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이제 연회장 쪽으로 돌아가자.’
마리가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 한 인물을 마주쳤다.
“키엘 님?”
비단 같은 은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조각 같은 얼굴. 황실 친위대의 키엘이었다.
“안녕하세요.”
마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키엘도 마주 인사하더니 말했다.
“오스카 전하께서 오셨었군요.”
“아, 네. 방금 왔다 가셨어요.”
키엘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뛰어가고 있는 꼬마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오스카를 향한 따뜻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깃들었다. 그리고 곧 오스카의 모습이 완전히 안 보이게 되었을 때, 키엘은 마리를 향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 행동을 하였다.
“키, 키엘 님?”
황실 친위대인 그가 시녀인 마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스카 전하를 신경 써 주셔서.”
“괘, 괜찮아요.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마리는 당황해 손을 저었다. 아무리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라지만, 황실 친위대의 인물이 일개 시녀인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다니. 지난번 백조 정원에서 자신을 도와줄 때부터 느꼈지만, 평범한 성격의 귀족은 아닌 것 같다. 지나치게 착하고, 지나치게 예의가 발랐다.
‘무, 물론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니, 좋은 성격이지만…… 그래도 귀족인데…….’
한편, 마리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키엘은 싱긋 웃었다. 소녀의 심장 건강에 안 좋은 맑은 미소였다.
“이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마리 양은 참 착하고 귀여우신 것 같습니다.”
귀엽다는 말에 마리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화악 붉어졌다.
‘순진한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정말로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키엘의 성격상 별다른 사심 없이 하는 이야기겠지만, 마리는 주책없이 가슴이 뛰었다. 키엘은 잠시 미소를 짓고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오스카 전하는 외로우신 분입니다.”
“아…… 네.”
“그래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저 말고는 그분을 진심으로 대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 말에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키엘의 정체에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키엘 님은 어떻게 저렇게 오스카 전하와 가까운 거지?’
자신처럼 오가며 우연히 가까워진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오스카는 진심으로 키엘을 의지하고 있었다. 마치 진짜 가족처럼.
‘혹시?’
이전부터 키엘에 대해 떠올랐던 의문들. 그 의문들이 겹쳐 한 가지 가정을 이루었다.
‘설마 종자가 아니라…….’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키엘을 바라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의 그는 순수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맑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리 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될까요, 키엘 님?”
“뭐든 말씀하십시오.”
“혹시…… 키엘 님의 풀네임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
키엘은 순간 멈칫했다. 마리는 굳은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풀네임은…….”
키엘은 주저하며 말을 이어 갔다.
“키에르한 드 세이튼입니다.”
“……!”
마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키에르한 드 세이튼 후작.
제국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황실 친위대의 단장이자, 제국 최강의 기사, 그리고 황실 다음 가는 군사력을 지닌 변경백(邊境伯)이 바로 키에르한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뭐라고? 키엘 님이 키에르한 후작이라고?’
마리는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때, 키엘, 아니, 키에르한 후작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그 말에 마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방패, 키에르한 후작 각하께 시녀 마리가 인사 올립니다. 지금껏 실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마리 양, 실례라니요.”
키엘은 딱딱해진 마리의 태도에 고개를 저었다.
“잘못은 정체를 숨긴 제가 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아닙니까?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리는 그 말에 속으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인 나한테 편하게 대해 달라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녀도 지금껏 키엘에게 친구 같은 편안함을 느끼긴 했다. 그와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제국 최고의 대귀족 중 하나인 세이튼가의 키에르한 후작과 시녀인 자신이 친구라니, 말이나 되는가?
한편 마리의 단호한 거절에 키엘은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전 마리 양을 친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운해하는 그의 목소리에 마리는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저분은 정말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 특이한 귀족이다. 마리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강경한 그녀의 태도에 키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제가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면 마리 양의 입장이 곤란하겠지요.”
마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키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
“솔직히 전 이대로 마리 양과의 인연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왜죠?”
키엘은 답했다.
“착하고 귀엽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리 양은 만나면 만날수록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요.”
“……!”
키엘은 살짝 웃었다.
“마리 양과는 신기하게 마음이 잘 통하는 느낌입니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던 것 같아요.”
그건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키엘이 편안하고 좋았다. 그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마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욕심 때문에 마리 양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전 마리 양을 ‘마음속으로’ 제 친구로 여기겠습니다.”
“……!”
마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키엘은 자신의 손을 마리에게 내밀었다.
“그러니 이전처럼 편하게 대하긴 어렵더라도, 마리 양도 마음속으론 저를 친구로 여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클로얀 왕성에 들어간 이후로 그 누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 주었단 말인가?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키엘이 내민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네, 각하.”
