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다음 날 마리는 드디어 호랑이 소굴 같은 사자궁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마리, 이제 자주 못 보겠네. 가끔 만나 줄 거지?”
같은 방을 쓰던 제인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자궁으로 근무처를 옮기게 되며 마리는 하급 시녀들의 단체 숙소가 아닌, 개인적으로 나온 방을 쓰게 되었다.
“그래도 부럽다. 사자궁이라니.”
제인은 동경의 눈빛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사자궁에 속한 시녀는 수많은 시녀 중 가장 존귀한 직책이다. 하급 시녀였던 마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벼락 승진이라도 한 상황.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했다. 하지만 마리는 곤란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자궁은 사지나 다름없었다. 황태자란 저승사자가 있는 사지(死地) 말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끝장이었다.
‘됐어. 더는 떨지 말자.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해.’
그녀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사자궁을 탈출하는 것.’
그리고 마리는 사자궁을 탈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곧 시작될 황태자비 간택 때 황태자비 후보를 도와 공을 세우는 거야.’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은 이른바 ‘사랑의 큐피드 계획!’. 그 유치한 이름의 계획의 골자는 간단했다. 기회를 엿봐 황태자비 후보가 황태자와 맺어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마치 사랑의 큐피드처럼 말이다. 분명 사자궁에 머물다 보면 도움을 줄 기회가 생기리라.
‘그러면 그 도움에 대한 대가로 나를 사자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 부탁하자. 내가 황태자의 개인 소유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이루어줄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녀도 고작 시녀인 자신이 간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기가 될 만한 작은 도움들 정도일 뿐. 그래도 그 정도라도 상관없었다. 도움을 받은 황태자비 후보는 분명 자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잘하자. 아니, 무조건 잘해야 해.’
황태자가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마리는 그렇게 굳게 다짐하였다.
그녀는 제인과 인사를 마무리한 후 사자궁으로 향했다.
‘일단 먼저 사자궁에 적응해야 해. 분명 텃세가 심할 거야.’
황태자가 거하는 사자궁에서 일하는 것은 시녀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직책이었다. 그런 만큼 사자궁의 시녀는 모두 귀족가 출신의 영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녀 같은 평민, 아니, 평민보다 못한 전쟁 포로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으니 가면 어떤 구박을 당할지 몰랐다.
‘그래도 구박에는 익숙하니까. 기죽지 말고 어떻게든 노력해서 자리를 잡자.’
그렇게 각오하며 사자궁에 들어갔는데, 생각지도 못 했던 인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워요. 마리 양인가요?”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중년 여인을 보고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네, 마리라고 합니다! 에슐린 백작 부인을 뵙습니다!”
에슐린 백작 부인! 이 사자궁을 넘어서 황궁 전체의 시녀들을 총괄하는 총시녀장이었다. 말단 시녀인 마리와 비교하면 까마득하게 높은 인물. 총시녀장인 그녀가 가진 권세는 가히 궁내부장인 길버트 백작에 비할 만했다.
‘왜 총시녀장님이 나를?’
고작해야 선배 시녀가 자신을 마중할 줄 알았던 마리는 생각지도 못 한 거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성(姓)은 없나요?”
당시 평민 중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네, 그냥 마리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에슐린 백작 부인은 돋보기안경을 곧추세우며 마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흠. 전하께서는 도대체 왜?”
마리는 그 시선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말이지? 하지만 백작 부인은 특별한 설명 없이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전에 일했던 곳에서 모두 평가가 훌륭하던데, 이곳에서도 잘할 거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몸이 힘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다만.”
백작 부인은 나직이 주의를 주었다.
“이곳 사자궁에서 만나는 분들은 모두 지고한 신분의 귀족들이에요. 그러니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그분들을 모시는 데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특히 순번을 돌아가며 황태자 전하의 시중을 들게 될 텐데, 그때는 꼭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세요.”
마리는 얼굴을 굳혔다. 황태자의 시중!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역시 황태자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구나.’
그런데 문득 그녀는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전하께서는 전담 시녀가 없으신지…….”
보통 황족이나 대귀족은 따로 시중을 전담하는 시녀와 시종들이 있었다. 이렇게 순번을 돌아가며 시중을 드는 경우는 드물었다. 참고로 이러한 시중을 드는 이를 전담 시녀라 부르며, 이들은 황족을 근처에서 보필하는 최측근인지라 최소 백작가 이상의 명문가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에슐린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따로 전담 시녀를 두지 않고 계세요.”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클로얀 왕국의 왕자들만 해도 전담 시녀, 시종을 우루루 데리고 다녔었다. 그런데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권세를 지닌 황태자가 전담 시녀를 안 두고 있다니?
