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마리는 제인을 만나기 위해 허겁지겁 감옥으로 달려갔다.
“마리?”
“제인!”
감옥에 갇혀 있던 제인은 같은 방을 쓰는 친구를 만나자 와락 눈물을 흘렸다.
“엉엉. 마리, 나 어떻게 해. 엉엉.”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제인은 한참을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끄윽. 나, 나 어떻게 해. 크게 벌 받을 거라는데. 나 잘못한 것 없는데. 분명 다 확인하고 나왔는데.”
제인은 겁에 질려 횡설수설했다.
“나, 나 괜찮을까? 으, 응? 정말 크게 벌 받으면 어떻게 하지?”
“제인…….”
마리는 그런 친구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아무리 의도치 않은 일이라 해도 황궁에 화재를 일으킨 죄는 컸다. 더구나 이번 일의 경우엔 오케스트라단의 악기가 상하는 등의 재산 손실도 컸으니까. 수잔의 말처럼 큰 벌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제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대성통곡을 하였다.
“엉엉. 엄마, 아빠. 나 어떻게 해…… 흐윽. 나 잘못한 것 없는데. 다 잘 확인하고 나왔는데. 왜, 왜 불이?! 엉엉.”
마리는 제인의 말에 이상한 점을 느꼈다.
“문제없는지 다 잘 확인하고 나왔지?”
“끄윽. 다, 당연하지.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왜 불이?”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조금 이상해. 도대체 어떻게 불이 난 거지?’
꼼꼼히 관리하고 있었는데 왜 불이 난 걸까?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꿈속 주인공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증거는 현장에 있다네. 그리고 그 증거를 발견하는 것은 꼼꼼한 관찰이지.」
“……!”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단순 화재가 아닌 것은 아닐까?’
그녀는 방화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단순 화재일 가능성도 높지만 무언가 이상해. 왜 하필 대연회가 시작하기 전 오케스트라단의 악기가 보관된 곳에 불이 났을까?’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너무 공교로웠다. 제인은 친구가 아무런 말없이 있자 훌쩍이며 물었다.
“끄윽, 마리?”
“제인, 나 잠시 다녀올게.”
“어디에?”
“화재 현장에!”
“마, 마리?
마리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혹시나 제인의 잘못이 아닌지를 밝히려면, 화재에 수상한 점은 없었는지 밝혀내야 해. 그리고 그 답은 화재 현장에 있을 거야!’
마리는 서둘러 화재 현장에 도착했다. 불이 났던 곳은 평소 오케스트라단이 공연을 연습하는 장소인 수정궁 밑의 지하에 위치한 보관 창고였다.
‘빨리 들어가서 보자.’
그런데 마리는 의외의 난관에 마주쳤다.
“들어갈 수 없다.”
딱딱한 얼굴의 기사가 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는 놀라 기사를 바라보았다. 하얀 제복의 금색 수실.
‘황실 친위대 제복! 왜 황실 친위대의 기사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황실 친위대는 황궁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 범죄를 수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단순 화재 사고를 담당하지는 않는데?
“이곳엔 왜 온 거지, 시녀?”
“아! 이전에 수정궁에서 일할 때 이곳에 개인 물품을 보관한 적이 있는데, 혹시 남아 있나 확인하러 왔습니다.”
마리는 다급히 둘러대었다. 이곳 보관 창고는 악기만 보관하는 곳이 아니어서, 기사는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렇군. 그래도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저…… 그런데 혹시 어째서 친위대의 기사님이 이곳에 계신 건가요? 원래 불이 난 곳에는 기사님이 오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쫓아버릴까 하는 눈빛을 보이다 입을 열었다. 아마 마리가 입고 있는 중급 시녀 복장을 보고 마음을 고친 것 같았다. 하급 시녀와 다르게 중급 시녀는 귀족가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미가 보여 조사 중이다.”
그 말에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심상치 않은 기미라면?”
“그것까지 알려 줄 수는 없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니 뭘 이야기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통제되고 있으니 돌아가라, 시녀.”
기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리는 주저했다.
‘어떻게 하지? 제인을 구하려면 화재 현장을 꼭 확인해 봐야 하는데.’
하지만 황실 친위대의 기사가 막고 있으면 그녀로서는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 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마리 양?”
“……!”
익숙한 목소리에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친위대의 기사도 급하게 예를 표했다.
“친위대의 나이트 필론이 단장님을 뵙습니다!”
나타난 이는 은발의 조각 같은 미남, 황실 친위대의 단장 키에르한 후작이었다!
“아, 그래. 수고가 많군. 특별한 이상은 없나?”
“네, 이상 없습니다!”
자신에게 고압적이던 기사가 뻣뻣하게 얼어 대답하는 모습을 본 마리는 놀란 마음이 들었다.
‘역시 친위대의 단장이 맞긴 맞는구나.’
자신에게 늘 친절하기만 해서 실감이 안 났는데, 저 은발의 남자는 제국 최강의 기사로 불리는 어마어마한 존재였다.
“그런데 마리 양은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키에르한은 평소처럼 친절하게 물었다.
“아…… 그게…… 이전에 이곳에 물건을 하나 보관해 놓아서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저런. 성한 물건은 거의 없던데.”
키에르한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저…… 혹시 죄송한데,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볼 수는 없을까요? 개인적으로 중요한 물건이어서.”
마리는 조심히 부탁했다. 키에르한과의 개인적 친분에 기대는 부탁인지라 꺼려지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인을 위해 꼭 화재 현장을 확인해 봐야 했다. 다행히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물건이라니 어쩔 수 없죠. 잠시만 들어갔다 오십시오.”
“단장님! 화재 현장에 외부인의 출입은…….”
기사가 완강한 얼굴로 반대했다. 맞는 말인지라 키에르한은 잠시 고민했다.
“원칙적으로 외부인이 현장에 들어오면 안 되긴 하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네?”
“내가 이 시녀와 직접 동행하겠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는 것으로 하지.”
“……!”
그렇게 마리는 화재 현장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마리는 자신 때문에 수고를 감수한 키에르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뭘요. 어차피 저도 들어와 보려 했습니다.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마리는 그 말에 의문이 들었다. 조금 전 기사도 그렇고, 이번 화재에서 무슨 수상한 점을 보고 있는 걸까?
