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8화 (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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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마리는 종종걸음으로 황태자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요한의 방에서도 나왔으니, 각자 갈 길 가면 될 것 같은데 딱히 가 보란 이야기가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기분이 나쁘시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적국의 황제와 대화를 나누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방을 벗어나서도 계속 분위기가 안 좋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요한의 방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돌아가 맡은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꼭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황태자와 단둘이 있는 게 굉장히 불편했다. 방금 자신을 도와준 것은 고마웠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닌가.

“저…… 전하.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글로리아 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황태자는 우뚝 자리에 멈추어 섰다.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당연히 가 보라 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철가면 안에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하?”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그렇게 한참이나 그녀를 보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예?”

“가 보도록.”

마리는 주춤주춤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황태자가 이상했지만, 가 보라 하니 다행이었다.

‘이제는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요한 황제도, 황태자도, 아무도 얽히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는 꼭 조심하도록.”

마리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평소 황태자의 음성과 다르게 뭔가 어정쩡하게 낮은 목소린지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시 물어볼까 했으나, 황태자는 이미 등을 돌려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시간이 지나고 다시 밤이 되며 연회가 시작되었다. 마리는 선배 시녀에게 부탁해 배정된 자리를 옮겼다.

“연회장 밖에서 일하고 싶다고? 나야 좋지. 근데 괜찮겠어?”

연회장 밖에서 근무하는 것을 좋아하는 중급 시녀는 아무도 없다. 공연이나 음악 등 연회를 즐길 수 없기도 했고, 연회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일해야 해서 훨씬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 연회장 안이 갑갑해서요.”

“아, 그렇구나. 그래, 그러면 내가 안쪽에서 일할게.”

“감사합니다!”

마리에게는 연회장 밖이 안쪽보다 훨씬 좋았다. 모든 이유를 다 떠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말 조심조심 지내자. 더는 아무런 관심도 받고 싶지 않아.’

물론 지금까지의 일들도 일부러 눈에 띄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뒤로 엎어졌는데 코가 깨졌다는 것처럼 뭘 해도 상황이 이상하게 풀렸을 뿐이다. 자꾸만 황태자와 마주치는 게 불안했다. 그럴 가능성이야 적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자신이 모리나 왕녀인 것을 그에게 들키면 끝장이었다.

‘오늘은 ‘꿈’도 안 꾸었으니까.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을 하였다.

“연회장은 이쪽입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먼저 연회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연회 시작 시간이 지나 대부분 사람이 도착한 다음에는 연회장 주변을 돌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다.

“여기 음료 좀 가져다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부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 좀 저쪽으로 치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날씨가 추운데 연회장 안에 놓은 내 숄 좀 가져다줘.”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것 좀…….”

수많은 사람이 연회장 밖을 오가며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중을 들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확실히 연회장 밖이 안쪽보다 더 힘들긴 하구나.’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일해야 하니 훨씬 움직여야 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사람들 눈에 안 띄니까.’

정확히는 황태자 눈에 안 띄니까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일하던 중, 마리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한 귀족 부인의 심부름으로 다과를 들고 저 멀리 성벽 가까이에 있는 정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 저분은?’

마리는 생각지도 못 한 인물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키엘 님?”

비단 같은 은발과 마치 천상의 조각 같은 얼굴. 이전 백조 정원에서 만났던 황실 친위대의 종자 키엘이었다! 키엘도 그녀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 양?”

“아, 네! 반가워요. 잘 지내셨어요?”

마리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은발의 미남, 키엘도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마리 양도 별다른 일 없으셨나요?”

별다른 일이야 많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 저도 잘 지냈어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근무 중입니다.”

“아…….”

그녀는 그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황궁을 수호하는 황실 친위대니, 축제 기간에도 쉬지 못하고 근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축제 기간이면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황궁에 모이니 오히려 더 바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말했다.

“힘드시겠어요. 축제 기간인데 쉬지도 못 하시고.”

그 말에 키엘은 고맙다는 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마리 양도 축제 기간인데 고생이 많으시군요.”

“저야 뭐, 시녀니까 당연하죠. 그런데 이 구역에서 근무하시는 건가요?”

