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휘융! 파앙!
동방에서 들여온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수많은 사건 사고 끝에 드디어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와아아!”
“제국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신께 영광을!”
황궁도, 길거리도 모두 기쁨의 함성으로 물들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제국의 사람들은 모든 근심 걱정을 잊고 축제 기간을 보낼 것이다. 백성들은 길가로 몰려나와 거리 축제를 즐겼고, 귀족들은 황궁에 모여 연회를 즐겼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하게 먹고 마시며 떠드는 순간, 평소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거기 쓰레기 좀 정리해 주세요!”
“네, 시녀장님!”
“이 음식 연회장에 늦지 않게 가져다주시고요!”
바로 황궁의 시녀들이었다.
“자자! 정신 차리고 빨리빨리 움직여요!”
막상 축제가 시작되니,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연회장을 정리하고, 음식을 나르고, 귀빈을 접대하고, 어지럽혀진 오물을 치우고, 행사를 준비하느라 모두 정신없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축제를 준비할 때가 천국으로 느껴질 정도로 일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시녀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몸을 움직였는데, 그중에서도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마리 같은 하급 시녀가 가장 고생했다. 축제장 주변에는 접근도 못 하면서 할 일은 가장 많았던 것이다.
“마리, 밥은 먹었어?”
“아니, 너는?”
“나도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죽겠다.”
같은 방을 쓰는 동료 제인은 연회장에서 나온 쓰레기를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높은 시녀님들은 연회장에서 맛있는 것 드시고 있겠지?”
제인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똑같이 시녀란 단어로 불려도,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하급 시녀와 귀인들을 직접 상대하는 중급 시녀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담당하고 있는 일도 전혀 달랐고, 신분도 귀족가 출신의 영애가 대부분이었다.
“부럽다. 나도 축제가 끝나기 전 연회장 구경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꾸미는 것은 다 우리가 했는데, 정작 축제 때는 구경도 못 해보네.”
그렇게 한숨을 내쉰 제인이 마리에게 말했다.
“마리? 너 무슨 고민 있어?”
“아? 응? 아니야.”
“아닌데? 좀 이상한데?”
제인은 이상하단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봤다. 평소 씩씩하고 활발하던 모습과 다르게 계속 아무 말 없이 조용했던 것이다. 마치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 아니야. 정말 괜찮아.”
“그래?”
“응, 나 저기 정리하러 갈게! 이따 봐!”
도망치듯 뛰어가는 마리를 보며 제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갑자기 왜 저러지?”
한편 혼자 있게 된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인의 추측처럼 사실 그녀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심각한.
“도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그녀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고민하는 건 바로 어젯밤에 꾸었던 꿈 때문이었다.
“왜 이런 꿈을? 하아.”
다른 사람이 보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꿈의 내용 때문에 고민하다니. 하지만 그녀는 심각했다.
“내가 꿈을 꾸면 꼭 관련된 일이 벌어지잖아.”
마리는 고뇌에 찬 표정으로 생각했다. 이제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꾸는 지각몽은 절대 이유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꿈을 꾼 이상, 분명 관련된 일이 주변에서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왜 도대체 그런 꿈을?”
그녀는 어젯밤 꾼 꿈을 떠올렸다.
「크악! 살려줘!」
「내 팔! 내 팔!」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피가 수없이 흐르는 아비규환 같은 모습.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의무병! 의무병 어디 있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거기까지 떠올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런 꿈을?’
그녀가 꾼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의 꿈이었다. 그녀는 꿈에서 전쟁에 참전한 병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보통 병사가 아닌, 의무병이었다. 병사들이 다치면 병원에 도착하기 전, 응급처치를 해주는.
‘도대체 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행복한 축제 때 왜 이런 꿈을 꾼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한편 그때, 황태자는 지친 표정으로 사자궁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쁘군.”
“위스키라도 내올까요?”
호위 기사 알몬드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미 많이 마셨다.”
그는 철가면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천상의 것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은 술기운에 살짝 붉은 기를 띠고 있었다.
