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그렇게 대망의 가면무도회가 끝났다. 다음 날 마리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젠 정말 즐거웠어.’
물론 시끌벅적하고 방탕한 가면무도회는 전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친구와 함께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키엘 님.’
그녀는 어젯밤 자신과 함께했던 친구를 떠올렸다. 착하고 고마운 그는 심지어 어젯밤 헤어질 때 자신의 저택에 초대까지 해주었다.
‘물론 실제로 방문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늘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과자라도 만들어 드려야겠다.’
어젯밤 수다를 떨 때 그는 예전에 자신이 해준 과자를 몇 번이나 칭찬하였다. 그가 맛있게 먹었다고 하니, 그녀는 기회를 봐서 다시 한번 과자를 선물하기로 했다.
“으아,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네. 이제 다시는 그런 무도회에 참석할 일이 없겠지?”
마리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문득 그녀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한바탕 꿈같은 무도회가 지나고, 자신에게 닥칠 일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오늘 주어진 휴가만 지나면, 사자궁으로 가야 해.’
오늘은 수잔 시녀가 자신을 배려해 특별히 준 휴가 날이다. 잠깐 궁 밖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온 후에는 황태자가 있는 사자궁으로 가야 한다.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어. 이제부터 정말 정신 차리고 잘해야 해.”
무도회에 참석하고 그녀는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를 하였다. 황태자 개인 소유의 시녀가 되었으니, 사자궁에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사자궁에서 빠져나오는 거야. 그러지 못하고 계속 피의 황태자 곁에 머물다간 언젠가 정체를 들켜 단두대에 목이 잘릴 거야.’
그러니 무조건 사자궁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황태자가 직접 자신을 지목했으니, 황궁의 총괄 시녀장이라도 자신을 다른 곳으로 빼 주진 못한다. 하지만 마리에게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이제 황태자비 간택이 시작돼. 간택 기간 중 황태자비가 될 분을 최대한 도와드리자. 그리고 간택이 이루어지면, 다른 곳으로 빼 달라고 부탁하면 돼.’
황태자비 간택! 동제국의 오래된 전통으로, 황태자비가 될 후보들을 궁에 입궁시켜 황태자와 친분을 쌓게 한 후, 그중 한 명을 최종적으로 간택하는 것이다.
‘황태자를 직접 시중들 일도 많을 테니, 황태자비가 될 분을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있을 거야.’
황태자비가 될 분을 도와주는 데는 대단한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황태자의 옆에 머물 테니 은근슬쩍 도와줄 수 있는 일은 많으리라.
‘더구나 내게는 남들이 모르는 능력이 있으니까.’
원한다고 ‘그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능력이라면 결정적일 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황태자비가 될 분을 도와드릴 수 있으면 그분께 부탁해 사자궁에서 벗어나야지. 정말 일이 잘 풀리면 전쟁 포로의 신분을 벗고 자유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자유인! 그녀에게 반드시 필요한 신분이었다. 이 살얼음판 같은 황궁을 못 떠나는 것도 그녀가 황제, 아니, 이제는 황태자의 개인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유인이 되어 황궁을 떠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황태자비로 결정된 분이면 친분 있는 시녀 한 명 정도는 자유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거야.’
물론 황태자가 직접 자신을 본인의 개인 소유로 지목했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녀는 그가 그랬던 이유가 순간의 흥미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다. 신기한 것을 볼 때 생기는 흥미 같은 것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사라지리라.
‘자! 꼭 잘하자, 마리. 사자궁, 아니, 자유인이 되어 이 황궁을 벗어나는 거야!’
그녀는 황태자비 간택 기간 중, 사랑의 큐피드가 되기로 결심했다. 물론 마리의 그런 결심이 어떤 결과가 되어 그녀에게 돌아올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궁 밖을 나섰다. 특별 휴가를 받았으니, 오늘 하루는 궁 밖으로 나들이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조심히 다녀와, 마리! 외진 거리는 돌아다니지 말고!”
“응, 잘 다녀올게!”
제인의 걱정스러운 외침에 마리는 손을 흔들었다. 동제국 황궁에 온 지도 벌써 3년. 처음으로 황궁 밖을 벗어나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사자궁에서 황태자를 보며 살얼음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니, 오늘은 실컷 놀다 들어가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황도의 거리로 향했다.
“여기 와서 구경하세요, 아가씨!”
“이것 좀 먹고 가세요!”