“네. 원래는 아닌데 문제가 있어서 잠시만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반갑게 그와 대화를 나누던 마리는 퍼뜩 귀족 부인의 심부름이 떠올랐다.

“키엘 님, 죄송해요. 제가 일하는 중이어서. 시간될 때 다시 올게요.”

“괜찮습니다. 바쁘실 텐데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니에요. 꼭 다시 올게요!”

마리는 급히 심부름을 마무리하고, 다른 일들을 하였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또 심부름 거리가 생겼는데 키엘이 근무하고 있는 곳 주변이었다.

‘먹을 거라도 가져다드릴까? 근무하면서 밥도 못 먹었을 것 같은데.’

어차피 연회장에 음식은 많았으니 그녀는 간단히 요기할 만한 음식을 챙겨 키엘에게 가져갔다. 키엘은 마리가 가져온 음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 양, 이건?”

“혹시나 근무하다가 출출하실까 챙겨 왔어요.”

키엘은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과자도 그렇고, 매번 마리 양에게 신세를 지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며 그는 주변에 놓인 벤치를 가리켰다.

“잠깐 같이 드시고 가시죠.”

“아, 저는 괜찮은데…….”

“마리 양도 바빠서 식사 못 하지 않았습니까?”

마리는 잠시 고민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낮에는 요한 황제에게 불려 가고, 밤에는 정신없이 일하느라 한 끼도 못 먹었다. 엄청 배고팠다.

“네, 그러면 잠시만…….”

그렇게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날씨가 좋네요. 시원하고.”

“네, 여름이 지나 딱 좋은 날씨인 것 같습니다.”

“바람이 좋아요. 달빛도 밝고.”

벤치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가벼운 대화를 나누니, 마리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랑 있는 것 같아. 좋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오래 알고 지낸 이가 아닌데도, 괜히 마음이 잘 맞는 듯한 느낌.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편안해지는 느낌. 키엘과의 대화가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무서운 황태자와 불길한 요한 황제에게서 받은 스트레스가 조금 치유되는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 마음 통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앞으로도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여 물었다.

“그러면 키엘 님은 계속 이곳에서 근무하시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원래 제 업무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원래 이곳의 업무를 맡고 있던 단원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다들 손이 안 돼 잠시만 제가 맡는 중입니다.”

그 말에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알기로 키엘은 종자인데, 정식 기사를 부르는 호칭이 너무 편했던 것이다. 마치 아랫사람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키엘 님도 정식 기사인가? 하지만 여전히 기사 제복은 아닌데?’

그녀는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이 황궁 내에서 종자가 아닌, 친위대의 정식 기사는 무조건 제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 예외가 인정되는 것은 오로지 단 한 명. 황실 친위대의 단장뿐이었다. 마리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앳된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키엘!”

“아.”

순간 키엘의 눈가에 곤란함이 스쳐 지나갔다.

“곤란한 분이 오셨군요.”

마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웬 꼬마 아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와, 진짜 귀엽다.’

이제 한 7살쯤 되었을까? 목소리를 들었을 땐 남자아이인 것 같은데, 여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인형처럼 귀여운 꼬마였다.

‘그런데 황궁에 웬 꼬마가?’

온갖 진귀한 보석이 달린 옷을 보니 분명 신분이 높은 귀족의 자제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귀족이라도 어린 꼬마를 황궁에 데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누구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소문이 떠올랐다. 저 꼬마 아이와 딱 맞아 떨어지는 인상착의를 가진 인물에 대한 소문이었다.

‘설마 이 꼬마 아이가?’

그 순간 키엘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오스카 전하를 뵙습니다.”

마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스카. 내전 때 황태자의 칼을 피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린 황자의 이름이었다.

“10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시녀 마리라고 합니다.”

꼬마 아이라도 황족은 황족. 마리는 급히 예를 표했다. 그런데 황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예를 받기는커녕,

“넌 누구야?”

“네?”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며 외쳤던 것이다.

“못난 게 왜 키엘이랑 놀고 있어? 키엘은 나랑만 놀아야 하는데!”

