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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고민 끝에 마리는 레이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예상 밖의 제안이긴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레이첼이 제시한 보상이 굉장히 컸다.
‘자유인의 신분에 타국으로 이주 보장, 정착비로 1,000페나라니.’
1,000페나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거금이었다. 레이첼은 그저 마리를 사자궁에서 빼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자유인의 신분에 더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약속해 준 것이다.
어쨌든 마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과연 레이첼 영애가 바라는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사실 마리가 생각했던 기존의 계획은 간단했다. 황태자 곁에 머물며 후보들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은근슬쩍 다리만 놓아주면 되니까. 하지만 레이첼의 부탁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레이첼 영애가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도움을 줘야 해.’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에 부담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선택 사항은 없어. 아리엘 공녀는 내 의견을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된 이상 가능한 최선을 다해 레이첼 영애를 도와주자. 그래서 사자궁을, 아니, 이 제국을 벗어나는 거야.’
성공적으로 레이첼이 황태자비가 되면 마리는 영원히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인이 되어 이 제국을 떠날 것이니까.
‘지나치게 능력을 드러내 정체를 의심받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어차피 난 뒤편에서 도움을 줄 것이고, 모든 관심은 레이첼 영애가 받을 테니까.’
마리가 전면에서 능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면 레이첼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모든 주목을 레이첼이 아닌, 마리가 받을 테니까. 레이첼이 바라는 것은 마리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닌, 뒤에서 은밀히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공로는 자신이 가져가고. 마리도 가급적 주목을 피해야 하는 입장이므로, 그편이 나았다.
‘좋아. 나쁘지 않아.’
결론 내린 마리는 의지를 돋우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보자.’
그렇게 마리와 레이첼, 둘의 비밀스러운 계약이 이루어졌다. 앞으로 마리는 레이첼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능력이 닿는 한에서 도움을 줄 것이다. 레이첼은 은밀한 그 도움을 통해 황태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킬 것이고. 서로에게 이득인 윈윈(Win-win)의 계획.
그런데 마리와 레이첼이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황태자가 그녀를 어떤 눈빛으로 좇고 있는지. 따라서 마리가 하는 일은 결단코 그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레이첼은 물론 마리 본인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그날 이후 레이첼은 마리를 자신의 전속 시녀로 요청했다. 황태자비 후보인 델피나가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인물을 전속 시녀로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로 볼 때 마리가 레이첼의 전속 시녀가 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총시녀장인 에슐린 백작 부인은 별생각 없이 마리를 레이첼의 전속 시녀로 배정하려 했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그녀의 ‘주인’인 황태자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마리를 이스트반 영애의 전속 시녀로 배정할 예정이라고?”
“네, 전하.”
무언가 딱딱한 어조에 에슐린 백작 부인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리는 내 개인 소유, 즉 나의 것이다. 그런데 왜 레이첼 영애의 전속 시녀로 배정한다는 것이지?”
“……!”
에슐린 백작 부인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황태자가 마리에 대한 소유권을 이야기한 것에 놀란 것이다. 더구나 ‘나의 것’이라니?
‘물론 전쟁 포로인 마리가 황실의 주인인 황태자의 소유인 것은 맞는 말이지만.’
에슐린 백작 부인은 조심히 황태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신 소속의 소유물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싫은 건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살피기 위해. 하지만 저 철가면 안 푸른 눈동자는 늘 그렇듯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리가 별궁에서 이스트반 영애를 시중드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그녀는 내 소유이니, 다른 이의 전속 시녀로 배정하지는 말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마리는 별궁에서 일하며 레이첼의 시중을 들게 되었으나, 전속 시녀로 배정되지는 않았다. 이 일은 다른 여러 시끄러운 일로 큰 화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리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마리, 너는 나, 라엘의 것이다.”
황태자가 지난번 했던 말을 여전히 가슴에 담아 두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그 뒤로 별 언급이 없으셔서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마리는 그 뒤로 낮에는 레이첼 영애의 별궁에서 일하고, 밤에는 황태자의 침소로 가서 불면을 치료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요한 며칠이 지나갔다. 레이첼과 아리엘, 두 후보는 공식적인 일정에 따라 황태자와 만남을 가졌고,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너무 아무런 일이 없어 따분하다고 느껴질 정도. 곁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마리는 이런 생각까지 하였다.