마리는 시끌벅적한 거리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아, 아직도 거리 축제가 안 끝났네?’
황궁의 공식적인 축제는 끝났지만, 거리에서는 아직 축제를 진행하고 있는 듯했다.
‘신난다.’
그녀는 흥겨운 분위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한편 그때, 사자궁에서는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황태자가 옷을 갈아입고 외유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로 혼자 가시겠습니까? 근위 기사를 대동하는 것이…….”
알몬드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근위 기사를 데려가면 무슨 암행을 할 수 있겠나. 백성들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려면 혼자 가는 것이 나아.”
“그래도 위험합니다.”
알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황태자는 이런 문제로 늘 자신을 힘들게 했다. 라엘은 허리에 찬 검을 툭툭 쳤다.
“위험? 황도 내에서 날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키에르한 후작 정도면 모르겠군.”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피의 황태자라 불리는 라엘의 검술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보통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적수를 찾기 어려웠다. 제국 최강 기사라 불리는 키에르한 후작과 동급의 실력.
그건 라엘이 검술을 열심히 연마했다기보다는 검술을 포함한 다방면의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실 라엘이야말로 불공평한 재능을 지닌 천재였다. 당연히 일반 근위 기사들보다는 몇 수는 위의 실력.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호위가 필요 없긴 했다.
“……그래도 다시 고려해 주심이. 궁 밖에서는 어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날지 모릅니다.”
“괜찮다. 그대들이 있으면 백성들을 살피는 데 방해가 돼.”
거인 같은 덩치의 알몬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괴물 같은 검술을 지니고 있어도 궁 밖에서는 돌발 사태에 대비해 웬만해서는 호위를 동행했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다. 결국 늘 그랬듯 알몬드는 황태자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평복에 가면을 벗은 맨얼굴로 궁을 나온 황태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몬드에게 미안하군. 고집을 부려서.’
그도 안다. 자신이 고집을 부렸음을. 민심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황태자인 자신의 안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었으니.’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어젯밤 가면무도회 이후로, 정확히는 그 소녀가 키에르한과 다정히 춤추는 것을 본 이후로 머리가 계속해서 복잡했다. 어떻게든 이 복잡함을 털어 내고 싶어 혼자 나오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궁 밖 거리를 돌며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지겠지.”
그는 황도의 거리로 향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라엘이 선택한 길은 아직 거리 축제가 한창인, 방금 마리가 향했던 그 거리였다.
* * *
‘와아!’
마리는 활기찬 거리 축제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처음 도시에 올라온 시골 처녀처럼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역시 난 황궁 대연회나 가면무도회 같은 것보다 이런 축제에 더 잘 어울려.’
클로얀 왕궁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녀도 이런 거리에서 살았었다. 어머니는 길거리 노점에서 잡화를 팔며 홀로 자신을 길렀다. 따라서 이런 거리는 그녀에게 고향처럼 익숙했다.
‘엄마 보고 싶네. 천국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길거리에 길게 늘어선 노점 좌판을 보니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엄마와 지낼 때가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비록 가난했지만 말이다. 괜히 울적해지려 해 그녀는 휙휙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축제에 정신을 집중했다.
‘고향에서 보던 축제보다 훨씬 더 시끄럽구나. 번화하고.’
그녀의 고향은 작은 시골이었다. 지금은 제국과의 전쟁 중 불에 타 마을 자체가 사라졌는데, 그 시골 거리와 제국의 중심인 이곳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났다.
“아가씨! 여기 와서 구경하고 가세요!”
“싸게 해드릴게요!”
활기찬 호객 행위에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한참을 거리를 돌아다니다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굉장히 밝구나.’
클로얀 왕국과의 전쟁에서 시작된 황자들의 내전이 끝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아직 전쟁의 참화를 씻기에는 이른 시기.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 제국을 통치하는 이의 역량이 굉장히 뛰어난 것이다.
‘현 황제인 토른 2세는 당연히 아니고…….’
토른 2세가 쓰러져 의식을 못 차린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숨만 붙어 있을 뿐, 소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무엇보다 토른 2세는 폭군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의 통치 아래 백성들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두 황태자의 통치력.’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제국으로 끌려온 후, 3년간 황궁에만 갇혀 지내 외부의 사정을 잘 몰랐다. 냉혹하고 자비 없는 행보로 피의 황태자라 악명 높은 그가 이런 선정을 베풀고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다.
‘하긴 클로얀 지방에도 나름 선정을 베풀고 있다고 했지.’
