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5화 (6/54)

Chapter 5

드디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축제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만세!”

“제국 만세!”

제국 탄신 축제는 카톨릭 성당의 부활절과 더불어 제국 최고의 축제였다. 축제 시작 일주일 전부터 제국 탄신을 축하하는 행사가 여럿 열리게 되는데, 수도의 거리는 그때부터 흥겨운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축제 준비에 문제는 없는가?”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 황태자 라엘도 축제 준비에 분주했다. 재상 오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그래, 수년 만에 처음 여는 축제이니 빈틈이 있으면 안 돼. 오랜 내전에 지쳐 있던 백성들은 이 축제만 기다렸을 테니까.”

클로얀 왕국과의 전쟁부터 이어진 황자들 간의 내전으로 백성들은 굉장히 지쳐 있었다. 황태자 라엘은 긴 전쟁 끝에 찾아온 첫 축제이니, 이번 축제를 통해 백성들의 괴로움을 달래 주고자 했다.

“축제가 시작되면 비축해 두었던 고기와 술을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도록.”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 연도에 한해 특별세를 감면해 주는 것도 좋겠어. 지금껏 내전으로 인해 온갖 세금에 시달렸으니.”

그렇게 라엘은 민심을 챙기는 조치를 재상 오른과 상의하였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간 후, 재상 오른이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그런데 전하. 이번 축제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무엇이지?”

“서제국이 축하 사절단을 보내왔습니다.”

“서제국에서?”

라엘은 철가면 안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뜻밖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서제국이 최근 들어 축하 사절을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의외군.”

“네, 서로 주적 관계인 서제국에서 축하 사절을 보내다니, 확실히 의외입니다.”

서제국! 원래 동제국과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국가로, 각자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 년에 걸쳐 싸우고 있는 관계였다. 특히나 수년 전 그들이 클로얀 왕국을 점령한 뒤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의 점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클로얀 지방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고 계속해서 시비를 걸었다.

‘서제국 놈들도 클로얀 왕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 모리나 왕녀를 계속해서 찾고 있다고 했지? 괜히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려면 하루빨리 우리 쪽에서 모리나 왕녀를 찾아야 할 텐데.’

만약 저들이 모리나 왕녀를 먼저 찾아내면 일이 복잡해진다. 분명 그녀를 앞세워 클로얀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설 것이다.

‘모리나 왕녀를 먼저 찾아 내 비로 만들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겠지만, 도무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군.’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재상 오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놈들은 왜 갑자기 안 보내던 사절단을 보낸 것이지?”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태자 라엘은 철가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염탐이겠군.”

“네, 아니면 흠집을 잡으려는 것이든가요.”

“흠집?”

재상 오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통치가 시작된 후 첫 축제이니, 어떻게든 흠집을 찾아 전하를 깎아내리려는 심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황태자는 재상의 추측에 동의했다.

“혹시라도 축제 기간에 문제가 생기면 쓸데없는 말이 돌 수도 있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군.”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물론 그들 동제국이 서제국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다만 괜한 일로 흠집을 잡혀 비웃음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자존심도 상하고.

“사절단은 몇 놈이나 되지?”

“그게…….”

재상 오른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 200명입니다.”

“뭐, 200명?”

황태자는 놀라 반문했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였다. 보통 각국 사절단의 규모는 10명 이내였다.

“그게 대부분 기사 병력입니다.”

“기사? 뭐지? 무력시위라도 하려는 건가?”

황태자는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군.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를 보이면 당장 목을 치면 될 테니.”

아무리 정예 기사 200명이라도 영토 안에서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발 무력시위를 해주었으면 좋겠군. 서쪽 놈들에게 제대로 된 교훈을 내리게.”

점점 흉흉해지는 황태자의 기세에 재상 오른은 다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 호위를 위한 병력 같습니다.”

“호위? 누구의?”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들을 살핀 수비대의 보고에 따르면, 마치 중요한 인물을 경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사절단의 책임자인 쇼버 백작 외에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또 다른 중요 인물이 동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황태자는 말했다.

“그 정도의 병력이면 거의 황족을 호위하는 수준인데. 설마 황족이라도 오려는 것인가?”

“한번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황태자 라엘은 일정을 물었다.

“그들 사절단을 맞는 만찬회가 언제지?”

“축제 전야제 날, 앞으로 3일 뒤입니다. 그네들은 정확히 전날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만찬회 장소는?”

“백합궁입니다. 황궁의 오래된 주방장인 피터가 만찬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잠깐 멈칫하며 물었다.

“백합궁?”

“네, 백합궁의 원래 역할이 이런 귀빈들을 맞는 것이니까요.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니다.”

재상 오른은 그런 황태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별거 아니다. 신경 안 써도 된다.”

라엘이 멈칫한 것은 정말 별것 아닌 이유에서였다. 백합궁에 소속되어 일하는 누군가를 떠올린 탓이다.

‘내가 왜 그 시녀를 떠올렸지?’

마리. 백합궁이란 말에 그냥 이유 없이 그 시녀가 떠올랐다. 시녀, 그중에서도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하급 시녀.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인물인 그와는 정반대로 가장 밑에 위치한 소녀를 왜 돌연 떠올린 것일까?

‘나도 이상하군. 그냥 백합궁에 소속되어 여러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일 뿐인데.’

그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생각을 지웠다. 순간 백합궁에서 만찬회를 하면 그 소녀를 다시 보게 될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으나, 고개를 저었다.

만찬회 시중은 그 소녀 같은 하급 시녀가 아닌, 귀족가 출신의 중급 시녀가 맡게 된다. 그 소녀 같은 하급 시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할 것이다.

‘허드렛일이라. 몸이 약해 보이던데, 힘들겠군.’