마리는 그 난데없는 질투에 당황했다.

“그게…… 키엘 님이랑은…….”

“키엘은 내 거란 말이야! 나하고만 놀아야 해!”

“…….”

어린아이의 억지에 마리는 뭐라 대답할 말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오스카 전하는 키엘 님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딱 좋아하는 친구와 놀았다고 질투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키엘은 엄청 잘생기고, 무척이나 친절했다. 어린애가 좋아할 만했다.

‘그런데 키엘 님은 오스카 전하를 어떻게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 거지?’

그냥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굉장히 친해 보였다. 오스카는 키엘의 바지를 딱 붙들고 있었는데 마치 엄마를 쫓아다니는 꼬마 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키엘이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카 전하, 마리 양은 저를 많이 도와준 사람입니다.”

“도와줘? 그러면 저 못난 시녀가 나보다 중요하다는 거야?”

계속 못났다고 하자, 원래 자신감이 부족한 마리는 시무룩해졌다. 그때 키엘이 오스카 몰래 마리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물론 저에겐 전하가 가장 소중합니다. 전하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니까요.”

“그렇지?”

오스카의 표정이 밝아졌다. 키엘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하지만 마리 양도 저의 친구입니다.”

“키엘의 친구?”

“네, 그러니 전하께서도 마리 양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꼬마 아이는 키엘의 말이 조금 어려운 듯했다. 손가락을 귀엽게 입술에 가져가며 고민하더니 빽 소리 질렀다.

“몰라! 난 키엘이 제일 좋단 말이야!”

그렇게 마구 떼를 쓰며 키엘을 곤란하게 했다. 그 모습에 마리는 속으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귀엽게 생기긴 했는데…… 버릇은 조금 없네.’

황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버릇없는 모습. 아니, 오냐오냐 받들어주는 황족이니 버릇이 없는 건가? 어쨌든 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황태자와 같은 아버지 밑에서 나온 배다른 형제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때 키엘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리에게 말했다.

“미안하군요. 저는 전하를 궁에 모셔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사과하자 마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오늘 가져다주신 음식 정말 감사했습니다.”

키엘이 걸음을 옮기자, 오스카가 화다닥 따라붙었다. 키엘은 옆에 온 오스카에게 손을 내밀었고, 오스카는 꼬옥 그 손을 붙들었다.

“헤헤.”

순간 심통 맞은 오스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키엘은 그런 오스카의 얼굴을 잠시 따뜻하게 바라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날 밤 마리는 또 꿈을 꾸었다.

‘왜 이렇게 자주 꾸는 거야?’

그녀는 지각몽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자각한 순간 울상을 지으며 생각했다. 또 무슨 일이 주변에서 벌어지려고 꿈을 꾸는 건지.

‘제발 이번엔 별다른 꿈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간절히 바라며 꿈의 내용을 바라보았다.

「자자, 이것 봐.」

「또 뭔데?」

「새로 개발한 트릭이야.」

꿈에는 두 남녀가 등장했다. 남자는 당찬 표정으로 여자에게 손을 펼쳐 보았다.

「아무것도 없지?」

「그런데?」

「자, 봐. 짠!」

남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던 손바닥에 동전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피식 비웃을 뿐이었다.

「그게 뭐야? 완전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

여자는 의기양양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보라고. 내가 진짜 마술을 보여 줄 테니까.」

“……이번엔 마술사라니.”

꿈에서 깬 마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매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번 꿈도 왜 꾼 것인지 모르겠다.

“설마 나 보고 연회장 앞에 나가 마술 쇼를 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사람들 앞에서 마술 쇼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나마 한 가지 희망적인 면은 꿈속의 인물들이 전문 마술사는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냥 취미로 마술을 배운 아마추어? 남녀 모두 그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데 이번 꿈은 정말 왜 꾼 것일까? 그것도 전문 마술사도 아닌, 애매한 실력의 아마추어 마술사의 꿈을.’

저 정도의 실력으로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공연도 당연히 불가능했다.

‘몰라. 어쨌든 이번에는 절대로 안 나설 거니까 상관없어.’