그러고 보면 거리 곳곳에서 축제 기운에 취해 황태자의 영광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황태자를 부르는 백성들의 얼굴엔 공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존경도 공존했다.
‘적에게는 무자비하지만, 백성들에게 나쁜 군주는 아니구나.’
잔인하고 냉혹한 행보가 꼭 백성들을 향한 통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명군(名君).’
황태자는 적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는 두려운 존재였지만, 자신의 백성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통치자로 보였다.
‘문제는 난 그의 적에 속한다는 거지.’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얀 왕국의 마지막 후예인 자신은 황태자가 볼 때 명명백백한 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백성과 제국을 위해 일말의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목을 베어버리리라.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오늘은 축제에나 집중하자. 내일부터는 또 살얼음판이니.’
꼭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켜 사자궁, 아니, 황궁을 탈출하리라 결심한 마리는 다시 축제에 빠져들었다.
“자, 아가씨! 이거 맛 좀 봐요!”
“이것도 먹어 봐요!”
거리 곳곳에 먹음직스러운 먹거리와 살 거리가 그녀를 유혹했다. 마리는 바삭하게 튀겨진 과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먹고 싶다. 하나 사 먹을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나들이를 나오긴 했지만, 돈을 넉넉히 가져오지 않았다. 적지 않은 돈을 받는 다른 시녀들과 다르게 전쟁 포로인 그녀는 봉급이 형편없이 적어 최대한 아껴 써야 한다.
‘아쉽다. 저것도 먹어 보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은데.’
그래도 눈요기만으로 즐거우니까. 마리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길거리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가 있다는 것을.
‘…….’
금발의 머리, 마치 그림과도 같이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선. 가면을 벗고 암행을 나온 황태자 라엘이었다.
“저 소녀는 왜 또 여기에…….”
라엘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궁에서 나온 그는 바깥바람을 마시며 기분 전환을 하고 있었다.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하지만 황궁을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마셔도, 마음속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떨쳐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제발 정신 차려라, 라엘.’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라엘의 눈에 믿을 수 없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녀가 보인 것이다.
‘……헛것인가? 왜 저 소녀가 여기에?’
라엘은 눈을 깜빡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저 소녀도 황궁 밖으로 외유를 나온 것이다. 그것도 그가 외유 나올 때와 같은 시간에.
‘하필 이런 우연이. 다른 곳으로 가야겠군.’
저 소녀를 보고 있으면 마음속의 혼란만 커지니,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향하지 못했다. 갑자기 더럭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궁에서 혼자 나온 건가?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에, 불세출의 검술을 지닌 그도 황궁 밖을 나올 때 호위를 대동한다.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작은 소녀가 홀로 돌아다닌다고? 불한당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빌어먹을.’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그런 걱정이 들자, 도저히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없었다. 실제로 소녀의 외모가 귀여운 탓인지,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길. 눈 치워.’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질 나빠 보이는 놈들이 소녀를 훑어보자, 그는 살심이 치솟았다.
‘다 베어버릴까.’
젠장, 저 소녀는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인가. 저렇게나 무방비하다니. 그는 그렇게 혹시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남몰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라엘은 그녀의 뒤를 따르다가 또다시 못마땅한 모습을 목격했다.
‘뭘 저렇게 고민하는 거지?’
그는 마리가 자판의 음식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엄청 먹고 싶은 표정으로 음식들을 보다가 쓸쓸히 고개를 저었는데, 그걸 한 번도 아니고, 매번 반복했다.
‘왜 저러는 거지? 그냥 사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 평민들 기준으로도 비싼 음식은 아닐 텐데.’
그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돈이 없는 건가?’
라엘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봉급을 받고 고용된 시녀가 아닌, 전쟁 포로라 제대로 된 봉급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물론 이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저 소녀는 시무룩한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돌아가면 당장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에게 전쟁 포로로 끌려온 시녀들의 봉급을 조정하라 일러야겠군.’
그렇게 마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봉급 상승의 쾌거를 이루었다.
한편 마리는 자신의 뒤를 황태자 라엘이 쫓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채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이것저것 구경하다 거리 구석에 도착한 그녀는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어? 이건?’
엄청나게 낡은 피아노였다!
‘누가 버린 건가?’
사람들이 오가며 신기하다는 듯 건반을 눌러 봤다. 그런데 이리저리 줄이 끊어진 건지, 제대로 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흰 건반은 대부분 끊어져 있구나.’
