황궁을 떠난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가장 쉬운 길은 인적 드문 곳으로 가서 은거하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이 제국과 먼 곳이면 좋겠지.
‘하지만 그게 맞는 걸까? 이런 능력을 가지고?’
마리는 분명 자신에게 능력이 주어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그녀에게 내려진 소명(召命)이리라.
‘정확히 내 소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난 남들에게 행복을 주는 삶을 살고 싶어.’
신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가능하다면 남들에게 행복을 주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의미 있는 삶을 살다 죽고 싶었다. 그간 정신없는 삶에 부닥쳐 잊고 있었던 소망.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곳을 좀 더 둘러보려고 하려던 찰나, 그녀는 의외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리 양? 이곳에는 웬일로?”
생각지도 못 한 목소리에 어두웠던 마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은발의 조각 같은 미남, 키에르한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후작 각하!”
마리는 반갑게 그를 불렀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키엘.”
“네?”
“둘이 있을 때는 키엘이라고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린 친구니까.”
그 말에 마리는 당황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신이 그를 이름으로 부르나. 키에르한은 옅게 웃음을 지으며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마리 양.”
너무나 부드러운 그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하. 저도 보고 싶었어요.”
뜻밖의 재회 후 둘은 정원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마리는 반가운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셨나요, 각하? 특별한 일은 없으셨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잘 지낸 것 같지는 않군요.”
“네?”
그가 잘 지내지 못했다는 말에 마리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어째서?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그건 아닙니다.”
키에르한은 마리를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마리 양이 보고 싶었거든요.”
“……!”
마리의 얼굴이 순간 사과처럼 빨개졌다. 그냥 친구로서 하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그의 미소가 너무 부드러운 탓일까.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그……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네?”
“여기가 제가 근무하는 곳이거든요.”
“아.”
마리는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여기 자운궁이잖아. 나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자운궁(紫雲宮)! 현 황제인 토른 2세의 궁이었다.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덧 이곳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러면 각하께서는?”
“네, 여기서 폐하를 경호하는 것이 친위대의 임무이니까요. 뭐, 사실 저는 대외 업무를 주로 보고, 대부분의 경호는 제가 아니라 부단장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말에 마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워낙 부드럽고 친절해 종종 까먹지만, 그는 최강 기사단인 황실친위대의 단장이자 제국의 북방을 수호하는 변경백이었다. 또한 황실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최강의 군벌(軍閥).
‘그리고 의식불명인 현 황제 토른 2세를 아직까지도 모시며 황태자 라엘에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유일한 대귀족이기도 하지.’
키에르한의 세이튼 가문은 대대로 변경백과 친위대의 단장을 역임하는 황실의 수호 가문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황제만을 섬기며, 황제의 정통성을 물려받은 계승자만을 제국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키엘 님의 세이튼 가문은 황제가 쓰러진 후 발생한 황자들 간의 내전 때도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켰어. 현 황제가 살아 있는 한 황자들 모두 황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특히 황태자 라엘의 경우, 그들 세이튼 가문의 입장에서는 찬탈자나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적합한 계승자인 1황자를 살해하고, 다른 황자들도 모조리 도륙한 뒤 위법으로 황태자의 지위를 차지해 버렸으니까.
‘키엘 님의 세이튼 가문이 황태자를 인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황태자도 언제까지 세이튼 가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즉…… 둘은 언젠가는 충돌해야만 하는 관계.’
그러한 사실을 떠올린 마리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신이 간섭할 수준의 문제는 아니지만, 저 친절한 키엘과 황태자가 언젠가는 서로의 목숨을 노릴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 한숨을 들은 키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한숨을? 혹시 힘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마리는 급히 고개를 저었으나, 키에르한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레이첼 영애의 시중을 든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녀가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리엘 공녀? 그것도 아니면 혹시 황태자 전하가?”
“아, 아니에요.”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정말로 가서 대신 화내 주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라 그녀는 급히 말했다.
“다들 잘해 주세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로요.”
마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리 양,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네?”