“축제라. 두 번 하기는 어려운 일이군.”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모두가 즐기는 축제에서 시녀들만큼 바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황태자인 그였다. 축제에 참석하랴, 각종 행사에 얼굴 비치랴, 외국 사절들을 상대하랴, 상경한 지방의 귀족들과 여러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랴, 축제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랴 등등. 해야 할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몸이 두 개, 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재상 오른이 웃으며 말했다. 그도 술을 어느 정도 마셔 얼굴이 붉었다.
“이게 다 전하께서 홀몸이셔서 그렇습니다.”
“홀몸?”
“네, 내명부의 주인만 따로 있다면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축제는 내명부의 황후 마마나 황태자비 마마의 소관이니까요.”
현재 내명부는 비어 있었다. 제국의 실질적 주인인 그가 홀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전하, 비전하는 언제 맞이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생각 없다.”
“하지만 원로원의 압박이 거셉니다. 이번 축제가 끝나면 어떤 분을 황태자비로 맞으실지 결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결혼이 내키지 않아 계속 미뤄 왔지만, 더는 미루기 어려웠다.
“혹시 마음에 두신 분은 없으십니까?”
그러며 재상 오른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연회 때 보니, 코제린 후작 영애와 스피나 공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말입니다. 그녀들뿐 아니라, 사절로 온 도미닌 공주도…….”
오른 공작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영애들의 이름을 쭉 읊었다. 하나같이 사교계에서 이름 높은 레이디로, 모두 대단한 절색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관심 없다. 황태자비는 제국에 가장 도움이 될 법한 인물로 선정할 것이야.”
그러며 그는 생각했다.
‘모리나 왕녀를 못 찾고 있는 것이 아쉽군.’
만난 적도 없는 인물이지만, 제국의 국익을 생각하면 모리나 왕녀만 한 황태자비도 없었다.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의 장점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첫째로 서제국과의 화약고인 클로얀 지방의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 점 말고도 외가가 없으니, 외척의 힘을 견제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장점이었고, 모리나 왕녀 본인의 심성도 어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라엘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황태자비감이었다. 문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만약 비로 삼기 어려우면, 나중에라도 찾아내서 죽일 수밖에.’
모리나 왕녀는 클로얀 왕국의 후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그게 힘들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
‘비로 삼든, 죽이든, 어느 쪽이든 그녀를 찾아야 하는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술기운이 올라와서일까?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그래. 내일 보도록 하지.”
재상 오른이 물러가고, 알몬드가 조심히 말했다.
“침소로 가서 주무시는 것이.”
“아직 안 잔다. 검토해야 할 서류가 있어.”
서류도 서류이지만, 평소에 앓는 불면 때문에 그는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그때 그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는 문득 이전 수정궁에서 들었던 연주를 떠올렸다. 전원 풍경을 묘사한 그 연주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 자신의 불면도 치료해 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그 연주자는 못 찾았지. 악장 바한이 새로 작곡한 전원 교향곡도 나름 나쁘지 않으나, 그날 들었던 연주에는 미치지 못해.’
근위 기사단까지 동원해 샅샅이 뒤졌으나 오리무중이었다. 아무리 조사해도 그날 수정궁에 있었던 것은 시녀 마리밖에 없었다. 이전 조각사 사건 때도 그렇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황궁에 천사라도 다녀간 것일까?
‘천사는 무슨.’
라엘은 피식 실소했다. 자신처럼 많은 피를 흘린 이에게 무슨 천사란 말인가.
‘혹시 그 소녀가 연주했던 것은 아니겠지?’
불현듯 다시 떠오르는 의문.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답답하군. 산책이나 다녀올까.’
그는 늘 그렇듯 가볍게 차려입고 사자궁을 나섰다. 그리고 어두운 황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디로 가지.’
그러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백합궁 쪽으로 가볼까.’
백합궁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한 소녀.
‘마리. 지금 백합궁에 가면 그 시녀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그는 흠칫 놀랐다. 백합궁에 그 시녀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즘 이런저런 일로 계속 마주쳐서 그런가, 자꾸 쓸데없이 생각이 나는군.’
그는 고개를 젓고는 백합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저 산책을 즐기기 위해. 곧 백합궁 근처에 도착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분주하군.’