주저하며 그 손을 잡았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지만, 고된 일을 많이 해 동시에 거칠기도 했다. 마리의 거친 손바닥에 새겨진 지난 세월을 짐작한 키엘은 순간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다.
“마리 양.”
“네?”
그는 손을 잡은 채 마리에게 말했다.
“그래도 단둘이 있을 때는 키엘이라 불러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한편 그때, 마리와 키엘이 있는 으슥한 정원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무언가 못마땅함이 가득한 음성. 그 목소리의 주인은 놀랍게도 철가면을 쓴 황태자였다.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계속 답답한 거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가 그들을 일부러 훔쳐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회 내내 알 수 없이 계속 답답한 마음이 들어 연회장 주변을 산책 나왔다가 우연히 시녀 마리가 마술 쇼를 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저 소녀가 마술을?’
상상도 못 했던 모습이라 그는 깜짝 놀랐다. 수준도 낮아 보이지도 않았다.
‘대단하군. 거의 전문가급의 실력이야. 그런데 저 시녀는 어떻게 마술을 할 줄 아는 거지?’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마술이야 연습하면 할 수 있는 거지만, 시녀와 마술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요리 솜씨도 굉장하고.’
얼마 전 그녀가 백합궁의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 역시 전문 셰프 이상의 솜씨였다.
‘다재다능하군. 단순한 시녀로 두기 아까울 정도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음악가나 조각사의 일도 혹시 저 시녀가?’
그는 미궁에 빠진 두 사건을 떠올렸다. 근위 기사단까지 동원했는데도 범인(?)의 그림자도 못 찾고 있었다.
‘두 사건 모두 저 시녀가 주변에 있었지.’
라엘의 머리에 자꾸만 같은 의혹이 떠올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보면 모를까, 일개 평범한 시녀가 천사가 한 듯한 음악과 조각을 표현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의문에 잠겨 있을 때였다.
‘잠깐.’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키에르한 후작이 마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이 마리에게는 왜?’
그냥 우연히 다가온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굉장히 친근해 보였던 것이다.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왜일까? 아까 전부터 느껴지던 답답함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그 답답함은 마리가 키에르한에게 웃음을 보일 때마다 더욱 커졌다.
“……거슬리는군.”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황태자는 흠칫 놀랐다. 뭐가? 뭐가 거슬리는 거지? 저 시녀가 누구와 대화를 나누며 웃음을 보이든 불쾌한 기분이 들 이유는 전혀 없잖아?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뭐 하는 거냐, 라엘. 꼴사납게 남이나 훔쳐보고.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가려는 찰나, 라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키에르한이 손을 내밀고, 마리가 그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본 것이다.
“…….”
라엘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순간 붉은 입술이 하얗게 물들었다.
‘정신 차려, 라엘. 왜 기분 나빠하는 거지?’
그저 서로 손을 잡았을 뿐이다. 특별한 사이가 아니어도 흔하게 할 수 있는 악수.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다. 아니, 설혹 그들이 정말로 특별한 사이라도 자신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지난번 마리가 황제 요한과 같이 있을 때부터 느꼈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에 휘몰아쳤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군.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그러나 황태자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결국, 황태자는 그녀가 키에르한과 헤어져 연회장 쪽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가슴의 답답함이 더욱 커졌다.
마리는 그날 밤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헤헤.”
마리가 기분 좋게 웃자, 같은 방을 쓰는 동료 제인이 물었다.
“마리, 무슨 좋은 일 있어?”
“아,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니야. 잘 자!”
제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다르게 마리가 굉장히 들떠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마리는 지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첫 번째로, 다행히 별일 없이 꿈이랑 관련된 일이 끝났다. 마술사 꿈을 꾼 후 또 무슨 일을 겪을까 굉장히 노심초사했는데, 별 탈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꼬마 황자에게 마술을 보여 줬을 뿐, 누구의 눈길도 끌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10번도 해도 괜찮아.’
그리고 두 번째 기분 좋은 일.
“단둘이 있을 때는 키엘이라 불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녀에게 친구가 생겼다! 마리는 헤헤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물론 일반적인 친구라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와 자신 사이에는 하늘과 땅 같은 신분의 차이가 났다. 따라서 보통의 친구들처럼 친근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꼭 허물없이 지내야 진정한 친구인 것은 아닐 테니까. 가깝게 지낼 수는 없다고 해도, 키엘처럼 착하고 편안한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행복했다.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을 붙였다. 기분이 좋아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은 꿈을 꾸길 바란 탓일까? 마리는 그날 밤 또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녀가 바라던 아기자기하고 행복한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왓슨, 이것 좀 보게.」
「이게 뭐지?」
「피해자의 집에서 발견된 목도리야.」
범죄 사건을 조사하는 탐정이 되는 꿈을 꾼 것이다!