‘내가 할 일이 있기는 있는 건가? 차라리 황태자 곁에 머물면서 레이첼 영애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고요도 잠시. 곧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 일어났다.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가 수작을 걸어온 것이다. 그것도 두 후보의 입궁을 축하하는 간택 연회 직전에! 그리고 공교롭게도 마리는 그날 밤 또 꿈을 꾸었다.
「……입니…….」
「저는…….」
잔뜩 노이즈가 낀 듯한 의식. 그 흐릿한 의식 속에서 늘 꾸던 자각몽이 끝이 났다. 이전과 늘 마찬가지로 마리는 번뜩 눈을 뜨며 꿈에서 깨어났다.
“무슨 꿈을 꾼 거지?”
그녀는 곤혹스럽게 중얼거렸다. 꿈의 내용이 혼란스러워서가 아니었다. 혼란스러울 것이 없었다.
“……기억이 안 나.”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당황해 기억을 더듬었다.
“자각몽을 꾼 것은 맞아. 그런데 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거지?”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꿈을 꾼 것은 확실한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지금 마리의 상황이 그러했다. 자신에게 능력을 주는 신비한 자각몽을 체험한 느낌은 확실히 들었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뭐지?’
마리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전이었다면 별생각 없이 넘겼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당신의 능력을 저를 위해 빌려 주세요.”
마리는 레이첼 영애에게 도움을 주기로 거래한 상태이니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각몽을 꾸었으면 분명 꿈과 관련된 일이 일어날 거야.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안 나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하필 오늘은 후보들의 입궁을 축하하는 간택 연회인데. 설마 연회에서 사고가? 떠올려, 마리!’
그녀는 막이 내려진 극장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그 노력 덕분인지 그녀는 간신히 한마디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의 목표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가치로 최고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흐릿한 의식 속 꿈속 주인공이 했던 이야기. 이 한마디 외에는 아무런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리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마리, 이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준비해.”
“아, 네!”
어쩔 수 없이 마리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였다.
* * *
최근 마리의 일과는 시중을 드는 레이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오늘 레이첼은 오전에 황태자와의 조찬, 그리고 저녁에 후보들을 환영하는 간택 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리는 조찬에 가기에 앞서, 레이첼의 머리를 다듬어주었다.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응, 좋아. 그렇게 다듬어줘.”
서로 간의 거래가 성립된 후 레이첼은 마리에게 편하게 말을 놓았다. 사실 계급 차이가 있으니 하대가 당연했다. 거울 앞에 앉아 편안히 눈을 감고 있던 레이첼은 마리가 머리를 손질해 주는 것을 끝내자 눈을 떴다.
“마리, 머리도 잘 다듬네.”
레이첼은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자신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닙니다. 영애의 머릿결이 원체 좋으셔서 특별히 다듬을 것이 없었습니다.”
마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레이첼은 머릿결도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부럽다. 나도 저렇게…… 아니, 반의반만큼이라도 예뻐 봤으면.’
마리는 레이첼을 훔쳐보며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특별히 자신의 외모에 불만은 없었지만, 눈앞의 상대가 워낙 아름답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어. 바랄 것을 바라야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정신이나 바짝 차리고 있자.’
꿈속의 일이 오리무중인 탓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마리는 오늘 하루 최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기로 다짐했다.
“가자, 마리.”
“네.”
단정하게 꾸민 레이첼은 마리와 다른 시녀들을 대동하고 조찬이 예정된 사자궁의 테라스로 향했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급한 회의가 생기는 바람에 조찬이 취소되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영애.”
레이첼의 눈동자에 옅은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으나, 티 내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저와의 조찬보다 국정이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 조찬이야 언제든 다시 해도 되니, 전하께 개의치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주십시오.”
“네, 살펴 가십시오.”
그렇게 사자궁을 나온 레이첼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마리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그 시간’이구나.”
“……?”
“잠시 둘이서 산책이나 하다가 들어갈래, 마리?”
마리는 남부에서 데려온 시녀들을 놔두고 굳이 자신과 따로 산책하자는 게 의아했다. 그리고 ‘마침 그 시간’이라니? 어쨌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중앙 정원이 예쁘다던데, 그쪽에 가 보자.”
마리는 중앙 정원으로 레이첼을 안내했다. 레이첼은 드넓게 펼쳐진 정원을 보며 감탄했다.
“와, 역시 남부의 정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구나.”
