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11화 (12/54)

Chapter 4

‘왜? 왜? 어째서?’

숙소로 돌아온 마리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외쳤다.

‘왜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시녀 마리, 너는 나, 라엘의 것이다.”

왜 나에게 그런 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감옥에 감금한다든지, 매를 때린다든지 하는 거면 모르겠어.’

이유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벌이었다. 황태자 라엘의 곁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물론 다른 시녀라면 벌은커녕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 이 제국에서 가장 지고한 이를 곁에서 모시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절대 아니었다. 곁에 계속해서 머물다가는 정체가 안 들킨다는 보장이 없었다.

‘내가 모리나 왕녀인 것을 들키면…… 난 죽겠지.’

지금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가면을 쓴 채 검을 휘두르던 그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녀의 클로얀 왕국은 그의 검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니 냉혹한 황태자는 자신의 정체를 알면 곧바로 목을 칠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황태자비 간택이 시작되기 전 사자궁을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해.’

황태자비 간택이 시작되기 전은 고사하고 그 후에도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지를 다지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손바닥이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안 돼. 왜 나를 자신의 소유로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황태자 주변에서 벗어나야 해.”

마리는 굳게 다짐했다.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가능, 불가능을 떠나 무조건 그의 곁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마리? 몸은 괜찮아?”

“아, 제인.”

같은 방을 쓰는 제인이었다. 제인은 마리가 침대에 웅크려 일어나지 않자 잔뜩 걱정이 담긴 얼굴을 했다.

“약방에 가서 약이라도 가져올까?”

“아니, 괜찮아. 그냥 피곤한 것 같아.”

그녀 덕분에 감옥에서 벗어난 제인은 목숨을 구제받은 은혜를 입은 것처럼 마리에게 크게 감사해했다. 실제로 큰 은혜를 입긴 했다. 마리가 아니었으면 중벌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울음을 터뜨리며 끝없이 감사를 표하는데, 마리가 민망할 정도였다. 이후 감옥에서 나온 제인은 마리에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해 주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겠어?”

“응. 그냥 쉬면 될 것 같아.”

그런데 제인이 의외의 물음을 하였다.

“저, 마리. 내일은 어떻게 준비할 거야?”

“내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일은 대망의 축제 마지막 날, 가면무도회 날이다.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는데? 평소처럼 글로리아 홀에서 무도회 시중들면 되는 거라서.”

“응? 너 가면무도회 참석 안 해?”

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 당연히 참석 안 하지.”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가면무도회에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귀족들이 자신의 마음에 든 시녀에게 초청장을 보내 무도회에 참석시킬 수 있는 이벤트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초청을 받을 리가 없으니까.’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생각했다. 황궁 여기저기에서 초청장을 받은 시녀들이 설렌 마음으로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좋은 집안 출신이거나, 아름다운 용모의 시녀들이었다. 마리에게는 모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기나 했으면.’

그나마 가면무도회를 마지막으로 축제가 끝나면 짧은 휴가를 약속받았다. 백합궁을 떠나 사자궁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시녀 수잔이 고생했다며 휴가를 준 것이다.

‘잠깐 궁 밖으로 나들이라도 갔다 와야겠구나.’

휴가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어쩌다 보니 궁 안에 갇혀 지내게 되었지만, 그녀는 궁 밖이 좋았다. 클로얀 왕성에서 통원의 궁에 갇혀 지낼 때도 남몰래 종종 궁 밖에 나들이를 갔었으니까.

‘제국에서는 처음이네. 지금껏 궁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

그렇게 휴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제인이 또 가면무도회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마리, 정말 가면무도회 참석 안 해?”

“응, 내가 어떻게 참석해? 초청장도 못 받았는데.”

“왔는데?”

“응?”

“너 초청장 왔어.”

“…….”

마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가 왔다고?

제인은 그녀에게 봉투들을 내밀었다. 화려한 문양으로 수놓아진 봉투들이었는데, 이상하게 한 통이 아니었다.

“너 초청장 왔어.”

“……누구한테서?”

“몰라. 나 글씨 못 읽잖아.”

문맹률이 높은 시대라 하급 시녀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는 소수였다.

“어쨌든 왔어. 그것도 3통이나.”

마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초청장들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왜 초청장이? 더구나 초청장이 3개라고?

‘잘못 온 것 아니야?’