“만약 힘든 일이 있거나, 누군가 곤란하게 하면 꼭 저에게 이야기해 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해 주십시오.”
그 말에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자신이 저 후작 각하께 고자질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네, 약속할게요.”
“꼭입니다.”
“네, 꼭이요.”
그의 당부에 그녀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시 안 들어가 보셔도 괜찮으세요? 근무 중이신데.”
그 말에 키에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괜찮습니다.”
“……정말요?”
방금 분명 멈칫했다! 마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땡땡이치는 것 같은 기색인데? 키에르한은 변명하듯 말했다.
“어차피 단장직은 실무직이 아니라 명예직에 가까워서 대부분의 일은 부단장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 정말입니다.”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땡땡이가 분명했다! 완전 근면 성실의 대명사일 것처럼 생기셔서 땡땡이라니!
‘각하께도 이런 면이 있구나.’
마리는 신기한 마음이 들어 쿡쿡 웃었다.
“……진짜인데. 정말로 부단장이 저 대신 철통같은 경호를…….”
“네에, 네에.”
마리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좋아요. 이렇게 각하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일까. 마리의 말을 들은 키엘은 순간 멈칫했다. 그는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네?”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던 마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키에르한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너무나도 부드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저도 마리 양과 같이 있어서 좋습니다.”
두근두근!
또 알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려 마리는 고개를 돌렸다.
“……네, 네.”
그 뒤 잠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마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빨개진 얼굴을 속으로 휙휙 내저었다.
‘진정해. 진정해.’
몇 번이고 생각하지만, 저 키에르한의 얼굴은 정말 심장에 안 좋은 얼굴이었다.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키에르한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봐서 정말 기쁘긴 한데,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습니다.”
“네? 제가요?”
마리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저 천사 같은 남자의 마음에 안 들게 한 것이 있다고?
“네, 마리 양이요.”
“어, 어떤 거요?”
“왜 그렇게 마르신 것입니까?”
“아.”
마리는 그의 말에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최근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마르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볼품없는 몸이 더 볼품없어 보였다.
“그게…… 바빠서…….”
키에르한은 정말로 불만 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마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십니까?”
“죄송해요.”
마리는 그의 걱정이 기분 좋아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신경 쓸게요.”
“정말입니까?”
“네, 꼭 약속할게요.”
“그러면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어떤 거요?”
“들어주신다고 이야기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탁을 못 들어줄 것이 무엇 있겠는가. 그런데 키에르한의 부탁은 그녀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혹시 급한 일이 없다면 오늘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십시오.”
“……네?”
마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자유 시간을 받은 상태라 어려울 것은 없지만, 왜?
“너무 말라 속상해서 안 되겠습니다. 맛있는 거라도 사드려야겠습니다.”
키에르한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니 잠시만 제게 시간을 빌려주십시오, 레이디.”
마리는 당황해 거절하려 했으나, 키에르한은 생각 외로 고집을 부렸다. 저 부드럽고 착한 남자가 강건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의외여서 마리는 어어, 하며 자신도 모르게 끌려가 버렸다.
“어서 오십시오.”
잠시 후 키엘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황궁 옆에 위치한 수도 최고의 레스토랑이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레스토랑의 주인이 그들을 환대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각하. 여기 레이디께서는?”
그는 제국 3대 대귀족가의 하나인 세이튼가의 당주(當主)인 키에르한이 웬 소녀를 데리고 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저는 그냥…….”
뭔가 둘 사이를 오해하는 듯한 시선이라 마리는 서둘러 입을 열려 했으나, 키에르한이 먼저 말했다.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레이디입니다.”
마리는 깜짝 놀라 키에르한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말이야?’
폭탄 같은 이야기를 내뱉은 키에르한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 물론 소중한 친구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오해하잖아요! 마리는 또 알 수 없이 얼굴이 화끈해져 시선을 돌렸다.
“아, 그렇군요! 귀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곧 말끔한 웨이터가 그들을 안쪽의 VVIP 룸으로 안내했다.
‘내가 이런 곳을 다 와 보다니.’