이른 시간이라 하늘은 맑고, 아침 햇살을 받은 정원의 호수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레이첼은 옅게 미소 지으며 호수를 바라보았는데, 정말로 황궁의 정원에 감탄한 표정이라 마리는 왠지 레이첼이 자신의 또래처럼 느껴졌다.
‘또래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또래지. 나보다 한 살밖에 안 많으니까.’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있고, 차분해서 레이첼은 나이보다 성숙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 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요? 반가워요, 레이첼 영애.”
“……!”
레이첼과 마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장미와도 같은 화려한 아름다움의 아리엘 공녀가 시녀들을 잔뜩 이끌고 서 있었다.
“아리엘 공녀 저하를 뵙습니다.”
레이첼은 차분히 예를 표했다.
“그래요, 반가워요. 첫날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잘 지내셨나요?”
“네, 공녀 저하 덕분에 특별한 일 없이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그 뒤 둘은 각자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친근한 지인처럼 느껴질 대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리엘 공녀가 넌지시 발톱을 꺼내었다.
“정원이 아름답지요?”
“네, 저하.”
“아무래도 남부에서는 보기 힘든 정원이니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
레이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리엘은 한마디의 말로, 그녀의 출신인 남부를 깔아 내림과 동시에 레이첼이 황후가 되지 못할 것이라 무시한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은 곧 얼굴을 풀며 공손히 답했다.
“네, 저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리엘 공녀는 레이첼이 반박해 들어오지 않자 인상을 찌푸렸다. 꾸민 듯한 공손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리엘은 다른 트집거리가 없는지 찾다가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마리를 발견했다.
“저 아이는?”
“사자궁 소속의 시녀, 마리라고 합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아리엘은 더러운 것을 봤다는 듯 고운 눈매를 찡그렸다.
“저 아이는 망국 출신의 전쟁 포로 아닌가요? 노예나 다름없는.”
“……!”
“당신도 나름 황태자비 후보인 델피나인데, 저런 천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 아닌가 싶군요.”
그 말에 마리는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마리가 착해도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듣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레이첼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부족한 저를 생각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저하. 다만 저 마리는 황태자 전하가 직접 사자궁으로 부른 아이…….”
레이첼은 진심으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그녀를 천하다고 하는 것은 혹여나 황태자 전하를 욕보이게 하는 것은 아닌지, 어리석은 저로서는 조금 걱정되옵니다.”
“……!”
아리엘 공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이첼의 말이 맞았다. 황태자가 부른 시녀를 천하다 욕하는 것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황태자를 욕보이게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황태자를 욕보이게 된 아리엘은 당황했다.
“나,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레이첼은 정말로 아리엘이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 시녀에게 사과하는 것이 어떨까요? 저희야 상관없지만, 혹시나 황태자 전하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가면…….”
아리엘 공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보고 저 천한 시녀에게 사과하라고?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상황상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리엘은 귀 끝까지 시뻘게져서 말했다.
“미안하구나. 마, 말실수였다.”
“아, 아닙니다.”
마리는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이첼 영애도 보통이 아니구나.’
마리는 고개를 숙인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청초하게 생겨서, 상황을 몰아가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레이첼의 말 한마디로 아리엘은 공녀의 신분으로 시녀에게 사과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한편, 아리엘 공녀는 고개를 숙인 마리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레이첼을 노려보았다. 아리엘도 완전히 바보는 아닌지라, 이 상황이 레이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 당분간 수도 사교계에서 오늘의 일이 수다거리로 오르내리리라.
‘이 가증스러운 것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리엘은 꺼내서는 안 될 내용을 말해버렸다.
“오늘 간택 연회가 기대되는군요.”
“……?”
“영애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나올지 기대가 돼요. 누구보다도 어여쁜 영애이니, 오늘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겠죠?”
레이첼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저 이야기를 왜 하지? 아리엘은 가시 돋친 장미처럼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벼운 선물을 준비해 놓았으니, 곧 소식이 갈 거예요. 영애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오늘밤 기대하고 있을게요.”
아리엘은 시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휑하니 남게 된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무슨 말이지?”
말 자체로만 보면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런 말을 난데없이 왜 한단 말인가?
“날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더욱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저 공녀가 자신에게 웬 선물을?
“일단 별궁으로 돌아가자, 마리.”
그때 마리에게 고개를 돌린 레이첼은 흠칫 놀랐다. 마리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마리는 레이첼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으나, 얼굴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방금 아리엘 공녀의 이야기를 듣고 본능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한 것이다.