그녀는 꼭꼭 굳게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눈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절대로.

준비를 마친 마리는 연회장으로 일하러 나갔다. 오늘도 그녀는 선배 시녀에게 부탁해 연회장 밖에서 일하기로 했다.

‘힘들지만, 사람들 눈에는 확실히 덜 띄니까.’

게다가 혹시나 연회장 안에 있다가 ‘마술’과 연관된 사건에 얽힐까 걱정도 들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적은 연회장 밖이 마술과 연관될 일이 적을 것이다.

“음료 좀 부탁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그녀는 어제와 같은 일을 하였다. 심부름하며 돌아다니느라 바빴지만, 다행히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넘기자. 힘내자, 마리!’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마술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또 다른 곤란한 일이 생긴 것이다.

“어, 너는 어제 그 못난이 시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마리는 고개를 돌렸다. 정원의 낮은 나무에 인형같이 생긴 꼬마가 올라가 그녀를 향해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오스카 황자였다!

“10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마리는 급히 오스카에게 예를 표했다. 버릇없는 꼬마답게 오스카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연회에 참석한 분들을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보면 몰라? 나도 연회에 참석하러 왔어!”

꼬마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예복을 펄럭였다. 왠지 턱을 치켜든 모습이 ‘나 멋지지?’라고 말하는 듯했으나, 저렇게 작고 앙증맞은 얼굴로 그래 봤자 멋지기보단 귀엽기만 할 뿐이다.

“크흠.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 내가 물어보는 것을 너는 큰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

잔뜩 거들먹거렸지만, 역시나 위엄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귀엽기만 해서 마리는 웃으며 말했다.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연회장이 어디에 있지?”

“연회장은 저기 글로리아 홀 안쪽에…….”

대답하던 마리는 순간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잠깐? 그런데 왜 아무런 수행원 없이 혼자 온 거지?’

어린이여도 황자이니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황족이 혼자 다니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나 저렇게 어린 나이의 꼬마 황족이라면 더더욱. 그러고 보니 어제도 혼자였다.

“전하, 혹시 시종이나 시녀는 같이 안 오셨는지요?”

그런데 오스카 황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표정이 딱 굳더니 빨개진 얼굴로 짜증을 냈던 것이다.

“그런 거 없어!”

“네?”

“몰라! 이 못생긴 게! 쓸데없는 것 묻지 말고 넌 그냥 빨리 연회장이나 안내해!”

갑작스럽게 아이가 화를 내자, 마리는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고민했다.

‘왜 기분 나빠 하는 거지?’

어쨌든 그녀는 연회장으로 오스카 황자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흥! 그래, 수고해라!”

그런데 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연회장 입구에 서서 고귀한 신분의 인물이 올 때마다 입장을 알리는 나팔 기수가 오스카 황자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유령을 보듯 힐끗 한번 쳐다보고 모른 척했다.

“…….”

마리는 잠시 가만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간 오스카 황자를 바라보았다. 인형같이 귀여운 아이가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오스카가 정말 유령이라 아무도 못 보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힐끗힐끗 아이를 바라보기는 했으니까.

아이는 연회장을 빨빨 돌아다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나서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오스카에게 무슨 말실수를 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저 꼬마 황자가 황궁 내에서 어떻게 여겨지는 존재인지도 떠올렸다.

그날 마리는 또 꿈을 꾸었다.

「이 못난 아이가 내 동생이라고?」

「뭐야, 엄청 볼품없잖아? 천한 핏줄이라 그런가?」

늘 꾸던, 그녀에게 기적을 주는 지각몽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꿈. 과거, 클로얀 왕국에서의 꿈이었다.