“여러 번 전담 시녀와 시종을 두라고 권하긴 했었는데, 매번 번거롭다고 거절하더군요. 아마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어서인 것 같아요.”
“아…….”
그때 백작 부인이 묘한 눈빛으로 마리를 훑어보며 말했다.
“뭐, 혹시 모르죠. 이번에 전담 시녀가 한 명 생길지.”
그 알 수 없는 말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추가적인 설명을 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면 전 간택 후보분들을 맞을 준비를 하러 가야 하니, 추가적인 설명은 저기 레시아 양에게 듣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곧 레시아라 불린 소녀가 마리에게 다가왔다. 나이는 마리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뭔가 쉽게 말 걸기 어려운 기품 같은 것이 느껴지는 미소녀였다.
‘예쁘다. 당연히 귀족이겠지?’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레시아뿐이 아니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시녀 모두 상당한 미모와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최고의 영애들로만 가리고 가려 뽑은 티가 났다. 왠지 마리는 자신이 백조들 사이에 선 오리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레시아 폰 베나첼이라고 해.”
폰(Von). 도이칠란트 지방에서 유래한 귀족을 뜻하는 미들네임. 역시나 귀족이었다.
“아, 네! 선배님. 마리라고 합니다.”
마리는 뻣뻣이 대답했다.
‘분명 날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을 거야.’
그녀는 귀족 영애들이 갑자기 나타난 오리인 자신에게 심한 텃세를 부릴 것으로 예상했다. 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편하게 마리라고 부를게. 괜찮지?”
“아, 네!”
“오늘은 첫날이니 특별히 일은 안 해도 될 거야. 나랑 같이 다니면서 천천히 사자궁에 익숙해지면 돼. 설명을 들으며 이해 안 가는 것 있으면 물어봐.”
마리는 레시아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굉장히 친절한 말투였다.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뭐지? 처음이어서 그런가?’
하지만 아니었다. 레시아는 마리를 데리고 다니며 사자궁과 그녀들이 담당해야 할 건물들, 업무들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친절했다.
‘원래 굉장히 친절한 성격인 건가?’
그런 생각도 하였으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중간중간 만나는 다른 선배 시녀들도 마리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네가 오늘 오기로 한 마리? 힘들 텐데 잘 부탁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을 테니,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고.”
이해할 수 없는 친절.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해. 대놓고 텃세를 부리진 않더라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모두 잘해 주기만 하다니?’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다. 결국, 마리는 눈치를 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혹시 저한테 잘해 주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응, 이유?”
“그게…… 전 귀족도 아니고…… 다른 분들이 보시기에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들 잘해 주셔…….”
그 말에 레시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거? 네가 귀족이 아니라서 그래.”
“네, 그게 무슨?”
“넌 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사자궁에 왔잖아. 다른 분도 아닌, 황태자 전하께서 지목해서.”
“……!”
마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레시아가 하는 말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평민인 너를 사자궁에 오도록 하다니. 전하께서 너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고 계시기에 그렇게 명한 걸까?”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렇지 않은데…….”
레시아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전하와 네가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데, 감히 우리 같은 것들이 어떻게 너를 함부로 대하겠니?”
그녀는 겁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괜히 너를 잘못 건드려 황태자 전하의 진노를 사는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며 그녀는 말했다.
“황태자 전하는 정말 정말 무서우신 분이니까.”
이유를 알게 된 마리는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다들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물론 엄밀히 말하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맞을 테니까. 다만 시녀들이 생각하는 ‘특별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신기하게 여기는 거겠지. 내가 보여 준 여러 능력 때문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쓸데없는 텃세는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일도 어려워 보이지 않고.’
대충 교육을 받고 보니 높은 신분의 사람들을 시중든다는 것뿐, 특별히 일이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전에 일하던 험한 곳들에 비하면 가히 천국 같은 환경! 문제는 단 하나. 황태자였다.
‘당장 내일부터 황태자의 시중을 들어야 해. 지나치게 긴장하면 더 이상하게 보일 테니 조심하고, 사자궁에서 탈출하는 날까지 힘내자!’
하지만 늘 그렇듯, 마리의 의도대로 일이 풀릴 리가 없었다. 최근 그녀의 인생은 있는 대로 꼬여 있으니까. 황태자를 시중들기 전날 밤, 그녀는 또 꿈을 꾸게 되었다.