‘혹시 오늘 일어날 일이?’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명해. 아리엘 공녀는 이번 간택 연회 때 무슨 일을 꾸미고 있어. 내가 어젯밤 꾼 꿈은 아리엘 공녀가 꾸미는 일과 연관이 있을 거야.’
간택 연회가 시작될 때까지 남은 시간은 반나절. 마리는 그 안에 아리엘 공녀가 꾸미는 일을 파악해 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레이첼의 별궁으로 돌아온 마리는 생각에 잠겼다.
‘아리엘 공녀가 꾸미고 있는 음모는 과연 무엇일까?’
범위가 너무 막연했다. 연회장에서 획책할 수 있는 음모의 종류는 무궁무진했다.
‘분명 공녀가 한 말 중에 단서가 있을 거야.’
당시 아리엘 공녀는 흥분에 못 이겨 속마음을 내뱉은 것으로 보였다. 원래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내용의 말을. 그러니 공녀가 한 말 중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 내, 마리. 그래서 공녀의 음모를 막는 거야.’
그녀는 아까 공녀가 자신에게 던졌던 말들을 떠올랐다. 어차피 레이첼을 도와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공녀의 음모를 막고 싶었다. 자신에게 모욕을 준 공녀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공녀는 몇 번이나 거듭해 레이첼 영애의 모습을 기대한다고 했어.’
무언가 수상했다. 물론 레이첼 영애가 워낙 아름다우니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그럴까?
‘무언가 있어.’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에 장난을?’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주인공으로 연회에 참석할 때는 보통 새로운 드레스를 제작하게 마련이야. 그 제작 중인 드레스에 혹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급히 발걸음을 옮겨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레이첼에게 물었다.
“영애, 혹시 오늘 간택 연회 때 입을 드레스는 별다른 문제없이 준비되었는지요?”
“응, 제이드 살롱에서 주문 제작한 드레스를 점심에 가져오기로 했어. 그건 왜?”
순간 마리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혹시 드레스는 문제없이 제작되고 있는 건지…….”
“며칠 전에 사람을 보내 확인했어. 기본 디자인은 완성되었고, 장식을 넣고 있었는데? 왜 그래, 마리?”
레이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걱정을 이야기했다. 마리의 말을 들은 레이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아리엘 공녀의 말을 레이첼도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다.
“드레스를……. 하지만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을 보내 볼게.”
그녀는 남부에서 같이 온 시녀 지나를 제이드 살롱에 보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지나가 돌아왔다.
“아, 아가씨.”
“지나?”
레이첼과 마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지나의 안색이 창백했던 것이다.
“드레스를 제작 중 갑자기 재료에 문제가 생겨 납입 일자를 맞출 수가 없을 것 같대요.”
“말도 안 돼!”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시녀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오늘이 당장 연회인데 납입 일자를 맞출 수가 없다니?”
별궁에 난리가 났다. 레이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리에게 물었다.
“이건 아리엘 공녀의 입김이겠지?”
“아마…… 그럴 것입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도 최고의 드레스 숍인 제이드 살롱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 분명 아리엘 공녀, 아니, 슐레안 대공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리라.
“가문에서 가져온 다른 연회용 드레스는 없으신지요?”
“그…… 있긴 한데, 수도에서는 완전히 유행이 지난 스타일이야.”
레이첼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남부는 수도와 비교해 유행이 반년 이상 차이가 났다. 수도에서 어떤 스타일이 유행하면, 한참 뒤에 남부로 퍼지는 식이었다. 그러니 남부에서 가져온 드레스를 입고 간택 연회에 나서면 큰 비웃음을 살 게 뻔했다.
‘이런 치졸한 음모를.’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치졸했지만 아픈 일격이었다. 간택 연회는 델피나의 첫 공식 데뷔 장소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자리다. 그런 곳에 유행이 지나간 구닥다리 드레스를 입고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야. 아직 시간이 있으니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나마 일찍 문제를 알아채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알게 되었으면, 손쓸 수도 없었으리라.
“영애, 지금이라도 다른 드레스 숍을 수소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이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드레스 숍을 수소문해 봐도 대체할 드레스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연회용 드레스는 굉장히 고가이고, 수요층이 한정되어 있어 주문 제작만 받기 때문이다. 미리 다량의 제품을 만들어 놓고 파는 일반적인 드레스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나마 다른 귀부인들이 주문해 놓은 연회용 드레스가 몇 벌 있긴 있었으나, 체형이 맞지 않았다.