「아바마마는 왜 이런 천한 핏줄을 남겨서. 그래도 아바마마의 씨인데 왕녀로 인정 안 할 수도 없고. 쯧. 어쩔 수 없군. 이름이 모리나라고?」

큰 오라버니, 왕세자는 혀를 찼다. 제국과의 전쟁 당시, 피의 황태자와 싸우기도 전에 반란을 일으킨 동생들에게 죽은 인물이었다. 왕세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의 처치를 고민하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모리나를 통원의 궁에서 지내게 하도록.」

「……!」

그 말에 다른 왕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님, 그건?」

통원의 궁. 그곳은 과거 죄를 지은 왕족들을 가두던 곳으로, 지금은 버려진 채 방치되고 있는 곳이었다. 왕세자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왜? 저 천한 핏줄의 동생과 잘 어울리는 곳 아니냐? 그곳이라면 저 못난 아이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지. 아무도 만나기 어려울 테니까.」

꿈에서 깬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는 침대 위 이불을 개었다. 클로얀 왕성의 꿈은 처음이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꾸는 꿈이었다. 즐겁지 않은, 아니, 솔직히 말하면 힘들었던 기억이지만 이제 와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오늘 하루도 씩씩하게 파이팅!”

이불을 다 정리한 마리는 다시 글로리아 홀로 출근했다.

‘축제도 많이 지났구나.’

준비 때부터 정신없었는데, 벌써 절반이 넘게 지나 있었다. 이제 이틀 뒤 가장 큰 규모의 대연회 후 하루의 휴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면무도회만 지나면 대망의 축제도 끝이었다.

‘시녀 중 가면무도회에는 누가 초대될까?’

축제 마지막 날 열리는 가면무도회에는 한 가지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축제 기간 중 높은 귀족들의 눈에 들었던 시녀들을 무도회에 초청하는 것이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참석하기 때문에 신분이 낮아도 부담 없이 연회를 즐길 수 있었고, 이 무도회가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성공하는 경우도 있어 누가 초청을 받을지 시녀들 모두 관심이 지대했다.

‘뭐, 나랑은 상관없겠지.’

그녀는 자신의 주제를 알았다. 어차피 자신이 가면무도회에 초청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 축제가 끝난 다음이 문제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축제가 끝난다고 시녀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무수히 많은 일정이 계획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큰 일정은 황태자비 간택. 곧 황위를 이을 황태자는 현재 홀몸이었다. 이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어 축제가 끝나는 대로 황태자비 간택을 진행할 것이라 들었다.

‘물론 누가 황태자비가 되든 전혀 관심 없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간택이 시작되고 황궁이 정신없어지기 전에 빨리 사자궁에서 나와야 해.’

이게 바로 그녀의 최대 고민이었다. 축제가 끝나면 그녀는 사자궁으로 전속된다. 저 무서운 황태자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다. 황태자비 간택이 시작되어 내명부가 정신없어지기 전, 반드시 사자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이 황궁을 떠나는 것이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자유인이 아니라, 전쟁 포로였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유로 포로의 신분을 벗어 자유인이 되지 않는 한, 이 황궁을 떠날 수 없었다.

‘어쨌든 힘내자.’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다시 분주히 일하였다. 그런데 한참을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뭐야, 또 못난이 시녀네?”

퉁명스러운 목소리. 어린 황자 오스카였다.

“10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연회에 오셨나요?”

“당연히 연회에 왔지. 안 그러면 왜 여기에 왔겠어?”

그는 흥 하며 말했다. 여전히 버릇없는 태도였지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보다 보니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어린애니까.’

마리는 웃으며 물었다.

“오늘도 연회장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이미 갔다 왔어.”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 다르게 오스카의 목소리가 굉장히 의기소침했다.

“전하?”

“됐어. 연회엔…… 다시는 안 가.”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어 마리는 깜짝 놀랐다. 꼬마 황자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절대로 안 가.”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가 연회장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구나.’

마리는 10황자 오스카에 대해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운의 황자.

오스카 황자는 서자인 황태자 라엘과 다르게 황후 소생의 적통이었다. 라엘이 승리했으니 원래대로라면 내전 중 당연히 죽었어야 하지만, 이상하게 황태자 라엘은 이 어린 황자의 목을 베지 않았다. 하지만 라엘이 끝까지 오스카 황자를 살려 둘 가능성은 적었다. 냉혹한 그가 후환을 남겨 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이 어린 황자를 상대해 주지 않고 있어. 혹시나 황태자의 오해를 살까 두려워서.’

그건 귀족들뿐이 아니었다. 시종이나 시녀들도 오스카를 은근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이제 연회 절대 안 와.”