‘또 웬 꿈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마리는 꿈속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하필 황태자를 시중들어야 하는 전날, 자각몽을 꾸게 되다니! 이제 이 자각몽은 능력을 선물해 주는 꿈이라기보단 사고를 예고하는 꿈처럼 느껴졌다.
‘안 돼. 그냥 차라리 일어나자. 꿈을 꾸기 전, 잠에서 깨면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마리의 의식 속으로 마치 그림을 보듯 선명하게 꿈속의 내용이 들어왔다.
「날씨가 좋구려, 연매.」
「네, 가가(哥哥).」
동방을 배경으로 하는 꿈이었다. 산들바람이 부는 산속의 정자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연인 관계인 듯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애틋했다.
「이건 어떤 차요, 연매?」
「낙양에서 구해 온 백차이옵니다.」
여인이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신 남자는 편안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역시 훌륭하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차를 우릴 수 있는 거요?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이 차 한잔에 떠내려가는 듯하니.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요?」
남자의 감탄에 여인은 가만히 웃으며 답했다.
「성어중형어외(誠於中形於外)라, 그저 마음을 다할 뿐입니다.」
꿈이 끝난 후 마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다행히……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꿈은 아니네.”
모차르트 꿈, 의무병 꿈, 탐정 꿈 등등에 비하면 굉장히 잔잔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차야 원래부터 그럭저럭 끓였었는데.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늘 그렇듯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어쨌든 대형 사고는 안 일어날 건가 보구나. 다행이야.’
다소 안도한 마리는 숙소에서 나와 사자궁으로 향했다. 새로 배정받은 개인 숙소가 사자궁 바로 옆이어서 그녀는 곧 사자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저 나와 있던 선배 시녀가 그녀를 맞았다.
“마리, 왔구나. 오늘은 네가 전하를 시중드는 날이니?”
“네, 선배님.”
“너무 긴장할 것은 없어. 피의 황태자라 불리는 분이긴 하셔도, 우리 시녀들에게 까탈스럽게 대하지는 않으시니까.”
그러며 선배 시녀는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물론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마리는 당황해 손을 저었다. 황태자가 자신을 직접 사자궁으로 부른 탓에 뭔가 다들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저는 전하와 그런 사이가.”
“그래, 그래. 그렇겠지. 어쨌든 수고해.”
선배 시녀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저런 삐쩍 마른 평범한 아이를 도대체 왜 황태자 전하가?’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리는 발끈하여 속으로 외쳤다.
‘다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물론 그래 봤자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고, 간단한 다과를 들고 황태자의 집무실 앞에 섰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곧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몇 번 와본 탓에 익숙한 느낌이 드는 황태자의 집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석의 피아노. 응접용 테이블과 의자. 늘 황태자의 옆자리를 지키는 거구의 호위 기사 알몬드를 뒤로하여 섬뜩한 철가면이 눈에 들어와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 라엘이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서류를 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인가?”
“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두근. 긴장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토끼가 맹수를 마주할 때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긴장을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다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혹시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조심히 황태자의 책상 위에 다과를 올려놓은 마리는 집무실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집무실에 대기하며 황태자가 불편함이 없도록 시중드는 일이다. 힘들 것은 없는 일이지만, 저 황태자와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니, 어마어마하게 불편했다.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그렇게 불편한 침묵 속 시간이 흘렀다.
사각사각. 황태자가 펜을 놀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인 고요함이 방 안을 메웠다. 그런데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가 서류를 보는 와중에 힐끗힐끗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뭐지?’
처음엔 그냥 우연히 이쪽을 보는 것인가 했다. 곁눈으로 힐끗힐끗 볼 뿐, 정면으로 그녀를 주시했던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황태자는 분명 자신을 보는 것이 맞았다.
‘왜 저렇게 보지? 시킬 일이 있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마리의 말에 황태자는 흠칫 놀라기라도 한 듯 몸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라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시간이 지나자,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황태자가 서류를 읽으며 이런 말을 툭 던진 것이다.
“다리가 아프진 않나?”
마리는 순간 누구에게 이야기한 것인지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마리?”
“아, 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계속 서 있는데 힘들진 않나?”
생각지도 못 한 질문에 마리는 당황했다.
“괘, 괜찮습니다.”
“그래?”
“네.”