그는 백조 정원에서 작은 몸을 이끌고 홀로 정원을 정리하던 소녀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피의 황태자는 다시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자꾸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서제국을 비롯해 각국 사절단을 맞이하는 첫 인사이니, 주방장에게 일러 만찬회 준비를 철저히 하라 이르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장난일까?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황태자가 생각하던 마리는 피터 주방장을 도와 만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리가 소속된 백합궁은 만찬회 준비로 정신없이 분주했다.

“마리, 나 좀 도와줄 수 있니?”

“네, 주방장님!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만찬회에 사용할 식기들을 정리하던 마리는 피터 주방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만찬회의 메인 요리인 어린 송아지 스테이크의 고기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가 보려고. 혹시 이상은 없는지. 같이 가 줄 수 있니?”

“네, 지금 바로 갈게요.”

마리는 식기를 내려놓으며 피터 주방장을 따랐다. 피터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축제 직전이라 정신없지? 힘들진 않니?”

“아, 괜찮습니다. 주방장님께서도 힘드시죠?”

“뭐, 이런 축제 기간이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제일 힘들지.”

피터는 편안한 얼굴로 마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봤다. 이전부터 그는 딸뻘인 마리를 친근하게 대하곤 했었다.

“그래도 요즘 일 잘해 줘서 고마워. 백합궁 시녀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던데?”

“아, 아닙니다.”

“아니야. 이전처럼 실수도 거의 안 하고. 만찬회 준비로 정신없었는데, 네가 주방에 와 줘서 한결 숨통이 트여.”

백조 정원의 정리가 끝난 후 그녀는 원래 소속된 백합궁의 만찬회를 준비하도록 배정되었다. 주방에 온 그녀는 이전처럼 마스터급의 하녀 실력을 통해 일당백의 능력을 발휘하며 요리사들을 보조해 큰 칭찬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만찬회는 황태자 전하도 신경 쓰신다 해서 부담이 많이 됐었거든. 네가 잘 도와줘서 고맙구나.”

“황태자 전하께서요?”

거듭된 칭찬에 민망한 표정을 짓던 마리는 황태자란 단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각국의 대표로 온 사절단을 처음 맞는 행사라 문제가 있으면 안 되거든. 제국의 위신이 걸린 문제라. 특히 이번엔 이례적으로 서제국의 사절단도 왔다고 하고. 그래서 전하께서도 각별히 신경 쓰시고 계신 것 같아.”

어지간히 무던한 성격의 피터였지만, 황태자가 주시하고 있다고 하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모든 이에게 공포의 존재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틀 뒤 만찬회 때 황태자도 오겠구나.’

그녀는 속으로 으스스 몸을 떨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철가면.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나 하고 있을 테니까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그날은 절대로 주방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다짐하며 그녀는 피터에게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말을 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방장님 요리 솜씨는 황궁 최고시잖아요.”

마리의 말에 피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고맙다. 황궁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조금 하긴 하지.”

“이번 만찬회의 그로스피에스(메인 요리)는 어린 송아지 스테이크인가요?”

마리는 만찬회의 요리를 물었다. 만찬회의 정찬에는 3종류의 수프부터, 입맛을 돋우는 오르되브르(애피타이저), 연어로 요리한 차가운 앙트레, 메인이 되는 그로스피에스, 다시 따듯한 3종류의 앙트레, 샐러드와 함께하는 고기 요리 등 20종류는 가뿐히 넘는 요리가 나온다.

그 수많은 요리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그로스피에스. 최고급 품질의 소고기를 구운 스테이크를 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응, 최고 품질의 송아지 고기를 한 달 전부터 저온으로 숙성하고 있단다.”

“저온이요?”

“응, 아무리 품질 좋은 고기라도 곧바로 요리하면 뻑뻑한 맛만 나거든. 최대한 좋은 맛을 내기 위해 저온에서 숙성하는 거란다. 다 도착했으니 너도 직접 보면 알 거다.”

끼익.

보관소에 도착한 피터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문은 신기하게도 지하로 향해 있었다.

“여기 등잔 들고 조심히 따라 내려오렴.”

“아, 네!”

조심조심 경사진 계단을 타고 한참을 내려온 마리는 싸늘한 한기에 놀라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춥죠?”

파르르 떨리는 게 마치 한겨울처럼 추웠다.

“깊은 지하라서 그래. 이렇게 추운 곳에 고기를 두면 상하지 않고 숙성돼 좀 더 깊은 맛을 내게 된단다.”

그 말에 마리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고기를 곧바로 요리하지 않고 이렇게 숙성하다니. 생각지도 못 한 방식이었다.

“대단하네요.”

“응, 제대로 숙성하면 고기 맛이 훨씬 좋아지지.”

“그런데 이렇게 보관하면 중간에 상하거나 하지는 않나요?”

그런데 그렇게 그녀가 물은 다음이었다. 피터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게 사실 문제야. 고기를 숙성하다 제대로 관리를 못 하면 균이 퍼져 전부 상해서 버리는 경우도 많거든. 여러 온도나 습도 등을 잘 따져 보고 숙성을 해야 해.”

“그러면 이 고기들은 괜찮은 건가요?”

마리는 조심히 물었다. 피터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 보관소는 원래 서늘한 기온이 잘 유지돼 고기가 잘 상하지 않아. 그래서 상할 걱정 없이 숙성한 것이지. 그런데 최근 들어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단다.”

“무슨 문제요?”

“최근 며칠간 비가 계속 온 탓인지, 이 지하 보관소의 공기가 갑작스레 습해졌어. 그래서 고기가 변할까 걱정이야.”

“아…….”

“당장 이틀 뒤에 만찬회라 이 고기들이 변하면 메인 요리에 쓸 수 있는 고품질의 고기가 없거든.”