귀빈을 대접하는 백합궁은 축제를 맞아 굉장히 분주했다. 시녀도 여럿 돌아다니고 있어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그 소녀를 생각했다.
‘없군.’
그 순간 라엘은 다시 흠칫 놀랐다. 그 시녀를 보러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오늘따라 나도 이상하군.’
라엘은 고개를 젓고는 사자궁에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백합궁 근처를 벗어나려는 순간, 그는 다시 눈을 돌려 백합궁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거냐, 라엘. 그 시녀는 왜 찾아? 찾아서 뭐 하게? 빨리 돌아가기나 하자.’
그런데 그 순간 라엘의 귀에 그가 찾던 이의 이름이 똑똑히 들려왔다.
“마리, 이것 좀 저쪽에 가져다 버려 줘!”
“네, 수잔 시녀님!”
씩씩한 목소리! 그 소녀의 음성이었다.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곧 그의 눈에 작은 체구의 소녀가 들어왔다. 마리였다.
‘뭘 저렇게 들고 있는 거지?’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리는 거의 자신의 체구만 한 쓰레기 더미를 들고 있었다. 축제에서 나온 쓰레기였다. 무거운지 하얗게 질린 손으로 낑낑대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그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몸도 약해 보이는데 저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건가.’
라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저런 일은 하급 시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란 것을. 하지만 술기운 때문일까? 그냥 마땅치가 않았다.
“영차!”
마리는 작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쓰레기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턴 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끝났다.”
순간 라엘은 고민했다.
‘말을 걸어 볼까?’
하지만 그는 멈칫했다. 무슨 이유로 말을 건단 말인가. 더구나 저 소녀는 자신의 진짜 정체도 모른다.
‘지난번 과자가 고마웠다고? 그 감사의 인사라도?’
그가 고민하는 사이,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여기 와서 주방 좀 도와줘!”
“네, 지금 갈게요!”
소녀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엉거주춤 멈추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오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
피의 황태자는 중얼거렸다.
* * *
마리는 그날 밤 또다시 꿈을 꾸었다. 전날 꾸었던 것과 같이 전쟁의 꿈이었다.
「크으…….」
「사, 살려 줘.」
전쟁의 모습은 참혹했다. 과거 그녀가 경험했던 것처럼. 꿈속에서 그녀는 병사가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그 병사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어?」
「아, 분대장님.」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놈들이 죽은 건 너 때문이 아니야.」
그 말에 병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병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래도…… 살 수 있지도 않았을까요? 제가 조금 더 잘했으면.」
분대장은 그런 병사의 머리를 휘저었다.
「됐어. 넌 의무병으로서 최선을 다했어.」
결국, 병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오늘 전사한 이는 그의 친구였다.
「아무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아.」
꿈속에서 병사는 중얼거렸다.
「내가 조금만 더 응급처치를 잘할 수 있다면.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텐데.」
그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마리는 눈을 떴다.
“도대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축제 기간에 왜 전쟁터의 꿈을.”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그녀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때 분명 꿈과 관련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축제와 관련된 꿈이면 모를까, 전쟁터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었지만, 막상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녀가 대처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백합궁에 도착한 마리는 무거운 마음을 떨치려 일부러 밝게 인사했다. 그런데 수잔 시녀의 얼굴이 이상했다.
“마리? 혹시 미리 이야기 들은 것 있니?”
“네?”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
“역시 모르고 있었나 보네.”
“무슨 일이죠?”
“그게…… 나도 조금 당황스러워서.”
마리의 표정이 더욱더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지?
“네 근무지가 변경되었단다.”
“네? 근무지요?”
갑자기 근무지 변경이라니? 그것도 한창 정신없는 축제 기간 중에? 마리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내가 정한 게 아니어서. 하여튼 너도 모른다는 거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상급자인 수잔 시녀가 정한 것이 아니라니? 누가 그녀의 근무지를 변경했단 말인가?
“어쨌든 오늘부터 백합궁이 아닌, 글로리아 홀로 가서 근무하면 된다.”
