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폐하!”
“괜찮으십니까?!”
눈을 뜬 요하네프 3세의 귀에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한 표정을 지은 요한은 곧 상황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다행히…… 살아났군.”
“폐하, 그러니까 궁을 벗어나 계신 것은 위험하다고 제가 몇 번이나!”
쇼버 백작이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비밀리에 동행한 어의 갈트 남작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엔 정말 위험하셨습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발작은 예전과 달리 정말 심각했다. 그는 의식을 잃으며 죽음을 직감했었다.
“위험하긴 했어. 최근 반년 이상 발작이 없어서 안심하고 황궁을 떠난 것인데.”
아무리 그가 엉뚱한 기행을 즐긴다 해도 발작이 계속되고 있는데 자신의 황궁을 떠날 담력은 없었다. 그건 담력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그가 이번 암행을 결정한 이유는 모리나 왕녀의 일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최근 지병이 많이 호전되어서 황궁을 떠나도 무리가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발작이 일어나다니? 어의 갈트 남작이 이유를 추측했다.
“아마 발작을 억제하는 약의 용량을 줄인 탓으로 보입니다.”
“역시 그런가. 그러면 약의 용량을 다시 올려야겠군.”
“네, 약을 이전의 용량대로 복용하면 발작이 재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싫지만 하는 수 없군.”
요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발작을 억제하는 약은 굉장히 독했다. 그래서 용량을 줄였던 것인데,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는가?”
“네, 진찰 결과 옥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심장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파란 약을 늦지 않게 복용한 덕분입니다.”
어의의 말에 요한은 멈칫했다.
“파란 약? 내가 그걸 복용했다고?”
“네, 정확한 용량대로 2알 복용하셨습니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 약을 복용한 적이 없는데?”
분명히 기억한다. 그는 파란 약을 꺼내려다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어의는 그에게 파란 약통을 보여 주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약을 복용하셨습니다. 그것도 정확한 용량대로 2알을 복용하셨습니다.”
약통에는 8알의 파란 약이 들어 있었다. 원래 10알이 있었으니, 딱 2알이 사라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난 분명히…….”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던 그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살릴 수 있어! 살려야 해!”
의식을 잃고 있던 중 어렴풋이 들렸던 목소리.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압박하고 입가로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의식은 흐릿했지만, 자신의 입가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똑똑히 떠올랐다. 마치 여인의 것처럼 부드러운 느낌이어서 굉장히 놀랐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요한은 그때의 기억을 어의에게 설명해 주었다. 파란 약을 먹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누군가 그에게 응급처치를 한 것 같다는 설명을 듣고 어의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그렇군요. 정말 신께서 도우셨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그자가 아니었으면 폐하는 소생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그만큼 상태가 위중하셨으니까요. 혹시 그자가 어떤 응급처치를 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요한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내용을 설명했다. 어의 갈트 남작은 설명을 들을수록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야말로 완벽한 응급처치입니다. 그 덕에 아무런 문제없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입을 다물고 어의의 말을 들었다.
“응급처치 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의술이 소신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 자로 여겨집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의에 비해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닌 자였으니, 자신이 멀쩡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내게 숨을 불어넣던 입술은 여인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분명 그때 느껴지던 감촉은 여인의 것처럼 부드러웠는데.’
어의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닌 의사가 여인일 리는 없으니, 그는 자신이 착각한 것인가 생각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군. 하필 내가 쓰러졌을 때, 그렇게 뛰어난 실력의 의사가 근처에 있었다니.”
“네, 신께서 도우신 것 같습니다.”
“감사를 표해야겠군. 누구지, 날 살린 명의(名醫)가? 이곳 동제국의 어의인가?”
그런 응급 상황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자신을 살려 낸 이라면 분명 이름 있는 명의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요한은 물었다. 그런데 어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없습니다.”
“뭐?”
“당시 현장에 있었던 자는 폐하가 쓰러진 것을 목격한 시녀가 유일합니다.”
“시녀만 있었다고?”
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군. 그 시녀를 불러오도록.”
그는 자신을 구해 준 명의를 찾기 위해 명했다.
한편 마리는 머리가 하얗게 질려 요한의 방으로 끌려왔다.
‘뭐라고? 저분이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였다고?!’
이미 남자의 정체가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란 것은 온 궁에 퍼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흑발 남자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자가 많았는데, 그런 소동까지 벌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왜 하필 또.’
마리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를 피했다고 좋아했더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사자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요하네프 3세. 15세의 나이에 소년 황제로 등극해 10년 만에 혼란에 빠진 서제국을 안정시킨 절대 군주.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마음씨 착한 성군(聖君)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서제국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흘린 피는 황태자 라엘에 비해 결단코 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한 감이 있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첫날, 자신에게 불손하게 굴었던 공작의 목을 즉결로 베어버리고 영지를 불태운 것은 온 대륙에 유명한 일화였다. 요한 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군주였다.
‘왜 나는 맨날 이런 식인 거야.’
그녀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무슨 일을 하기만 하면 피의 황태자랑 연관되더니, 이번엔 다른 나라 황제까지 연관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쥐 죽은 듯 살고 싶은데. 정말 울고 싶었다.