‘……이건 또 왜?’
꿈속을 보며 마리는 절망하여 생각했다. 겨우 하루 행복하게 지냈건만, 이번엔 범죄 사건을 수사하는 꿈이라니? 더구나 그냥 사건도 아닌, 강력 범죄 사건이다.
‘나한테 또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그녀의 절망과 별개로 꿈은 차분히 진행되었다.
「자네는 이 목도리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나, 왓슨?」
「글쎄…… 그냥 평범한 목도리인데? 거리에 나가면 비슷한 목도리를 100개는 볼 수 있을 걸세.」
왓슨이라 불린 조수의 말에 꿈속의 주인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목도리는 우리에게 여러 귀중한 정보를 주고 있어. 이 목도리는 범행이 우발적이었다는 것과 범인이 혼자 산다는 것, 동시에 왼손잡이에, 굉장히 비만한 체형을 하고 있고, 외부에서 일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려 주고 있지.」
그의 ‘프로파일링’을 들은 꿈속의 조수 왓슨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그야 간단해.」
꿈속의 주인공은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계획적인 범죄였으면 결코 목도리를 놓고 가지 않았을 걸세.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당황해 놓고 간 것이지. 그리고 이 목도리는 해지고 낡았는데도 한 번도 손질하거나 세탁한 흔적이 없네. 부인이나 부모처럼 같이 사는 사람이 있었으면 이렇게 낡고 더러운 목도리를 그냥 놔뒀을 가능성은 적어. 대충 빨래라도 했겠지.」
그렇게 꿈속의 주인공은 하나하나 자신이 추측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이렇듯 모든 단서는 관찰에서 알아낼 수 있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야.」
그 말에 조수 왓슨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꿈속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네이니까 가능한 것이네.」
그러며 왓슨은 꿈속 주인공의 이름을 불렀다.
「셜록 홈즈.」
“……!”
마리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건 또 무슨 꿈이야.’
그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수사관의 꿈이라니. 연회장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단 말이야?’
이전 전쟁터의 꿈도 무서웠지만, 이것도 만만치 않았다.
‘설마. 그렇게 높으신 분이 많이 모여 있는데. 근위 기사단이 철저히 경호하고 있고.’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경호가 철저해도 사건 사고는 일어날 수 있어.’
잠들기 전만 해도 행복했었는데, 갑자기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고민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늘 그랬듯, 미리 대처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꿈을 꾸었으니 관련된 일이 일어나긴 하겠지만, 그게 반드시 범죄 사고라고는 확정할 수는 없었다. 어제 마술사 꿈처럼 연관된 일이 어떤 종류일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범죄가 아니라 완전히 의외의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안심하고 있을 수도 없고.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을 수도 없고.’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했다.
‘일단 연회장에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이상한 기미는 없는지 잘 살펴보자.’
그렇게 결론 내린 마리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글로리아 홀은 축제의 클라이맥스인 대연회를 앞두고 한창 분주했다.
‘이제 오늘의 대연회와 이틀 뒤에 있을 가면무도회만 지나면 축제도 끝이구나.’
그녀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은 축제가 끝나는 것이 아쉽겠지만, 시녀들은 달랐다. 축제 때 워낙 고생하다 보니 빨리 끝나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야 가면무도회에 초청받을 일은 없을 테니 오늘만 지나면 한결 낫겠지.’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별다른 일 없이 축제가 끝나야 할 텐데.’
자꾸 어젯밤 꾸었던 꿈이 떠올라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별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연회가 시작되기 전의 연회장은 평온하고 즐거운 기운만 맴돌고 있었다.
‘일단 대연회 먼저 준비하자. 할 게 많으니.’
그런데 마리가 대연회를 준비하며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반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양?”
고개를 돌리니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는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황실 오케스트라단의 마에스트로 바한이었다! 바한은 반갑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아, 네! 마에스트로께서도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저야 잘 지냈지요.”
오랜만에 만난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정식 악장이 되셨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축하는요.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 말고 ‘그분’이 악장이 되셨어야 하는데.”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바한의 말에 마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음악에 영혼을 바친 바한은 아직도 전원 풍경 교향곡을 완성한 정체불명의 음악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반드시 찾아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당시 그의 말이 떠오르자 그녀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바한은 그 음악가가 자신 바로 앞에 있는 시녀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대연회 때 음악을 연주하시는 거죠?”