“혹시 이번 화재를 방화로 보시는 건가요?”
“……!”
키엘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짓자, 마리는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기사님도 현장을 지키고 계시고, 각하께서도 직접 조사하러 오시고 해서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방화의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정황이 공교로워서 조사 중입니다. 하필 대연회가 시작 전, 다른 곳도 아닌 이곳에 불이 났다는 것이 이상하니까요.”
마리는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질 수도 있겠구나.’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만약 이게 방화라면, 범인은 누굴까? 대연회를 망치려는 의도를 가진 이가 일으킨 것일 수도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황태자와 적대적인 사람일 확률이 높아.’
그녀는 곤혹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면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때,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마리 양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런 건 우리 친위대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까.”
“네, 각하.”
그런데 키에르한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키엘.”
“네?”
“둘이 있을 때는 키엘이라 불러도 됩니다.”
그 말에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직 죽어도 못 하겠다. 어쨌든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둘은 화재 현장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아…….”
마리는 새까맣게 타 버린 지하 창고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이곳에서 단서를 찾아야 했다. 제인의 잘못인지, 아닌지. 정말로 방화의 흔적이 있는지.
‘시작하자.’
현장에 도착해서일까? 마치 꿈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옅은 긴장과 흥분이 몸에 감돌았다.
‘일단 먼저 등불의 위치부터.’
빛이 닿지 않는 지하 창고의 벽에는 조명 역할을 하는 등불을 놓는 자리가 존재했다.
‘역시 완전히 타 버렸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등불이 놓인 자리뿐 아니라, 벽 전체가 시커먼 재로 덮여 있었다.
‘만약 이 부분이 화재에서 깨끗했으면 제인은 책임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등불이 있던 자리 말고도 창고 전체를 꼼꼼히 살폈다. 불에 타 버려진 악기도 살피고, 잿더미도 만져 보고, 불길에 넘어진 기둥의 방향도 확인하고. 그리고 한참을 살핀 결과, 그녀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화재는 제인의 잘못이 아니야. 이건 분명…….’
그녀는 침음성을 삼켰다.
‘방화야.’
“마리 양? 물건은 찾으셨습니까?”
그때 키엘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 아니요.”
마리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물건이라 하셨는데, 안됐군요. 혹시 따로 구할 수는 없는 물건입니까?”
걱정 섞인 그의 말에 대충 답하며 그녀는 속으로 빠르게 생각했다.
‘이건 분명 방화야. 확실해.’
추측이 아니었다. 현장에 놓인 흔적들이 확실히 방화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하지?’
그녀는 일개 시녀일 뿐이었다. 친위대의 수사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친절한 키에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하, 하나 여쭈어 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방화의 증거는 발견되었나요?”
키에르한은 마리가 왜 그런 걸 묻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화재가 심해 단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군요.”
“그러면 혹시 의심 가는 범인은 없는지?”
그 물음에 키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있습니다.”
“……!”
마리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화재가 일어났을 즈음에 주변에서 수상한 사람을 목격한 증인이 있거든요.”
중요한 단서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용의자가 누구인지까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네, 각하.”
마리는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도 이야기해 준 것도 대단한 배려였다.
“그런데 그런 것은 왜 묻는 건지?”
“그게…… 이 화재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키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순간이었다.
“조사는 잘되고 있나?”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 들렸다! 마리는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타난 이는 철가면을 쓴 황태자 라엘이었다! 심지어 재상 오른도 같이 있었다.
‘왜 황태자가 여기에?’
의아한 것은 황태자와 재상 오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특히 황태자는 어째서인지 혼란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 너는 여기에 무슨 일이지?”
마리는 속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하필 황태자가 오다니.’
마음속 친구인 키엘과 황태자는 부담감이 달랐다. 특히 그녀는 무조건 황태자의 눈을 피하고 싶은데, 또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황태자는 잠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라, 마리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까 주저하더니 곧 입을 다물고 키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제국 놈들이 연관되었다는 증거는 찾았나?”
마리를 바라볼 때와 다르게 정적(政敵)인 키엘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시선에는 희미한 한기가 흘렀다.
“죄송합니다, 전하. 화재가 심하여 뚜렷한 단서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황태자는 혀를 찼다.
“곤란하군. 화재 당시 그놈들이 주변에 있던 것은 확실한데, 증거가 없다니.”
마리는 그들의 대화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의자가 서제국이었어?’
얼마 전 만났던 황제 요하네프 3세를 떠올렸다. 확실히 사이가 극악하게 나쁜 서제국이니 대연회를 망치려 방화를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들이 벌인 일이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순간 마리는 이상한 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방화의 흔적만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범인의 특징을 ‘프로파일링’할 만한 단서도 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범인은…….’
그때, 황태자 라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 너도 화재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말해봐라.”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에게 이야기해도 될까? 분명 또 관심을 끌 텐데.’
그녀는 고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제인은 누명을 벗을 수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이번 화재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 방화로 보입니다.”
그들은 눈에 놀란 빛을 띠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단순한 추측이 아닌 확신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너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사안이다. 명확한 증거 없이 함부로 이야기했다가는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는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옳은 말이었다. 무려 서제국이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니, 그녀 같은 시녀가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어떤 벌을 받을지 몰랐다.
“방화로 볼 만한 근거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녀가 굽히지 않고 당당히 말하자, 황태자 라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키에르한과 재상 오른도 그런 그녀에게 놀란 눈치였다. 키엘은 놀란 눈초리로, 재상 오른은 재밌다는 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다, 말해봐라. 들어보지.”
“이 화재가 사고가 아닌 방화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발화점의 위치 때문입니다.”
“발화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익숙하지 않은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발화점이 단순 화재 사고에서는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위치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봐라.”
발화점(發火點). 처음 화재가 일어난 위치를 뜻하는 용어로, 화재 원인 감식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지하 창고의 등불이 놓인 곳은 바로 이곳 두 곳의 벽면입니다.”
