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사자궁은 점차적으로 바빠졌다. 이제 곧 황태자비 후보들이 입궁할 예정이니,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번 황태자비 후보께서는 두 분이신가요?”
“그래,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와 이스트반 백작가의 레이첼 영애가 최종 후보로 결정되었어.”
마리는 시녀들을 위해 마련된 휴게실에서 선배 시녀 레시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같은 시녀 휴게실이라도, 이전 하급 시녀일 때 사용하던 휴게실과는 호화로움이 차원이 달랐다.
“슐레안 대공가면 황태자 전하의 가장 큰 우군이군요. 반면 이스트반 백작가는…… 내전 당시 황태자 전하의 반대 측에 섰던 1황자파이고요.”
마리의 말에 레시아는 눈에 살짝 이채를 띠었다. 귀족도 아닌 마리가 정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응, 둘 모두 대단한 권세가지. 슐레안 대공가는 제국 최고의 대귀족 중 하나이고, 이스트반 백작가도 1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을 영도하던 수장이었으니까.”
“두 분 중 어떤 분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실까요?”
“글쎄, 그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결정하실 문제니까. 결국, 배경이 되는 집안을 보고 결정하지 않으실까?”
레시아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래도 아마 제국에서 손꼽는 권세를 지닌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가 최종 간택될 가능성이 높을 거야.”
레시아의 말은 옳았다. 현 제국의 최고 대귀족이라 하면 이 3개의 가문을 손꼽았다.
재상 오른의 소비엔 공작가!
황실친위대 단장인 키에르한 후작의 세이튼 후작가!
그리고 이번에 후보로 들어오는 아리엘 공녀의 슐레안 대공가!
강력한 힘을 지닌 대공가와 황실이 혈연관계가 되면 제국으로서도 큰 이득이니, 모두 아리엘 공녀가 최종 간택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까?’
하지만 마리는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문제는 아니야. 이스트반 백작가를 품으면 1황자파의 세력들 전부를 거둘 수 있으니, 그 이득도 어마어마해.’
그러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정말 철저히 정치적인 이유로 결정된 후보들이구나.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마리는 문득 든 생각에 속으로 혀를 찼다. 아내를 맞을 후보를 선택함에 있어서 황태자 본인의 생각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로지 기준이 된 것은 제국에 가장 큰 이득이 되는지의 여부! 물론 제국을 이끌 황태자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난 두 후보 중 어떤 후보를 도와드려야 할까?’
마리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자궁 탈출 계획을 떠올렸다. 그녀는 황태자비 후보를 은밀히 도와 나중에 그 도움을 대가로 사자궁을 벗어날 계획이었다.
‘어차피 양 가문 모두 정치적 이득이 비등하니 황태자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최종 간택이 될 가능성이 높아. 나는 상황을 봐서 황태자비 후보 중 한 분이 황태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은밀히 도움을 주는 거야.’
저 철가면을 쓴 황태자가 여인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도 목석은 아닐 거다. 그렇게 마리는 자신의 ‘사랑의 큐피드 계획’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꼭 잘하자. 성공해 반드시 황궁을 벗어나는 거야.’
마리는 그렇게 의지를 다졌다. 어쨌든 그때, 레시아가 물었다.
“마리, 황태자 전하의 시중을 드는 거 힘들지 않아?”
“아…… 괜찮아요.”
그 말에 레시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네.”
그간 마리는 몇 번 황태자의 시중을 더 들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정체가 들킬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은 정말 편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면 평생 직업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해 주기도 하고…….’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 차가운 황태자는 그녀에게 잘해 주었다. 그건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적에게는 한없이 냉혹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자비로운 성격인 건가. 하긴 거리 축제에서 봤던 백성들도 황태자를 존경했었지.’
마리의 머릿속에서 황태자에 대한 생각이 일부분 수정되었다. 적에게는 한없이 냉혹하지만, 자신의 것에는 관대한 군주로.