“글로리아 홀이요?”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로리아 홀은 축제 기간 중 황궁에서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연회장이다.
“그곳에 가서 연회장 뒷정리를 하는 건가요? 아니면 주방 정리?”
그녀는 하급 시녀의 업무를 읊었다. 하지만 수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연회장에 직접 들어가서 연회 시중을 들 거야.”
“네, 하지만 그 일은?”
“그래. 그건 너 같은 하급 시녀가 아닌, 중급 시녀의 업무지.”
중급 시녀는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 귀인들을 직접 상대한다. 대부분 준귀족이나 하급 귀족, 몰락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드물게 하급 시녀로 오래 근무한 이가 승급한다.
“그런데 어째서?”
수잔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하한다.”
“네?”
“너는 오늘부로 하급 시녀에서 중급 시녀로 승급한 거야.”
“네?”
마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황당한 이야기? 수잔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나도 당황스럽긴 하지만…… 황실의 직인이 찍힌 명령이니 틀림없겠지.”
마리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혹시 이것도 꿈인가?’
당황스러운 것은 마리뿐이 아니었다. 수잔의 당황은 더욱 심했다. 수잔은 오늘 아침 전해 받은 명령을 떠올렸다.
“마리를 중급 시녀로 승격시키라고요?”
그 명을 전달한 사람은 놀랍게도 궁내부장인 길버트 백작이었다! 길버트 백작도 자신이 왜 이런 명령을 전달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단 표정이었다.
“그래. 마…… 리라고 했나? 에잉 참, 이름도 정말 시녀 같은 이름이군. 어쨌든 그 마리란 시녀를 중급 시녀로 승격시키라 한다!”
“……도대체 어째서?”
“나도 몰라! 이유는 기밀이니 더 묻지 말게.”
그렇게 된 일이라, 수잔도 더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궁내부장인 길버트 백작보다도 더 높은 인물이 마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뿐.
‘궁내부장보다 더 높은 인물이면 누구지?’
몇 명 존재하지 않았다. 궁내부장만 해도 까마득히 높은 권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는 어떻게 그런 분의 관심을?’
수잔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쟁 포로라 신분도 미천하고, 높은 분의 시선을 끌 정도로 외모가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나름 귀여운 상에, 못난 외모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녀보다 매력적인 여인은 이 황궁 안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 마리가 물었다.
“그러면 축제가 끝나면 다시 이 백합궁에 돌아와서 일하는 건가요?”
수잔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따로 내려온 명령이 있었다.
“아니, 축제가 끝나면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될 거야.”
“그러면 어디에서?”
수잔은 축하한단 목소리로 답했다.
“사자궁. 그곳이 네가 앞으로 일할 곳이란다.”
마리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답변이었다.
‘뭐라고?! 사자궁이라고?’
마리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어젯밤 뒤숭숭한 꿈은 머리 밖으로 까마득히 사라졌다.
‘안 돼! 사자궁이면 황태자가 있는 곳이잖아!’
그녀는 황태자의 철가면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그와 같은 곳에서 지내야 한다고? 정말 최악의 경우, 황태자를 곁에서 모셔야 할 수도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결정이?’
수잔 시녀에게 물어봐도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며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자궁만은 안 돼. 무조건 바꿔야 해.’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황태자의 눈에 자꾸 들어 곤란한데, 사자궁에 갈 수는 없었다.
‘기회를 봐서 다른 곳으로 근무 변경을 요청하자. 시녀장님께 잘 말하면 가능할 거야. 나 말고도 사자궁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시녀는 많으니까.’
제국의 지배자인 황태자가 거하는 사자궁에서 일하는 것은 시녀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나 같은 전쟁 포로는 사자궁에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 바꿀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누가 날 중급 시녀로 승급시키고, 사자궁으로 전속을 명한 거지? 혹시?”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얼마 전 주방에서 만났던 황태자의 철가면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 요리를 잘한 공으로?’