“네,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되니 미리 나와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연회 때 춤곡이나 배경이 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궁정악단의 중요한 업무였다. 오늘 대연회의 음악도 그들 황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예정이었다.
“그러면 다른 단원분들은?”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되니 악기를 가지러 갔습니다. 벌써 도착했어야 하는데, 조금 늦네요. 아마 지금 오고 있을 겁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선배 시녀가 마리에게 말했다.
“마리, 3층에서 테이블보 좀 가져다줄래?”
“아, 네!”
마리는 바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오늘 대연회 때 음악 기대할게요, 마에스트로.”
“네, 그러면 마리 양도 수고하세요.”
마리는 연회장 구석에 있는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으, 역시 3층은 어두워.’
글로리아 홀은 커다란 연회장이 있는 1층과 연회장의 주변 테두리를 감싸듯이 둘러싸고 있는 2층과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과 3층은 가운데 공간이 비어 있어 연회장이 내려다보이게 설계되어 있었고, 그중 발코니가 있는 2층은 연회 중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반면 저 높이 위치한 3층은 계단으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연회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빛이 잘 닿지 않아 굉장히 어두웠다.
‘테이블보가 어디에 있지? 가운데에 있다고 들었는데.’
마리는 창고 같은 3층을 뒤지다 의외의 물건들을 발견하였다.
“와, 이게 가면무도회 때 쓸 가면이구나?”
3층 한구석에 예쁘게 꾸며진 가면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보통은 자신의 가면을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원할 경우에는 황궁에서 가면을 마련해 주었다.
“와, 이건 눈만 살짝 가리네. 이건 조금 야해 보인다.”
마리는 신기하단 얼굴로 가면들을 살폈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것, 일부만 가리는 것, 가죽 재질, 동물무늬, 보석으로 장식된 것까지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어, 여기 피아노도 있네?”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피아노를 발견한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홀에 놓인 피아노와 다르게 낡아 보였는데, 아마 신형 피아노를 들여오며 이쪽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음색은 괜찮나?’
마리는 살짝 건반을 눌러 보았다.
딴~!
생각보다 커다란 소리가 울려 마리는 움찔 놀랐다.
‘피아노의 음량이 굉장히 크네.’
가운데 공간이 뚫려 있고, 천장으로 소리가 모이게 되어 있는 글로리아 홀의 구조상 이곳에서 연주하면 연회장 전체로 소리가 퍼질 것 같았다. 마리는 흥미가 돋아 피아노를 이리저리 살폈다.
‘삐걱삐걱 낡긴 했지만, 지금도 연주용으로 써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아.’
이전 꿈꾸었던 ‘모차르트’의 기운이 다시 맴도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참이나 피아노를 살폈다. 그러다 한번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야. 빨리 테이블보나 찾아서 내려가자.’
마리는 구석에 놓인 테이블보를 찾아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니 시각은 오후 5시 50분. 10분만 있으면 대연회가 시작할 시간이라, 홀 곳곳이 귀족들로 붐볐다.
“여기 테이블보 가져왔습니다.”
마리는 선배 시녀에게 테이블보를 가져다주었다.
“어, 어.”
그런데 선배 시녀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언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배님?”
“큰일 났어, 마리.”
“네?”
선배 시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오케스트라단의 악기를 보관하는 곳에 화재가 나서, 악기가 모두 불타 버렸대!”
“……!”
생각지도 못 한 이야기에 마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다행히 다른 곳으로 번지기 전에 불길이 잡혀 인명 피해는 없지만, 보관하던 물건들은 모두 못 쓰게 되었나 봐요.”
마리는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악기를 보관하는 곳에 불이난 거지? 그것도 대연회 시작 직전에.’
물론 화재는 언제 어느 때든 날 수 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조명으로 촛불이나 램프 등 불을 직접적으로 사용했으니, 화재가 흔한 편이다. 하지만 어젯밤 꾼 꿈 때문일까? 그녀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보관하는 방의 촛대는 화재의 위험을 대비해 흔들려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게 마련인데 어떻게 하다가 불이 난 거지?’
각 방에 놓인 등불을 관리하는 것도 시녀의 업무였다. 담당 시녀들은 불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철저히 관리한다. 직접 그 일을 해본 마리는 왜 불이 난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냥 관리 소홀로 인한 단순 화재인가? 아니면…….’
마리는 조심히 생각했다.
‘혹시 의도된 방화는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특별한 증거를 본 것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야.’