지극히 화려한 봉투들을 보니 그런 의심이 들었다. 금박에, 금술에, 각각 다른 문양이 고풍스럽게 새겨진 봉투는 초청장을 담은 봉투가 아니라, 마치 예술품 같은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봉투 구석에 쓰여 있는 ‘마리 양에게’란 문구를 보면 그녀에게 보낸 것이 맞았다.

‘도대체 누가?’

먼저 방패와 검 문장이 새겨진 흰색 봉투를 열었다.

-키에르한 드 세이튼 후작.

“……!”

그녀의 비밀스러운 친구인 키엘이었다!

‘나를 배려했구나.’

키엘은 시녀인 그녀를 신경 써 일부러 초청장을 보내 준 것 같았다. 이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모든 시녀의 로망이었으니까.

‘괜찮은데.’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 준 그가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혹시 무도회장에서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그녀는 다음 초청장을 열어 보았다. 고풍스러운 검은 문양에 독수리 문장이 새겨진 봉투였다.

‘누구지?’

곧 초청장을 꺼낸 그녀의 얼굴이 뻣뻣이 굳었다.

-요하네프 3세.

초청장을 보낸 사람은 바로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였던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요하네프 3세가 나에게 초청장을?’

키엘 때와 다르게 서늘한 한기가 등 뒤를 스쳐 지나갔다. 부드러운 미소 뒤 차가움을 감추고 있는 눈동자가 떠올랐다. 피의 황태자 라엘에 못지않은 냉혹한 지배자. 그가 왜 자신에게 초청장을? 마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마지막 초청장을 꺼내 들었다. 이번엔 도대체 누가? 요한이 보낸 초청장과 대조되는 흰색 문양의 봉투. 키엘과 요한의 것과 다르게 특별한 문장은 안 새겨져 있었지만, 그들의 것 못지않은 고급 재질의 봉투였다. 조심히 초청장을 꺼내 든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초청장의 발신인란에는 아무런 이름도 안 적혀 있었다.

‘다른 데 적혀 있나?’

혹시나 다른 구석에 적혀 있을까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없었다.

‘뭐지? 왜 발신인을 안 적어 보낸 거지?’

초청장을 보낼 때는 보내는 이의 이름을 적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지?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의문만 가득한 채 무도회 날이 되었다.

“자! 마리! 우리가 최대한 예쁘게 꾸며 줄게!”

“괘, 괜찮은데요.”

“무슨. 여자의 변신은 무죄! 우리가 마리를 완전히 변신시켜 주겠어!”

마리는 기분도 우울하고 딱히 꾸미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같이 일하던 시녀들이 우루루 달려들었다.

“후후, 마리. 넌 평소에 너무 안 꾸몄지.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렸어.”

특히 같은 방을 쓰는 제인은 눈을 번뜩이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그 기세에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니. 어차피 가면을 쓸 건데. 나는 그냥 드레스만 입고…….”

“얘가 모르는 소리 하네. 가면을 써도 알아볼 사람은 다 알아봐. 아니, 오히려 가면을 썼으니 얼굴을 보일락 말락 드러내면서 요염하게 꾸며야지!”

“어, 어. 자, 잠깐만요! 잠깐만!”

시녀들은 온갖 자신만의 비술을 사용해 마리를 단장시켰다. 마리는 반항했으나, 그 정도는 가뿐히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짠! 변신 완료!”

“이, 이제 끝난 거죠?”

“그래, 거울을 봐!”

한참을 시달린 끝에 멍한 얼굴로 거울을 본 마리는 깜짝 놀랐다.

‘이게 나?’

풍성하게 올린 갈색 머리, 밝게 빛나는 하얀 피부, 커다란 맑은 눈망울. 원체 체구가 작고 말라 보호 본능을 자극하면서도, 귀엽고 예쁜 소녀가 거울 속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리는 중얼거렸다.

“이, 이건 사기 아닌가? 다른 사람인데?”

제인이 풋 하고 웃었다.

“사기긴, 뭐가 사기야! 평소에 좀 꾸미고 살아!”

“꾸미긴 뭘…….”

마리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변한 자신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래서 단장을 하는구나.’

마리는 늘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여자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했다. 자기만족이랄까? 꼭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스스로를 예쁘게 꾸미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마리, 도대체 누구야?”

“네?”