“그래, 모두 불타 버렸지. 당연히 이쪽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라엘은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하였다.
“아닙니다. 이곳에서 처음 불이 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먼저 불이 난 후 이곳 벽면까지 번졌다가 등잔에 담긴 기름이 터져 이렇게 벽이 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마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황태자의 철가면을 마주하며 말을 하니, 두 배…… 아니, 열 배로 긴장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래, 나도 궁금하군요. 왜 그런 거죠?”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인상의 흑발, 흑안의 남자가 빙글 미소 지으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
황태자, 재상 오른뿐 아니라,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까지. 마리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어, 어쩌다 일이 또 이렇게 커진 거야!’
처음 시작은 친구 제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한 시간도 안 되어 양 제국의 외교 문제가 되어버렸다. 역시 최근 그녀의 인생은 있는 대로 꼬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황태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놈이 여기에 무슨 일이지? 분명 경고했을 텐데. 추방당하기 싫으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아아, 그렇긴 한데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요. 우리 서제국이 대연회를 망치려고 불을 질렀다는.”
잠시 말을 멈춘 요한은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소 지은 채이지만, 눈빛이 서늘했다.
“그런 기분 나쁜 헛소리가 들려서 확인하러 왔죠.”
“……!”
황태자 라엘은 코웃음 쳤다.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너희 서제국의 쇼버 백작이 근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 어쨌든 어떻게 된 일인지는 곧 밝혀지겠지.”
그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계속 말해봐라. 어째서 이 화재가 방화인지.”
“저도 궁금하군요.”
양 제국을 지배하는 군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답했다.
“첫째로는 불길의 방향 때문입니다.”
“불길의 방향? 이미 다 타 버렸는데, 불길의 방향을 어떻게 알 수 있지?”
“먼저 이 악기를 보십시오.”
마리는 타다 만 바이올린을 가리켰다.
“그을림의 방향이 벽면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악기뿐만이 아니라, 저 악기도, 저 보관함에 남은 그을음도요.”
마리의 손가락을 따라간 그들의 눈이 곧 놀랍다는 듯 한껏 커졌다. 정말이었다. 모든 그을음이 벽면을 향해 나 있었다.
“만약 벽에 놓인 등불에서 불이 난 것이었으면 그을음의 방향이 반대쪽을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럴듯한 이야기군. 하지만 그것만으로 방화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증거가 약해. 다른 근거는 없는가?”
당연히 있었다. 마리는 이번에는 불에 그슬려 쓰러진 목조 기둥을 가리켰다.
“기둥이 쓰러진 방향 또한 이상합니다. 만약 벽의 등불에서 불이 난 거면, 기둥은 이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어야 합니다.”
“어째서지?”
“화재로 기둥이 무너질 때는 불이 닿아 타오르기 시작한 부분부터 힘이 약해져 그쪽으로 쓰러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모두의 눈에 또다시 놀람이 서렸다. 마리의 말이 이치에 맞았기 때문이다. 과연 쓰러진 기둥의 방향을 살피니 모두 한쪽 방향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것 외에도 몇 가지 근거가 더 있습니다. 발화점에서 시작한 불이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태우고 퍼지는데, 여기 남겨진 재들과 흔적을 봤을 때 그 방향 또한…….”
그렇게 마리는 자신이 발견한 사항들을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황태자, 요한, 키엘, 재상 오른의 눈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일개 시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가히 화재 전문 감식가와 같은 전문성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마리는 놀람에 가득 찬 그들의 눈동자를 보고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원치 않게 또 주목받게 되어버린 것 같다. 그것도 황태자는 물론이고, 서제국의 황제 요한, 재상 오른한테까지.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한 지점으로 걸어가 입을 열었다.
“이러한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처음 발화 지점은 이곳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에서 추가로 방화의 결정적 증거를 발견하였습니다.”
모두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증거가 뭐지?”
마리는 발화 지점에 놓인 팀파니에 손을 올렸다. 팀파니의 윗부분 가죽은 완전히 타 있었는데,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을음을 닦아 내자 무언가가 나타났다.
“이 촛농입니다.”
검게 변한 촛농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 그 촛농을 바라보았다. 재상 오른은 신음성을 흘렸다.
“촛농…… 그렇군. 범인은 그곳에서 초를 이용해 불을 낸 것이었어.”
저 정도면 증거로 충분했다. 이 화재는 분명한 방화였다. 잠시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아무도 단서를 못 찾고 있었는데, 일개 시녀가 순식간에 방화의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놀람이 가득한 그들의 눈동자는 마치 ‘저 소녀가 정말 시녀가 맞는 건지?’ 하고 묻고 있는 듯했다. 특히 마리가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황태자의 혼란은 더욱 컸다. 그때, 갑자기 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놀랍군요. 대단해요.”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였다. 그는 진정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잿더미만 가득한 현장에서 그런 사실을 유추해 내다니, 정말 대단해요.”
황제 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그의 머릿속에 지난번 발작이 일어나 쓰러졌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일은 정말 저 시녀와 상관없는 일이었을까? 지금 모습을 봤을 때 왠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모리나 왕녀를 찾으러 왔다가 생각지도 않게 흥미 있는 인물을 발견했군. 재미있어. 탐날 정도로.’
한편 요한의 눈빛을 받으며 마리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황태자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곤란한데, 어쩌다 서제국 황제의 관심까지 받게 된 것 같았다.
‘저 서제국의 황제 요한은 황태자와는 다른 의미로 엮이고 싶지 않은 존재인데.’
하지만 제인을 구하기 위해 안 나설 수도 없었고,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그러면 혹시 범인에 대한 단서는 있는가?”
황태자의 물음에 다시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가 전문적인 식견을 보여 준 뒤여서 시녀에게 허튼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에, 서제국의 황제에, 친위대의 기사단장에, 재상까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뭔가 본격적으로 망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 모른다고 말할까?’
그녀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여기서 자신의 추리를 밝히면 더욱 주목받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곤란한 일이 일어났다.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것이다.
“역시 범인에 대한 단서까지는 알기 어렵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군. 수상했던 자들 위주로 심문할 수밖에.”