자신의 요리 때문에 만찬회가 대성공으로 끝났단 이야기를 듣긴 했다. 그 공으로 상을 내린 건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 외에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때 황태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이건 전혀 상이 아니라고!’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물론 일반적인 시녀에게는 사자궁에서의 근무는 큰상이 맞았다. 시녀로서 가장 영광된 직책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사자궁 근처만 가도 목이 서늘해지는 사람이었다.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일이 잘못 풀리면 정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만약 정말 그런 것이면 잘됐어. 강하게 사양해 사자궁에서의 근무는 없던 걸로 하자.’
마리는 그렇게 다짐했다. 물론 그녀의 뜻대로 일이 풀릴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마리는 유니폼을 일단 갈아입었다. 하급 시녀와 중급 시녀는 하는 일이 전혀 달랐기에 다른 옷을 입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시녀의 옷이 주방의 작업복 같은 느낌이라면, 황족이나 귀인들을 직접 상대하는 중급 시녀의 옷은 좀 더 드레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내가 이런 옷을 다시 입다니.’
마리는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치마에 달린 레이스와 프릴이 어색했다.
‘몸은 힘들어도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하급 시녀의 일이 더 좋은데.’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오지랖 넓게 이 일, 저 일 나선 그녀의 잘못이지.
‘그냥 다 모른 척해야 했을까. 그러면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러기도 힘들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시 한숨을 내쉰 마리는 글로리아 홀로 향했다. 글로리아 홀의 시녀들을 담당하는 블랑쉬 시녀장은 마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리 양?”
“네, 마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원래 백합궁에서 일했다고? 클로얀 왕국 출신이고?”
블랑쉬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마리 같은 애가 왜 중급 시녀로 승급한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초리였다. 물론 마리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저도 동감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백합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연회가 시작되면 연회에 참석한 분들을 시중들면 돼요. 하급 시녀라도 황궁 생활을 3년이나 했으니 예법은 전부 알고 있죠?”
“네.”
블랑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수잔에게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한다고 전해 들었으니 지켜볼게요.”
그렇게 글로리아 홀에서의 근무가 시작되었다. 마리는 처음 보는 연회의 화려한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연회장의 모습이구나.’
우스운 일이지만, 그녀는 왕녀였음에도 연회장에 가 본 일이 없었다. 평민인 어머니에게 태어난 사생아였고, 왕비 태생의 형제들이 극심히 견제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침략에 멸망할 때까지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의 궁에서 쥐 죽은 듯 지냈다. 간간이 몰래 담을 넘어 정체를 숨기고 궁 밖의 사람을 만나는 일탈 외에는 창살 없는 유폐 생활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정체를 안 들키고 살아남았으니, 세상일은 참 아이러니했다.
“칵테일을.”
“네, 여기 있습니다.”
마리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연회 시중을 들었다.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이전 꿈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능숙히 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도 귀족, 저기도 귀족. 귀족들뿐이구나. 황족이랑 다른 나라의 왕족도 있고.’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연회를 즐기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름 높은 귀족들이었다. 황궁에서 오랫동안 일했음에도 귀족들을 직접적으로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던 그녀는 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퍼뜩 떠오른 생각.
‘잠깐. 내가 연회장에 왔으면 꿈속과 연관된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거 아니야?’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서, 설마. 아닐 거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귀족이 많은데 무슨 일이 생기려고.’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사건 사고는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놀라 돌아보니, 망토를 걸친 황태자가 연회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불빛에 철가면이 하얗게 반사됐다. 황태자는 가장 상석, 황족을 위한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 즐겁게 즐기시오.”
잠시 조용해졌던 연회장은 악단의 음악과 함께 다시 흥겨운 분위기를 띠었다. 한편 마리는 일을 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가까운 거야?’
그녀가 배치된 곳과 황태자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얼굴을 돌리면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마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에 열중했다. 사람들이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피고, 모자란 음식을 부탁하고, 음료를 가져다주며 바삐 움직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창 일에 열중하다가 무심코 황태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마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만 눈이 마주쳐 버린 것이다. 철가면 사이 푸른 눈동자는 정확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급히 고개를 숙였다.
‘시, 신경 쓰지 마.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니.’
별것 아닌 눈 마주침이지만, 워낙 공포의 대상이다 보니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이, 일이나 하자.’