마리도 피아노를 이리저리 눌러 봤다. 검은 건반 외에는 거의 사용이 불가능한 지경이라 버려 놓은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곡이 떠올랐다.
‘곡을 연주해 봐도 될까?’
모두가 흥겹게 먹고 마시며 즐겁게 노래 부르는 축제이니, 그녀도 단순히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닌, 어느 정도 참여를 하고 싶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검은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거리 여기저기에 악사도 많으니까 조금 연주해도 될 거야.’
어차피 이곳엔 자신이 누군지 아는 이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한 곡은 흑건(黑鍵, Black key). 흰건반 줄이 대부분 상했기 때문에 선택하게 된 검은건반 음표로만 이루어진 곡이었다.
‘축제이니, 가볍고 신나게.’
딴. 딴.
짧은 스타카토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피아노 소리에 잠시 멈추어 섰다. 흑건, 내림 G 장조(G flat Major). 마치 춤을 추듯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건반 위를 두드렸다. 탬버린이 울리듯 그 경쾌한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누구지? 새로운 악사인가?”
“엄청 잘 치는데?”
사람들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축제의 흥을 돋우는 신명 나는 연주였다. 춤이라도 따라 추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거 고장 난 피아노 아니었어?”
“그러게? 고쳤나?”
“아니야. 방금 내가 쳐 봤는데 소리 안 나던데?”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고장 난 악기인데 너무나 좋은 소리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사람들 틈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던 라엘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건반만으로 연주하고 있군. 역시 대단해.’
검은 건반으로만 연주하는데, 곡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마치 거리 축제를 위해 따로 준비한 것 같은 곡이었다. 단순히 시끄럽고 높기만 한 곡조가 아니라, 곡 자체로도 상당한 완성도가 있었다. 듣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좋군.’
그는 눈을 감고 마리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했다. 그녀 때문에 심란했는데, 그녀의 피아노 연주로 위안받고 있다.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곡은 듣기 좋았다.
“와아! 최고다!”
“브라보!”
짧은 즉흥 공연이 끝나자 모여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개중에는 거리로 구경을 나온 귀족가의 인물도 일부 보였다.
툭. 툭. 투둑.
곧 마리의 앞에 수없는 동전이 쌓였다. 그녀가 전문 악사인 줄 안 사람들이 훌륭한 연주의 사례로 동전을 던져 준 것이다.
“한 곡 더! 한 곡 더!”
어느새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외쳤다. 그녀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 당황해 한 곡을 더 연주 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후아. 무슨 사람들이 그렇게.’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몰렸는지, 조금만 더 있다가는 아예 빠져나오지도 못 할 뻔했다. 그래도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다. 재미도 있었고.
‘그리고 돈도 벌고.’
마리는 수북이 쌓인 동전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혹시나 황궁을 나올 수 있게 되면 피아노 연주로 먹고살아도 되겠구나.’
그렇게 그녀는 다시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제를 구경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마리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마리가 연주의 사례로 받은 동전을 챙기고 떠날 때,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있었단 것을.
“……!”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복잡한 인파 속으로 들어간 마리를 시야에서 놓친 것이다.
“어디로 간 거지?”
시간이 지나며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자 거리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거리에는 골목도 수없이 뻗어 있어 그녀가 어느 쪽으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다가 흠칫 멈추어 섰다.
‘내가 왜 그 소녀를 찾는 거지? 그냥 각자 갈 길 가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따라다닌 것만으로도 우스운 일이었다. 이 거리에 혼자 다니고 있는 여성이 그녀 한 명도 아니고, 알아서 축제를 즐기다 황궁으로 돌아오겠지.
‘이제 그만 따라다녀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그는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갑자기 든 불안한 느낌만 아니면.
‘어린애도 아니고 별일 없겠지?’
제국 수도의 치안은 다른 나라의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편이었다. 모두 그가 치안에 신경 쓴 덕이었다.
‘그러니 괜찮을 거야.’
하지만 왜일까?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제기랄.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나 한번 확인하고 가자.’
그래, 귀엽게 생겼으니까. 어쩌면 흑심을 품은 못된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괜찮은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확인하고 가자.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소녀는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젠장, 어디에 있는 거지? 혹시 진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불길한 마음이 커졌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대로를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자, 다급한 마음에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 소녀요? 못 봤는데요?”
“못 봤는데…….”
‘이런 빌어먹을!’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아마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축제를 즐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하단 말인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 소녀의 밝은 얼굴을 확인해야 이 불안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으슥한 골목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해!”