그녀는 아직 현장을 보지도 못 했다. 아니, 현장은커녕 어떤 상황이었는지 전해 듣지도 못 했다. 그녀는 일단 화재의 원인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고민한다고 원인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악기가 상했으면 대연회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음악 없는 연회라니.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리는 시선을 돌려 오케스트라단을 바라보았다. 악장 바한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새하얗게 질려 당황하고 있었다.
“가, 갑자기 불이라니.”
“이제 곧 연회가 시작하는데. 이를 어떻게…….”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이 그들에게 펄쩍펄쩍 뛰었다.
“아니,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도대체 악기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오늘은 대연회 날이라 제국의 귀족들은 물론, 외국의 사절들도 모두 참석할 거란 말이야!”
“지금 다른 곳에 보관 중인 여분의 악기를 급하게 가져오고 있습니다.”
악장 바한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불이 난 것은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지만, 악장인 그는 악단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의 책임을 져야 했다.
“다른 악기를 가져오고 있다고? 얼마나 걸리는데?”
“거리가 조금 있어 앞으로 20~30분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20~30분?”
길버트 백작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는 듯 화를 내었다.
“지금 당장 연회를 시작해야 하는데, 20~30분이나 걸린다고?! 그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죄, 죄송합니다. 조금만 연회 시작을 연기하면…….”
“연기? 이게 무슨 동네 티 파티인 줄 알아?!”
악장 바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궁내부장의 말이 옳았다. 무려 제국 탄신 축제의 대연회 날이다. 수많은 귀빈 앞에서 구겨질 황실의 권위는 둘째 치고, 대연회 중간에 무수히 많은 세부 일정이 계획되어 있어 시작 시간 변경은 불가능했다. 무조건 정해진 시간에 시작해야 한다.
그때, 한 시종이 와서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각하, 이제 곧 6시 정각이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길버트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6시 정각이 되면 오케스트라단이 짧은 전주곡(프렐류드)을 연주함으로써 연회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곧바로 춤곡이 이어지는데, 사람들은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된다.
“각하, 명령을…….”
시종이 재촉하자 길버트는 버럭 화를 내었다.
“시끄러! 잠깐만 기다려 봐!”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오늘은 황태자 전하께서도 연회장에 일찍 도착한다 하셨는데. 신이여, 왜 내게 이런 시련을.’
하지만 고민한다고 수가 나올 리가 없었다. 연회의 시작을 알릴 음악을 연주할 악기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연회가 시작되지 않자, 연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다.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뭐지?”
웅성거림은 점차 커졌고, 길버트와 악장 바한은 좌불안석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탄신 축제의 클라이맥스인 대연회를 악단의 음악 없이 시작해야 한다니!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악장 바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오케스트라 때문에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의 시작이 망쳐졌다.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일단 시작해! 뭐라도 좋으니, 아무 음악이나 시작하란 말이야!”
길버트의 외침에 바한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악단을 살폈다. 그나마 몇몇 단원이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올린 1대, 비올라 1대, 첼로 1대. 안 돼. 이 악기들로 연주를 해봤자,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소리에 묻힐 거야.’
연회 음악은 조용한 공연장에서의 음악과 다르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로 시끌벅적하기 때문에 크고 다채로운 음량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단 전체가 연회의 연주를 맡는 것이다.
‘저 악기들로는 춤곡은 어떻게든 간신히 가능하겠지만,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은 무리야. 연회의 시작을 기념해야 하니 만약 연주할 거면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량을 대체할 수 있는 소리여야 해.’
하지만 그런 음악을 지금 어떻게 연주한단 말인가? 오케스트라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정말 이대로 대연회의 시작을 망쳐야 한단 말인가? 신이여, 제발 기적이라도 일으켜 주시옵소서.’
바한은 절망하여 기도했다. 그런데 그 순간.
딴!
어디선가 높고 높은 고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커다란 피아노 소리였다.
“……?!”
“뭐지? 저 위에서 무슨 소리지?”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그 웅성거림이 가라앉기도 전에 터질 듯이 격렬한 건반 소리가 연회장에 축포를 터뜨렸다. 마치 축제의 기쁨을 널리 알리는 나팔 소리 같은 음색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율.
‘아니, 이 소리는?’
악장 바한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기라도 한 것일까? 기적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연회장에 내려앉았다. 마치 하늘의 천사가 직접 연주하는 듯한 선율.
‘도대체 누가?’
바한은 멍하니 생각하였다.
나팔을 불듯 높고 격렬한 음으로 축제의 시작을 축하한 선율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변하였다. 나들이를 나가듯 행복한 소리는 푸가 형식으로 주제를 거듭하며 깊은 의미를 담아 갔고, 듣는 사람을 점차적으로 천상의 행복을 향해 이끌어 갔다. 오늘의 대연회가 행복할 것이란 것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축복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멜로디였다.