“초청장 보낸 분 말이야. 듣기로 3통이나 왔다고 하던데.”

주변 시녀들은 그녀가 어떤 이에게 초대받은 것인지 몰랐다. 마리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나가다 본 분들이에요.”

평범한 귀족이면 말해도 상관없겠지만, 무려 황실 친위기사단 단장에, 서제국의 황제였다. 말하는 순간 궁이 뒤집어지리라. 사실 특별한 관계도 아닌데 쓸데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마지막 초청장은 누가 보낸 거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나 무언가 더 연락이 올까 기다렸지만 없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 무도회 시간이 다가왔다. 마리는 동료 시녀들이 마련해 준 드레스를 입었다.

“너, 너무 파인 것 같은데.”

“괜찮아! 요즘엔 다 이렇게 입어. 아니면, 촌스러운 시녀복이라도 입고 갈 거야?”

“그래, 예뻐. 우리 마리.”

동료들은 선 자리에 나가는 동생이라도 응원하듯 외쳤다.

“좋은 인연 만들고!”

“그래, 꼭 결혼해!”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잠깐 다녀올게요.”

“오늘 밤은 안 들어와도 돼! 아니, 들어오지 마!”

“그래, 외박하고 와!”

킥킥 웃으며 외치는 말에 마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여튼 다들 짓궂다니까. 무슨 외박이야.’

다들 가면무도회장을 백마 탄 왕자라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지만, 마리는 머리가 복잡해 남자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가서 맛있는 거나 먹고 쉬다 오자.’

그렇게 그녀는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회장 입구에 도착하니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각자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게 가면무도회.’

마리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황궁에 오래 있었지만, 가면무도회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액세서리처럼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은 드물었다. 많이 가려야 얼굴의 윗부분 절반 정도. 보통은 눈 부위 정도만 가려서 원래 알던 사람이 보면 대충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어, 저 사람은?’

그런데 무도회장 입구에 들어가려는 순간, 마리는 문 앞에서 의외의 사람을 보고 흠칫했다.

흑발에 흑안. 지적이고 부드러운 얼굴의 미남.

‘요하네프 3세!’

검은 예복을 입은 서제국의 황제 요한이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눈을 가리는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워낙 외모가 독특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왜 저기 서 있는 거지?’

마리는 주춤 멈추어 섰다.

‘지나가야 하는데.’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도회장에 입장하려면 그가 서 있는 곳을 지나야 한다. 가급적 피하고 싶은 상대라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난감해했다.

그 순간, 요한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정확히 마주쳐 흠칫한 순간, 요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셨군요.”

마리는 화들짝 놀라며 예를 표했다.

“서제국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가면무도회장이니 그렇게 예를 표할 필요는 없어요. 가면무도회장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척하기로 약속한 것이니까요. 편하게 대하세요.”

“그래도…….”

원칙적으로야 그렇다지만, 상대의 정체를 아는데 어떻게 편하게 대하겠는가. 더구나 보통 귀족도 아닌 무려 황제인데.

“그나저나.”

요한은 묘한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네?”

“마리 양이 아름다워서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말에 마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노, 놀리지 말아주십시오.”

“놀리는 것 아닌데요? 마리 양은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실없어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진지한 사람입니다.”

진지한 사람인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서제국의 혼란을 피로 평정한 냉혹한 군주가 바로 그였으니까. 그가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계속 바라보자, 마리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전 들어가 볼 테니 용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옆을 지나가려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탁.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은 것이다. 거칠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마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폐, 폐하?”

요한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용무는 마리 양인데요?”

“네, 네?”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당신을.”

마리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요한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마리는 그 웃음 너머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를?”

“왜긴요.”

요한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을 에스코트해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

그는 그녀를 붙잡은 손을 부드럽게 놓았다. 그리고 기사가 귀부인에게 하듯, 한쪽 손으로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저에게 당신을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혹시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자신을 보는 흑색 눈동자는 기이하게 진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둔한 그녀라도 그가 장난으로 이러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갔다.

‘왜 그가 나를?’

“레이디?”

요한이 다시 물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에스코트를 받고 말고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였다. 특히나 가면무도회이니 더욱더 그러했다. 가면무도회 때는 남녀 모두 신분을 잊고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선택할 자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녀는 요한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녀 관계로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고, 웃음 뒤에 악마의 꽃 같은 위험함이 느껴졌다. 저 부드러운 웃음에 방심했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함. 실제로 서제국에는 그렇게 그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 정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 에스코트 신청도 그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까? 아니면, 그저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대답해 주십시오.”