“그래? 난 황태자 전하 시중드는 거 정말 힘들던데. 우리 시녀들에게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괜히 긴장되고 무서워서.”
마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하긴. 황태자를 만나러 온 대신들도 모두 잔뜩 긴장하지.’
그러고 보니 황태자가 모두에게 잘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에게 차갑게 대했다. 특히 그에게 일을 보고하러 오는 대신들은 매번 저승사자라도 만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소한 일까지 황태자가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국정을 잘못 운영해 백성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생기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낮게 목소리를 깔며 질책하면,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리도 괜히 몸이 떨렸다.
‘시녀에게만 잘해 주는 건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레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외모는 정말 천사처럼 아름다우신데.”
마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태자 전하가 아름다우시다고요? 얼굴이 흉측해서 가면을 쓰는 게 아니고요?”
지금까지 마리는 황태자가 철가면을 쓰는 이유가 흉터라도 가리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아니야. 가끔 가면을 쓰지 않으시고 산책하러 나갈 때가 있는데, 너도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정말 너무나 아름다우시거든.”
무슨 장면을 상상하는지, 레시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정말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외모셔.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아마 황태자 전하일 거야. 이번에 후보로 입궁하는 아리엘 공녀와 레이첼 영애가 아니라.”
참고로 아리엘 공녀와 레이첼 영애는 제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여인들이었다.
‘에이, 설마.’
마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레시아가 지나치게 과장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흉터가 없다면 왜 가면을 쓰고 있는 거지?’
다음 날, 마리는 늦은 밤에 사자궁으로 출근했다. 당직 근무를 설 차례였다.
“앞으로 일주일간 당직 근무지?”
“네, 선배님.”
그녀와 교대하는 선배 시녀가 말했다.
“10시에 나와서 아침 6시에 정시 근무자와 교대하면 돼.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다가 황태자 전하가 부르면 그때 가 보면 되고.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그러며 그녀는 주의를 주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단 하나야. 혹시나 황태자 전하가 잠이 드셨을 때 절대 깨우면 안 된다는 것.”
그러며 덧붙였다.
“전하께서는 정말 잠을 잘 못 이루시거든. 그러니 간신히 잠이 드셨을 때는 절대로 방해하면 안 돼.”
그 말에 마리가 물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불면이 심하신가요?”
“응, 심한 정도가 아니야. 어제도 전혀 못 주무셨는걸. 그저께도 2시간도 못 주무시고. 간신히 잠이 드셔도 얼마 주무시지도 못 하고 금방 악몽을 꾸면서 깨곤 하셔.”
“…….”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불면을 앓고 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긴, 낮에도 종종 피곤한 기색을 보이긴 하셨지.’
처음 시중을 들 때는 몰랐지만, 그의 곁에서 하루 종일 있어보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악몽이면 어떤 악몽을?”
“글쎄, 그거야 전하께서만 아시겠지. 어쨌든 수고해.”
그렇게 마리는 사자궁에서 당직 근무를 시작했다. 당직 대기실에서 달빛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가 심한 불면을 앓고 있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존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였다. 하긴 의외인 면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직접 마주한 황태자는 지금껏 상상해 오던 삼두육비의 괴물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적에게 가차 없는 것은 맞는 것 같지만.’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기실 한편에 마련된 종 중 하나가 땡땡 하고 울렸다.
‘아, 황태자의 호출이구나.’
마리는 종의 종류를 확인했다. 집무실과 연결된 종이었다. 그녀는 집무실로 향했다.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근위대의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늦은 밤이라 알몬드 자작은 사자궁 내 침소로 취침하러 간 상태였다.
끼익. 문이 열리고 집무실의 책상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황태자의 철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
“전하를 뵙습니다.”
라엘은 왜인지 당직 시녀가 마리란 사실에 살짝 놀란 듯했다.
“오늘 당직은 그대인가?”
“네, 전하.”