황태자의 말에 요한의 얼굴이 굳었다. 수상했던 자들, 바로 화재 당시 주변에 있었던 서제국의 사신을 뜻한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란. 설마 지금 무고한 우리 서제국을 핍박하겠다는 건지?”
“무고한지 아닌지는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일단 너희 서제국의 쇼버 백작이 화재 당시 수상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니까.”
“우리 서제국이 그런 부당한 요구에 따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가요? 알고 있겠지만, 국경에 대기 중인 우리 서제국 기사들의 창끝은 굉장히 날카롭답니다. 내전에 지친 그대들이 그 창을 받아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지금 협박하는 건가?”
“글쎄요. 협박은 란, 당신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둘 사이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자칫 국제적 외교 문제로 치달을 듯한 분위기에 마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
‘쇼버 백작이 아니야! 범인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어쩌지?’
정말 더는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고 있기에는 외교 문제가 터질 판이었다. 결국, 그녀는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범인은 쇼버 백작님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태자와 황제 요한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지?”
“현장에 남겨진 몇 가지 단서 때문입니다.”
“말해봐라.”
모두의 눈빛을 받으며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범인은 어린애처럼 작은 체구이며, 신분이 높은 사람이고, 이 수정궁 내부를 잘 알며,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 않는 익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추가로 계획된 방화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방화를 저질러 놀라 달아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모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그녀의 추리가 굉장히 구체적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첫째로 발자국입니다.”
마리는 창고에서 밖으로 향하는 계단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화재 현장의 잿더미를 밟은 이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너무 섞여 있어서 알아보기가 어려운데?”
“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특이한 발자국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녀는 중간쯤 나 있는 발자국 하나를 가리켰다.
“저 발자국은 다른 발자국에 비교해 반절의 크기도 되지 않습니다. 마치 어린애의 것과도 같죠.”
확실히 다른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발자국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지만 그게 범인의 것이라고는 어떻게 알지? 화재 현장을 조사한 이의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발자국의 방향이 바깥으로만 향해 있습니다. 다른 모양의 발자국들이 대부분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향해 있는 것과 다르게요.”
“……!”
“그리고 이 발자국은 굉장히 드문드문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새겨진 다른 발자국에 흔적이 지워진 것이지요.”
그녀는 추가적인 사항을 설명했다.
“무엇보다 화재 후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이렇게 체구가 작은 사람이 왔다면 당장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즉,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이 발자국은 화재가 발생한 당시에 찍힌 발자국입니다.”
그럴듯한 추리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왜 범인이 이 수정궁 내부를 잘 아는 이라는 것이지?”
“그건 간단합니다. 불을 일으킨 도구 때문입니다.”
“도구?”
“네, 발화점에 떨어진 촛농의 성분을 봤을 때 범인이 불을 일으키는 데 사용한 촛대는 바로 이 창고 내에 보관하고 있던 촛대로 보입니다.”
이건 그녀가 이 수정궁에서 근무해 봤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발화점에 떨어진 촛농과 이 창고에 보관 중인 촛대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군. 범인은 이곳에 촛대가 보관 중이란 것을 알 정도로 이 수정궁에 대해 잘 아는 존재란 것이군.”
어린애처럼 작은 체구에, 수정궁에 대해 구석구석 자세히 아는 존재. 그렇다면 서제국의 쇼버 백작은 가능성이 떨어졌다. 일단 그는 장대한 체구였기 때문이다.
“네, 특히 대연회 직전이라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목격자가 분명 있었을 텐데 용의자로 지목되지 않은 것을 보면, 평소 수정궁을 자주 오가 사람들 사이에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소 자주 보던 인물이니, 용의자로 의심받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면 신분이 높다는 것은?”
“그것 역시 간단합니다. 이 촛대 때문입니다.”
마리는 창고 구석에 버려져 있던 촛대를 들어 보였다. 촛대는 대부분 불에 타 손잡이 부분만 일부 남아 있었다.
“원래 이 창고에 보관 중인 촛대인데, 범인이 불을 일으키기 전 사용하다 버린 촛대입니다.”
“다 타 버려 끝부분만 남아 있군. 그걸 보고 어떻게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거지?”
“이 손잡이 부분 때문입니다.”
모두 그녀가 가리킨 철제 손잡이 부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철제 손잡이에 끼우는 부분에 굉장히 많은 흠집이 나 있습니다. 이건 촛대를 다뤄 본 경험이 없기에 익숙하지 않아 생긴 흠집이지요.”
“……!”
“즉, 범인은 촛대를 직접 다뤄 본 적이 없는 높은 신분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들 모두 촛대를 다뤄 본 경험이 없었다.
“다만 방화의 의도는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정교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가연성이 높은 발화물을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우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설명이 끝났다. 황태자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다.
‘정말 대단하군.’
만약 우연히 특별한 단서를 발견해 범인을 지목한 것이면 그렇게까지 감탄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시녀가 발견해 낸 단서들은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오가며 한 번씩은 확인한 것들. 그런 흔한 단서에서 생각지도 못 한 결론을 추리해 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도대체 저 시녀는…….’
그는 최근 몇 번이고 떠올린 의문을 중얼거렸다. 알면 알수록 새로운 면이 나오는 소녀. 도대체 저 소녀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황태자 라엘은 갑자기 답답하단 느낌을 받았다. 저 소녀를 볼 때마다 느끼는 이유 모를 답답함이었다.
한편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도 각양각색의 감정을 느꼈다.
‘정말 대단하군. 서제국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진심으로.’
서제국의 황제 요한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흥미를 느꼈다.
‘마리 양?’
그렇지 않아도 마리에게 호의적이었던 키에르한은 그녀의 또렷한 설명에 깊은 감탄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껏 말없이 듣고만 있던 재상 오른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저 시녀는 도대체 뭐지? 시녀가 어떻게 저런 추리를 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알기로 저 시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드렛일을 하던 하급 시녀였다. 도저히 저런 추리를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눈여겨봐야겠군. 무언가 수상해.’
그렇지 않아도 황태자 라엘이 저 시녀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재상 오른은 황태자를 위해서라도 조금 더 저 시녀에 대해 파고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리에게 새로운 위협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때, 마음을 다스린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네 이야기는 잘 들었다.”