“……!”
바로 옆의 허름한 건물 안이었다. 라엘은 생각할 것도 없이 삐그덕거리는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그렇게나 찾던 그녀를 발견했다.
“누구냐!”
“웬 놈이?!”
강도로 보이는 불한당 3명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 당신은?”
반항하다 뺨을 맞았는지 한쪽 뺨이 빨갛게 변한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엘은 그 상처 자국을 보자 이성이 뚝 하고 끊길 것만 같았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냐?”
“뭐?”
“너희가 저 소녀를 다치게 했느냔 말이다.”
그 얼음 같은 목소리에 불한당 3명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남자의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빛을 담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라고! 꺼져!”
“돌아가면 순순히 보내 주겠다!”
불한당은 겁먹은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오히려 소리를 질렀다. 라엘은 피식 웃었다. 너무 화가 나니 오히려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너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뭐?”
라엘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 그들 앞에 던졌다.
쨍그랑!
단도가 차가운 금속음을 내며 바닥에서 뒹굴자 불한당은 흠칫 몸을 떨었다. 피의 황태자는 말했다.
“자결하거나 나에게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리와 라엘은 나란히 어느 건물에서 나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마리를 보며, 라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그들이 나온 곳은 치안을 담당하는 수도 경비대의 건물이었다. 불한당을 제압한 라엘이 그들을 경비대에 넘긴 것이다.
‘그냥 다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 살 가치도 없는 것들.’
라엘은 속으로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불한당에게 둘러싸여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너무나 화가 나 오히려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그대로 목을 베어버리려고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녀 때문에 멈추었다. 피가 튀는 모습에 혹시나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분노를 억제하고 제압만 해 경비대로 끌고 왔다.
‘어차피 살기는 그른 놈들.’
잡고 와 보니 부녀자 추행에, 강도에, 살인 등 전적이 화려했다. 법대로 해도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꼭 법이 아니더라도 그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다.
‘만약 내가 안 갔으면 이 소녀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인가.’
문득 떠오른 그 생각에 라엘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걱정이 뒤섞인 화였다.
“……꼭 조심하도록.”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냉랭하게 나왔다. 가만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마리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해 주신 것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리도 자신이 방금 정말로 위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큰 도로로만 다녔었는데.’
마리라고 아무런 경각심 없이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적 없는 곳은 피하고 최대한 사람이 많은 곳만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이번 강도들은 인파가 많은 틈에서 갑자기 옆구리에 칼을 들이밀며 위협해 끌려간 것이다. 만약 저 남자가 아니었다면 어떤 꼴을 당했을지. 마리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녀가 계속해서 감사의 인사를 하자, 라엘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겠는가. 피해자에 불과한데. 엄밀히 말하면 저런 소녀도 걱정 없이 다닐 수 없는 치안을 못 만든 자신의 책임도 없다 할 수 없으리라.
“……됐다. 다음에는 정말로 조심하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며 마리는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경황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분이 어떻게 그때 나타난 거지?
‘황궁의 시종 아니었나?’
마리는 황궁에서 몇 번 마주했던 이 남자를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용모여서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저…… 그런데 제가 그곳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아시고?”
남자,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답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 네.”
뭔가 석연치 않은 답변이었지만, 생명의 은인에게 뭐라고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마리는 남자가 황태자 라엘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섬뜩한 철가면 밑에 저렇게나 아름다운 얼굴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저 남자가 원래는 시종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시종이 저렇게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기사? 멀리서 보니 경비대의 병사들도 굉장히 어려워하는 것 같던데.’
마리는 궁금했지만 물어보기가 꺼려졌다.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과 다르게 남자의 푸른 눈동자는 굉장히 차가웠다. 나쁜 사람이 아닌 것은 알지만, 뭐라고 편하게 말 걸기 어려운 분위기랄까? 마리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감사의 은혜를 갚아야 할지…….”
그녀는 가지고 있는 것은 없지만, 어떻게든 오늘 구원받은 은혜를 갚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답?”
그녀의 말에 라엘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어쨌든 무사하니 됐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됐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렇게 된 이상, 이것도 괜찮겠군.’
“오늘 일에 보답하겠다고 했느냐?”
“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말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너는 그것을 도와주도록.”
마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해야 할 일? 뭐지?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신지요?”
남자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얼굴에서 나온 표정답게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였다.
“네가 할 일은 없다.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네.”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저……”
“란이다.”