‘어쩌지?’
마리는 레이첼을 돌아보았다. 레이첼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리, 방법이 없겠지?”
“…….”
이런 상황에서 마리라고 답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레이첼은 첫 공식 연회에서 망신을 당하고 말 것이다. 저 못된 아리엘 공녀의 치졸한 음모에 의해서.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마리는 필사적으로 고민해 보았으나,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직접 드레스를 만들지 않는 한 해결책이 없었다.
‘드레스를 직접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패션 디자이너도 아니고.’
그런데 그 순간 마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설마?’
「나의 목표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가치로 최고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들었던 한마디. 다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오로지 저 한마디만 기억이 났다.
‘이게 무슨 뜻일까? 스스로의 가치로 최고가 되도록 도와준다고?’
무언가 깊은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내용. 마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설마 패션을 이야기하는 말은 아니겠지?”
마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한 가지 있었다. 이전 황궁에서 하급 시녀로 일할 때 우연히 만났던 패션 디자이너 한 명이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이다.
“패션은 단순히 외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 자아의 완성입니다! 패션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루는 것이죠!”
……뭔가 비슷한 말 같아 보인다. 거기까지 생각한 마리는 침묵했다. 뭔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때 레이첼이 마리에게 물었다.
“마리, 무슨 생각해? 혹시 좋은 방법이 있어?”
“……영애.”
“응?”
“제이드 살롱에 주문한 옷은 미완성 상태라고 했죠?”
레이첼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미완성 상태의 드레스는 제이드 살롱에 있는 건가요?”
“응, 재료에 문제가 생겼다는 핑계로 작업을 멈추고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
마리는 고개를 젓고 레이첼에게 말했다.
“혹시 그 미완성의 드레스를 가져올 수는 없을까요?”
레이첼은 눈을 크게 떴다.
“어려울 것은 없지만, 그건 왜?”
마리는 답했다.
“어쩌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마리는 미완성 드레스를 가지고 별궁에 비어 있는 방에 들어갔고, 수선 도구를 손에 잡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꾼 꿈은 패션 디자이너의 꿈이 맞았다는 것을! 그것도 어마어마한 경지에 이른 패션 디자이너였다. 옷을 단순히 외모를 치장하는 데 그치게 하지 않고, 입는 사람의 특성을 최고의 가치로 이끌게 하는 경지의 디자이너.
‘단순히 유행을 따라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입는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가치를 꽃피울 수 있도록 하는 옷이야말로 최고의 옷.’
마치 정말로 패션 디자이너라도 된 것처럼 생각이 떠올랐다.
‘시작하자. 남은 시간은 반나절. 시간이 얼마 없어.’
그나마 기본적인 디자인은 제이드 살롱에서 만들어 놓아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최고 경지의 디자이너라도 반나절 만에 옷을 뚝딱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물론 디테일과 마무리가 가장 어려운 거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마리는 그나마 제이드 살롱에서 디테일과 마무리를 손대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일부러 엉망으로 해놓았다면 아예 손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어. 디테일과 마무리를 잘 손보면 충분히 훌륭한 드레스를 만들 수 있으니까.’
사실 정말 파격적인 드레스가 아닌 한, 옷의 기본 형태는 다 엇비슷하다. 그 비슷한 옷을 다른 옷들과 차별화해 명품으로 인정받게 하는 것은 바로 디테일과 마무리. 마리는 반나절 안에 제이드 살롱에서 가져온 미완성 드레스를 최고의 명품으로 탈바꿈시켜 보기로 결심했다.
‘해보자.’
바늘과 실, 가위를 든 그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 간택 연회가 시작되었다.
* * *
탄신 축제가 끝난 후 한동안 한적했던 글로리아 홀. 오래간만에 다시 수많은 귀족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황태자비 후보인 델피나들을 환영하는 간택 연회가 열린 것이다.
“델피나분들은 아직이시지요?”
“네, 주인공들이니 연회가 조금 더 무르익고 도착하겠지요.”
“기대되는군요. 어떤 분들이신지.”
연회장은 축제 때만큼이나 붐볐다. 두 명의 후보 중에서 한 명이 차기 황태자비로 선택된다. 그리고 현 황제인 토른 2세의 병환으로 봤을 때 머지않은 시기에 라엘이 황위를 양도받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황태자비 후보가 아니라 황후 후보인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누가 최종적으로 간택될지 사람들의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떤 분이 황태자비로 간택될지.”