“네, 전하.”
“아직 범인이 확정되지 않아 네 의견이 맞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긴 하군. 혹시 원하는 것이 있느냐?”
마리는 주저하다가 조심히 제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그녀의 말을 들은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시녀의 잘못이 아님이 판명되었으니, 그 시녀는 당연히 죄를 벗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그건 당연히 조처해야 할 일이지, 네가 밝혀낸 단서에 대한 상이라고 할 수 없어.”
마리는 그 말에 곤란한 얼굴을 했다. 상? 그녀에게 최고의 상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모두 거두어주는 것이다.
“저는 딱히 바라는 것이…….”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렇게 하지.”
“……?”
“네가 말한 추리가 맞다면, 범인은 금방 검거할 수 있을 거다. 지금 당장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으니까.”
그 말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짐작 가는 인물이 있다고? 그리고 그건 황태자뿐 아니라 재상 오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마…… 그분이면 가능성이 있겠군요. 저 시녀의 말이 맞는다면 말입니다.”
“그래.”
그들의 대화를 들은 키에르한도 용의자를 짐작한 듯했다. 반면 그는 그들과는 달리 창백해진 얼굴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설마……? 그분이 그럴 리가?”
마리는 그들이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황태자는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범인 검거가 마무리되면 부르지. 그렇지 않아도 너에게 따로 할 말이 있었으니까.”
* * *
‘도대체 누가 범인인 거지?’
마리는 숙소의 침대에 누워 고민했다. 일단 제인이 누명을 벗은 것은 다행이었다. 서제국과 쓸데없는 충돌을 피한 것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실제 범인은 누구일까? 황태자와 재상 오른은 자신의 설명을 듣더니 곧바로 용의자를 짐작해 내었다. 키엘도 그렇고. 그 말은 용의자가 그들에게 굉장히 익숙한 존재란 뜻이었다.
‘더구나 키엘 님은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어.’
어린애 같은 체구에, 황궁 구석구석을 잘 알고, 모두에게 익숙한 인물. 누군가가 어렴풋이 떠오를락 말락 하였다.
‘도대체 누구지?’
그 순간 마리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한 명 있었다. 그녀가 프로파일링한 조건에 딱 맞는 인물이!
‘서, 설마?’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치 아까 전 키에르한의 낯빛처럼.
‘그분은 아닐 거야.’
마리는 애써 자신의 추측을 부정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숙소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여니 황태자의 근위 기사 알몬드가 서 있었다. 장대한 체구의 그는 자신의 가슴 정도밖에 안 되는 마리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시녀, 마리?”
“네.”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신다. 지금 바로 사자궁으로 갈 준비를 하도록.”
“알겠습니다.”
마리는 한참 전에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중이었으므로, 곧바로 방에서 나왔다. 마리는 알몬드의 뒤를 따라 사자궁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하구나.’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황태자가 자신을 왜 따로 부르는지도 걱정이 되었고, 화재를 일으킨 범인의 정체도 궁금했다.
‘만약 정말로 내가 추측한 분이 범인이면 어떻게 하지?’
그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알몬드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네?”
“너희 아랫것들 사이에서 전하가 어떻게 불리는지는 알고 있지만, 소문같이 처녀의 피를 마시고 하는 분은 아니야.”
“아, 아니, 저는…….”
알몬드는 자신이 황태자에 대한 소문 때문에 걱정하는 걸로 착각한 듯했다.
‘피를 빨아 먹힐까 봐 걱정한 것은 아닌데. 물론 황태자가 무서운 것은 맞지만.’
“하여튼 빨리 가지.”
“네!”
마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알몬드를 바라보았다.
‘방금 나 달래 준 것 맞지?’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는 사내지만 의외로 친절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그 친절에 기대 마리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 알몬드 경.”
“왜 그러지?”
“혹시 어제 화재 사건의 범인은 잡혔나요?”
알몬드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잡혔다. 범인은 범행을 자백했고, 현재 구금 중이다.”
마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렇게 빨리 잡힌 것으로 보아 황태자, 재상, 키엘이 짐작하던 인물이 범인이 맞는 것 같았다. 마리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정말로?’
“저, 혹시 범인은 누구였는지?”
조마조마하게 물었으나 알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자궁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거다.”
“……네.”
마리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그녀는 황태자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전하, 시녀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와라.”
끼익.
어딘지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철제문이 열렸다. 마리는 문 안으로 들어와 예를 올렸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황태자는 재상 오른과 함께 있었다. 재상 오른은 황태자에게 무언가를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마리가 온 것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래, 어서 오도록. 그대 덕분에 화재 사건의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황태자는 잠시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갑기만 한 평소의 눈동자와 다르게 무언가 복잡한 빛이 섞여 있어 마리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금방 사라졌고, 그는 평소와 같이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지난번 만찬회 때도 그렇고, 두 번이나 공을 세웠어. 공을 세웠는데 그대로 넘어갈 수 없지. 혹시 바라는 것이 있는가?”
마리는 늘 그렇듯 고개를 저어 사양하려 했다. 포상이나 훈장을 받아 황태자의 눈에 더 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황태자에게 부탁해야 했던 일.
‘이 기회에 사자궁에서의 근무를 취소해 달라고 해야겠구나.’
이대로 가만있으면 축제가 끝난 후, 그녀는 저 황태자의 옆에서 일해야 한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이번 기회에 그 문제를 부탁하면 될 것 같았다.
“사실…….”
그렇게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에 황태자의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서류가 들어왔다.
<수정궁 화재 범인 검거 보고서.>
친위대에서 작성해 올린 보고서 같았다. 그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범인’ 항목을 훔쳐봤다. 범인의 이름을 본 마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 정말로? 그분이?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황태자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전하,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아까 전 화재의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습니까?”
황태자는 말을 하다 말고, 범인을 물어보는 그녀에게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답했다.
“오스카다.”
그 대답을 들은 마리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얘졌다.
“그대의 말대로 10황자 오스카가 범인이었다.”
‘정말? 그 오스카 전하가 화재의 범인이었다고?’
