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15화 (16/54)

Chapter 8

그날 마리의 차를 마셨던 황태자는 정말로 잠들 수 있었다. 그것도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깨지 않고 잘 수 있었다. 남들에게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최근 그렇게 깊게 자 본 적이 없는 황태자는 잠에서 일어난 후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깊게 잠이 들다니?’

늘 꾸는 악몽도 꾸지 않았다. 깊게 잔 덕분에 몸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상쾌했다.

‘정말로 그 차 때문인가?’

그날 이후로 마리는 종종 밤에 황태자를 위해 차를 끓여 주게 되었다. 그녀는 차를 끓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음악을 연주해 주기도 했는데, 효과가 있어 라엘은 짧게나마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렇게 황태자의 불면을 치료하기 위해 늦은 밤에 황태자의 침소에 들르는 것이 마리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일단 난 황태자의 시녀니까.’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태자는 나쁘지 않은 주인이었다. 그러니 그를 떠나기 전까지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불면 치료를 위해 매일같이 황태자의 침소를 들락거리니,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주변의 다른 이들이 마리를 더욱더 특별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역시 황태자 전하가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구나.”

“그러게. 매일 밤 전하의 침소를 들락거리다니.”

사자궁의 시녀들이 마리를 보며 속닥거렸다. 물론 마리가 황태자의 침소에 가는 것이 불면 치료를 위해서란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매일 밤 황태자의 침소에 가다니. 특별한 것은 특별한 것이다.

‘황태자 전하가 가장 아끼는 시녀.’

‘전하가 가장 신뢰하는 시녀.’

모두 마리를 그렇게 여겼다. 아무리 불면을 치료하기 위해서라지만, 보통 아끼고 신뢰하지 않으면 매일 밤 침소로 부르겠는가. 그렇게 마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의 머릿속에 황태자가 가장 아끼는 최측근 시녀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일상적인 나날이 지나고, 사자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황태자비 후보들이 입궁하게 된 것이다. 마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황태자비 간택의 시작이었다.

* * *

“드디어 후보들이 입궁하는군요.”

재상 오른이 집무실에서 황태자에게 말하였다.

“그렇군.”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를 보며 오른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무 관심이 없으신 것 아닙니까? 곧 전하의 비가 될 후보들인데.”

오른은 이 간택을 추진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제국의 남자 모두가 전하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두 후보 모두 제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이니까요.”

라엘은 그 말에 실소를 지었다. 여인의 용모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와 같은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들에게 결혼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는 국익에 가장 도움이 될 여인과 결혼해야 했다. 그것이 제국을 지배할 이의 의무였다.

“혹시 두 후보 중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아직은 없다. 슐레안 대공가와 이스트반 백작가. 둘 중 어느 쪽이 더 제국에 도움이 될지 가늠해 보고 결정해야겠지.”

황태자의 대답에 오른은 혀를 찼다. 그는 두 여인 중 어떤 이가 더 마음에 가는지 물은 것이건만, 황태자는 정략적인 면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건 라엘이 자신의 결혼을 오로지 제국의 국익을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평생을 함께할 이를 고르는 것인데. 조금은 본인을 위한 선택을 해도 좋을 텐데.’

사실 결혼뿐이 아니었다. 저 황태자는 오로지 제국과 제국민만을 위할 뿐,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물론 군주로서 굉장히 훌륭한 태도이지만, 그 정도가 심하니 문제였다.

‘이번 간택을 통해서 저 목석같은 면이 조금 누그러지면 좋겠구나.’

모든 게 완벽한 황태자이지만, 인간적인 면모가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오른은 후보로 입궁할 두 여인 중 아무라도 황태자의 마음을 녹여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택 기간 중 계속해서 같이 지내실 테니, 둘 중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주시겠지. 황태자 전하도 사람이니까.’

어차피 양 가문의 정치적인 이득은 비등하므로, 오른은 이왕이면 황태자의 마음을 얻은 여인이 황태자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황태자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모리나 왕녀의 행방은 아직도 못 찾았는가?”

“죄송합니다. 계속 사람을 풀어 찾고 있으나…….”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군. 황태자비로 맞았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될 이는 슐레안 대공가도, 이스트반 백작가도 아닌 클로얀 왕국의 마지막 핏줄인 모리나 왕녀인데. 도저히 행방을 알 수가 없으니.”