그녀는 가급적 황태자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중을 들며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또 마주쳤다!
‘왜 자꾸 이쪽을 보는 거야? 여기에 뭐가 있나?’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는 게 심장에 좋지 않았다. 황태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자.’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그녀가 배치받은 곳에서 최대한 황태자의 시선이 안 닿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마리.”
“……?!”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저 차가운 음성은 분명히 자신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왜?’
황태자가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는 재상 오른도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왜 나를 부른 거지? 혹시?’
마리는 긴장하여 생각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긴장과 다르게 허무한 것이었다.
“음료를 조금 가져다주겠나?”
“…….”
“마리?”
“아! 네, 네! 어떤 음료면 되겠습니까?”
“딸기 주스가 좋겠군.”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허무했다. 그리고 딸기 주스라니! 처녀의 피라면 모를까, 저 철혈의 황태자와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음료를 황태자에게 가져갔다.
“음료입니다.”
“그래.”
그리고 후다닥 도망쳐 나오려는데 황태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마주한 듯한 느낌의 깊고 깊은 푸른 눈동자였다. 마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 혹시 다른 필요하신 것이라도?”
그런데 황태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려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입을 닫은 것이다.
“……?”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러섰다.
“혹시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그녀는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난 후, 재상 오른이 물었다.
“전하,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무슨 말이지?”
“그게…… 평소와 조금 다르신 것 같아서.”
오른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딱히 말하긴 어렵지만, 뭔가 평소와 달랐다. 황태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오른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막만 한 시녀가 연회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딸기 주스를 마시고 있는 황태자와 마리를 번갈아 보던 오른의 머리에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시간이 흐르고 연회의 1부가 끝났다. 오케스트라가 잔잔한 곡을 연주했고, 2부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마리는 사람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부족한 음식이나 음료들을 채워 주었다. 그런데 음료를 들고 발코니 쪽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발코니에서 휙 튀어나온 사람을 피하지 못하고 부닥쳐 버리고 말았다.
“꺄악!”
낮게 비명을 지른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들고 있던 음료가 상대방의 상의에 쏟아진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만 실수로…….”
그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엄밀히 말하면 갑자기 튀어나온 상대의 잘못이었지만, 상대는 귀족이었다. 그러니 무조건 그녀가 사과해야 했다. 다행히 상대는 성격 좋은 귀족 같았다. 주스에 잔뜩 젖은 상의를 털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쪽이야말로 넘어지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대단한 미남이었다. 흑발에 흑안, 부드러운 눈매. 지적인 느낌을 주는 안경.
‘요즘 잘생긴 남자들을 참 자주 보네.’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혈통 좋은 귀족들이 모여 있는 탓에 연회장에는 수많은 미남 미녀가 있었지만, 눈앞 남자의 외모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와 비견할 만한 사람은 이전 백조 정원에서 봤던 황실 친위대의 키엘과 정체불명의 금발 남자 정도? 다만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해 병약해 보이는 게 흠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온 제가 잘못이죠. 그리고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쪽이야말로 안 다쳐서 다행이네요.”
그러며 남자가 싱긋 웃었다. 부드러우면서 차분한 미소여서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저런 굴곡이 많아서 그렇지 그녀도 엄연히 소녀인지라, 저렇게 매력적인 미소를 보니 가슴이 설레었다.
“아! 오, 옷! 새 옷을 가져다 드릴게요.”
“고마워요. 이 옷도 가져가서 세탁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마리는 음료에 젖은 조끼를 남자에게 건네받고, 궁에 비치된 조끼를 가지러 후다닥 발코니를 내려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귀여운 시녀님이네.”
그러며 그는 중얼거렸다.
“작고 귀여운 게 딱 내 취향인데, 란에게 말해 내 궁으로 데려간다고 해볼까?”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굉장히 놀라운 것이었다. 란, 그것은 황태자의 아명이었기 때문이다. 동제국을 지배하는 황태자의 아명을 태연히 부른 남자의 이름은 요하네프 3세. 믿을 수 없게도 마리와 부닥쳤던 남자의 정체는 서제국의 황제인 요한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안 들어주겠지.”