마리는 피터의 말을 이해했다. 만찬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200명이 넘는다. 이 송아지 고기들을 사용할 요리는 바로 만찬회의 핵심인 메인 디시. 반드시 좋은 품질의 고기를 써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황궁이라도 그 많은 각국 대표를 대접할 만한 고품질의 고기를 하루 이틀 만에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지금 오신 것은?”

“응, 혹시나 변한 고기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이렇게 공기가 습하면 균이 번식해 주변으로 부패가 확 퍼질 수도 있어서.”

그렇게 대답한 피터는 꼼꼼히 고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부패한 부위는 없는지, 냄새가 이상하지는 않는지, 고기의 색깔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등을 확인했다. 과연 이상이 있는 고기들이 꽤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버리는 것이 좋겠구나.”

“부패된 건가요?”

“날씨가 좋지 않아 그런지 어제 왔을 때보다 더 심하구나.”

피터는 어두운 얼굴로 걱정스러워했다. 실제로 고기가 변질돼 만찬회 준비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 책임은 바로 그의 몫이었다.

“일단 내일도 와서 봐야겠구나.”

다음 날도 마리는 피터와 함께 보관소에 다녀왔다. 역시나 이번에도 일부 고기들이 변질되어 있었다. 어제보다 더 심했다.

“큰일이구나. 점점 지하의 공기가 습해지고 있어. 이러다 대규모로 부패가 진행되면 안 되는데.”

피터는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일이면 요리할 것이니 오늘 하루만 신선하게 유지되면 되는데.”

“하루 만에 그렇게 고기들이 변할 수도 있나요?”

“계속해서 부패된 고기가 늘고 있어 그럴 수도 있어.”

그렇게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의외의 사람이 찾아왔다. 이번 만찬회를 비롯해 궁내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이었다.

“그래, 만찬회 준비는 차질 없이 하고 있는가? 이번 만찬회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귀빈들이 참석할 예정이니 반드시 최고의 요리를 내야 할 것이야.”

길버트는 옆으로 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신경 쓰시고 계시니, 차질이 없어야 해.”

그 말에 피터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 백작님. 사실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뭐, 문제?”

길버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사실은…….”

피터는 날씨 문제로 지하 보관소 습도가 높아져 고기 일부에 문제가 생겼고, 앞으로도 부패가 진행될 수 있음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길버트는 노발대발 펄쩍 뛰었다.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말인가! 도대체 보관을 어떻게 했길래! 지금 제정신인가?!”

피터는 하얗게 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공기가 습해진 것은 그의 탓이 아니었지만, 책임자인 만큼 문책을 피해갈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날씨가 아무리 그래도 보관을 제대로 했어야지! 그게 자네의 일이잖은가!”

길버트는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하아. 큰일이군. 그래서? 내일 만찬회에 최고급 품질로 된 고기를 내지 못한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주의해서 살피고 있으니 문제가 생길 확률은 낮습니다. 그래도…… 공기가 계속 습하니 혹시나 만약을 대비해 추가적인 고기를 준비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길버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어째서…….”

“몇 명이면 모르지만, 이제 와서 수백 명이나 되는 인원의 고기를 준비할 수는 없어. 물론 품질이 떨어지는 고기야 몇 천 명의 것이라도 얼마든지 준비해 둘 수 있지만, 축제 전야제 만찬회에 그런 질 떨어지는 고기를 내오면 각국 사절단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내일 만찬회 요리는 반드시 최상품의 것이어야 해.”

“…….”

피터는 입을 다물었다. 궁내부장의 말이 옳았다. 각국의 귀빈들을 초청해 놓고, 만찬회에 질 떨어지는 요리를 내놓으면 뒤에서 무슨 비웃음을 들을지 몰랐다.

“그러니 고기가 변하지 않도록 반드시 만전을 기하도록. 만약 준비에 문제가 생기면 자네에게 그 잘못을 물을 거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길버트는 씩씩거리며 사라졌고, 마리는 피터를 불렀다.

“주방장님…….”

피터는 애써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거다. 신경 써서 보고 있으니.”

하지만 마리도 피터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습도의 변화로 인한 고기의 부패는 신경 써서 감시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특히나 이렇게 보관 중이던 고기가 군데군데 변하고 있는 것은 굉장한 위험 신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하는 양도 늘고 있고.’

어쩌면 고기들 사이에 이미 균이 퍼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면 최악이었다.

‘혹시나 고기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녀는 자신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는 꿈을 떠올렸다.

‘주방장님을 도와줄 수 있는 꿈이라도 꿀 수 있었으면.’

하지만 아무리 꿈속에서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고기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별일 없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주님, 제발. 별 탈 없이 만찬회가 끝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기도 덕분일까? 그날 밤 마리는 ‘꿈’을 꾸었다. 다른 인물이 되는 듯한 그 자각몽을 말이다.

‘이번엔 무슨 꿈이지?’

지금까지 경험상 이 꿈은 앞으로 벌어질 일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피터를 도와줄 실마리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꿈속의 내용이 무언가 이상했다. 고기와 관련된 꿈이 맞긴 했지만, 그녀가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대망의 그랜드 비프(Beef) 마스터의 최종 결승자를 결정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소고기 요리 대회에 참석하는 꿈이었다. 마리는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이게 무슨? 갑자기 웬 소고기 요리 대회?’

그녀는 꿈속에서 최종 결승에 남은 2명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상대는 금발의 남자, 그녀는 흑발의 동양 여인. 둘은 각자 준비한 소고기 요리를 놓고 심사 위원의 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첫 번째 요리는 죠셉의 필렛 미뇽(Fillet mignon)입니다. 일체의 기법도 사용하지 않은, 오로지 최고급 안심 부위의 육질로 승부하는 요리이지요. 그 부드러운 맛은 천상의 맛!」

꿈속에서 대회 사회를 보는 인물은 이번엔 꿈속의 그녀, 동양 여인의 요리를 소개했다.