“네?”
“란이라고 부르면 된다.”
마리는 그제야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란’은 라엘의 아명이었다. 라엘은 마리를 뒤에 두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건물을 본 마리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란 님, 여기는? 왜 의원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의원이었다. 그것도 그냥 의원이 아니라, 귀족들이 이용하는 고급 의원이었다.
“해야 할 일이 의원에 있으신 건가요? 여기서 제가 어떤 일을?”
하지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할 일은 없다.”
“그러면?”
“네 상처, 그대로 놔둘 것인가?”
“아…….”
마리는 오른쪽 뺨을 만졌다. 강도에게 맞아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괜찮은데…… 그냥 놔두면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보기 싫어서 그렇다.”
라엘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아까 그 녀석들을 얌전히 잡아간 것이 후회되었다. 이 소녀가 충격받을 것만 걱정하지 않았어도 그 자리에서 모조리 베어버렸을 텐데.
‘재판관에게 이야기해 최대한 중벌을 내리라고 해야겠어.’
안에 기별을 하자 곧 의사가 허겁지겁 뛰어 내려왔다.
“어찌 이 누추한 곳에!”
하얗게 질려 쩔쩔매는 의사를 보며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긴장하는 거지? 남자는 짧게 말했다.
“이 소녀를 치료하도록.”
“이분은?”
의사는 놀라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라엘이 암행을 나온 황태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여인에게 관심이라고는 일절 없다고 알려진 황태자가 소녀를 데려오다니? 귀족가의 레이디 같지는 않은데 누구지? 암행을 수행 나온 수행원인가? 그런데 의사는 소녀의 달아오른 뺨을 주시하는 황태자의 눈동자를 보고 놀랐다. 걱정과 속상함이 담긴 눈빛이었던 것이다.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의사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저 찰과상일 뿐인데 무슨 대단한 수술에라도 임하는 것처럼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러며 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했는데, 그 조심스러운 손길이 마치 공주라도 치료하는 듯해 마리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펴,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닙니다! 혹시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마리는 정성이 가득 담긴 치료를 받고 의원을 나왔다.
“조금 괜찮나?”
“아…… 네. 감사합니다.”
마리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진 않고? 불편한 것은 없나?”
그 물음에 마리는 묘한 얼굴을 했다. 엄청 냉랭한 목소리인데,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뭐지? 원래 남들에게 친절한 성격인 건가? 키엘 님처럼.’
하지만 원래 친절한 성격으로 보이진 않았다. 친절한 성격이라기에는 말투나 눈빛이 너무 무뚝뚝했다. 아니, 무뚝뚝하다기보다는 차가움에 가까운 느낌.
‘그런데 왜 날 걱정하는 거지? 오가며 우연히 몇 번 본 사이에 불과한데.’
남자가 라엘인 것을 모르는 마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 그런데 왜 저를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 건지…….”
그 물음에 라엘은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몰라.’
자신이 알면 이러고 있겠는가. 그도 갈팡질팡한 자신의 감정을 몰랐다. 이 소녀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다가 엉망으로 뒤섞였고, 파도를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감정. 라엘은 그냥 되는 대로 답했다.
“……과자 때문에 그렇다.”
“네? 과자요?”
“그래, 그때 네가 나한테 주었던 과자.”
마리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그녀는 백조 정원에서 그에게 과자를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라엘이 등을 돌리며 어딘가로 향했다.
‘드디어 볼일을 보려나 보다.’
마리는 과연 볼일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남자를 따라갔다. 그런데 남자가 향한 곳은 전혀 의외의 장소였다.
“여기는?”
축제 거리의 좌판이었다. 바로 아까 전 그녀가 먹고 싶다 고민하다 돈이 없어 고개를 젓고 포기했던!
“아이고, 엄청 잘생긴 손님이시네. 무얼 드릴까요?”
“딸기 주스 한 잔.”
그러며 남자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넌 뭐 먹을 거지?”
마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빨리 골라라.”
“……전 타르트요.”
“목이 메니 음료도 같이 마셔라. 너도 딸기 주스 마실 텐가?”
“그…… 저, 전 오렌지 주스요.”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가 계산을 해버렸다. 곧 시원한 주스와 타르트가 나왔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외양만큼이나 맛있었다.
“먹을 만한가?”
“네, 그런데…… 저에게 왜?”
마리는 냉랭한 얼굴로 빨대로 딸기 주스를 마시고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저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로 딸기 주스라니, 뭔가 부조화스러웠다. 라엘은 마리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나도 모르는데.’