“그렇군. 피곤하겠군.”
평소와 같은 낮은 목소리. 그런데 왜일까. 오늘 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서일까. 마리는 ‘피곤하겠군’이란 그의 말에 마음에 미묘한 파문이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 잉크가 다 떨어져서. 잉크와 종이를 조금 더 가져다주겠나?”
힐끗 보니, 그는 지방 행정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정말 끝없이 일하는구나.’
낮에도 하루 종일 일이었는데, 이런 늦은 밤까지 일이라니.
‘잠이 안 와서 그러는 거면, 저런 서류를 보는 것은 오히려 불면에 안 좋지 않을까?’
마리는 주저하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너무 늦은 밤까지 서류를 보는 것은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잠시 멈칫했다. 혹시 마리는 자신이 주제넘게 이야기해 불쾌하게 느낀 건가 염려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황태자가 철가면 밑에 드러난 입술의 입꼬리를 희미하게 들어 올린 것이다.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옅었지만, 분명 미소였다. 그가 웃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구나.’
황태자의 미소는 빠르게 사라졌다. 마치 그녀가 목격한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나도 자고 싶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인지 늘 잠을 이룰 수가 없군. 어차피 깨어 있을 것, 일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러며 그는 말했다.
“내가 조금 더 일하는 만큼 백성들이 그만큼 편안해질 테니.”
“……!”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은 이야기 죄송했습니다. 잉크와 종이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사자궁 구석에 자리한 창고에 가서 종이와 펜을 찾으며 생각했다.
‘이 동제국의 백성들은 축복받았구나. 저런 군주를 만나다니.’
이제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황태자는 명군(明君)이었다. 비록 적에게는 냉혹할지라도 말이다. 아니, 적에게 냉혹한 면은 그의 보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함일 것이다.
‘내가 그의 적이 아니었다면, 그랬으면 좋았을지도.’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아, 여기 있다.”
곧 잉크와 종이를 찾은 마리는 황태자의 집무실로 그것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물러가 보겠습니다. 혹시나 명하실 일 있으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마리는 예를 표하고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황태자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말씀하십시오.”
“오늘 밤은 밤새 대기하는 건가?”
“네, 전하.”
“그렇군.”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머뭇거린 후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였다.
“밤공기가 차가운데, 따뜻하게 입고 있어라.”
“……!”
마리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마리는 방을 나가려다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응, 왜 그러지?”
“밤이 늦었는데, 혹시 제가 차를 한잔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황태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까 전 봤던 옅은 미소였다.
“그것도 좋겠군. 부탁하지.”
마리는 가만히 차를 우릴 준비를 하였다. 공포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황태자의 의외의 면을 마주해서인 걸까? 이유 없이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왜 황태자에게 차를 끓여 준다고 했을까?’
잘 모르겠다. 불면으로 잠을 못 이루면서도 서류를 놓지 않는 모습이 자신의 가슴을 건드렸을지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따뜻한 차라도 한잔 드리고 싶었다.
‘이 정도 해드리는 것은 상관없겠지.’
그녀는 꿈속 내용을 떠올렸다.
「다도(茶道)는 마음의 수양이니, 깊은 마음으로 차를 우리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꿈속 동방의 여인은 다도에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똑같은 찻잎을 사용해도 그녀가 끓이는 차는 모두를 감탄하게 할 만큼 전혀 다른 맛이 났다. 그건 그녀가 차를 우릴 때 단순한 기교를 넘어서 마음을 다해 우리기 때문이다.
‘아니, 차를 끓이는 기교 자체가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
마리는 꿈속의 내용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이 점차 꿈속 동방 여인처럼 가지런해졌다. 가슴속 복잡함이 깊게 가라앉으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늦은 밤이라 좋은 물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쉽구나. 물은 차의 체(體)인데.’