마리는 복도를 걸으며 힐끗힐끗 주변을 살폈다. 몹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고풍스러운 벽난로, 화려한 고미술품들. 과거 클로얀 왕국의 왕성,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제국의 황궁보다도 고급스러웠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레이디.”
웨이터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의자를 탁자 안에서 빼낸 후 그녀에게 말했다.
“아…… 네.”
그녀가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 앉자, 얕은 그릇에 올리브 잎을 띄운 손 세정용 물을 가져오고 손수건, 식기 등을 세팅해 주는데 마치 공주라도 대접하는 듯 정중한 태도였다.
‘좋기는 진짜 좋은 레스토랑이네.’
마리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레스토랑은 황궁 옆 낮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제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유럽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의 전경답게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좋긴 좋은데, 내가 이런 데를 와도 되는 건지.’
솔직히 이런 레스토랑에 오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마치 공주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고급 레스토랑인데, 그 어떤 여인이 싫어하겠는가? 여인이라면 한번쯤 이런 곳에 오고 싶다는 로망을 모두 갖고 있을 거다.
‘다만 내가 정말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해도 되는 건지…….’
그때 키에르한이 조심히 마리에게 입을 열었다.
“혹시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요.”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부담스러워한 게 얼굴에 티가 났나 보다. 키에르한이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리 양과 하는 첫 식사인데 최대한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서, 제가 욕심을 부린 것 같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마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뭐가 죄송해요. 죄송해하지 마세요. 오히려 감사하죠.”
마리는 진심으로 키에르한에게 고마웠다. 자신을 위해 이런 곳까지 데려온 것도 모자라, 자신이 불편할까 봐 깊게 배려하고 있다. 어찌 고맙지 않을까.
‘그래도 신경 써서 데려와 주셨으니까…… 감사하게 즐기자.’
키엘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언제 또 이런 곳에 와 보겠는가. 그와 함께 있으면 자꾸 자신이 신데렐라라도 된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먼저 따뜻한 가재 수프 요리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곧 수프부터 오르되브르(애피타이저), 차가운 앙트레, 메인이 되는 그로스피에스, 다시 따듯한 앙트레 등 만찬회의 정찬과도 같은 다양한 요리가 코스로 나오기 시작했다.
“많이 드십시오, 마리 양.”
“네, 감사해요.”
그 뒤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였다. 그와 함께했던 다른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식사도 즐거웠다. 하나하나 천천히 나오는 고급스러운 음식은 혀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역시 그와 함께하는 대화였다.
‘참, 신기하지. 특별히 별다른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와 대화를 나누면 마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면 각하께서는 황실과 후작령(領)에 번갈아 머물며 업무를 보시는 건가요?”
“네, 친위대의 단장직만큼이나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으로서의 의무도 중요하니까요. 사실 지금은 국경이 안정되어 황실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보통은 주로 후작령에 머물고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마리는 키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친위대의 단장은 대대로 황실의 수호 가문인 세이튼가의 가주가 역임하는 명예직 같은 것이고, 실제로 주가 되는 역할은 변경백으로서의 국경 방위에 있는 것 같았다.
“후작령은 어떤 곳인가요?”
그 물음에 고향을 떠올린 것인지, 키에르한의 얼굴이 따뜻해졌다.
“국경 지대라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좋은 곳입니다. 멋진 경관도 많고, 사람들도 따뜻하고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번 방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마리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키엘은 살짝 놀란 듯했다.
“정말입니까?”
“네.”
“약속입니다?”
마리는 재차 묻는 키엘에게 웃음을 지었다.
“네, 기회가 된다면 꼭 가 볼게요.”
그러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 황궁을 떠나게 되면 자유의 몸이 될 테니까. 그때, 후작님의 영지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 아예 그곳에 정착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었다. 국경 지대라 클로얀 지방과 가깝다는 것이 걸리긴 하지만, 저 키에르한이 다스리는 영지라면 분명 살기 좋은 곳일 것 같았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볼 문제였고, 이런저런 대화를 더 하다가 식사가 끝났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 볼까요?”