요한의 말에 마리는 결국 결정했다.

“저는…….”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에스코트,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

마리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가면을 썼음에도 단번에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키엘 님!’

황실 친위대 단장인 키에르한 후작이었다. 저 찬란한 은발과 조각 같은 얼굴선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니까. 요한도 그를 알아봤는지,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름 높은 키에르한 후작이군요. 이곳엔 웬일로?”

“폐하 역시 의외의 곳에서 뵙는군요.”

대면하자마자 둘 사이에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특별히 발톱을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 가는 싸늘한 시선이 서로를 오갔다.

‘서로 적국인 서제국의 황제와 국경 방위를 책임지는 변경백이니 당연한 건가?’

마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둘은 평소보다 더 심한 적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어쨌든 들어가서 볼일 보시죠. 나는 이 레이디에게 볼일이 있으니.”

요한의 말에 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저도 여기 마리 양께 볼일이 있으니까요.”

“볼일?”

요한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키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 전 요한이 했던 것처럼 귀부인에게 하듯 예를 표하며 말했다.

“마리 양, 이 시간, 저에게 그대와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각하?”

마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제국의 황제 요한에 이어 황실 친위대 단장 키엘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 물론 키엘 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 좋지만 그래도…….’

그녀는 키엘이 좋았다. 오스카를 대할 때를 보면 알 수 있듯 키엘에게는 태생적으로 선한 사람의 느낌이 흘렀다. 친절하고 잘생긴 데다, 착하기까지 하니 누가 그를 싫어할까? 더구나 키엘은 그녀의 친구였다. 그와 함께라면 무도회도 당연히 환영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요한과는 또 다른 이유로 그의 손을 맞잡는 것을 망설였다.

“마리 양?”

“저는 각하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배려에 감사하지만,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키엘이 나선 이유는 자신이 요한 때문에 곤란해하니 도와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빛나는 저 남자는 자신 같은 미천한 이 말고, 더 훌륭한 레이디가 어울리리라.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키에르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그럽니까?”

“네?”

“누가 마리 양이 부족하다고 했죠?”

어딘지 불쾌한 듯한 목소리. 키에르한의 이런 목소리는 처음이라, 마리는 주춤했다.

“각하?”

“마리 양은 제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마리의 가슴에 ‘소중한’이란 단어가 박혀 들었다. 물론 키엘은 착한 마음으로 자신을 생각해 한 말이겠지만, 그녀는 가슴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각하.”

결국, 그녀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이 잡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손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저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주는데 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가면무도회니까 하루 정도는 신데렐라가 되어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키에르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도회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버려진 남자, 요하네프 3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군.”

무려 황제의 몸으로 에스코트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했지만, 별로 불쾌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서제국의 지배자인 그는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리나 왕녀를 찾으러 왔는데, 왕녀는 흔적도 못 찾았군.”

모리나 왕녀. 그의 계획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 그가 이 황궁에 온 것은 그녀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이 있으니 다행인가?”

요한은 방금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소녀를 떠올렸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끝없이 흥미를 끄는 소녀.

“이거 어쩌나. 모리나 왕녀보다 저 시녀에게 더 흥미가 가니. 이제 당분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아쉽군.”

오늘의 무도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서제국으로 돌아간다.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계획을 위해서 요한은 머지않은 시기에 다시 이 황도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저 시녀와도 작별이군. 못 보면 아쉬울 것 같은데, 그냥 서제국으로 확 납치해 버릴까?’

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조만간 다시 보자고요, 귀여운 시녀님.”

* * *

‘와, 이게 가면무도회.’

무도회장에 들어온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글로리아 홀에서 열렸던 일반적 연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인지 훨씬 격의 없고, 자유로웠고, 흥겨웠다. 어떻게 보면 방탕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살던 세계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으므로, 마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탁.

마리는 누군가와 부닥쳐 몸을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키엘이 급히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조심하십시오.”

“아, 감사해요. 조금 정신이 없어서.”

“그러면 저기 안쪽으로 가서 잠시 쉬시겠습니까?”

키엘은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발코니로 그녀를 이끌었다. 발코니로 가니 복잡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후아, 좀 살 것 같아요.”