황태자의 말은 옳았다. 모리나 왕녀를 정식 황태자비로 맞으면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클로얀 지방을 완전히 제국의 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그로 인한 이득은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모리나 왕녀를 찾을 때까지 비를 맞는 것을 미룰 수는 없습니다, 전하. 사실 한참 전에 결혼을 하셨어야 했는데, 늦어도 많이 늦은 상태입니다.”

오른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간택을 시작한 거였다.

“알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모리나 왕녀를 황태자비로 맞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네, 그래야 할 듯합니다.”

그러며 오른은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만약 후에 모리나 왕녀를 찾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태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비를 2명 맞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모리나 왕녀는 클로얀 왕국의 마지막 핏줄이다. 비로 맞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왕녀에 대한 처분은 하나였다.

“당연히 죽여야겠지.”

황태자 라엘은 무감정하게 말했다.

* * *

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꾸민 마차 두 대가 황궁 안으로 들어와 멈추어 섰다. 황태자비 후보들을 태운 황실 마차였다. 곧 각각의 마차에서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태자비 후보들이 내려왔다.

“아리엘 공녀 저하와 레이첼 영애를 뵙습니다. 총시녀장인 에슐린이라고 합니다.”

2명의 후보를 맞아 먼저 총시녀장 에슐린 백작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 뒤를 따라 대기하고 있던 사자궁의 시녀들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여기 사자궁의 시녀들이 앞으로 두 델피나분을 모실 것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델피나. 황태자비를 뜻하는 라틴어, 델피나투(Delphinatu)에서 기원한 단어로, 간택에 참여하는 황태자비 후보를 칭하는 단어다. 두 여인 중, 고고한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이 말을 받았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한편 뒤에 서 있던 마리는 여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분이 아리엘 공녀이구나. 정말 소문대로 아름다워…….’

여기 사자궁의 시녀도 미녀가 많았지만, 저 아리엘 공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흑발, 빠져들 것 같은 커다란 푸른 눈동자, 백옥 같은 피부에 장미처럼 붉은 입술. 조각 같은 얼굴선은 천상의 보석을 연상시켰다.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고고한 보석 말이다. 거기에 강렬한 눈매에 육감적인 몸매까지. 남자라면 누구라도 저 공녀를 보고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뒤를 이어 여린 인상의 소녀가 고개를 숙였다. 마리는 그 소녀를 보고도 속으로 감탄성을 뱉었다.

‘저 소녀가 이스트반 백작가의 레이첼 영애. 저분도 정말 아름다우시구나.’

나이는 그녀와 비슷해 보였다. 찬란한 금발에 호수 같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형 같은 외모가 한 떨기 꽃처럼 청초했다. 아까 아리엘 공녀가 도도한 장미꽃처럼 짙은 유혹의 향을 풍긴다면, 이 레이첼 영애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리고 청초한 매력이 흘렀다. 두 후보 모두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소문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듯했다.

‘이건…… 뭐, 완전 소설 속 주인공들 같잖아.’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두 여인 옆에 있으니 나름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사자궁의 시녀들이 배경으로 전락해 버린 듯했다. 평범한 외모의 마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황태자 전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두 델피나분께서는 이쪽으로.”

총시녀장 에슐린 백작 부인이 그들을 안내했다. 아리엘 공녀는 외모 그대로 고고한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고, 레이첼 영애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따랐다. 그들이 사라지자, 사자궁의 시녀들이 웅성거렸다.

“와, 봤어? 정말 소문대로네.”

“그러게. 아리엘 공녀야 제도의 사교계에서 여러 번 뵈어 알고 있었지만, 남부의 레이첼 영애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데?”

시녀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은 소녀처럼 낭만적인 눈이 되어 속닥였다. 그들은 과연 누가 황태자와 맺어질지 속닥속닥 떠들었다.

“과연 두 분 중 어느 분이 황태자 전하의 선택을 받을까?”

“아리엘 공녀 아닐까? 황태자 전하도 남자이신데 저런 매혹적인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으실까?”

“아니야. 난 레이첼 영애가 더 승산이 높다고 보는데? 남자들은 저런 연약한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고.”