「반면 두 번째 요리는 완전히 반대의 스타일입니다. 사용한 고기는 가정집에서도 사용하는 2등급 품질!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탁월한 기법을 통해 2등급 고기를 최고급 품질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은 맛으로 탈바꿈시켜 놓았지요.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그 맛은 이 요리가 과연 우리가 알던 그것이 맞나 의심스럽게 합니다.」

그러며 사회자는 동양 여인이 만든 요리의 이름을 말했다.

「모두가 아는 이 요리의 이름은……!」

“마리! 마리! 일어나!”

“……!”

거기까지 꿈꾼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무슨 꿈인지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다급한 말이 들려왔다.

“큰일 났어! 지금 빨리 백합궁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무슨 큰일이요?”

마리는 큰일이란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설마?’

“오늘 만찬회 메인 디시에 사용할 고기에 문제가 생겼나 봐! 지금 백합궁 전체가 초비상이야!”

“……!”

그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 불안했는데, 결국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급히 백합궁의 주방으로 뛰어가니 피터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서 있었다.

“주방장님?”

피터와 보조 요리사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젯밤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지, 분명히?”

“네, 주방장님. 분명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아.”

“밤사이 습한 공기가 더 유입되면서 원래 부패 기운이 있던 고기들이 확 변질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막으려고 공기가 통하는 구멍을 최대한으로 열어 두었었는데.”

상황을 보니 밤사이 공기가 더 습해지며 고기 사이에 서식하고 있던 균이 대규모로 퍼져 대부분의 고기가 변질된 것 같았다.

“향신료를 강하게 뿌리면 어떻습니까? 변한 냄새를 눈치챌 수 없게.”

“그 정도로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피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고기들을 사용할 수는 없어.”

“그러면 어떻게?”

“식자재를 담당하는 부서에 일러 메인 디시에 사용할 고기를 급하게 새로 준비해 달라 이르게.”

“주방장님, 그러면 요리의 질이 너무 떨어지게 됩니다.”

보조 요리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책임 주방장인 피터는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네.”

그는 속으로 한탄했다.

‘이번 만찬회가 끝나면 문책을 피할 수 없겠구나. 어떤 벌을 받게 될는지.’

피터는 배다른 형제들을 모조리 베고, 황태자의 지위에 오른 라엘을 떠올렸다. 이번 만찬회는 제국의 황태자인 그의 위신이 걸린 일. 피의 황태자인 그가 본인의 위신을 떨어뜨린 자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목이 떨어질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번이 내 마지막 요리일 수도 있겠군.”

그 씁쓸한 어조에 요리사들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피터 주방장님!”

마리도 안타까운 얼굴로 피터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피터가 만찬회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죄로 어떤 벌을 받을지 걱정이 들었다.

‘내가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까.’

그녀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가 피의 황태자에게 벌 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메인 디시에 사용할 고기가 제대로 보관되지 못한 것은 분명 그의 책임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사람이 습도를 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니, 그런 걸 떠나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제발. 방법이…….’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방법이 퍼뜩 떠올랐다. 질 나쁜 고기를 사용하면서도 상급의 메인 디시를 낼 방법이! 오늘 꾼 꿈에서 떠올린 방법이었다. 꿈속의 동방 여인, 그녀가 만든 요리라면 질 나쁜 고기로도 최상급의 맛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요리를 그로스피에스로 인정할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의 내용대로라면 인정할 거야. 다른 그로스피에스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맛이니까.’

꿈속의 여인은 일반 가정에서도 흔하게 만드는 요리를 최상으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요리들을 제치고 대회 결승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여인의 요리라면 분명 사절단의 입맛도 만족하게 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이걸 어떻게 주방장님께 말씀드리지?’

그녀는 고민했다. 자신은 주방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하급 시녀에 불과했다. 요리는 요리사의 영역. 아무리 그녀가 최근 예쁨을 받고 있다지만, 요리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굉장히 주제넘은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 한 음성이 그들 사이에 들려왔다.

“만찬회 준비에 무슨 문제가 있나?”

“……!”

그 음성을 들은 그녀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주방장 피터도, 보조 요리사들도, 주방 시녀들도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왜 이곳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마음 깊이 새겨진 두려움에 마리의 눈동자가 남몰래 흔들렸다. 곧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타난 이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철가면을 쓴 황태자였다.

주방이 쥐 죽은 듯한 고요에 휩싸였다. 그들 같은 아랫것들에게 황태자는 평소에도 공포의 대상이었고, 문제가 생긴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황태자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방해하는 것 같아 와 볼까 말까 고민하다, 마침 백합궁 주변에 올 일이 있어 와 봤는데…… 와 보길 잘한 것 같군. 만찬회 준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지?”

“…….”

모두 대답을 못 하고 눈치만 살폈다.

“말해봐라.”

결국, 책임자인 피터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메인에 사용할 고기가 부패되었다는 말을 한 피터는 죽을죄를 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 불찰로!”

황태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얼굴의 반을 뒤덮은 철가면 때문에 표정을 볼 수 없었기에 주방의 사람들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저 피의 황태자가 검을 꺼내 피터의 목을 치는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황태자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로스피에스는 만찬회의 핵심이다. 원래 준비하려던 어린 송아지 스테이크를 못 내게 되었으니, 어떤 요리를 낼 예정이지?”

피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식자재 담당 부서에 연락해 다른 고기를 준비하라 하였습니다.”

“다른 고기로? 낮은 품질의 고기를 쓰면 요리의 질이 많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황태자는 철가면 안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만찬회에는 수없이 많은 요리가 나오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메인 디시인 소고기 요리였다. 각국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볼품없는 메인 디시를 내면 분명 뒤에서 비웃음을 살 것이다.