어깨를 으쓱한 요하네프 3세는 시선을 돌려 발코니 밖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던 때와 다르게 그의 시선이 무거워졌다.
“농담할 때가 아니지. 모리나 왕녀의 문제가 급하군.”
그가 황제의 몸으로 남몰래 이 동제국에 온 것은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였다. 바로 모리나 왕녀를 찾기 위해서였다.
“내 계획을 위해서는 그녀가 반드시 필요한데. 찾는 게 쉽지가 않군.”
그는 작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여인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레이나 아니고. 케냔 아니고. 소니아 아니고.”
그는 종이를 눈으로 훑어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전부 아니야. 뭐가 잘못된 거지?”
그가 보고 있는 종이는 다름 아닌 클로얀 왕국이 멸망 당시 이 황궁으로 끌려온 시녀들의 명단이었다.
“모리나 왕녀가 이곳 황궁에 시녀로 끌려온 것은 맞아. 그건 분명한 정보야.”
정말 우연히 얻은 기적 같은 정보였다. 그는 그날로 클로얀 왕국에서 이곳 황궁으로 끌려온 전쟁 포로의 명단을 조사하였다. 그 명단을 토대로 한 명 한 명 몰래 살피고 있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왜 아무도 의심 가는 사람이 없는 거지?”
애초에 쉽게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 황궁에 끌려온 시녀 중 한 명이란 것만 알지, 그도 모리나 왕녀의 정확한 인상착의는 몰랐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성녀’라고까지 불렸던 인물인 만큼 직접 보면 어느 정도 의심 가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없었다, 전혀! 이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모리나 왕녀는 그냥 봐서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찾아내야 해.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요한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가 그리고 있는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가 필요했다.
“시간이 많이 없으니…….”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중얼거리던 요한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런…… 발작이?”
갑작스레 가슴에 밀려오는 통증에 그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피부가 시체처럼 질렸다.
“빨리 약을.”
그는 오래전부터 정체불명의 지병을 앓고 있었다. 그가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서제국 내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는 극비로, 어의가 처방한 비약만이 발작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을 뒤졌다. 최근 들어 병이 호전을 보이고 있어 안심하고 있었다. 요 반년 사이, 발작이 일어난 적도 없었는데 하필 지금 이렇게나 극심한 발작이 재발하다니. 가슴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빨리…….’
손이 덜덜 떨려 약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것을 필사적으로 버티며 약통을 찾아 하얀 약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약을 삼킨 후였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졌다.
‘왜 약효가……!’
평소엔 약을 먹으면 곧바로 심장의 통증이 잦아들었는데, 어째서인지 이번엔 전혀 효과가 없었다.
탕!
계속되는 격통에 손에서 약통이 떨어져 바닥으로 와락 하얀 약들이 쏟아졌다. 그의 머릿속에 어의의 말이 떠올랐다.
“폐하, 혹시나 발작이 굉장히 심하게 오면 하얀 약만으로는 발작이 가라앉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는 따로 처방한 파란 약을 복용하셔야 합니다.”
“하얀 약? 파란 약? 다른 건가?”
“네, 작용 효과가 전혀 다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얀 약을 먹고도 효과가 없다면 꼭 파란 약을 드셔야 합니다.”
그 생각을 떠올린 그는 이를 악물며 손을 움직였다.
“파, 파란 약을.”
파란 약은 반대쪽 품 안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크흑.”
요한은 외마디 비명을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 안 돼.’
그의 시야가 점차적으로 검게 변했다. 조금씩 심장의 맥이 느려지며,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렇게 쓰러질 수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이 꺼졌다. 그렇게 서제국의 황제 요한은 아무도 없는 발코니에 쓰러졌다.
젖은 조끼를 세탁 맡기고, 새로운 조끼를 구한 마리는 빠른 발걸음으로 발코니로 돌아왔다. 그 흑발의 남자가 자신 때문에 기다리고 있으니 최대한 서두른 것이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기 조끼를……!”