사실 오랫동안 서 있다 보니 다리가 욱신욱신 쑤시긴 했다. 차라리 걷는 게 낫지, 가만히 서 있으려니 더 고역이었다. 그래도 곧이곧대로 황태자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마리의 대답에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무언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중얼거림이라, 마리가 다시 의문을 품으려는 찰나, 황태자가 상상하지도 못 한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앉아 있도록.”
“……네?”
마리는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앉아 있어.”
마리는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시녀인 나 보고 앉아 있으라니?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 앞에서.”
“굳이 서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 예법에 어긋납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철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진 않았으나, 왠지 못마땅해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알몬드.”
“네, 전하.”
“시녀가 황태자 옆에서 대기 중에 서 있어야 한다는 궁중 예법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궁중 규율을 집대성한 책에 그런 내용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앉아.”
마리는 입을 벌렸다. 아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 궁중 규율에 안 적혀 있지!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설마 날 시험하려는 건가? 예법을 어기게 해 그 핑계로 목이라도 치려고?’
물론 그럴 리가 없었지만, 마리는 너무 당황해 그런 생각마저 하였다. 그때 황태자가 나직이 말했다.
“모든 예법보다 내 명령이 우선이다. 그러니 앉아.”
“……!”
결국, 마리는 옆에서 작은 의자를 가져와 조심히 앉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왜 저러시는 거지? 설마 정말로 내가 다리가 아플까 배려해서?’
앞뒤 정황을 따지면 그것밖에 이유가 없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을 배려해 준 거라고? 처녀의 피로 주스를 만들어 마신다는 소문까지 도는 저 피의 황태자가? 마리는 힐끗 황태자를 바라보았지만, 철가면 속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태자는 묵묵히 서류를 읽을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혼란 속에서 시간이 다시 흘렀다. 황태자는 마치 일하는 기계처럼 꿈쩍도 않고 서류를 읽고 또 읽었다. 중간중간 정무를 논하기 위해 오는 대신들을 맞는 것을 제외하고는 쉬지도 않았다.
‘저렇게 안 쉬어도 되나. 밥도 대충 빵으로 때우던데.’
옆에서 지켜보던 마리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할 정도. 그런데 그렇게 있을 때였다. 돌연 황태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혹시 시키실 일이라도?”
“힘들진 않나?”
“네? 네?”
그녀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중간중간 찾아온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을 뿐,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자신이 뭐가 힘들겠는가.
“괜찮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황태자가 또 생각지도 않은 명령을 내렸다.
“계속 옆에서 대기하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지 않았는가? 잠시 나가서 쉬었다 오도록.”
마리는 괜찮다고 하려 했으나, 왠지 따르지 않으면 또 뭐라고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조심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면 잠시만 나갔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순간.
“하아.”
황태자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라엘은 가면을 벗고 지친 표정을 한 채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전하?”
호위 기사 알몬드가 물었다.
“아아, 괜찮다. 불편한 것은 없어.”
라엘은 고개를 저었으나, 알몬드는 의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황태자가 오늘따라 이상했다. 딱히 꼭 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라엘은 그렇게 눈을 감고 한참이나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복잡한 머리라도 정리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고개를 젓고, 철가면을 쓴 후 그는 다시 평소처럼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알몬드는 그런 주군을 보며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는 황태자의 명대로 짧은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무실에 돌아온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호위 기사인 알몬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근위대에 일이 생겨 해결하러 갔다. 아마 한참 걸릴 거다.”
황태자가 짧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별생각 없이 대답하고, 본인의 자리로 향한 마리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잠깐. 그러면 이 방 안에 황태자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 거야? 계속?’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침에 확인한 스케줄상 앞으로는 방문할 사람도 없었다. 알몬드가 한참 늦는다고 했으니, 몇 시간인지 모를 시간을 황태자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워낙 두려워하던 상대여서 그럴까, 이유 없이 긴장감이 확 올라갔다. 그녀는 뻣뻣이 굳어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려 했다.
한편 황태자는 그녀가 그러든 말든 묵묵히 서류를 읽고, 검토하고, 결제했다. 아침부터 계속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건만 지치지도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10분, 20분, 30분, 1시간, 2시간…… 얼마나 지났을까? 마리에게 생각지도 못 한 큰일이 닥쳤다.
‘크, 큰일 났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치마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조, 졸려!’
마리에게 일어난 큰일! 그건 급격하게 몰려온 졸음이었다.
‘안 돼. 정신 차려, 마리. 황태자 앞에서 졸 수는 없잖아!’
사실 최근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은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몸이 피로한 상태였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황태자가 서류를 읽는 모습만 보고 있으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단둘이 있다는 사실에 긴장해서 그나마 나았지만, 계속 아무런 일도 없으니 긴장도 풀리고 수마가 몰려왔다.