“네, 각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리는 키에르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따각따각.
마차 소리와 함께 황궁이 가까워지자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신데렐라에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구나.’
그때, 마주 앉아 있던 키에르한이 입을 열었다.
“마리 양.”
키에르한은 평소처럼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무언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여서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첼 영애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마리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입니다. 레이첼 영애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키에르한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마리 양도 어렴풋이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
“안 그렇습니까?”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키에르한의 말이 옳았다. 그녀도 레이첼에 대해 그런 느낌을 받고 있긴 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
마리의 눈이 가라앉았다.
“제가 속사정까지는 모르지만, 레이첼 영애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레이첼 영애는 마리 양을 이용하려고만 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마리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레이첼은 자신을 본인의 사람으로 여기며 아끼기보다는 이용하려고만 하고 있었으니까. 마리라고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면 레이첼 영애에게서…….”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고는 있지만 상관없어요.”
“……!”
“그녀가 절 이용하려는 듯이, 저도 그녀에게서 얻어 낼 것이 있어서 곁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제 목적을 위해 그녀를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상관없어요.”
자신은 레이첼 영애를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설사 자신을 이용하더라도 자신도 그녀를 통해 목적을 이루면 그만이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계약관계였으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속사정까지는 정확히 모르니,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키에르한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고 말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
“아까 이야기했다시피, 만약 곤란한 일이 생기면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저를 찾아주십시오. 알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키에르한과 눈과 마주친 마리는 순간 가슴이 흔들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각하.”
키에르한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혹시나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린 친구이니까요.”
그렇게 마리는 키에르한과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헤어졌다. 그 뒤 황태자비 간택은 조금은 묘한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모두 당연히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가 간택될 것으로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레이첼이 조금씩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레이첼, 이 가증스러운 년!”
아리엘은 자신의 별궁으로 돌아와 거칠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 그녀는 오늘도 레이첼에게 한 방 먹고 돌아온 참이었다. 공손한 얼굴로 얄미운 말만 하는 것을 떠올리니 열불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공녀 저하. 고정을…….”
“레이첼, 그년이 나쁜 년입니다. 마음 넓으신 저하께서 참고 넘어가 주시지요.”
“레이첼, 고년은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황태자 저하도 그런 가식적인 년은 싫어할 겁니다.”
시녀들이 레이첼을 욕하며 아리엘을 달래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면이 있는 아리엘인지라, 노련한 시녀들이 레이첼을 욕하며 살살 달래자 조금 마음을 풀었다.
‘어쨌든 이대로는 안 돼.’
아리엘은 손톱을 질끈 깨물었다. 다행히 아직 황태자는 누가 좋다, 나쁘다 의견 표시를 한 적이 없다. 그저 공평하게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와 레이첼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아리엘은 황태자의 눈동자가 자신만을 향하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수를 내야 해.’
물론 아리엘은 자신이 황태자비로 최종 간택될 것이란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문의 위세만 믿고 있을 게 아니라 자신도 무언가 황태자에게 점수를 따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리엘은 고민했다. 하지만 늘 오냐오냐 떠받들며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 온 그녀의 머릿속에 쉽게 방법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아리엘은 속으로 레이첼을 욕했다.
‘이게 다 그 가증스러운 년 때문이야!’
아리엘은 레이첼뿐만 아니라, 그 옆에 붙어 다니는 왠지 얄미운 시녀 마리도 떠올렸다.
‘마리라고 했나? 그년도 마음에 안 들어.’
넌지시 전해 듣기로는 최근 레이첼이 두각을 드러내는 데는 그 시녀의 역할이 큰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시녀도 나중에 가만두지 않겠어.’
그녀는 그렇게 씩씩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두 후보가 간택을 놓고 다투던 중에 제국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제국의 안주인 자리를 정하는 간택이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질 정도로 큰일이었다.
바로 동방을 지배하는 이교도들의 대제국, 동방 교국(敎國)의 사절단이 동제국을 방문한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이교도들의 대제국, 동방 교국 사절단의 방문에 온 제국의 촉각이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