먼 옛날부터 다도와 다례를 중시하던 동방과 다르게 유럽은 차를 끓이는 수준이 형편없었다. 그저 찻잎을 뜨거운 물에 넣고 우리는 것이 끝이었다. 따라서 차에 사용할 약수를 따로 보관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물의 종류보다 중요한 건 끓여 내는 과정이니까.’
너무 높은 온도로 끓여도 안 되고, 너무 낮은 온도로 끓여도 안 된다. 또한 너무 짧게 끓여도 안 되고, 너무 길게 끓여도 맛이 상한다. 그야말로 찻잎의 종류에 맞는 조화, 중정(中正)을 이루어야 상질의 차를 끓일 수 있는데, 오로지 깊은 정성이 있어야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되니 다도를 마음의 공부라 하는 것이다.
달그락. 달그락.
달빛 아래 찻잎을 담은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물에 일어나는 거품의 정도(형변, 形辨)와 물이 끓는 소리를 통해 온도를 가늠하며(성변, 聲辨) 마리는 마음속 떠도는 잡념을 잊었다. 그저 색과 향과 미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깊은 마음으로 차를 우려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차가 다 끓여졌다. 마리는 조심히 찻잔에 차를 따르고, 황태자의 집무실로 갔다.
“그건?”
“아랍의 상인들이 동방에서 구해 온 찻잎으로 끓였습니다.”
황태자는 깊게 퍼져 나오는 향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늘 마시는 차인데 오늘따라 향이 더 깊게 느껴지는군. 특별한 향료라도 쓴 건가?”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향을 섞으면 차의 맛이 상한다. 깊은 향이 나는 것은 찻잎에 맞게 조금 더 낮은 온도로 더 오랜 시간 우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법을 조금 달리해 보았습니다. 전하의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맙군.”
천천히 찻잔에 입술을 가져간 황태자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맑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 가득 퍼졌기 때문이다. 분명 늘 마시던 찻잎과 똑같은 종류일 텐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맑았다.
“이건…… 대단하군. 이전 동방에서 온 사신이 끓여 주었을 때의 맛과 흡사하구나. 네가 직접 끓인 거라고?”
“과찬이옵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마리에게 황태자는 진심으로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천고의 음악 솜씨에, 황실 주방장 못지않은 요리 실력, 사소한 단서로 범인을 추측하는 추리 능력 등에 이어 이런 다도 실력까지.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저 소녀는 끝없이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정말 대단하군.’
황태자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좋은 차를 내어주어 고맙구나.”
“아닙니다. 부족한데 좋게 여겨 주어 감사합니다.”
“아니야. 부족하지 않아. 그나저나 마리.”
라엘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무언가 진중한 그 목소리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전하.”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마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날 그렇게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난 며칠간 지켜보니 날 많이 어려워하는 것 같더구나. 난 널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네게 또 다른 능력이 있다면 나를 위해, 이 제국의 백성을 위해 사용해다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모두 지켜주겠다.”
황태자의 말에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며 뭐라고 입을 열려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도록.”
예를 표하고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온 마리는 문에 몸을 기댄 후 눈을 감았다.
“하아.”
그녀는 깊고 긴 숨을 내쉬었다. 방금 황태자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한편 방 안에 남은 황태자는 마리가 끓여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혀 주는 맑은 맛이 가슴에 퍼졌다. 라엘은 이전 동방의 사신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차를 끓이는 다도는 마음의 공부라 그랬지. 마음을 다해 끓이지 않으면 차 본연의 깊은 맛을 절대 낼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차는 저 소녀가 마음을 다해 끓였다는 뜻일까? 바로 자신을 위해서? 라엘은 속으로 실소했다. 이런 별스러운 생각을 떠올리다니. 확실히 내 마음이 이상하긴 한가 보다.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코끝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는 듯한 따뜻한 차향이 느껴졌다.
‘어쨌든 좋군.’
저 소녀가 직접 끓인 차여서 그런 걸까? 조금 더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느낌.
‘어쩌면…… 오늘은 조금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