“당연히 슐레안 대공가겠지?”
“아니야, 1황자파를 품을 수 있는 이스트반 백작가도 만만치 않아.”
경쾌한 음악과 화려한 음식이 연회장을 수놓았지만, 귀족들의 정신은 오로지 델피나들에게로 쏠렸다. 둘 중 어떤 인물이 간택되느냐에 따라 앞으로 정치 판도가 변하리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문지기가 나팔을 불었다.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이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연회장으로 쏠렸다. 곧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역시 아름다우시군요.”
아리엘은 흰 바탕에 붉은색 무늬로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최근 제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로 깊게 파인 가슴, 코르셋으로 강조한 잘록한 허리, 크리놀린으로 부풀린 치맛단으로 꾸며져 마치 화려한 꽃 같은 인상을 주는 드레스였다. 가장 압권인 것은 드레스의 곳곳에 매달린 수많은 보석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소문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리엘의 아름다움에 연회장이 술렁였다.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그녀를 보며 감탄성을 내뱉었고, 아리엘은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 연회에 주인공은 나야. 레이첼, 네가 아니라.’
그녀는 일부러 레이첼보다 조금 일찍 연회장에 도착했다. 보다 먼저 시선을 받기 위해.
‘물론 늦게 도착하는 게 주목받는 데 더 유리하지만. 오늘은 이야기가 다르지.’
아리엘은 속으로 차갑게 미소 지었다.
‘오늘 레이첼, 너는 유행이 지난 형편없는 드레스를 입고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마리의 짐작대로 제이드 살롱의 일은 아리엘이 손을 쓴 것이었다. 제이드 살롱 자체가 대공가의 가신(家臣)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어려울 것도 없었다.
‘내 화려한 등장에 사람들은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올지 잔뜩 기대하게 되겠지. 그런 상황에서 네가 구닥다리 옷을 입고 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어.’
아리엘은 오전에 중앙 정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나한테 천한 시녀에게 사과하라고 했었지. 그것도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떠올리니 열이 확 치밀어 올랐다. 아리엘은 빨리 레이첼이 등장해 그녀가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두고 봐. 레이첼, 너는 오늘도, 앞으로도 내 들러리가 될 것이니.’
그래서 최종적으로 황태자비로 간택되면 그 거슬리는 천한 시녀도 가만 두지 않겠다. 꼭 치도곤을 쳐 줘야지. 그렇게 아리엘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연회장의 문지기가 다시 나팔을 불었다.
“이스트반 백작가의 레이첼 영애입니다!”
모두가 연회장의 문을 바라보았고, 아리엘도 의기양양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레이첼의 모습을 확인한 아리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드레스는?’
옅은 푸른색이 감도는 백색의 드레스였는데, 무언가 스타일이 일반적인 드레스와 달랐다. 남부의 구닥다리 스타일인가 싶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아예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코르셋으로 과도하게 강조한 것이 아닌,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허리선. 과하게 조이지 않았음에도, 부드러운 곡선이 오히려 시선을 끌었다. 또한, 치맛단을 부풀리는 크리놀린도 당시 유행과 달랐는데, 우산처럼 커다랗게 펼쳐진 것이 아닌 단정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초라해 보일 것 같은 예상과 다르게, 레이첼의 여린 몸매와 백색의 색상은 잘 어우러져 우아한 기품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드레스를 치장하는 장식 보석들.
누군가 놀라 중얼거렸다.
“보석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군요.”
“그러게요. 의외입니다.”
드레스 전체에 걸쳐 모래알처럼 촘촘히 보석이 박혀 있는 아리엘과 다르게, 레이첼의 드레스는 부드러운 고급 옷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을 뿐이었다. 다만 중간중간 포인트를 주듯 보석과 깃발, 리본 등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끌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름답군요.”
“네, 정말 아름답네요. 마치 요정 같아요.”
누군가 이런 이야기도 하였다.
“저 새로운 양식의 드레스가 레이첼 영애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 같군요.”
“네, 부드럽고, 우아하고, 기품 있어요.”
아리엘과 같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레이첼이지만, 체구가 작고 여린 인상이다 보니 화려한 연회 드레스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입고 온 드레스는 레이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최고의 장점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훌륭합니다. 보석을 적게 사용해 자칫 잘못하면 수수해 보일 수도 있는데, 포인트를 적절히 줘 그런 단점을 상쇄했어요.”