“가면무도회가 조금 복잡하긴 하지요.”

“네, 저랑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가면무도회 싫어합니다.”

“아, 그러면 왜?”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귀족들이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탄신 축제 대연회와 다르게 가면무도회는 참석이 자유였다. 오로지 즐기고 싶은 사람만 참석하면 되는 것이다.

“싫으시면 굳이 참석 안 하셔도 되지 않으세요?”

“뭐, 그렇긴 하죠. 그냥 이번에는 참석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키엘은 그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일 뿐 참석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무하고도 안 즐기시네.’

다른 이들이 계속 파트너를 바꾸며 춤을 추는 것과 다르게 키엘은 자신의 곁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춤이 싫으신 건가? 그러면 왜 참석하신 거지?’

그때, 키엘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달빛이 밝군요.”

“아, 네. 예뻐요.”

“마리 양은 좋아하는 별자리가 있습니까?”

“저기 목동자리를 좋아해요. 각하는요?”

그렇게 그와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것 아닌 대화를 하였다.

‘좋네.’

마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키엘과 대화하면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정말 친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그녀가 정체를 숨긴 시녀가 아니었다면, 어릴 때부터 그와 알고 지냈다면, 그와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그가 편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화를 하던 어느 순간, 키엘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감사합니다.”

“네?”

“이야기 들었습니다. 오스카 전하를 위해 나서 주셨다고.”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그냥 어쩌다 보니…….”

일부러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도저히 그 꼬마 황자가 중벌을 받는 것을 못 참아 나선 것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그녀를 보는 키엘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리의 말처럼 가볍게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 그녀는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스카는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작게는 오스카 전하의 친구로서, 크게는 세이튼 후작가의 당주로서 마리 양께 감사를 표합니다.”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나 키에르한은, 그리고 세이튼 후작가는 이번에 마리 양께 입은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세이튼 후작가는 자신의 일처럼 마리 양의 일을 도울 것입니다.”

제국 최고의 귀족가 중 하나인 세이튼 후작가의 도움! 굉장한 약속이었다.

“괘, 괜찮은데…….”

그렇게 키엘은 감사를 표했고, 마리는 난감한 얼굴로 감사를 받았다. 그때 그녀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오스카 황자는 괜찮으신가요?”

“아, 네. 많이 놀라긴 하셨지만 괜찮으십니다.”

키엘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런 말을 하시긴 했군요.”

“네?”

“나중에 꼭 마리 양과 결혼하겠다고.”

마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은 발코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주제는 없었지만,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였다.

‘가면무도회는 적성에 안 맞지만, 그래도 좋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얼마 만인지. 클로얀 왕성에 왕녀로 불려 간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날 초청한 또 다른 분은 누구일까?’

그녀는 정체불명의 초대장을 생각했다. 누굴까 하고 무도회장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모르겠다.’

그때였다. 키에르한이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마치 조각같이 아름다운 미소여서, 마리는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마리 양.”

“네?”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키에르한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각하?”

“이렇게 같이 무도회장에 오게 되었는데,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난생처음으로 춤 신청을 받은 마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저, 저요?”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싫으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춤 잘 못 추는데.”

떠듬떠듬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키에르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편하게 추는 춤이니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는 마리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하얀 장갑 아래로 부드럽지만, 강인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제가 나름 잘 추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근!

왜일까? 마리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룻밤 동안 무도회장의 공주가 되었던 신데렐라. 저 키에르한이 이야기 속 왕자님처럼 친절하고 멋져서일까? 그의 춤 신청을 받으니, 자신이 신데렐라가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키엘 님의 신데렐라도, 뭣도 아니지만.’

오늘 밤만큼은 신데렐라가 된 듯한 기분을 느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네, 각하.”

한편 외진 곳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들과 다르게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태자 라엘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황태자 전하가 왜 가면무도회장에?”

“이런 자리는 싫어하시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왜 저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시지?”

그는 검은 가죽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가 황태자인 것을 못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가면을 쓰던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늘 철가면을 쓰던 것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었다.

“그런데 정말 왜 오신 거지? 가면무도회에 전하가 오신 것은 처음 아닌가?”

“그러게요.”

사람들은 의아한 눈초리로 속닥거렸다. 연회도 즐기지 않는 황태자가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다니? 무슨 바람이 드신 거지? 누군가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혹시 황태자비가 되실 분을 물색하러 오신 것은 아닐까요?”