‘다른 건 괜찮은데, 서제국 놈들이 뒤에서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짜증 나는군.’

황태자는 오래된 적국인 서제국 놈들의 비웃음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한편 황태자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주방의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아무런 말이 없으니 그게 더 무서웠다.

“메인 디시로 품질이 떨어지는 고기를 내야 한다고?”

“죄송합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 상황이 벌어졌으니 지금은 해결 방안을 찾을 때다. 다른 방법은 없나?”

“다른 방법이라면……?”

“품질이 떨어지는 고기로 괜찮은 그로스피에스를 만들 방법은 없냐는 말이다.”

황태자의 말에 주방의 요리사들은 눈을 깜빡였다. 품질이 떨어지는 고기로 상품의 요리를 만드는 건 그들로선 불가능했다. 피터는 침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품질이 떨어지는 고기로 상품의 메인 요리를 만들 방법은 소신이 알기로 없사옵니다.”

“소고기로 그로스피에스를 만드는 방식이 직화 스테이크만 있는 건 아닐 것 아닌가?”

“그렇긴 하오나, 어떤 방식을 써도 소고기 본연의 맛을 살리는 스테이크를 능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가.”

라엘은 철가면 아래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하군.’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작은 몸집, 순한 인상, 귀여운 느낌의 외모. 지난번부터 이상하게 계속 그와 마주치는 시녀 마리였다.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군.’

“너는?”

“시녀 마리라고 합니다, 전하.”

생각지도 않게 황태자가 자신을 부르자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왜 갑자기 나를?’

특별히 그가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여러 켕기는 것이 많은 그녀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한편 황태자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지난번 나에게 준 과자의 맛이 굉장히 수준급이었지.’

백조 정원에서 저 시녀가 자신에게 건네준 과자는 어지간한 황궁의 파티시에 못지않은 뛰어난 맛을 가지고 있었다.

‘과자 말고 다른 요리도 솜씨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한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혹시 알고 있는 방법이 없느냐?”

그 물음에 주변의 요리사들이 깜짝 놀랐다.

“전하? 저 아이는 하급 시녀일 뿐입니다. 요리에 대해서는 전혀…….”

하지만 황태자는 낮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난 너희 말고 저 소녀에게 물어보는 중이다.”

“……!”

그러며 라엘은 철가면 사이 푸른 눈으로 마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물으마. 마리, 너는 등급이 낮은 고기로 괜찮은 그로스피에스를 만드는 방법을 혹시 알고 있느냐?”

“……!”

마리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난밤 꾼 꿈이 이것에 대한 대답이었으니까.

그로스피에스. 만찬회의 메인 디시를 뜻하며, 대부분 소고기를 구운 스테이크가 나온다. 음식의 맛은 재료가 되는 소고기의 품질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꼭 직화로 구운 스테이크만을 낼 필요는 없어. 그로스피에스는 ‘큰 덩어리의 고기 요리’란 뜻이니까. 그 뜻에 해당하기만 하면 어떤 요리를 내도 괜찮아.’

물론 다른 주방장들도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찬의 그로스피에스가 늘 스테이크인 이유는 고품질의 스테이크를 능가하는 ‘덩어리 고기’ 요리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속의 여인이 만든 요리라면, 비록 낮은 품질의 고기를 사용해도 스테이크 못지않은 맛을 낼 수 있어.’

마리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왜 대답이 없지?”

마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지?’

평소라면 주방장을 돕기 위해 당장 입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직접 물어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대답하는 걸 꺼리게 했다.

‘황태자에게 주목받으면 안 돼.’

조각사, 음악가 때의 일도 그렇고, 더는 그의 관심을 끌면 안 됐다. 황태자는 아직도 자신, 모리나 왕녀를 찾고 있었다. 얼굴을 아는 이가 없으니 쉽게 정체를 들키진 않겠지만, 최대한 그의 주목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잘못해서 더 주목받으면 나중엔 정체를 들킬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그녀는 끝장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황태자도 더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

마리의 눈에 하얗게 질려 무릎을 꿇고 있는 피터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가 모른 척 넘어가면 자신에게 늘 잘해 주던 그는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안 돼, 그건.’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금이라도 황태자의 눈에 들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피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주님, 저 어떻게 하죠?’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도 요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시녀 중에서도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생각 안 할지도 몰라.’

물론 최선은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다. 그녀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그러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한 가지…… 알고 있는 요리가 있습니다.”

“마리?”

요리사들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도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무엇이지?”

그녀는 황태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제 어머니께서 가끔 해주던 요리로, 다소 품질이 떨어지는 고기로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는 요리입니다.”

“그 요리의 이름이 무엇이지?”

마리는 꿈속의 여인이 요리한 음식을 떠올렸다. 그녀도 처음 들어보는, 아마도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요리였다.

“솔즈베리 스테이크입니다.”

“솔…… 즈베리 스테이크?”

낯선 이름에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고기를 간 후, 여러 재료와 함께 다져서 커다란 덩이로 굽는 요리입니다.”

솔즈베리 스테이크, 흔히 햄버그 스테이크라 불리는 요리다. 황태자는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맛있다고? 고기를 갈아 다지다니. 잘 이해가 안 되는군.”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방식의 요리였다. 마리도 어젯밤 꿈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요리는 맛있어.’

최상급 스테이크보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일단 재료의 차이가 크니까. 하지만 솔즈베리 스테이크에는 솔즈베리 스테이크만의 맛과 풍미가 있다.