“오히려 보석을 잔뜩 사용한 것보다 더 눈에 잘 들어옵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드레스를?”
“제이드 살롱은 아닌 것 같아요. 거긴 유행에 따르는 옷 아니면 취급 안 하니까. 남부의 디자이너일까요?”
레이첼이 입고 온 드레스는 단번에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귀족 영애들은 레이첼의 드레스가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귀족 영애들은 두런두런 떠들었다.
“와아! 정말 예쁘네요. 저도 저런 스타일로 입어 보고 싶어요.”
“네, 저도 다음엔 가문의 디자이너에게 저런 스타일로 디자인해 보라고 해야겠어요.”
한편 레이첼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감탄 어린 시선에 부드럽게 웃으며 응대했다.
‘이게 어떻게 된?!’
반면 아리엘 공녀는 주먹으로 애꿎은 드레스를 쥐어뜯으며 분노했다. 아리엘은 레이첼의 새로운 드레스 때문에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모두 레이첼을 보며 드레스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탄할 뿐이다. 완벽한 아리엘의 패배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드레스를?!’
아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깎아내려 보려 했으나, 드레스는 아리엘의 눈에도 아름다워 보여 깎아내릴 게 없었다.
‘이익!’
그 순간이었다. 연회장의 문지기가 최종 주인공의 등장을 알렸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일순 연회장의 음악이 끊기고 모두가 자리에서 멈추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받은 황태자는 가운데 황족을 위한 자리에 가서 앉았고, 곧 다시 연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무심하게 사람들을 스치던 황태자의 눈동자가 어느 한곳에서 멈추어 섰다. 레이첼 영애에게서였다. 그것도 잠시가 아닌, 한참이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후보와 황태자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전하께서도 레이첼 영애를 눈여겨보시는군요.”
“하긴 오늘 레이첼 영애가 정말 아름답긴 하지요.”
하지만 그때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전하는 레이첼 영애가 아니라, 드레스를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드레스요? 전하께서 유행에 관심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신데…….”
“그게 아니라, 레이첼 영애가 입고 온 드레스가 굉장히 검소한 스타일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이전부터 귀족 영애들의 사치스러운 스타일을 안 좋아하셨으니, 검소하게 꾸민 드레스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철혈의 황태자가 귀족 영애들의 과도하게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유명한 일이긴 했다.
“아니면 모르지요. 그냥 관심이 가서 보셨던 것일 수도요. 저 철혈의 황태자 전하께서도 남자이시니, 아름다운 레이첼 영애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셨을 수도 있죠.”
그렇게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시간이 흐르고, 간택 연회의 하이라이트가 다가왔다. 바로 황태자와 두 후보의 춤 시간이었다.
예법에 따라 황태자는 아리엘 공녀와 먼저 춤을 추었다. 다방면에 능통한 황태자답게 빼어난 춤 실력을 보여 주었지만, 아리엘 공녀와의 춤은 무언가 밋밋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훌륭한 춤이긴 한데, 무언가 비어 있는 것 같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밋밋합니다.”
춤이 끝나고, 이번엔 레이첼의 차례였다.
황태자는 장갑을 낀 손을 레이첼에게 내밀었다.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예법에 따른 춤 신청. 레이첼은 하얀 뺨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둘의 춤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무언가 텅 비어 보였던 아리엘 공녀와의 춤과는 다를지.
“레이첼 영애와는 조금 다를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까도 레이첼 영애를 눈여겨보셨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기대와 다르게, 여전히 황태자의 춤은 밋밋했다. 기교적으로는 완벽하게 훌륭하지만, 무언가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그저 해야 하니 하는, 업무를 처리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 느낌은 같이 춤을 추고 있는 레이첼이 가장 강하게 받았다.
‘아직 처음이니까.’
레이첼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첫걸음이니, 그의 마음을 열 기회는 많으리라. 그런데 한참 춤을 추고 있을 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그 드레스. 누가 고안한 것이지?”
레이첼은 황태자가 생각지도 않은 것을 물어보자 눈을 크게 떴다.
‘아! 이 드레스가 전하가 원하시는 대로 사치스럽지 않은 스타일이어서 그렇구나.’
레이첼은 황태자가 사치스러운 스타일을 싫어한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저 보석이 결국 다 백성의 세금이거늘.”