“서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시녀 마리입니다.”
침대에 기대 앉아 있던 요한은 마리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때 봤던 시녀님이군요. 내 조끼는 잘 빨아주었나요?”
“아.”
그 웃음기 섞인 말에 마리는 당황했다. 서제국의 황제를 알현한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친근한 말투였던 것이다. 더구나 시녀인 자신에게 경어라니?
“말씀을 낮추어주시옵소서, 폐하. 미천한 것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습관이니. 난 원래 내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면 편하게 말 안 해요.”
내 선 안에 들어온 사람? 무언가 뜻 깊은 어감의 말이었다. 어쩔 수 없어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의 조끼는 깨끗이 세탁해 궁에 보관 중입니다.”
“그래, 고맙군요. 이렇게 마리 양을 부른 이유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예요.”
그 말에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신 차려야 해. 상대는 서제국의 황제야.’
부드럽게 웃으며 경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녀는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말투이기에 더욱 두려웠다. 그가 어떤 황제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라엘이 압도적인 공포로 적에게 군림한다면, 저 요하네프 황제는 웃으며 사람을 베었다. 즉, 황태자 라엘이 맹수라면, 요하네프는 이리의 음험함을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흑안 밑에는 피의 황태자 못지않은 냉철함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아차 하면 모조리 들킬 수도 있었다.
“마리 양이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고 들었어요. 혹시 그 당시 다른 인물을 본 적은 없나요?”
“다른 인물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마리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답했다.
“없습니다. 당시 발코니에는 폐하 혼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대답에 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도 없었다고? 그럴 수가 있나?’
아무도 없었다면, 요한을 구한 이는 응급처치를 하고 그를 그대로 방치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뜻인데, 상식적인 면에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응급처치가 잘 끝났다고 해도 환자가 추가적인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부르고 떠나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자신을 살릴 정도로 뛰어난 의학적 실력을 지닌 이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환자를 버려두고 떠났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게 어려운 상황도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요한은 마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혹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마리의 눈에선 특별히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 일이긴 하지. 그러면 뭐지?’
요한은 미궁에 빠져 고민했다. 오랜 기간 제위에 올라 암투를 헤쳐 온 그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는 그때의 일을 반추해 보았다. 놓치는 것 없이 최대한 꼼꼼하게.
“살릴 수 있어! 살려야 해!”
당시 들렸던 목소리. 두 손이 자신의 가슴을 누르던 것과 입술을 통해 숨결이 들어왔던 것이 떠올랐다. 특히 여인의 것처럼 부드러웠던 입술의 감촉은 똑똑히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가슴에 올려져 있던 손도 작았던 것 같아. 여인의 손처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긴 한 것인가? 그 순간이었다. 요한의 눈에 공손히 서 있는 마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과 입술이.
‘잠깐.’
저 마리란 시녀는 소녀치고도 작은 체구였다. 손바닥도 굉장히 작았다. 그가 혼몽 속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입술. 순하고 귀여운 인상의 얼굴에 놓인 작은 입술은 붉고 촉촉해 보였다.
‘설마?’
요한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작은 소녀가 날 구했을 리가 없지. 정신을 잃은 여파가 있나 보군.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니.’
그는 다시 상황을 떠올렸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정확한지, 무언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아니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없어.’
어렴풋한 의식이었지만, 가슴을 누르던 손의 느낌과 호흡을 넣어주던 입술의 감촉은 똑똑히 기억났다. 급박한 상황과 이질적인 느낌이어서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요한은 시녀 마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증언. 자신을 응급처치 하던 이와 꼭 닮은 손과 입술. 상식적으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그럴수록 의혹은 커져만 갔다.
‘설마 정말로?’
한편 그가 자신을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자 마리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맹수의 시선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생각했다.
‘요즘 나는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
어떻게 기적 같은 능력을 얻긴 얻었는데, 인생은 더욱더 꼬여만 가는 기분이었다.
“마리 양.”
그때, 요한이 그녀를 불렀다. 마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을 숨기며 차분히 답했다.
“네, 폐하.”
‘제발 그냥 나가라고 해주었으면.’
하지만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소원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제 쪽으로 가까이 와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마리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떴다. 요한은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만 이쪽으로 가까이 와 주세요. 직접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니.”
“……예?”
마리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요한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마리는 주춤주춤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맹수의 입으로 스스로 걸어가는 기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문을 열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누구의 앞이라고 그러겠는가? 저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는 서제국의 황제였다. 자신은 미천한 시녀일 뿐이고. 물론 다른 나라의 황제라지만, 그가 죽으라고 하면 자신은 죽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와, 왔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가까이.”
“더 말입니까?”
지금도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웠다.
“네, 이쪽으로 더 오세요.”
몇 걸음 더 옮기니 그가 기대어 앉아 있는 침대에 몸이 닿았다.
“다, 다 왔습니다.”
마리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었다. 요한은 생각지도 못 한 일을 하였다. 그의 손으로 마리의 손을 붙든 것이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폐, 폐하?”
마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 잠시만요.”