마리는 안쓰러운 눈으로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어린 황자는 지난 이틀간 받은 대접이 서러웠는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적인 사항을 생각하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그냥 어린애일 뿐인데.’

이전 자신이 클로얀 왕궁에서 받았던 구박이 떠올랐다. 자신이야 나이라도 조금 많았지, 이 황자는 완전 꼬마인데.

‘어떻게 위로해 줄 방법이 없을까?’

과거 자신의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그냥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궁에 돌아가면 이 어린 꼬마는 남몰래 펑펑 울겠지. 과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전하, 혹시 맛있는 주스라도 드시겠어요?”

“됐어. 많이 먹었어.”

“그러면 과자라도?”

“싫어. 입맛 없어.”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여 기분을 전환시켜 볼까 했지만, 오스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음, 어떻게 하지?’

마리는 고민했다. 사실 그녀도 아이를 달래는 데 별다른 재주가 없는 편이었다.

‘좋은 생각을 주세요, 주님.’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아, 그거면 되겠구나!’

“전하.”

“왜?”

입술을 삐죽 내미는 꼬마에게 마리가 말했다.

“저랑 같이 놀이 하나 하지 않으실래요?”

“놀이?”

아이답게 오스카는 놀이란 단어에 반응했다. 마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놀이요. 마술 놀이.”

그녀의 손에는 어느덧 동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 술?”

“네, 마술요. 마술 아시죠?”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거리 서커스에서 백성들이 한다는 그것?”

황궁을 나가 보지 않은 그는 마술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책에서 내용을 들은 적은 있었다.

“네, 제가 몇 가지 마술을 할 줄 알거든요.”

“네가?”

꼬마 황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하지 마. 넌 시녀잖아. 시녀가 어떻게 마술을 해.”

지극히 합당한 의심이었다. 시녀 중 마술을 할 줄 아는 이는 전 유럽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리, 그녀를 제외하고는.

마리는 꿈속의 마술사가 된 것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직접 한번 보시겠어요? 제가 어떤 마술을 할 수 있는지.”

무언가 분위기 있는 그녀의 동작에 오스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래! 하지만 만약 거짓말한 거면 큰 벌을 내릴 거야!”

“네, 그러면 첫 번째 동전 마술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리는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동전을 들어 황자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술에 들어가기 직전.

“아, 전하. 그냥 마술을 보기만 하는 것은 재미가 없으니 이건 어떨까요?”

“……?”

“서로 내기하는 거예요.”

“무슨 내기?”

“전하께서 제가 하는 마술이 어떤 트릭을 쓴 것인지 알아보는 거예요. 만약 알아볼 수 있으시면 전하의 승리, 알아볼 수 없으시면 저의 승리. 진 사람이 이긴 쪽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걸로요.”

그 말에 꼬마 황자는 의지를 불태웠다.

“좋아! 해! 당연히 내가 이길 테니! 이기면 엉덩이로 크게 이름을 쓰게 해줄 테니 각오해!”

“네, 그러면 시작합니다.”

마리는 왼손으로 동전을 든 오른손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왼손으로 춤을 추며 오스카의 시선을 현혹시켰다.

“자, 잘 보셔야 해요.”

꼬마 황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마리는 꿈속의 마술사처럼 옅게 미소를 짓더니, 휙 하고 왼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와 동시에 동전을 든 오른손이 나타났는데!

“……!”

꼬마 황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동전이 사라진 것이다!

“아, 아니? 어디?”

“네, 첫 번째 마술 동전 사라지기였습니다.”

“알려 줘! 동전 어디로 간 거야?!”

오스카는 마리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물론 마리는 알려 주지 않았다.

‘워낙 쉬운 마술이어서 알면 흥미가 사라져.’

마술은 트릭을 모를 때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다. 사실 동전 사라지기 마술의 트릭은 간단했다. 처음 왼손의 현란한 동작은 시선 뺏기용. 왼손에 모든 시선을 집중시킨 후, 휙 하고 내릴 때 오른손에 든 동전도 같이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왼손만 보고 있던 청중은 동전이 허공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도구가 있으면 좀 더 정교한 마술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한 생활 마술 정도밖에 없어.’