‘특히나 처음 맛보는 음식이니, 스테이크 구이에만 익숙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

더구나 솔즈베리 스테이크는 누가 요리하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꿈속 여인의 요리 솜씨는 최고였다. 평범한 재료로 만든 솔즈베리 스테이크로, 최고급 스테이크에 대항해 결승까지 올라간 실력이니까.

“제가 맛본 바로는 일반적인 스테이크와는 또 다른 맛과 풍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방의 요리사들은 그렇게 말하는 마리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요리 방식을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황태자가 당장에라도 분노를 토할까 걱정된 것이다.

“잘 모르겠군. 고기를 다지다니. 솔직히 말해 좋은 요리가 나올 것 같지가 않아.”

그런데 이어진 황태자의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네?”

“마리, 넌 그 요리를 만드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지?”

마리는 당황해 대답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로 요리를 해봐라. 내가 직접 네가 만든 요리를 먹어 보고 판단하겠다.”

“……!”

모두가 깜짝 놀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리를 직접 시식해 보겠다니? 하지만 황태자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뭐 하는가? 시간이 많이 없다.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마리는 허겁지겁 요리를 시작했다.

‘황태자 앞에서 직접 요리를 해도 될까? 혹시 수상하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나중에 피터는 어떤 벌을 받을지 몰랐다.

‘그리고 요리하는 모습 정도는 괜찮을 거야.’

조각사와 음악가 때와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시녀라도 요리는 잘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일단 반죽에 넣을 야채를 다지고. 와인도 필요해.’

처음 해보는 요리지만, 마치 꿈속의 여인이 된 것처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타타타탁.

식칼이 휘리릭 도마를 두드렸고, 순식간에 양파와 야채가 토막 나 해체되었다. 그 모습을 본 주방의 요리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설거지, 주방 닦기, 음식물 쓰레기 정리 같은 허드렛일만 하던 시녀의 손놀림이 마치 일급 쉐프의 것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저, 저?”

“어떻게 저렇게?”

하지만 마리는 그들의 놀람을 신경 쓰지 못했다. 오로지 완성도 높은 음식을 완성하는 것에 온 정신이 집중돼 있었던 것이다.

「얘야, 너는 최고의 음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꿈속 여인의 스승이 그녀에게 말하던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좋은 품질의 재료를, 재료 본연의 맛이 가장 잘 살아나게 요리하는 것 아닌가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를 누구나 행복하게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하는 것이 최고의 요리가 아닌가 싶구나.」

탁. 탁. 탁.

그녀의 손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고기를 다지고, 준비한 양파, 계란, 우유, 빵가루 등을 섞었다. 독특한 풍미를 더하기 위해 와인도 일정한 비율로 섞었다.

‘여기서 핵심은 배합 비율!’

솔즈베리 스테이크, 즉 햄버그 스테이크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요리다. 하지만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맛은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보인다. 꿈속의 여인은 스승과 더불어 이 평범한 요리를 최고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고, 그 결실이 지금 마리의 손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완성된 고기 반죽을 심혈을 다해 불에 익히며 그녀는 생각했다.

‘불에 익히는 것도 아무렇게나 익히면 안 돼. 최대한 고기의 식감이 살아나게, 그러면서 풍미가 죽지 않게 적절하게 익혀야 해.’

그렇게 고기가 익으며 고소한 냄새가 주방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언뜻 봐도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냄새였다.

‘마무리는 최대한 고급스럽게.’

상급의 와인을 섞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낸 데미글라스 소스를 얹고, 그 위에 정갈한 반숙 에그 프라이를 올렸다. 그리고 으깬 감자와 구운 야채를 깔끔하게 데커레이션하며, 요리를 마무리하였다.

“완성되었습니다, 전하.”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 마리를 주방의 모두가 놀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마리가 아닌 것 같았다. 황태자도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리를 잘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저런 손놀림을 보여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단순히 손놀림뿐 아니라…… 음식도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군.’

그녀의 손에 들린 하얀 쟁반에는 고기를 다진 동그란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 반숙 계란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식욕을 절로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이리로 가져오도록.”

“네, 전하.”

중요한 건 생김새가 아니라 맛이다. 황태자는 나이프로 일부를 잘라 낸 후,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건?’

생각지도 못 한 훌륭한 맛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작 다진 고기가 이런 맛을 내다니?’

저품질의 고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을 건드렸다. 그리고 고기를 씹는 순간, 육즙이 배어 나오며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자칫하면 천박해질 위험도 있는 맛이지만, 적절히 배합한 와인이 요리의 풍미를 더해 주었고, 그 모든 맛의 조화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미각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이건…… 정말 훌륭하군. 훌륭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연거푸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미식에 관심 없는 그를 단번에 사로잡을 정도로 대단한 맛이었다.

‘물론 최상급 재료로 만든 스테이크보다 뛰어난 요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진 훌륭한 요리이다.’

그렇게 결론 내린 그는 어린 시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를 비롯한 주방의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라고 했나? 직책은 하급 시녀라고?”

“네, 전하.”

“오늘 만찬회 때 이 요리를 그로스피에스로 낼 수 있겠는가?”

“……!”

그 말에 주방 사람들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만찬회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내가 직접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그 말에 마리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피터가 벌을 피하는 것만으로 됐다. 황태자가 직접 내리는 상이라니, 무조건 사양하고 싶었다.

“아닙니다, 전하. 그저 부족한 저의 솜씨가 전하와 제국에 조금의 보탬이라도 된다면 그걸로 만족하옵니다.”

“군주 된 이로서 공을 세운 이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어쨌든 만찬회가 끝난 후 따로 부르도록 하겠다.”

‘망했다! 저 황태자를 다시 만나야 한다니!’

마리는 속으로 그렇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황태자는 생각했다.

‘마리라고 했지. 무슨 상을 줄지 생각해 봐야겠군.’