“에이, 당연히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가 선택되시겠지. 제국 최고의 대귀족 가문인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스트반 백작가의 저력도 만만치 않아. 그리고 저 아름다운 레이첼 영애가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녹이면 이야기는 달라질걸?”

그렇게 그들은 갑론을박하였다. 한편 마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야. 의외로 황태자의 마음을 얻는 분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 두 가문 모두 정치적인 이득은 비등하니까.’

물론 저 황태자가 여인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안 가긴 했지만, 오늘 저 두 후보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철혈의 황태자라도,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이라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으리라.

‘마리, 이제부터 정신 차려야 해. 일단 어떤 분을 지지할지 먼저 결정하자.’

마리는 이 사자궁을 탈출할 ‘사랑의 큐피드 계획’을 떠올렸다. 이제 그녀는 저 두 후보 중 한 명을 도와 황태자와 맺어지는 데 도움을 줄 생각이다. 그리고 그 도움의 대가로 사자궁에서, 황태자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정신 차리고 잘하자, 마리!’

그렇게 황태자에게서 탈출할 의지를 돋울 때였다. 얼마 전 황태자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날 그렇게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 그 말이 갑자기 떠오른 것일까?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태자…… 는 나쁜 분이 아니지만.’

아니, 어쩌면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이제 마리도 그걸 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왠지 알 수 없이 찝찝한 마음이 들어 그녀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마 그가 자신에게 나쁘지 않게 대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그전까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섬기다 떠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나게 되겠지만 그의 시녀로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를 섬기다 떠나자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이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조금은 사라질 것 같았다.

마리는 다음 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정은 사자궁에 방문하는 분들을 시중들고…….’

그녀는 시녀복으로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후보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해.’

황태자비 간택 때 공을 세우려면 일단 후보들과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한다.

‘워낙 지고한 신분이라 쉽게 접근하기는 어려울 거야. 난 귀족도 아닌 일개 시녀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해내야 했다. 마리는 후보들에게 접근할 기회를 조심히 엿보기로 했다. 그런데 숙소에서 나서는 순간, 그녀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일이 일어났다.

“시녀 마리? 맞나요?”

“아…… 네. 제가 마리입니다.”

마리는 숙소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중년 여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왠지 깐깐한 인상이었는데,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잠깐 시간 괜찮은가요?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누구이신지?”

중년 여인은 콧잔등에 걸쳐진 안경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전 아리엘 공녀 저하를 섬기는 마틸다라고 해요. 공녀 저하께서 마리, 당신을 만나고자 해요.”

“……!”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마틸다는 어딘지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공녀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따라오세요.”

‘아리엘 공녀가 왜 나를?’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마틸다의 뒤를 따라갔다. 지고한 신분의 공녀가 일개 시녀인 나를 왜 보려고 하는 거지?

‘어쨌든 잘됐어. 어떻게든 만나서 연결 고리를 만들려고 했으니까.’

“다 왔어요.”

얼마 걷지 않아 공녀의 거처에 도착했다. 간택 후보, 델피나의 거처는 사자궁 바로 옆 별궁에 마련되어 있었기에 굉장히 가까웠다. 그 때문에 사자궁의 시녀들이 후보의 시중을 들었다.

“전해 듣기로 귀족이 아니라 들었는데, 공녀 저하께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다시 고압적인 말투.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마틸다는 노크하며 말했다.

“시녀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저하.”

슐레안 대공가에서 따라온 다른 시녀가 문을 열었다. 황태자비 후보답게 화려하게 단장된 방 안으로 들어가니, 어제 보았던 아름다운 미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리엘 공녀!’

고고한 장미 같은 모습. 이른 아침임에도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듯이 아름다웠다.

“아리엘 공녀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마리는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고, 공녀는 까닥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마리는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공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통은 계급이 높은 윗사람이 일어나라 한 다음 일어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공녀에게서 그만 일어나라는 말이 없었다.

‘뭐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공녀의 눈빛도 어딘가 이상했다. 높은 의자에 앉아 무릎 꿇은 자신을 아래로 깔아 보고 있었는데, 마치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절대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네가 그 마리?”

“네, 그렇습니다.”

“계급은? 몰락 귀족가 출신? 아니면 혹시 평민?”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불러 왜 이런 걸 물어보지?

“전쟁 포로입니다.”

공녀의 예쁜 눈매가 찌푸려졌다.