“아름다워.”
“이런 전주곡이라니.”
연회장의 모두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음악을 들었다. 웅성거리던 소리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마치 고요한 공연장에 온 것처럼 모두 입을 다물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이 대연회장에 천사라도 온 것인가.”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음악은 축제를 축하하듯 밝고 즐거우면서도,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주제가 반복되며 점차 고조되는 음색은 듣는 사람들을 드높은 고양감으로 이끌며, 마치 신이 축복을 내려 주는 듯했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으로 이런 음악을 듣게 되다니, 대단하군.”
“맞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수많은 음악을 들어 왔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마음을 울리는 음악은 처음입니다.”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리고 또 한 명 감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철가면을 쓴 황태자였다.
‘누구지? 누가 또 이런 음악을?’
황태자 라엘은 연회장 입구에 우뚝 서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대연회 날이라 시간에 맞춰 글로리아 홀에 도착한 그는 생각지도 않게 아름다운 선율에 발걸음도 멈추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그때 수정궁에서 들었던 피아노 연주와 비슷하지 않은가?’
황태자 라엘의 머리에 이전에 들었던 그 음악이 떠올랐다. 마치 전원에 와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 연주. 끝내 연주자를 찾지 못한 그 연주와 지금 연주는 기묘하게 닮은 면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에 조예가 깊은 라엘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전원 풍경 연주와 지금 저 전주곡의 연주는 분명 유사점이 있었다.
‘혹시 저곳에 그때의 연주자가?’
황태자는 철가면 아래로 음악이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음악은 하늘, 아니, 천장 바로 아래 놓인 3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편, 그 3층에서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며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소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가 미쳤어! 어쩌려고!’
마리는 속으로 계속해서 외쳤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마리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실 그녀는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렇게 수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했다가 들키면 뒷감당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항상 잘해 주던 악장 바한의 얼굴이 계속해서 사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자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엔 억지로 외면하려 했으나 그가 절망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자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빨리 서곡만 마무리하고 내려가자! 이어질 춤곡은 마에스트로 바한이 알아서 연주할 거야. 춤곡은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처럼 강렬한 음색이 필요하지 않으니, 지금 있는 적은 숫자의 악기만으로도 가능해.’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의 눈길이 안 닿는 3층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안 것이었다. 만약 이 피아노의 존재를 몰랐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은 보통 3~5분 정도이니 남들이 올라오기 전에 끝내고 내려갈 수 있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움직였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물론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누가 올라올 가능성은 적었으나, 그래도 걱정되었다.
‘빨리! 최대한 빨리!’
그런 마리의 마음이 반영된 탓일까, 종결부로 향하는 연주의 템포가 점차 빨라졌다. 알레그로(빠르게)에서 비바체(아주 빠르게)로, 비바체에서 비바치시모(가장 빠르게)로. 그녀의 손가락이 최고의 비르투오소(기교 연주자)의 것처럼 현란하게 움직였으며, 마치 작렬하는 듯한 최고의 테크닉이 클라이맥스의 주제를 터뜨려 내며 곡이 마무리되었다.
“브라보!”
“최고다!”
격정적인 성정을 지닌 이탈리아 반도에서 온 사절들이 감탄을 외쳤다. 곧 연회장 전체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짝짝짝!
원래 서곡 연주가 끝났다고 박수가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연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연회의 서곡이란 것을 떠나 모두가 깊이 감탄했기에 마음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연주를 끝낸 마리의 귀에는 그런 청중들의 환호가 들려오지 않았다.
‘빨리 도망가야 해!’
그녀는 허겁지겁 피아노에서 일어나 계단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연주가 끝났으니 누군가 3층으로 올라올 수도 있다. 그러면 빼도 박도 못 하고 들킬 것이다.
‘바로 밑의 2층으로만 가면 돼! 거기서 시중을 들고 있었던 척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곧 밑의 대연회장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린 마에스트로 바한이 이어 춤곡을 지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춤을 출 생각을 하지 않고 박수를 이어갔다. 모두 마리가 한 연주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됐어! 다 왔어!’
드디어 3층의 계단 입구까지 도착한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계단만 내려가면 위기 탈출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끼익.
3층으로 이어진 목조 계단이 흔들리는 소리.
“……!”
누군가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힐끗 아래를 내려다본 마리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차가운 철제 가면. 올라오고 있는 이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황태자 라엘이었다.
이윽고 3층에 도착한 황태자 라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피아노로 연주한 것인가?”
구석에 낡은 피아노가 보였다. 그는 피아노 앞으로 가더니 건반을 눌러 보았다.