인형처럼 귀엽던 꼬마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낭랑하게 귀여운 시비를 걸던 모습. 연회에 소외당해 울먹이던 모습. 자신의 마술을 보고 기뻐하던 모습.
‘귀엽고, 안쓰럽기만 하던 그 꼬마 황자가 범인이었다고?’
황태자는 차분히 말했다.
“그대의 말이 조사에 큰 도움이 되었어. 만약 그대가 아니었으면 범인을 짐작도 못 하고 있었을 거다.”
황태자는 그녀를 칭찬했으나, 마리는 그 칭찬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왜 그분이 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혹시나 자신을 소외시킨 사람들에게 복수할 생각에 대연회를 망치려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마술을 보고 어느 정도 응어리를 풀기도 했고, 무엇보다 꼬마 황자는 그렇게 나쁜 심성을 지니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엔 자신에게 마술로 복수해 주겠다며 아이처럼 외치고 떠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방화를 저질러 대연회를 망치려고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꼬마 황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두고 봐! 오늘 네가 보여준 마술 내가 샅샅이 공부해서 올 테니, 그때 다시 내기해!”
‘설마?’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보여 주었던 플레임 배니싱을 연습하다가?’
플레임 베니싱(Flame vanishing). 기다란 촛대에 불을 붙인 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다. 어쩌면 꼬마 황자는 그 마술을 연습하다 실수로 불을 낸 것은 아닐까?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혹시 오스카 전하께서는 왜 불을 낸 것인지…….”
“글쎄.”
황태자는 말끝을 흐렸다.
“대연회를 일부러 망치려는 것은 아니었고, 촛대로 무슨 연습을 하다 불을 냈다는데. 추궁해도 정확히는 이야기하지 않는군.”
그 말에 마리는 직감했다.
‘내 불 마술을 연습하다 그런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평소 이곳저곳을 혼자 돌아다녀 황궁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오스카는 수정궁 지하 창고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불꽃 마술을 연습했던 것이다. 그러다 실수로 팀파니의 가죽 면에 불꽃을 튀어 화재를 낸 것이고.
‘이를 어쩌지? 내가 괜히 불 마법을 보여 줘서.’
마리는 크게 자책했다. 설마 위험한 불 마법인 플레임 베니싱을 따라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잠깐. 그러면 처벌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황족이었으면 큰 문제없이 넘어갈 일이었다. 이 정도 일이야 누군가 나서서 보호해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오스카는 달랐다. 누구도 그 꼬마 황자를 비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애초에 저 피의 황태자에게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는 신세 아니던가. 그런데 다른 잘못도 아닌, 화재라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어떤 중한 처벌을 받을지 몰랐다. 과연 옆에 있던 오른 공작이 이렇게 말하였다.
“오스카 전하에게 어떤 벌을 내리실 것입니까?”
“글쎄.”
“제국법에 따르면 황궁에 화재를 내어, 황제의 재산을 손상시킨 자는 중벌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벌이라면?”
“과거의 경우를 보면 손목을 절단한 판례가 있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뭐라고? 손목을 절단해?’
황태자도 과하다 생각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노예의 경우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만, 제국법은 황제 폐하의 재산에 손실을 입힌 경우에는 황족과 평민의 차등을 적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리는 눈앞이 깜깜해져 생각했다.
‘그, 그건 아무도 황족을 그렇게 처벌하지 않으니까!’
손목 절단이라니! 상상도 못 할 만큼 끔찍한 형벌이었다. 만약 죄를 저지른 사람이 황족이 아닌 하급 시녀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처벌까지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재상 오른 공작은 이번 기회를 빌려 오스카 황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거야!’
마리는 하얗게 질려 생각했다. 오스카 황자는 전(前) 황후의 적통이다. 훗날 장성하면 황태자의 강력한 정적이 될 게 뻔하니 미리 치우려는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재상 오른은 답답하다는 듯 채근했다.
“전하, 무얼 망설이시는 것입니까?”
“…….”
“사실 원래 내전 때 목을 베었어야 했습니다. 그때 살려 두신 것도 그렇고, 지금 망설이시는 것도 그렇고 전하답지 않습니다.”
전하답지 않다. 그건 수많은 피를 제물로 바친 피의 황태자로서의 면목을 뜻하는 것이리라. 결국, 황태자는 입을 열었다.
“그게 모두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황실 친위대의 키에르한 후작을 위시한 황제파가 반발하겠지만, 어차피 그들은 소수. 더구나 이번엔 명확한 죄가 있으니 그들이 반대해도 상관없습니다.”
라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그 대화를 듣고 있는 마리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이대로 황태자 라엘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오스카 황자는 끔찍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건 안 돼!’
꼬마 황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옷을 펄럭이며 자랑하던 모습. 마술을 보며 놀라던 모습. 사람들의 냉대에 울먹거리던 모습. 그 안쓰러운 꼬마 황자가 그런 끔찍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고작 내 마술을 따라 하다가 불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아니, 어른들의 정치적 사정 때문에?
“오스카 황자에 대한 처벌은…….”
황태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 입에서 판결이 떨어지면 그때는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섰다.
“전하, 말씀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포상을 지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황태자와 재상 오른은 그녀가 갑자기 나서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보도록.”
마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원래는 절대 나서면 안 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어떤 후환이 몰아닥칠지 두려웠지만, 도저히 못 본 척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10황자 전하의 죄는 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마리는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낮게 엎드렸다.
“그러니 10황자 전하가 받아야 할 벌의 일부를 저에게도 나누어주십시오!”
황태자와 재상 오른은 그 난데없는 청에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니?”
마리는 자신과 오스카 황자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마술로 내기를 하였고, 자신의 불 마술을 연습하다 사고가 났을 것이라는 이야기.
“……그러니 그 마술을 보여 준 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스카 전하께서 불민한 의도로 불을 낸 것이 아니고, 저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저에게도 벌을 나누어주시고, 대신 전하께 내리는 벌을 경감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들은 황태자와 재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장내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리.”
“네, 전하.”
“넌 지금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건가?”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어떤 후환이 몰아닥칠지 모르는 부탁. 원래대로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 안쓰러운 꼬마 황자가 무서운 형벌을 받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이 알려 준 마술이 빌미가 되어서.