“전쟁 포로? 그러면 노예란 말이야?”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노예는 아니었다. 아랍 쪽 국가와 다르게 동제국에는 노예 제도가 없었으니까. 옆에 서 있던 마틸다가 정정해 주었다.

“전쟁 포로들은 황실의 소유물이긴 하나 노예는 아닙니다, 저하.”

“그게 그거잖아. 황실의 노예. 아니, 황실에서 일하는 농노에 가까운 건가?”

“…….”

마리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흠, 어쨌든 일어나서 서 봐. 제대로 좀 보게.”

마리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리엘 공녀는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궁금하지?”

“……네, 저하.”

“궁금해서 불러 봤어. 부군 되실 황태자 전하께서 특별히 아끼는 시녀가 있다기에, 어떤 아이인가 해서.”

공녀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전하께서 설마 너 같은 애를 첩으로 받지는 않을 테니.”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나를 부른 이유가?’

내가 황태자의 첩이 될까 확인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마리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좋게 보시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불면을 치료하기 위해서란걸. 그래도 그냥 혹시나 해서 확인하려 불러 본 거야. 어쨌든 확인했으니 나가 봐.”

마리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공녀는 고운 눈매를 다시 찡그렸다.

“뭐 해? 나가 봐.”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공녀의 거처에서 물러났다. 별궁에서 한참을 멀어진 후,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황태자의 첩?’

아무리 신분이 높다지만 지나치게 무례한 말이었다. 얼굴이 붉어지며 수치심이 치밀어 올라왔다.

‘진정해, 마리. 참자, 참아. 저런 무례한 말에 기분 나빠하면 너만 손해야. 똥 밟았다 생각하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마음을 다스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마음을 안정시킨 마리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쨌든…… 아리엘 공녀는 아니구나.”

소문대로 대단히 아름답지만, 가문의 권세에 오만하기 그지없는 성품. 그녀는 짧게 공녀를 평가했다. 곱게 자란 대귀족 자제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성격 유형이었다.

‘저런 성품의 아리엘 공녀가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얻는 건 쉬울 것 같지 않아.’

물론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것은 마리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황태자가 오만한 대귀족 아가씨에게 마음이 흔들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외모가 아름답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면 레이첼 영애를 만나 봐야겠구나.’

레이첼 영애가 어떤 성격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엘 공녀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조만간 레이첼 영애의 시중을 들 차례가 돌아올 거야.’

사자궁의 시녀들이 별궁의 시중까지 들게 되므로, 마리도 순번을 돌아가며 레이첼 영애의 시중을 들 것이다.

‘그때 기회를 엿봐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그런데 마리의 생각보다 빨리 기회가 찾아왔다. 그날 사자궁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어린 시녀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저…… 마리 님 되시나요?”

마리는 순간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못 알아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마리 님’이라 불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마리이긴 한데…… 무슨 일로?”

“아, 반갑습니다! 레이디 레이첼을 모시는 지나라고 합니다.”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이첼 영애를 모시는 시녀가 나를?

“정말 죄송한데…… 혹시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레이디 레이첼께서 마리 님을 뵙고 싶어 해서요.”

그렇게 마리는 하루 만에 아리엘 공녀에 이어 레이첼 영애까지 만나게 되었다.

“시녀 마리입니다. 레이첼 님을 뵙습니다.”

어제 봤던 청초한 인상의 미소녀가 마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 앉으세요.”

레이첼은 반가운 목소리로 마리를 맞았다. 아리엘 공녀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라 마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어떤 차 좋아하세요?”

“괘, 괜찮습니다.”

생각지도 못 한 환대라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손님으로 오셨는데, 아무것도 대접 안 할 수는 없죠. 지나, 가문에서 가져온 차를 내와 줘.”

“네,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어린 시녀가 따뜻한 차를 끓여 마리에게 내다 주었다.

“뜨거우니 조심히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마리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레이첼 영애를 살폈다. 일개 시녀에 불과한 자신을 너무 환대해 주니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왜 날 보자고 한 거지? 혹시?’

레이첼은 여린 외모만큼이나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영애. 그런데 어떤 일로 저를?”

레이첼 영애는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고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간단한 동작이건만, 기품이 저절로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사실 한 가지 용건이 있어서 마리 양을 뵙고자 했어요.”