어차피 고난이도의 트릭을 자랑하는 마술 쇼를 하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냥 저 침울한 꼬마 황자가 즐거워할 정도의 마술이면 충분했다.

“자, 다음에는 물로 동전 녹이기입니다.”

“물로 동전 녹이기? 뭐야? 너 연금술도 할 수 있는 거야?”

꼬마 황자는 다시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세상에서 물로 동전을 녹일 수 있는 사람은 연금술사밖에 없다. 물론 마리가 지금 보여 주려는 것은 연금술이 아니었다.

“자아, 잘 보세요. 유리잔 안에 동전이 들어 있습니다. 보셨죠?”

“봤어! 빨리 계속해 봐!”

마리는 연회장 안에 있던 검은 천으로 유리잔을 덮었다. 그리고 정말 신비한 마술이라도 하듯 유리잔 주변에서 양손으로 춤을 추었다.

“수리수리 마수리~”

물론 아무런 의미 없는 손동작과 주문이었지만, 꼬마 황자의 눈은 점점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휙 천을 빼낸 마리는 준비한 주전자로 천천히 유리잔에 물을 붓기 시작했다.

“이제 동전을 물로 녹이도록 하겠습니다.”

조르륵.

유리잔에 물이 차오르는데, 오스카는 이번에도 기절할 듯 놀랐다. 정말로 동전이 물에 녹아 사라진 것이다!

“너, 너! 정말로 연금술을?!”

“연금술이 아니라 마술이에요.”

역시 이번에도 간단한 트릭이었다. 물이 차오름으로 생긴 빛의 굴절을 이용한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러면 다음 마술은……!”

이후 마리는 연달아 몇 개의 마술을 더 보여 주었다. 손수건을 이용한 마술. 시녀들끼리 가지고 노는 카드를 사용한 마술. 마지막으로 촛대의 불꽃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는 플레임 베니싱(Flame vanishing)까지.

“와, 와!”

오스카는 정신없이 그녀의 마술을 지켜봤다. 마술이 깊어질수록 넋을 잃어가던 그의 표정은, 마지막 고급 마술인 플레임 베니싱을 보고는 아예 기절할 듯 변했다.

“어, 어떻게 그렇게! 알려 줘! 나도 알려 줘! 나도 해볼 거야!”

그녀에게 달라붙어 비기를 알려 달라 조르는 오스카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의 것이었다.

‘다행히 아까 전 일은 까먹은 것 같구나.’

마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마술 쇼는 다행히 성공인 것 같았다.

“전하, 그러면 내기는 제가 이긴 거죠?”

“내기?”

꼬마 황자는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마술 쇼 시작 전 둘은 내기를 했었다.

“네, 이긴 쪽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셨잖아요.”

“그, 그건…….”

오스카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 난관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궁리하는 표정이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마리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물론 그녀가 저 귀여운 꼬마 황자에게 어려운 부탁을 할 리는 없었다. 그냥 저 황자의 모습이 예전 클로얀 왕성에서의 자신을 떠올리게 해, 당시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이야기를 해주려는 것뿐이었다.

‘내가 그나마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 정도니까.’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마음만 같아서야 최대한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릴 부탁은…….”

그런데 오스카 황자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나 안 졌어!”

“네?”

“비겁해! 넌 마술을 잘 알지만, 난 이번에 처음 보는 거라고. 이건 불공평한 내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조금 불공평한 내기이긴 했다. 마리는 당황해 말했다.

“무, 물론 그렇지만…… 제가 드릴 부탁은 어려운 게 아니라…….”

“몰라! 오늘 네가 보여 준 마술 내가 샅샅이 공부해서 올 테니, 그때 다시 내기해!”

그렇게 외친 황자는 도망치듯 자신의 궁으로 달려갔다. 마리는 황망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어쨌든 기운은 차린 것 같으니 괜찮은 건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결말이긴 했지만, 뭐 이것 나름대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주님, 저 황자님을 축복해 주세요.”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며 그렇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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