‘안 돼. 안 돼. 무서웠던 일을 생각하자.’
그녀는 황태자 앞에서 졸음에 빠지는 초유의 사태를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무서운 생각을 하고,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꼬집고 등등. 처음엔 그런 노력 덕분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졸음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졸면…… 안…… 되는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편 서류를 보면서도 계속해서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던 라엘은 마리가 잠든 것을 금방 눈치챘다.
“마리?”
“…….”
“마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녀에게 라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정말 깊이 잠에 빠졌는지, 마리는 그가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하아.”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라엘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이 소녀를 괜히 옆에 둔 것일까?’
사실 그는 오늘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했다. 하루 종일 서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이 소녀가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이다.
‘이 답답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차라리 먼 곳으로 보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나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소녀를 못 본다고 생각한 순간, 아득한 상실감이 그를 괴롭혔다.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듯한 상실감이었다.
‘이 소녀는 본인이 나를 이렇게나 괴롭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는 잠에 빠진 마리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순수한 소녀의 얼굴. 피로 물든 자신과는 전혀 다른 맑은 모습이어서일까?
‘마리.’
그는 홀린 듯 손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향해 가져갔다.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고,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
‘마리.’
라엘은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듯한 갈망을 느꼈다. 그의 손가락이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만지듯 조심히 움직였다. 천천히 뺨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그녀의 붉은 입술로 향했고, 이윽고 입술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라엘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거냐, 라엘! 잠들어 있는 소녀한테.’
그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군.”
저 소녀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것 같았다. 그는 집무실을 나가려다 눈을 돌려 다시 마리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집무실 한편에서 담요를 꺼내 마리에게 덮어주었다.
“하아.”
가슴을 떠나지 않는 답답함에 그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마리는 퍼뜩 눈을 떴다.
‘맙소사! 내가 정말 잠든 거야? 황태자 앞에서?!’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황태자 곁에서 일한 첫날. 상상도 못 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어, 얼마나 잠든 거지?’
그녀는 공황에 빠져 창밖을 바라봤다. 어둡게 변한 창밖엔 하얀 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망했다.’
그녀는 망연한 얼굴로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잠들었던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때 무뚝뚝한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이제 일어났나?”
황태자의 호위 기사인 알몬드 자작이었다. 마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
마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피곤했다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저질러서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다. 어차피 전하도 계속 안 계셨으니.”
그 말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알몬드만 있을 뿐, 황태자가 보이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볼일을 보러 나가셨다.”
“아…….”
마리는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자는 모습을 황태자가 계속 지켜봤으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민망했을 것이다.
‘조심하자고 그렇게나 다짐하고 와 놓고서는 황태자 앞에서 졸다니.’
그녀는 자신이 굉장히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까다로운 황족이었으면, 경을 쳐도 할 말 없는 실수였다.
“그만 돌아가서 쉬어라. 시간이 늦었으니.”
“하지만 전하께서 침소에 드실 때까지…….”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담해서 시중들 때는 상대가 침소에 들 때까지 시중을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황태자가 침소에 들어야 마리의 오늘 업무도 끝인 것이다. 그런데 알몬드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아, 처음이어서 전해 듣지 못했나 보군.”
“네?”
“황태자 전하께서는 불면을 심하게 앓으셔서 밤마다 거의 주무시지 못하신다.”
“아…….”
뜻밖의 이야기였다. 피의 황태자가 불면증을 앓고 있다고? 그것도 거의 잠자리에 못 들 정도로 심하게?
“그러니 침소에 들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나머진 당직을 서는 이가 담당할 테니 너도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네, 알겠습니다.”
마리는 알몬드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집무실을 나가기 전,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까 전, 담요 감사했습니다.”
“담요?”
알몬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마리는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
“네, 아까…… 제가 졸고 있을 때 담요 덮어주셨잖아요.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몸에 덮여 있던 담요가 알몬드가 덮어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덮어준 것이 아니다.”
“네? 그러면?”
“글쎄? 모르겠군. 어쨌든 난 아니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니라고?
‘그러면 누가? 알몬드 경 말고 방 안에 있던 인물이 누가 있었지?’
생각을 더듬던 마리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알몬드 말고 방 안에 있던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황태자 라엘, 그밖에 없었다.
‘설마?’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가 졸고 있는 자신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고?
‘그럴 리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으나, 황태자 말고 그 방에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리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