“황태자비 전하?”

“네, 이제 전하께서도 결혼하셔야 하잖아요. 아니, 지금도 늦어도 한참 늦었죠.”

“그렇긴 하지.”

“그렇지 않아도 축제가 끝나면 정식으로 황태자비 간택을 시작한다더라고요. 그전에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는지 보러 나온 것은 아닐까요?”

그럴듯한 추측이어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과연 누가 전하의 마음에?”

사람들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생각했고, 젊은 귀족 여인들은 혹시나 행운의 주인공이 될까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자신의 치장을 살폈다. 한편 황태자 라엘은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부답, 아무 말 없이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무언가 잔뜩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오랜 친우인 재상 오른이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아니, 전하? 가면무도회장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왔다.”

사실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왔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전하를 간절히 기다리던 레이디가 많았는데, 잘 오셨습니다.”

오른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라엘이 황태자비 간택이 시작되기 전에 여인들을 살피러 왔다고 생각했다.

“주스 말고, 간단히 술이라도 한잔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됐다. 주스가 좋다.”

원래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오른은 황태자의 손에 들린 시뻘건 주스를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주스는 무엇입니까? 혹시 그 소문의 처녀 피 주스?”

“……딸기 주스다.”

참고로 딸기 주스는 라엘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다. 철혈의 군주라 불리는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료인지라, 오른은 쿡쿡 웃음을 지었다.

“혹시 마음에 드시는 레이디는 없으십니까, 전하?”

수많은 귀족 영애가 황태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은데, 부담감에 못 나서고 있는 것이다. 오른은 자신이 기꺼이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에드먼드 후작가의 코엘린 영애? 아니면 이웃 나라 캐설린 공주? 아니면 이런 말씀은 조금 그렇지만, 제 동생인 아네스는 어떻습니까?”

황태자는 귀찮게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친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 됐다.”

오른이 말한 이들은 모두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였다. 특별히 결혼 생각이 없는 그였지만, 대신들은 그에게 비를 맞으라고 계속해서 압박을 넣었고, 급기야 축제가 끝난 후 간택 일정까지 잡아버렸다.

‘간택이라니.’

그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대신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그가 비를 안 맞고 있는 것은 큰 문제였으므로, 대신들의 주장은 옳았다.

“정말 아무도 안 만나 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도 전하의 마음에 드는 분을 비로 맞으셔야…….”

황태자는 오른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됐다. 정략적으로 국익에 가장 이득이 될 여인을 비로 맞을 것이다. 외모나 성격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지극히 철혈의 황태자다운 말이었다. 오른은 입을 다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이 가면무도회에는 왜 오신 거람?’

다른 연회들과 다르게 가면무도회는 오로지 남녀가 어울리기 위한 자리였다. 하지만 라엘은 애꿎은 딸기 주스만 마실 뿐, 어떤 여인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철혈의 황태자가 아닌, 목석의 황태자 같은 모습.

‘음?’

그런데 오른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전하, 혹시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까?”

황태자는 순간 멈칫했다가 답했다.

“……아니다.”

오른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게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인데? 사실 라엘은 찾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시녀 마리였다.

‘왜 안 보이지? 초대장을 보냈는데…… 안 왔나?’

마리가 받은 발신인 불명의 초대장. 그건 다름 아닌 라엘이 보낸 것이었다.

‘내가 왜 초대장을 보내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초대장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난 왜 여기에 나와서 그 소녀를 찾고 있는 거지.’

라엘은 한숨을 삼켰다. 그도 이제 자기 자신을 모르겠다. 자신이 여기 나와 있는 것도 우스웠고, 그 소녀를 못 찾아서 허전해하고 있는 것은 더욱더 우스웠다.

‘그냥 돌아가야겠군.’

그는 늘 일이 많았다. 이런 곳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돌아가자.’

그런데 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저 멀리 인파 사이, 한 소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보통 여자보다 작은 체구, 갈색 머리, 귀여운 느낌의 얼굴.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누군지 신기하게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찾던 시녀 마리였다.

“……!”

라엘은 굳은 듯 멈춰 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일까? 그녀를 보니 가슴속에 머물던 허전함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채워졌다.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드는 감정이었다.

‘……예쁘군.’