그렇게 외치며 발코니 문을 연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못 한 광경을 본 것이다. 흑발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그 생각지도 못 한 광경에 그녀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빨리 응급처치를!’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른다든지 하는 일반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순간 가장 필요한 조처를 하였다. 먼저 손가락으로 쓰러진 남자의 경동맥을 짚어 정확한 상태를 확인했다. 마치 ‘꿈속’의 의무병이 된 것처럼.
‘맥이 거의 없어! 심장마비 직전이야!’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호흡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몇 초 안에 완벽한 심정지로 진행할 것이 분명했다.
‘바로 처치를 해야 해!’
마리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남자가 바닥에 떨어뜨린 하얀 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재빨리 약의 정체를 확인했다. 다행히 꿈속 ‘의무병’으로 지낼 때 알던 약이었다.
‘심장 발작이 왔을 때 발작을 진정시키는 혈관 확장제야! 하지만 이 약은 이렇게 심장마비 직전 상태에서는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야!’
그녀는 혹시나 남자가 다른 약을 지니고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품속에 다른 약통이 들어 있었다. 약통에 있는 파란 약들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강심제! 이 약을 써야 해!’
그녀는 통에서 파란 약 두 알을 꺼내 남자에게 먹였다. 의식이 없어 삼키지 못하는 상태라 자신이 입에 물을 머금어 직접 깊숙이 전달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을 수밖에 없어 순간 멈칫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 약을 먹이지 않으면, 이 남자는 심장마비로 사망할 것이다. 부끄러운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약을 먹이고 난 직후였다. 맥박을 다시 확인한 마리의 안색이 하얘졌다.
‘맥이 완전히 없어졌어!’
그나마 희미하게 뛰고 있던 심장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완벽한 심정지 상태가 된 것이다.
“안 돼!”
급박한 상황에서 그녀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심폐소생술!’
마리의 손이 남자의 가슴을 압박했다.
‘약효가 돌 때까지 심장을 움직이게 해야 해!’
그녀는 작은 체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최대한 강하게 가슴을 압박해 심장을 마사지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꿈속’에서 의무병이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아.」
‘살릴 수 있어!’
심장마비가 오는 이유는 심장에 순간적으로 강한 충격이 오면 심장 기능이 멈추기 때문이다. 이렇게 멈춘 심장 기능은 시간이 지나거나 약을 투여하면 회복하는데, 그렇게 회복되기 전에 환자를 가만히 놔두면 사망한다. 심장이 멈춘 그 짧은 시간 동안 온몸에 피가 돌지 않으면 전신의 장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심장 기능이 돌아올 때까지 이렇게 외부에서 강제로 심장을 마사지해 줘야 한다. 그러면 심장의 피가 전신에 돌며 사망을 막을 수 있었고, 심장의 기능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살릴 수 있어! 조금만 더! 조금만!”
그렇게 그녀는 홀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였다. 단순히 가슴 압박만을 시행하는 것이 아닌, 저산소증을 막기 위해 인공호흡도 병행하였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지만,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오로지 남자를 살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두근.
남자의 맥이 다시 박동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기능을 되찾은 것이다.
“하아.”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의 기능이 돌아왔으니 되었다. 남자는 살아날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흠뻑 젖은 땀을 닦은 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사람들이 놀라 달려왔다. 남자는 곧 사람들에게 실려 갔다. 황궁의 의사에게 추가적인 진료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몇몇 인물이 놀라 웅성거렸지만, 마리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최근 꾼 꿈은 이분 때문이었구나.’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굉장히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잘 마무리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심장마비가 온 후 곧바로 처치했으니 저 남자는 별다른 문제없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황태자의 눈에도 안 띄었어.’
남자가 쓰러진 장소가 으슥한 발코니여서 누구의 눈에도 안 띌 수 있었다. 아무도 시녀인 그녀가 심폐소생술의 응급처치로 남자를 살려 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완벽한 결말이었다.
‘다 잘 끝나서 정말 다행이야.’
마리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마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것이 아니란 사실을.
그녀의 정확한 응급처치 덕에 심장의 기능이 돌아왔고, 그때 남자의 의식도 같이 회복되었다. 어렴풋한 의식 속에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치료 덕에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완전히 의식을 차린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는 자신을 살려 낸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