“네가 한 말이 정말인지는 오스카에게 확인해 보면 알겠지. 어쨌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다. 넌 방금 네가 한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느냐?”
“…….”
“너에게 벌을 피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네가 보여 준 마술을 따라 하다가 불을 냈다고 해도, 그게 꼭 너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으니.”
마리는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황태자는 알 수 없다는 눈빛을 하였다.
“왜지? 오스카와 먼 친척인 키에르한 후작과 다르게 너와 오스카 황자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틀린 물음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몇 번 마주쳤을 뿐, 마리와 오스카는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녀가 오스카를 돕는다고 얻을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황태자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대답해 봐라.”
마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냥……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리의 대답에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냥 선의(善意)일 뿐이라고?’
그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살짝 흔들렸다.
‘고작 선의로 남을 위해 나선다고? 자신이 피해 볼 수도 있는데? 왜?’
라엘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를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시커먼 눈동자로 바라보았고, 등 뒤에 비수를 감추고 살았다. 죽지 않으려면 죽이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모두의 목을 베고 황태자 지위에 올랐다. 그런 냉혹한 길을 걸어온 라엘은 순수한 선의를 말하는 마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저 온실 속 화초로만 자랐다면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 포로에, 하급 시녀로 지내온 저 시녀의 삶도 만만치 않은 굴곡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저런 선의를 가지며 살 수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할 수 없어.’
왜일까? 저 시녀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답답함이 또다시 도졌다. 도대체 이 답답함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라엘은 고개를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좋다. 네 부탁을 들어주마.”
“전하?”
재상 오른이 놀라 말했다.
“됐다. 난 이미 저 시녀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만.”
재상 오른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스카에 대한 벌을 결정하겠다. 화재를 일으켜 황제의 재산을 손상한 죄로 두 달 감금형에 처하겠다.”
마리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부탁대로 오스카가 받을 벌을 굉장히 감형해 준 것이다! 마리는 감사의 말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황태자는 차갑게 말했다.
“감사할 필요 없다. 네가 말한 대로 너도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니.”
마리는 얼굴을 굳혔다. 두려웠지만,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거부할 수 없었다.
“말씀하시옵소서.”
“그래.”
그런데 황태자는 바로 벌의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고 재상 오른을 돌아보았다.
“오른.”
“네, 전하.”
“먼저 나가 보게. 나는 이 시녀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황태자의 명에 따라 방에서 나갔다.
“그러면 나가 보겠습니다.”
끼이익.
왠지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소음을 내며 철문이 닫혔다.
“……전하?”
마리는 그토록 두려워하는 황태자와 단둘이 있게 되자 눈을 크게 떴다. 벌을 내리는데 왜 단둘이? 황태자는 잠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둘이 있는데 그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긴장감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 했던 것이었다.
“저 피아노 앞에 가서 피아노를 연주해 봐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재차 명했다.
“피아노를 연주해 봐라. 너의 연주를 듣고 너에게 내릴 벌을 결정하지.”
“……!”
마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스카 황자를 위해 나섰을 때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였다.
‘어째서 내게 피아노 연주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들킨 건가? 아니야. 그때 대연회장 3층에서 황태자는 나를 보지 못했어.’
그녀는 아닐 거라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들킨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자신에게 피아노 연주를 시킨단 말인가? 그녀는 힐끗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섬뜩한 철가면 아래 파란 눈동자는 가만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무감정한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황태자는…… 무언가 알고 있어.’
정확히 들켰는지 안 들켰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보관함에 숨어서 마주치지 않았는데?’
당시 대연회장 3층에서 황태자가 몰래 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지켜봤다는 것을 모르는 마리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황태자가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가 아니었다.
“빨리 쳐 보도록.”
황태자가 명했다. 마리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 어떻게 하지?’
그녀의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그냥 엉망으로 칠까? 아니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상황인데 엉망으로 치면 괜한 의심만 더 살 수도 있어.’
무엇보다 저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게도 굉장히 깊은 음악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정말 실력이 없는 것과 일부러 엉망으로 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는 거지? 아무 곡이나 쳐 보도록. 너에게 내릴 벌은 그 연주를 듣고 결정할 테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연주를 듣고 벌을 결정하겠다니? 마리는 황태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맹수 앞에 선 토끼였다.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의 상태. 도망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주님.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마리는 아득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일부러 엉망으로 치는 것은 안 돼. 그러면 실력이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쉬우면서, 이전에 쳤던 곡들과 다른 스타일의 곡으로.’
그녀는 최대한 정체를 숨길 수 있는 곡을 결정했다.
딴.
마리의 손가락이 건반을 눌렀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낮은 건반 음. 곧 방 안에 잔잔한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원 풍경 교향곡이나 대연회 서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곡이군.’
황태자는 마리의 곡을 들으며 생각했다.
‘특별히 현란한 기교도 없어.’
지금껏 들었던 전원 풍경 교향곡과 대연회 서곡은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도, 클라이맥스로 고조될 때는 굉장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난곡이었다. 반면 지금 저 시녀가 연주하는 곡은 완전히 정반대의 스타일. 분위기도 고요하고 잔잔했고, 난이도도 굉장히 낮았다. 악기의 초보자도 따라서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음형의 구성이 단순했다.
‘저 시녀가 아닌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 음악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전 두 명곡을 연주한 이와 저 시녀가 동일인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황태자가 철가면 아래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잔잔하게 귀를 간지럽히는 선율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편안하군.’
황태자는 멜로디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간단하지만, 좋은 곡이야. 아니, 좋은 연주라고 해야 하나?’
음표 하나하나, 템포, 아티큘레이션, 프레이징 등 멜로디를 이루는 수많은 내용이 그의 귀로 들어왔다. 그 음악적 정보를 분석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 시녀가 정말로 그 정체불명의 연주자인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왠지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않고 순순히 저 곡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단순한 기교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듣기 좋은 멜로디였다. 방 안에는 고요한 피아노 선율만 흘렀다. 잔잔한,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무릎에 눕히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한 느낌의 선율.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고 평안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마리는 아르페지오를 마지막으로 곡을 마무리하였다.