“관리가 안 돼 뻑뻑한데, 이런 피아노로 그런 연주를. 대단하군.”
그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런데 연주자는 어디에 있는 거지?”
라엘은 3층 전체를 훑어보았다. 3층은 1층이 내려다보이게 뚫린 커다란 빈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테두리 부위에 난간이 나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한눈에 시야가 들어오지 않았다.
“저쪽인가?”
그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북이 쌓여 있는 보관물들을 헤치며 반대 난간에 도착한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왜 없지? 이쪽이 아니었던 건가?”
고개를 갸웃한 그는 다시 반대쪽 난간을 살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었다.
“이미 내려간 건가?”
라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악을 듣자마자 바로 올라온 것인데, 그사이 아래로 내려갔다고? 혹시 다른 통로가 있나 살폈지만 없었다. 그가 올라온 허름한 목조 계단 외에 이 3층에서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뭐지?’
그는 다시 3층을 살폈다. 3층은 옷, 테이블, 의자, 보관함 등등 수많은 보관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저 보관물들에 가려 못 본 건가?’
그는 다시 3층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살폈다. 제국을 지배하는 황태자가 하기에는 굉장히 수고로운 일이었지만, 그는 이번에야말로 꼭 그 연주자를 찾고 싶었다.
한편 그 연주자는 라엘의 예상대로 아직 3층에 있었다. 연주자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왜, 왜 안 내려가는 거지?’
그녀는 구석에 놓인 보관함 아래 칸에 쪼그려 앉아 숨어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황태자가 내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안 보였다. 오히려 보관물을 이리저리 들추며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황태자가 점차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마리는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제발. 주님,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이대로라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벗어날 길이 안 보였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그녀가 숨어 있는 보관함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제, 제발…….’
마리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황태자는 그녀가 숨어 있는 보관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보관함에 사람이 숨어 있을까 고민하는 눈초리였다. 마리는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제발 그냥 가 주세요! 제발.’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황태자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
마리는 입으로 손을 가렸다. 터질 듯한 두근거림이 밖으로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철컥!
보관함의 문이 열리고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없군.”
그가 열었던 것은 그녀가 있던 곳의 바로 윗칸이었다! 마리는 긴장에 가쁜 숨을 삼켰다. 보관함 밖에서 황태자는 혀를 찼다.
“하긴 생쥐도 아니고, 이런 작은 보관함 안에 숨어 있을 리가 없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샅샅이 뒤졌지만, 3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하늘에서 천사라도 내려왔던 것인가?”
하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는 실없이 중얼거렸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보관함을 마저 열어 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보관함은 10칸이 넘었고, 성인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았다. 조막만 한 체구가 아니라면, 여자도 들어가기 힘들 크기였다. 무엇보다 그런 경이적인 연주를 했던 연주자가 왜 보관함에 숨는단 말인가? 자신은 그 연주자를 벌하려는 게 아니라, 상을 주려는 것인데.
‘모르겠군.’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연주자를 찾을 방법이.
‘혹시?’
만약 연주자가 3층에 남아 있는 게 맞다면, 이 방법을 쓰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몸을 돌려 보관함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3층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가 사라진 후, 마리는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보관함에서 나왔다.
“가, 갔지?”
그녀는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들킬 뻔했다.
‘빠, 빨리 내려가자. 다른 사람이 올라오기 전에.’
그녀는 허겁지겁 흐트러졌던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 이번엔 아무도 올라오지 않아 무사히 연회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리, 어디에 갔었어?!”
“죄, 죄송합니다. 잠시 볼일을 보느라…….”
“빨리 맡은 데 가서 일해!”
선배 시녀가 화를 내었지만, 그녀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정말 다행이야.’
황태자가 보관함에 손을 뻗을 때, 이번에야말로 끝장이구나 싶었다. 정말 기적적으로 안 들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3층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란 것을. 계단을 후다닥 내려올 때,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피의 황태자 라엘이었다. 그는 혹시나 자신이 사라진 후 내려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계단 뒤편에 숨어 있었는데, 마리가 내려오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왜 또 저 시녀가?”
황태자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 *
그렇게 가슴 철렁한 사건을 뒤로하고 대연회는 마무리되었다. 마리의 연주가 끝난 후 악장 바한은 필사적으로 춤곡을 이끌었다. 사용 가능한 악기의 숫자가 적어 쉽지 않았지만, 연회장 모두 처음 서곡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따로 보관하고 있던 악기를 가져온 오케스트라단이 도착해 제대로 된 편성을 갖출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별다른 문제없이 연회가 진행되었다. 다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해했다.