사실 그에게 해야 할 일 따위는 없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이야기한 것일 뿐이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도 솔직히 잘 몰랐다. 그냥 그때 그녀를 보내기 싫다는 충동이 들었고, 지금도 보내기 싫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사실 같이 다닐 이유가 없는데, 아니, 그냥 황궁으로 보내는 것이 맞는데.’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녀가 옆에 있으니 답답함은 조금 덜하다는 것이었다. 대답할 말이 궁한 라엘은 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답했다.
“……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
“네?”
“난 오늘 돈을 써야 한다. 넌 옆에서 내가 돈 쓰는 것을 도와주어야겠다.”
마리는 입을 벌리고 남자를 바라봤다. 이게 말인가, 똥인가? 라엘도 자신이 방금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발언, 정말 피의 황태자답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뒷수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돌연 마리가 쿡쿡 웃었다. 자신 앞에서 저 소녀가 웃음을 짓는 것은 처음이어서 라엘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웃지?”
“아니요.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라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그러면 다음 곳으로 가지.”
그는 다른 좌판으로 이동했다. 이곳도 그녀가 아까 사고 싶다가 돈이 없어서 포기했던 곳이다. 마리는 그런 남자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솔직하지 못한 분이구나.’
돈을 쓰는 게 볼일이라니, 그런 볼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 저 남자도 자신처럼 축제를 즐기러 나온 것이 분명했다. 혼자 돌아다니기 적적하니 저렇게 이야기한 것이겠지.
‘그냥 같이 다니자고 말해도 괜찮았을 텐데. 나도 혼자 심심했으니까.’
남자의 의외의 면을 보자 마리는 조금 경계심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무뚝뚝한 말투와 다르게 생각보다 차가운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맛있게 드십시오!”
다음 코스는 밀가루 과자에 크림을 잔뜩 올린 디저트였다. 남자는 어지간히 딸기를 좋아하는지, 그 위에도 딸기를 올렸다. 그 뒤로도 둘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볼거리를 구경하며 맛있는 것을 실컷 먹었다.
“신기하네요.”
“무엇이 신기하지?”
“란 님이랑 저랑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요. 란 님이 가자고 하시는 곳, 모두 다 제가 원했던 곳이거든요.”
마리의 말에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취향이 비슷한 게 아니라, 아까 그녀가 아쉬워하던 곳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방문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좌판에서 남자가 늘 했던 것처럼 계산하려는 찰나, 마리가 선수를 쳐 얼른 동전을 내민 것이다.
“왜 네가 계산하는 거지?”
“저도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돈 쓰는 일.”
마리는 삐죽 웃으며 말했다. 그 장난스러운 말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됐다. 넣어 둬라.”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계속 사 주기만 하셨잖아요. 저도 한번쯤 란 님께 사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라엘은 과자를 집어 입에 물었다. 사실 좋아하는 과자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서일까?
‘맛있군.’
그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마리는 깜짝 놀라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나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겠네.’
저 무뚝뚝한 남자와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즐거웠던 것 같다. 돌아가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꿈만 같네.’
가면무도회와 오늘 축제, 모두 즐거웠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내일부터는 사자궁에 가야 하는구나.’
황태자 곁에서 살얼음을 걸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더구나 그냥 살얼음도 아닌, 미끄러지면 목이 떨어질 살얼음이었다.
‘힘내자. 황태자비 간택 때 꼭 잘해 사자궁을 벗어나는 거야.’
그녀는 의지를 다졌다. 그때 옆에 있던 란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건가?”
“아, 네.”
“그러면 바래다주지.”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뚜둑뚜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갑자기 소나기가.”
남자는 손바닥으로 빗방울을 가늠하더니 말했다.
“거세지는군. 잠시 피했다 가지.”
“네.”
그냥 가기에는 빗방울이 거셌다. 피할 곳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허름한 성당 하나가 보여 둘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신부님도, 수녀님도 아무도 없네요. 이렇게 들어가도 될까요?”
“뭐, 상관없을 거다. 그래도 성당인데 야박하게 쫓아내진 않겠지.”
둘은 잠시 성당에 앉아 숨을 돌렸다. 라엘은 짧은 시간 만에 꽤 젖은 마리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젖었군.”
“아, 네. 괜찮아요.”
마리는 고개를 저었지만, 라엘에겐 괜찮지 않았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비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자, 마리의 뺨이 자신도 모르게 화악 달아올랐다.