그는 상벌을 명확히 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어쩔 수 없는 잘못은 넘어갈지언정, 잘한 것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면 다음에 보지.”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본인이 기거하는 사자궁으로 돌아갔다. 마리는 다시 황태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를 다시 만나야 한다고?’

괜찮다고. 제발 그냥 잊어 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백합궁을 떠난 뒤였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아, 피터 주방장님.”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가 그녀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마리는 당황해 그를 잡았다.

“주, 주방장님 왜 그러세요.”

“네 덕분에 살았어. 네가 아니었으면 전하께 큰 벌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다른 요리사들도 그녀에게 다가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래, 마리. 네 덕분에 큰 화를 피할 수 있었어. 네가 아니면 큰일 났을 텐데.”

“아, 아니에요. 그냥 저는…….”

“그런데 도대체 언제 그렇게 요리를 배웠던 거야? 식칼 다루는 솜씨가 나보다도 더 뛰어난 것 같은데?”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요리는 거의 해본 적이 없어 할 말이 없었다.

“그, 그냥 예전에…… 어쨌든 빨리 만찬회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백합궁의 주방은 분주히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햄버그 스테이크를 열심히 요리했다.

드디어 대망의 만찬회가 시작되었다. 자리에 착석한 각국 대표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지내셨소이까, 백작?”

“아, 오랜만입니다, 드레이크 후작님. 강녕하셨습니까?”

나라가 달라도 위세를 떨치는 귀족들은 서로 구면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잉글랜드의 드레이크 후작과 서제국의 쇼버 백작은 친근히 인사를 나누었다.

“나야 별문제는 없었소. 백작도 여전해 보이는구려.”

“감사합니다.”

드레이크 후작은 만찬회장의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는 아직이구려.”

“만찬회 시작 직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대는 이번에 새로 동제국의 군주가 된 황태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소?”

“황태자 말입니까?”

“그렇소.”

동제국과 적대 관계인 서제국의 귀족 쇼버 백작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낮게 코웃음을 친 후 귓속말을 하듯 작게 속삭였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피의 군주라니 뭐니, 소문은 무성합니다만, 뭐 별거 있겠습니까. 저희 요하네프 3세 폐하에 비하면 애송이나 다름없겠지요.”

서제국의 황제인 요하네프 3세도 마침 라엘 황태자와 비슷한 나잇대였다. 서로 비슷한 나이인 두 명이 각각 양 제국의 군주가 된 터라 사람들은 종종 둘을 비교하곤 했다.

“듣자 하니 이번 만찬회에 낼 고기도 제대로 관리 못 해 모두 부패됐다던데, 도대체 무슨 요리가 나올지 의문입니다.”

쇼버 백작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동제국이 야만적이어도 설마 우리에게 썩은 고기를 먹으라고 내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게 그가 사람들 몰래 악의 섞인 말을 내뱉는 사이, 황태자 라엘이 재상 오른을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입장했고 만찬회가 시작되었다.

“먼 길 와주어서 고맙소. 차린 것은 없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했으니 즐거운 식사가 되었으면 좋겠소.”

황태자의 말에 서제국의 쇼버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동쪽 촌놈들의 음식이야 뻔하지.’

그는 음식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잔뜩 비웃어줄 생각으로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음식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훌륭했던 것이다.

‘음, 전채 요리는 괜찮군. 동쪽 놈들답지 않게 나쁘지 않은 솜씨야.’

만찬회답게 테이블에는 수없이 많은 음식이 코스로 나왔다. 모두 흠을 잡기 어려운 요리들이었다. 쇼버 백작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만찬회의 핵심은 그로스피에스. 어떤 요리를 내오는지 보자.’

그는 이미 메인 요리로 준비한 고기가 모두 변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이 제대로 된 요리를 내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윽고 만찬회의 하이라이트인 그로스피에스의 차례가 다가왔다. 쇼버 백작 말고도 메인 요리 준비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사절들이 많아 모두 과연 어떤 요리가 나올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저건?”

하지만 접시에 나온 메인 요리를 보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보는 형태의 요리였던 것이다.

“전하, 이건?”

누군가 상석의 황태자에게 물었다. 황태자는 여유롭게 나이프로 고기를 썰며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한 특제 스테이크요.”

“…….”

“나쁘지 않을 테니, 맛들 보시길.”

모두 반신반의하며 고기에 포크를 가져갔다. 특히 적대 관계인 서제국의 쇼버 백작은 속으로 잔뜩 비웃음을 지으며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이건 다진 고기 아닌가? 만찬회 메인 요리에 다진 고기를 내다니! 이런 우스운 일이! 하여튼 동쪽 촌놈들이란.’

그렇게 생각하며 고기를 씹는 순간이었다.

“……?!”

쇼버 백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뿐이 아니었다. 만찬회에 참석한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떻게 이런 맛이?”

생각지도 못 한 훌륭한 맛이었다. 부드러운 식감. 달콤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육질. 평소 지겹도록 먹던 스테이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맛이 그들의 혀를 사로잡았다. 누군가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이런 스타일의 요리는 처음 보는군요. 훌륭합니다.”

“직화로 구운 스테이크와는 전혀 다른 맛이군요. 다진 고기를 사용했는데도 어떤 기법을 쓴 것인지, 맛의 질이 전혀 떨어지지 않아요. 부드러운 식감도 일품이구요.”

“그야말로 새로운 진미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맛에 각국의 대표들은 앞다투어 찬사를 내뱉었다. 잔뜩 비웃어주려던 쇼버 백작도 이 요리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황태자에게 물었다.

“전하, 이 진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황태자는 철가면 아래로 무뚝뚝하게 답했다.

“솔즈베리 스테이크. 또는 햄버그 스테이크라고도 부르더군.”

“햄버그 스테이크…….”