그가 했던 유명한 이야기다. 순간 레이첼은 황태자의 점수를 딸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 드레스를 고안한 것은 내가 아닌, 시녀 마리이지만 그래도…….’
이 드레스에 그녀가 관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리가 기적 같은 솜씨를 발휘하더니 완성한 것이다. 레이첼은 마리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으나,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마리가 디자인했다는 것은 자신밖에 몰랐다.
“이전부터 드레스에 과도한 사치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다 백성들의 고혈이니까요. 그래서 고민 끝에 사치를 줄인 드레스를 고안해 보았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현숙하게 보이려 노력하며 말을 했다. 황태자는 그 말에 잠시 가만히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깊고 깊은, 마치 마음속을 꿰뚫는 듯한 눈빛. 왠지 긴장되어 레이첼이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황태자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누가 고안한 것이지?”
“……!”
알 수 없는 물음. 분명 자신이 고안한 것이라 대답했건만, 다시 묻다니?
“제가 고안했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되물음.
“정말로 영애가 고안한 거라고?”
레이첼은 알 수 없이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황태자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철가면에 가려진 황태자의 마음은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춤이 끝났고, 늦은 시간에 연회가 막을 내렸다.
* * *
연회가 끝난 후 황태자는 바로 사자궁으로 돌아갔다. 그때 사자궁에는 그의 시녀 마리가 불면을 달래 주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언제나처럼 가만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리를 보며 라엘은 묘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도 어느덧 익숙해졌군.’
마리가 그에게 처음으로 차를 타 준 뒤부터였을 것이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차를 마시고 숙면을 취한 그는 그 뒤로도 밤마다 그녀의 차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는 차를 끓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피아노 연주도 같이 해주었고, 덕분에 그는 조금씩 잘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저 소녀의 차와 피아노가 없으면 잠을 자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군.’
마치 공기와 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녀와 이 시간에 만나 차를 마시고,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저 소녀가 자신의 삶에 생각보다 깊게 들어온 느낌이다. 물론 그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지.’
라엘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마리가 조심히 물었다.
“차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전하?”
“아아. 오늘은 술을 먹어서 차는 됐다. 그냥 피아노 연주만 부탁하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엘은 몸을 누이기 위해 침대로 걸어가던 중,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마리.”
“네?”
“오늘 수고했느니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뭘 수고했다고 하는 거지?
‘물론 이리저리 바쁘긴 했지만.’
아리엘 공녀의 음모를 간파하고, 드레스를 직접 완성하느라 정말 정신없는 하루긴 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내가 그런 하루를 보냈단 사실을 모를 텐데?’
그러나 황태자는 더 설명은 해주지 않고, 캐노피 안 침대로 들어가 몸을 뉘었다. 고개를 갸웃한 마리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오늘은 변주곡 17번입니다.”
곧 침실 안에 잔잔한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리는 불면에 도움이 될 만한 음악 몇 개를 작곡 후, 매일 주제를 변주시키며 황태자에게 들려주었다.
‘오늘도 좋군.’
황태자는 철가면을 벗어 침대 옆에 올려놓으며 생각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으나, 캐노피에 가려 마리는 보지 못했다.
‘잔잔한 선율.’
라엘은 귀를 간질이는 선율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리의 피아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았다. 하루 동안 쌓인 짙은 피로도,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노곤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너무 좋아서, 그게 문제지.’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떠올랐다.
‘왜 나는 저 소녀를 이렇게나 신경 쓰고 있을까?’
사실 알고 있다. 왜 자신이 저렇게나 저 소녀를 신경 쓰고 있는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있을 뿐.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자신은 이 제국의 지배자이다. 저 철가면이 피로 물들었던 과거에 했던 맹세대로 오로지 제국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이다.
‘슐레안 대공가나 이스트반 백작가 모두 제국의 훌륭한 동맹 상대이다. 그러니 난 그중 하나와 맺어져야 해. 제국에 이득이 될 결혼을 하는 것, 그게 내 의무야.’
모두 알고 있다. 군주인 자신의 감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을. 그는 오로지 제국에 가장 이득이 될 이와 결혼해야 했다. 그게 군주로서의 의무였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난 계속 너만 생각나는 걸까.”
황태자는 한탄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캐노피 밖에서는 여전히 잔잔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선율이었지만, 라엘의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해졌다. 라엘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