“괘, 괜찮아요!”
“왜 그러지? 가만히 있어 봐라.”
“저, 정말 괜찮아요!”
마리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행동이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임은 알지만, 왜일까? 주책없이 가슴이 뛰어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닦을게요.”
그렇게 사양하고 마리는 다시 남자의 옆에 앉았다. 성당 안이 너무 적막해서일까?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남자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비가 많이 오는군.”
“아, 네.”
두둑. 두둑.
빗방울 소리가 끝없이 창밖을 두드렸다. 조용한 성당 안에서 그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리는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저…… 예전에 비를 굉장히 무서워했었어요.”
“비를?”
“네, 엄마는 일하다 늘 늦게 들어오셔서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았거든요. 비가 많이 쏟아지면 저 비에 엄마가 떠내려가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걱정했어요.”
무언가 추억에 잠긴 마리의 말에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지?”
“그냥…… 평범한 분이셨어요. 아까 거리에서 보셨던 분들처럼 거리 노점에서 장사하셨고, 혼자 절 기르느라 늘 힘들어하셨어요.”
“……그렇군.”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저 때문에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항상 저를 위해서만 사셨는데…… 그때는 잘 몰랐어요.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좋았을 텐데.”
‘보고 싶다.’
마리는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왕녀로서 클로얀 왕성에 들어가기 전, 유일하게 행복했던 어린 시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괜히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어두워졌다고 생각한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란 님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었어요.”
라엘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소 뒤 깊은 곳에 아련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 아련함을 느낀 순간,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 님?”
“잠깐 있어 봐라. 들려줄 게 있다.”
의아한 표정의 그녀를 뒤로하고 그는 어딘가로 걸어갔다.
‘피아노?’
라엘이 향한 곳은 성당 구석, 십자가 아래에 놓인 피아노였다.
‘왜 피아노에?’
그녀는 곧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가 건반 위에 손을 올린 것이다.
“네 실력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냥 편하게 들어라.”
그러며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눌렀다. 곧 조용한 성당 안에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 녹턴(Nocturne).’
녹턴, 밤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야상곡(夜想曲). 남자의 손이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마리는 그 선율을 들으며 놀라 생각했다.
‘대단한 솜씨구나.’
전문 건반 연주자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솜씨였다.
‘선율도 굉장히 듣기 좋아. 직접 작곡한 건가?’
즉흥 연주라기에는 굉장히 뛰어난 곡이었다. 연주자의 감정이 곡 여기저기에서 묻어나왔다.
‘그리움. 두려움.’
마리는 곡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마음속 어두운 밤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구름에 가린 그 달은 너무나 희미한 빛만을 비출 뿐이었다. 여리디여린 월광(月光). 마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달을 보았다. 홀로 남겨진 두려움과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피아노 소리에 사무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멜로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두운 분위기의 단조에서 장조로 전조가 일어나며 암흑 속에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달을 감싸던 구름이 천천히 걷혔다. 구름이 걷히고 나타난 것은 따뜻한 월광. 따뜻하고 부드러운 월광이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이건…….’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의 피아노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느껴졌다. 저 따뜻한 월광은 바로 애틋한 사랑이었다. 엄마가 자신에게 주었던.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언제, 어디에 있든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순간 가슴이 울컥해져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마리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는 언제 이런 곡을 작곡한 것일까? 분명 즉흥적으로 떠올린 곡은 아니었다. 이 곡은 분명 본인의 경험과 아픔을 투영해 만든 곡이다. 그렇다면 저 차가운 눈동자의 남자도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었다는 것일까? 그때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멈추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들을 만했을지 모르겠군.”
“…….”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 곡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가슴이 흔들려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남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의외의 말을 하였다.
“괜찮다면 같이 쳐 보지 않겠나? 악기를 연주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니까.”
마리와 남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의 왼편에 앉았다. 곧 다시 고요한 성당에 피아노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와 그녀가 함께하는 합주였다. 라엘이 주선율을 연주했고, 마리가 그걸 따라갔다. 마리는 건반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그와 자신이 함께 자아내는 선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왜일까? 그 소리에 지금까지의 아픔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의 삶도 계속해서 힘들겠지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따뜻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리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고개를 들었다. 십자가가 보였고, 그 위 높은 곳에 위치한 창문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뚜둑. 뚜둑.
여전히 밖에선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다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고요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많은 것이 변했던 축제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