모두가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햄버그 스테이크란 이름이 온 대륙에 퍼지는 순간이었다.

만찬회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햄버그 스테이크의 맛을 잊지 못한 사절단은 각국으로 돌아가 요리법을 전파했고, 유럽 전역에 햄버그 스테이크가 퍼지게 되는데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다.

실패로 끝날 뻔한 만찬회를 대성공으로 마무리한 황태자는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인 시녀 마리를 생각했다. 그 시녀가 아니었다면 각국의 대표들에게 크게 비웃음을 살 뻔했다. 황태자는 마리에게 어떤 상을 줄지 생각했다.

‘시녀에게 상을 주는 것은 처음이라 어떤 상이 좋을지 모르겠군.’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허드렛일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힘든 일을 하기에는 체구가 작아 보이던데. 몸도 약해 보이는 것 같고.’

그러며 그는 생각했다.

‘사자궁으로 옮겨서 일하게 할까?’

사자궁! 황태자인 그가 기거하는 곳으로 모든 시녀가 일하길 바라는 곳이었다. 황궁의 중심인 사자궁에서 일하는 것은 시녀들 사이에서도 가장 영광된 직책이니 마리란 시녀도 크게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다만 신분이 걸리는군. 제국 귀족 출신이 아니라, 클로얀 왕국에서 끌려온 포로라고 했지?’

그는 마리에 대해 보고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사자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대부분 제국의 귀족가 출신의 영애였다. 반면 시녀 마리는 전쟁 포로인지라 귀족은커녕 자유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뭐, 큰 상관은 없겠지. 규정상 문제가 있겠지만 시종장에게 확인해 보라고 해야겠군.’

라엘은 그렇게 마리에게 내릴 상을 잠정적으로 결정하였다. 황태자가 기거하는 사자궁에서의 근무라니. 마리가 들으면 놀라 기절할 만한 내용의 포상이었다.

한편 그때, 마리가 근무하는 백합궁 인근에 마련된 사절단의 숙소. 동제국의 오랜 숙적인 서제국에서 온 사절 쇼버 백작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찬회는 생각보다 괜찮더군. 그렇지 않았나, 백작?”

백작과 같이 있는 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흑발, 흑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눈가의 안경이 지적인 분위기를 더하였다. 황태자와는 또 다른 느낌의 대단한 미남이었다. 다만 창백한 피부가 병약해 보이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런데 청년과 대화를 하는 쇼버 백작의 태도가 이상했다. 쇼버 백작은 서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권세를 지니고 있었는데, 저 병약해 보이는 청년에게 허리를 굽히며 쩔쩔매고 있었던 것이다.

“네, 네. 그렇습니다, 폐…….”

백작이 ‘폐’라는 어절을 발음할 때였다. 청년은 부드러운 눈매를 찡그렸다.

“공자. 공자라고 하라 했지? 잊지 말게. 지금 난 그대를 따라온 수행원일 뿐이란 것을.”

“하지만…… 제가 어찌 감히…….”

“내 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쇼버 백작은 울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자신이 감히 그럴 수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쇼버 백작의 반응은 당연했다. 청년의 이름은 요하네프 3세. 바로 그가 주인으로 모시는 서제국의 황제였으니까!

‘왜 또 이런 엉뚱한 일을 벌이신 건지.’

쇼버 백작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요하네프 3세! 불과 15세의 나이에 서제국의 황제 지위에 오른 인물로 10년 만에 혼란에 빠진 서제국을 안정시킨 명군(名君)이었다. 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지략,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완벽한 군주였지만 몇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번 같은 엉뚱함이었다.

‘도대체 왜 적국인 동제국에 몰래 들어오신 거야!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폐…… 아니, 공자님.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서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위험?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그 천연덕스러운 반문에 쇼버 백작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변복하셨다고 해도 정체를 들킬 수 있습니다.”

“뭐, 정체야 당연히 곧 들키겠지. 동제국 놈들의 눈이 장님이 아닌 이상.”

청년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정체가 밝혀지면 그 피에 굶주려 있다는 황태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자네는 걱정도 많군. 괜찮아. 정체를 들킨다 해도 동제국이 우리와 전쟁할 생각이 아닌 한, 나를 어쩌지는 못 해.”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굳이 폐하께서 축하 사절로 계실 필요는…….”

쇼버 백작의 지적은 타당했지만 젊은 청년, 요한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짐은 동제국의 축제를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니야.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

“클로얀 왕국의 마지막 왕녀, ‘얼굴 없는 성녀’ 모리나가 이곳 동제국 황궁에 있다는 이야기를 확인하러 온 것이지.”

마리가 들으면 깜짝 놀랄 내용이었다. 저 서제국 황제의 입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더구나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 그녀가 이곳 황궁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요한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모리나 왕녀. 왕녀로 있던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수많은 선행을 베풀었으면서 막상 얼굴을 아는 이가 없지. 그래서 클로얀 지방에서 그녀를 부르는 별명은 ‘얼굴 없는 성녀’.”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추적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 정말 기적 같은 우연으로 그녀가 이곳 동제국의 황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동제국 놈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요?”

“모르고 있을 거다. 알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테니.”

쇼버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저 황제가 그리고 있는 원대한 계획에 모리나 왕녀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 직접 행차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건강도 안 좋으시지 않습니까? 만약 이곳에서 ‘발작’이라도 일어나시면.”

‘발작’이란 말에 요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그도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내 병은 약을 꾸준히 먹고 있으니 괜찮을 거다. 실제로도 많이 좋아져 최근 반년 동안은 한 번도 발작이 없어서 약도 많이 줄인 상태이니까. 만약을 대비해 어의도 동행했으니.”

“그래도…….”

“이제 그만.”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내 것으로 맞아야 할 여인인데, 어떤 여인인지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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