그는 생각했다. 저 소녀가 꾸민 모습은 처음 봤는데, 잘 어울렸다. 분만 잔뜩 칠한 다른 영애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황태자의 얼굴이 뻣뻣이 굳었다. 마리의 옆에 키에르한이 다가와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는 것을 본 탓이다.

‘키에르한? 저놈이 왜?’

갑자기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키에르한이 손을 내밀며 그녀에게 웃어 보였고, 마리도 그를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친근해 보이는 모습. 왜일까? 그 친근한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유도 없이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저놈은 왜 저렇게 마리한테 친한 척 구는 거지?’

라엘은 미간을 좁혔다. 저 빤질빤질한 얼굴도, 마리한테 웃는 것도, 친한 척하는 것 모두 다 신경에 거슬렸다. 아니, 그것보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런 키에르한에게 마주 웃음을 보이는 마리였다. 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휘몰아쳤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었다.

“전하?”

갑자기 황태자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오른이 물었다.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오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라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신이 마리가 있는 쪽으로 집중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더욱더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둘이 조용히 발코니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왜 발코니에 둘이?’

황태자는 흠칫 표정을 굳혔다.

‘설마?’

무도회장에서 발코니에 남녀가 들어가는 경우는 단 하나였다. 밀회를 나눌 때.

‘아니야. 아니야.’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저 둘은 서로 잘 알지도 못 할 텐데 무슨 밀회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애써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으로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라엘은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거냐, 라엘. 저 둘이 무슨 관계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라엘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래, 저들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없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라엘은 오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른.”

“네, 전하.”

“이번에 논의 중인 사치세 개정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사치세 말입니까?”

가면무도회장에서 웬 사치세 이야기? 오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리고 북부 지방의 가뭄을 대비한 저수지 건설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지?”

“…….”

갑자기 무도회장에서 국정을 논하는 황태자를 보며 오른은 입을 다물었다. 왜 저러시는 거지?

“……사치세 개정안은 명하신 대로 의회에 입안했고…….”

“그래, 꼭 계획대로 통과되어야 할 것이다. 귀족들의 세금 부담을 늘리면 상대적으로 고액으로 측정되었던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

“……네.”

말하는 내용은 평소의 명민한 모습 그대로이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기분도 굉장히 안 좋아 보였고,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곳에 신경이 팔린 듯한 눈치였다.

‘뭐지?’

오른의 추측대로 황태자의 신경은 온통 발코니 쪽으로 가 있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들어가 볼까?’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무도회장에서 남녀가 함께 있는 발코니에 들어가는 것은 굉장한 실례였다. 둘이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구나 더 이상 키에르한은 그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가장 큰 정적.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지만, 때가 오면 그는 키에르한의 목을 칠 것이다. 그런 상대가 있는 발코니에 어떻게 따라 들어간단 말인가?

“하아.”

오른은 한숨을 내쉬는 라엘을 기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의 황태자는 평소와 달리 정말 이상했다.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전하,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

그렇게 오른이 물을 때였다. 황태자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딱딱하게 굳었다. 마리와 키에르한이 손을 잡고 춤을 추러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라엘의 얼굴이 마치 얼음처럼 변했다.

둘은 무도회장 구석에서 조용히 춤을 추었다. 마리는 춤이 익숙하지 않은지 연신 발을 헛디뎠고, 그때마다 키에르한의 팔이 그녀를 부드럽게 부축했다. 마리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고, 키에르한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그만 소녀와 은발 남자의 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라엘의 눈에는 똑똑히 들어왔다. 마치 가시가 박히듯 말이다.

“……오른.”

황태자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네, 전하?”

갑자기 극도로 차가워진 라엘의 목소리에 오른은 놀라 반문했다.

“축제가 끝났으니 외유를 다녀오겠다.”

“외유 말씀이십니까? 혹시 암행을 뜻하는 것인지?”

“그래. 축제 후 백성들의 민심도 중요하니, 잠시 살피고 오겠다.”

다른 군주들과 다르게 라엘은 민심을 많이 신경 썼다. 그래서 이전부터 종종 가면을 벗어 정체를 숨기고 백성들 사이로 암행을 나갔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실 그는 오른에게 말한 것처럼 민심을 살피러 암행을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아예 민심을 살피려는 의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면 제정신으로 돌아오겠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은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밝은 미소가 예쁘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난 이제 궁으로 돌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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