마리는 당황해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요한은 손을 붙든 채 가만히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빛이 담긴 눈길이었다. 그 눈길 때문일까? 아니면 당황 때문일까? 마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폐, 폐하. 놔주십시오.”
마리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제야 요한은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실례했네요.”
“어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물었다. 요한은 빙글 웃었다.
“손이 작고 예뻐 보여 직접 만져서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며 그는 말을 이었다.
“직접 만져 봐도 역시 작고 예쁜 손이네요.”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남자의 달콤한 말이니 가슴이 설렐 법했지만, 마리의 가슴은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그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님을 느낀 탓이었다.
‘왜 갑자기 내 손을?’
그때 요한이 다시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알 수 없는 빛이 담긴 눈동자. 부드러우면서도 위험한 느낌의 그 눈빛에 그녀의 가슴이 다시 떨리려는 순간. 요한이 입을 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마리 양.”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들리는 낮은 음성.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
마리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떨어졌다. 서제국의 황제 요한도 놀란 얼굴을 하였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깊은 불쾌감이 담긴 목소리. 나타난 이는 이 제국의 황태자인 라엘이었다. 그가 차가운 철가면을 쓴 채 요한을 노려보았다.
“대답해라, 요한.”
동서 양 제국의 지배자인 요한과 라엘. 둘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당황에 몸이 굳어 있던 마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예를 표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너는 이리로 와라.”
“네?”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라고.”
여전히 불쾌감이 가득한 목소리에 마리는 당황했다.
‘왜 저렇게 화가 나신 거지?’
그가 저렇게 기분 나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황태자의 뒤로 서둘러 물러났다. 공포의 대상인 황태자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가웠다. 저 요한 황제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황태자가 반가울 때도 있다니.’
황태자는 그녀가 자신의 뒤로 갔는지 힐끗 확인하더니 요한에게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나 보군.”
동제국의 황태자인 그는 서제국의 황제인 그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양 제국은 서로의 황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요한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반갑군요, 란.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건지? 오랜만의 만남인데 조금 서운하군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내 것’을 건드리고 있는데 기분 좋을 주인이 어디에 있지?”
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시녀 말이다. 이 시녀는 내 것인데 왜 네가 함부로 건드리고 있느냐는 말이다.”
“……!”
황태자의 말에 그 자리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요한도 놀랐고, 당사자인 마리는 더욱더 놀랐다.
‘지금 뭐라고?’
마리는 당황해 생각했다.
‘내 것?’
물론 황태자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황궁에 소속된 시녀이고, 황태자는 황궁의 주인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녀는 그의 것이 맞긴 맞았다.
‘그, 그냥 그런 의미로 말한 단어겠지. 그렇겠지?’
그녀는 속으로 애써 생각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이긴 했지만, 저 철혈의 황태자가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일 리 없었다. 서로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저 황태자는 적국의 황제가 황궁의 소유물인 자신을 건드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네놈을 추방하고 싶지만, 네놈의 몸 상태를 생각해 그건 참지. 하지만 이 황궁에 더 머물고 싶다면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명심하도록 하죠.”
“기력이 회복되는 대로 당장 네놈의 나라로 떠나도록.”
그렇게 이야기한 황태자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마리도 눈치를 보며 황태자의 뒤를 조심히 따라갔다. 그들이 나간 후 황제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놈의 성질 머리는 여전하군.”
그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재미있네.”
요한의 머릿속에 방금 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황태자는 그에게서 시녀를 지키기라도 하듯 앞을 막아섰다. 평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내 것이라고? 란에게 저런 면이 있었단 말이야?’
재미있는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까 그 시녀도 무언가 수상해.”
그는 시녀의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어젯밤 자신을 응급처치 했던 이의 손과 거의 똑같은 크기의 손이다. 그냥 단지 우연인 것일까?
“아닌 것 같은데.”
요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감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수라장을 헤쳐 온 그의 감은 그 어떤 합리적 판단보다 정확할 때가 많았다.
“입술의 느낌까지 확인해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그냥 입을 맞춰 확인해 봤어야 했나?”
요한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실 확인하려고 했었다. 손을 잡았을 때 긴장에 떠는 모습이 생각지도 않게 귀여웠던 탓이다. 충동에 못 이겨 입술까지 확인하려는 순간, 황태자가 들이닥쳤다.
“하긴. 내가 입술까지 맞추었다면 목을 보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그는 미소를 지었다. 방금 황태자가 화를 냈던 이유는 자명했다. 창밖으로 자신이 시녀의 손을 잡은 것을 본 탓이리라. 단순히 손만으로도 저런데, 만약 자신이 그 시녀의 입술까지 빼앗았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요한은 그것이 굉장히 궁금해졌다.
“어쨌든 재미있어. 원래는 몸의 기력이 회복되는 대로 바로 떠나려 했는데.”
그는 조용히 말했다.
“조금 더 머물러 봐야겠군.”
능력 있는 시녀님
유인 장편소설
지은이 : 유인
발행인 : 권태완
전자책 발행일 : 2017-09-01
제 공 : KWBOOKS
주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31길 41, 1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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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시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