“……끝났습니다, 전하.”
그녀는 피아노에서 손을 내리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철가면 안으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리는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생각했다.
‘최대한 다른 분위기로 연주하긴 했는데. 난이도도 쉬운 곡이었고.’
방금 그녀가 친 곡은 이전 곡들과 다르게 악기에 관심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곡이었다. 마리는 황태자가 제발 이 곡을 듣고 의심을 거두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너였군.”
나직한 음성. 황태자가 파란 눈을 들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본 순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네가 그 연주자였어.”
마리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마리는 하얀 안색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황태자가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더는 부정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전히 들켜 버린 것이다. 사실 라엘도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연주라 처음엔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한 멜로디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평안함으로 이끄는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저 시녀야말로 그 정체불명의 연주자가 분명하다는 것을.
‘저 소녀가 정말로 그 연주자였다니.’
황태자는 경악해 마리를 바라보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이 소녀는 얼마나 자신을 경악하게 하려는 것일까? 라엘은 마리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의 주방장과 비견될 정도의 요리 솜씨에, 마술 실력, 모두를 놀라게 하는 추리 능력에, 기적 같은 음악가의 실력까지. 그는 아직 서제국의 황제 요한을 살린 일과 조각사의 일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밝혀진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웠다.
“어째서 정체를 숨겼던 거지?”
마리는 화급히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해가 안 가서 물어보는 것이다. 왜 정체를 숨겼던 것이지?”
라엘은 지금껏 계속해서 품었던 의문을 물었다.
“그, 그게…….”
마리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정체를 숨기려 했던 것은 과도한 주목을 받아 혹시나 자신이 모리나 왕녀인 것이 밝혀질까 염려스러워서였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려, 마리. 아직 황태자는 내가 모리나 왕녀란 것까지는 몰라.’
긴장과 당혹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정말로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온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안 된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의심받지 않도록 해야 해.’
가장 최선은 능력을 들키지 않아 주목을 피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것은 늦었다. 최대한 의심이라도 피해야 했다.
‘뭐라고 해야…….’
그녀는 둘러댈 말을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대답해 봐라.”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의심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의심?”
“네, 전 미천한 신분의 여인입니다. 과한 능력을 보여 곤란한 의심을 받는 것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조심히 말을 이었다.
“저같이 미천한 신분의 여인이 괴이한 의심을 받을 경우,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물론 마리가 정체를 숨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면 모를까, 마리의 능력은 지나치게 뛰어났다. 그것도 다방면으로. 귀족가의 여인이라면 천재라 칭송받았겠지만, 신분이 미천하다 보니 운이 나쁠 경우 충분히 괴이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렇군. 마녀(魔女) 취급이라도 받을까 걱정되었던 건가?”
마리는 묵묵히 있었다. 황태자 라엘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듯한 이유긴 하군.’
확실히 저 소녀의 생각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냥 납득하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한 근거 없는 감이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 소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거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디평범한 소녀. 하지만 알면 알수록 느껴지는 끝없는 혼란. 라엘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하.’
그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저 소녀를 마주할 때마다 늘 느끼는 터질 듯한 답답함이다. 갑갑했다. 이 갑갑함의 벽을 깨부수고 싶었다.
‘도대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소녀는 무엇이건대 나를 이렇게 흔드는 건지, 혼란스럽게 하는 건지.
‘그냥 눈앞에서 멀리 치워 버릴까?’
라엘은 순간 생각했다.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이 혼란도 없어지리라. 자신은 이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철혈의 군주. 그런 자신을 흔드는 것은 어떤 요소라도 배제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이유는 없다. 그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오히려 반대로.
‘철저히 내 옆에 두면 이 답답함이 사라질까?’
라엘은 충동이 일어났다. 저 소녀를 옆에 가둬 두고 싶다는 충동이. 그래서 저 소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감춰진 것 없이 모든 것을 파헤치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엘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리.”
“네, 전하.”
“혹시 황궁 악단을 맡고 싶지는 않으냐? 네 음악 실력이면 악장 바한을 능가할 터.”
마리는 화들짝 놀랐다. 단순한 악단의 단원이 아닌, 악장이라니! 거의 준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직위였다. 일개 시녀와는 차원이 다른 높은 위치.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거두어주시옵소서.”
물론 그녀도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악단을 맡으면 공연 등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의 시선에 노출된다. 그러니 진실한 정체를 숨겨야 하는 그녀로서는 피해야 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정말 원하지 않는가?”
“네, 전하.”
“후회하지 않겠느냐?”
거듭 물어보는 라엘에게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시지?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녀의 대답에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면 아까 전 이야기하다 만 너에게 내릴 벌을 결정하지.”
마리는 긴장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과연 자신에게 어떤 벌을? 그런데 황태자는 의외의 말을 하였다.
“시녀 마리, 3년 전 클로얀 왕국에서 끌려온 전쟁 포로. 현 황제인 토른 2세의 개인 소유.”
“……전하?”
“내가 말한 것이 맞나?”
마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황제 폐하이신 토른 2세의 개인 소유가 맞습니다.”
자유인인 다른 시녀들과 다르게 전쟁 포로인 그녀는 황실, 정확히는 현 황제인 토른 2세의 개인 소유였다. 지금은 쓰러져 의식 불명의 상태이지만, 그녀의 생사여탈권은 현 황제에게 있었다. 그건 그녀뿐 아니라 다른 전쟁 포로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왜?
“좋다. 그러면 너에게 내릴 벌을 확정하겠다.”
황태자는 허리춤에 매어진 보검을 움켜쥐었다. 황가 대대로 내려오는 그 보검은 황태자로서 황제의 권한을 대신하게 하는 상징물이었다.
“오늘로서 마리, 너의 소유권을 황제 폐하로부터 나, 황태자 라엘에게로 이양한다.”
그 생각지도 못 한 말에 마리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저, 전하?”
라엘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시녀 마리, 너는 나, 라엘의 것이다.”
마리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얘졌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라엘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철가면 아래 푸른 눈빛에 일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으나, 마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