“말씀하십시오.”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레이첼 영애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커다란 푸른 눈동자로 마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 돌리지 않고 말할게요.”

마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했다.

“저와 제 이스트반 백작가를 도와주세요.”

마리는 흠칫 놀라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애와 이스트반 백작가를 도와 달라니? 저는 일개 시녀에 불과합니다.”

“그 말 그대로예요.”

아름다운 소녀는 말했다.

“저는 이 간택에서 최종 선택받아 황태자 전하와 반드시 결혼해야 해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비 후보인 델피나이니, 당연히 황태자와의 결혼이 목표이리라. 하지만 레이첼 영애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으로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이 간택에서 선택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우리 가문의 운명이 달려 있어요.”

마리는 놀라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간택에 가문의 운명이 걸려 있다니…….”

레이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이후부터 저희 이스트반 백작가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더 시간이 지나면 손을 쓸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몰락할지도 몰라요.”

“…….”

“그런 저희 이스트반 백작가를 이전처럼 부흥시킬 방법은 단 하나. 제가 간택에서 최종 선택받아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저는 가문을 위해서 반드시 황태자비가 되어야 해요.”

마리는 레이첼 영애의 말을 알아들었다. 확실히 황태자와 사돈 관계를 맺으면 백작가는 단번에 부흥할 수 있으리라.

“저와 가문은 이번 간택에 사활을 걸었어요. 가문을 부흥시킬 마지막 기회나 마찬가지이니까요. 하지만 객관적으로 간택에서 선택받을 확률이 높은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리엘 공녀예요. 가문의 위세도 그렇고, 슐레안 대공가는 오랜 시간 동안 황태자 전하를 도와 온 우군이니까요.”

레이첼은 희미하게 떨리는 눈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전 마리 양이 이번 간택 때 저를 도와주셨으면 해요. 저에겐 마리 양의 도움이 필요해요.”

거기까지 들은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의 도움을 통해 황태자와 가까워질 생각인 거구나.’

그녀는 가만히 수를 따져 보았다.

‘일단 레이첼 영애의 제안은 내가 계획하던 바와 일치하긴 해.’

황태자비 후보가 황태자와 맺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게 마리의 계획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들려 하고 있었는데, 먼저 손을 내밀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마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저 영애를 도와주어도 될까?’

이리저리 거창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결국 가문의 영달을 위해 황태자와 결혼하겠다는 뜻인데, 과연 도와주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괜히 이유 없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마리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니 저 영애가 가문의 이득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나쁘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성품도 나빠 보이지는 않고. 간택되면 나쁜 황태자비가 될 것 같지는 않아.’

물론 그건 함부로 확언할 수 없는 문제긴 했다. 그래도 최소 오만한 아리엘 공녀보다는 나쁜 황태자비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한 마리는 레이첼 영애가 황태자와 맺어지도록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결론 맺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영애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황태자는 자신을 총애하고 있다. 그러니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는 많으리라. 그런데 레이첼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저은 것이다.

“아니, 전 마리 양께 그런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마리 양이 도와준다면 전하와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거야 저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마리 양의 ‘능력’이에요.”

“……네?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 한 이야기여서 마리는 멍하니 반문했다. 자신의 능력을 바란다고?

“다 알고 있어요. 마리 양께서 여러 분야에 걸쳐 굉장히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황태자 전하께서 마리 양을 총애하시는 것도 다 그 다재다능한 능력 때문이죠?”

“……!”

“제가 바라는 것은 간택 기간 중 마리 양이 그 ‘능력’으로 저를 도와주는 것이에요.”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레이첼이 얼굴을 굳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간택 기간 중 저는 수많은 일을 겪게 될 거예요. 그 일은 모두 황태자 전하의 귀와 눈을 통해 보고되겠지요. 엄밀히 말하면 간택 기간 중 벌어지는 모든 일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

마리는 놀라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말이었다. 황태자와 친분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간택 기간 중 슬기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저는 그 시험을 겪는 동안 마리 양이 여러 능력을 통해 저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마리 양의 도움을 통해 누구보다 좋은 결과를 내 전하 앞에서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

생각지도 못 한 제안에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레이첼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의 능력을 저를 위해 빌려 주세요. 그 대가로 마리 양이 원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들어드리겠어요.”

능력 있는 시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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