“도대체 처음 서곡은 누가 연주한 것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황실 오케스트라단의 음악도 나쁘지 않지만, 처음 피아노 연주를 다시 한번 듣고 싶군요.”
모두 처음 피아노곡을 연주한 연주자를 궁금해했다. 황궁에 자주 들락거리는 귀부인 중 이런 말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었다.
“혹시 소문의 그 천사 아닐까요?”
“천사요?”
“아, 소문 못 들으셨어요? 요즘 황궁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축복을 베풀고 간다는 소문이 있어요.”
“에이, 말도 안 돼요. 농담하지 마세요.”
한 귀부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또 다른 귀부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장미 정원의 3황비 마마의 조각상 보셨죠?”
“아, 네. 당연히 봤죠.”
황태자의 친모인 3황비를 조각한 조각상은 황궁의 명물이 되었다. 단순히 외적 미형을 떠나,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내형미를 지니고 있어 보는 사람마다 감탄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아무도 조각상을 건드린 적 없는데 조각이 완성되었다고 해요.”
“설마…….”
“네, 하늘에서 천사가 몰래 내려와 조각을 손보고 떠났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또 그것뿐이 아니에요. 황실 오케스트라단이 하는 공연의 ‘전원 풍경 교향곡’도 천사가 완성해 주었다고 하고…….”
그렇게 귀부인들은 황궁에 축복을 내려 준다는 천사에 대해 떠들었다.
“저도 오늘 가서 기도해 보려고요. 혹시 아나요? 천사가 우리 저택에도 와 줄지.”
그때 작은 시녀가 조심히 말했다.
“여기 음료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 그러니까 그 천사가…….”
한편 음료를 가져온 작은 시녀, 마리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식은땀을 흘렸다.
‘세상에 천사라니.’
자신에 대해 이런 소문이 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오늘 들켰으면 어떻게 됐을지.’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가 보관함 앞에서 손을 뻗을 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리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왜 황태자는 계속 나를 보고 있는 거지?’
눈이 자꾸 마주치기에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황태자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만 보지.’
마리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곤혹스러운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리.”
“……!”
황태자가 그녀를 직접 부른 것이다. 연회가 잠시 소강을 보이며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였다. 마리는 놀라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필요한 것은 없다.”
“그러면?”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지?”
마리는 순간 그의 물음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일이 있느냐는 말이다.”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지?
“어, 없습니다.”
“그렇군.”
그때 피의 황태자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면 내일 사자궁으로 오도록.”
“……예?”
“너에게 할 말이 있다.”
* * *
탄신 축제의 클라이맥스답게 대연회는 매우 늦은 시간에 끝났다. 첫닭이 울 새벽에 숙소로 돌아온 마리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잠에 들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황태자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다.
“왜 나를 사자궁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당황과 두려움에 머리가 하얗게 질렸으나, 시간이 지나며 차차 진정이 되어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정체를 들킨 것은 아니야. 만약 내가 모리나 왕녀란 것을 알았으면 조용히 사자궁으로 부르지 않았을 테니까. 일단 감옥으로 끌고 갔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황태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정체를 들켜 단두대에 끌려갈까 싶어서니까.
‘그러면 왜 나를 부른 걸까?’
그녀는 침대에 누워 끙끙대며 고민했지만, 도저히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그녀는 깜빡 잠이 들었다 깼는데,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제인이 안 들어오네? 아직도 일이 안 끝났나?”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인은 그녀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였다. 벌써 3년째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이상하다. 어제 야간 근무 날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 어디서 일하고 있다고 했지?’
같은 시녀 숙소를 사용하고 있지만, 근무하는 곳은 달랐다. 특히 마리가 중급 시녀가 되어 연회장에 들어가 귀족들의 시중을 들게 된 뒤로는 일정이 완전히 달라져 제인이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곧 들어오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침을 먹기 위해 시녀 전용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식당에 도착한 마리는 생각지도 못 한 말을 들었다.
“제인이…… 감옥에 갇혔다고요?”
이전 마리의 상급자였던 수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양은 아직 못 들었나 보구나.”
“어째서?”
마리는 당황해 물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죄를 지을 만큼 못된 아이가 아니었다.
“어제 악단의 악기를 보관하는 곳에 불이 났다고 들었지?”
“네, 듣긴 들었는데…….”
순간 마리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래, 맞아. 그 보관 창고의 등불을 관리하던 게 제인이야. 제인은 어제 발생한 화재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혔어.”
“……!”
수잔은 안되었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고 해도, 황궁에 불이 나게 한 것은 중죄. 제인은 큰 벌을 피할 수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