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4화 (5/54)

Chapter 4

다음 날, 마리가 자고 있는 방을 누군가 쾅쾅 두드렸다.

“마리! 마리?! 안에 있니?”

마리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네! 안에 있어요. 무슨 일이세요?”

방문이 열리니, 동료 시녀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너 혹시 밤에 무슨 사고 쳤니?”

“네?”

마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고를 치긴 했다.

‘호, 혹시 누가 봤나?’

그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니야. 분명 연주할 때 아무도 없었어.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고. 아무도 못 봤을 거야.’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는 그녀에게 동료 시녀가 말했다.

“황궁 악단의 단장인 바한 님이 너 보고 수정궁으로 와 달래. 지금 당장!”

마리는 헐레벌떡 수정궁으로 향했다. 아직 일과가 시작하기 전인 이른 아침임에도 연습장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악장인 바한, 그리고 오케스트라단의 핵심 인물인 부악장, 콘서트 마스터 등이었다. 바한은 평소와 다르게 심각한 얼굴로 두루마리 종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내가 놓아둔 악보 때문에 물어보려 나를 부른 거구나.’

저 종이는 전날 그녀가 적어 둔 악보였다. 들킨 게 아니란 생각에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둘러대자. 명심해. 저건 내가 적은 게 아니야. 난 아무것도 몰라.’

한편 바한과 악단의 인물들은 그녀의 도착을 눈치채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 부악장이 적은 악보가 아니란 거죠?”

“당연하죠, 마에스트로. 제가 어떻게 이런 음악을 적습니까?”

“그러면 콘서트 마스터도?”

“네, 아시겠지만 전 감히 이 음악에 담긴 내용의 발끝만큼도 쫓아갈 실력이 없습니다.”

그 대답에 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누가 이런 기적 같은 음악을?”

악단의 인물들이 물었다.

“마에스트로가 적으신 것 아닙니까? 이 악보는 마에스트로가 작곡한 전원 풍경 교향곡의 뒷부분인 것 같은데.”

바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악상을 떠올리고 있긴 했지만, 전혀 그 내용을 전개시키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악보는…….”

바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그 내용이 완전히 현실화되어 있었다. 그것도 더 수준 높은 솜씨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인 거지? 누가 이런 기적 같은 악보를?’

그때 그는 마리가 도착한 것을 눈치채고 다급히 물었다.

“아, 마리 양? 이른 아침부터 불러 미안합니다. 급하게 물을 것이 있어서.”

“네, 말씀하세요.”

“어제 저녁, 연습장에서 이 악보를 쓴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 잘해야 한다.

“보지 못했어요.”

“아무도 못 봤습니까?”

“네. 정말 못 봤어요.”

바한은 그녀가 설마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특별히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하아.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 악보를 남긴 것인지.”

“……무슨 일이신데요?”

“이것 보십시오.”

바한은 마리에게 악보를 펼쳐 보여 주었다. 바로 그녀가 어제 적은 그 악보였다.

“누군가 이 악보에 기적 같은 음악을 적어 놓고 갔습니다.”

기적 같은 음악! 지나친 극찬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곡의 완성도가 대단함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코앞에서 그런 극찬을 들으니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저…… 마에스트로께서도 똑같이 내용을 진행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그렇기야 했죠. 하지만 그저 느낌만 가지고 있었을 뿐, 이런 식으로 풀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며 그는 탄식했다.

“더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악보에는 오로지 중요한 모티브만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제게 힌트를 주며,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된다고 알려 주듯이!”

그의 말이 정확했기에 마리는 할 말이 없었다. 힌트를 주려고 한 것이 맞았다. 그녀는 조심히 물었다.

“그러면 그 악보를 토대로 나머지 부분을 완성시킬 수는 없나요?”

“당연히 완성할 수 있죠. 중요한 모티브가 다 해결되었으니.”

“그러면 특별히 문제 될 것은……?”

바한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정말 잘된 일이죠. 일평생 숙원이었던 전원 풍경 교향곡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악보를 적은 분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음악을 만들어 냈는지! 분명 저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난 분일 터! 만나서 꼭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마리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가르침을 받겠다고? 농담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본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활활 타오르는 눈빛은 이 악보의 주인만 만나면 무릎이라도 꿇고 제자로 받아주십사, 하고 빌 것 같은 눈동자였다.

‘엄마야.’

절대! 절대로 들키면 안 되겠다고 마리는 다짐했다. 그런데 그때, 저벅저벅 군화 소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왜 또 황태자 전하의 근위 기사가?’

다가오는 이의 존재를 확인한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조각사 사건 때 나타났던 황태자의 근위 기사 알몬드였다.

‘이번엔 왜?’

왠지 불길한 예감이 스칠 때, 알몬드가 말했다.

“누가 악장이지?”

“제가 악단의 악장 바한입니다.”

바한이 의아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렇군. 따라오도록.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음악에 관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을 것 같은 피의 황태자가 왜 악단의 마에스트로를? 하지만 놀람은 끝이 아니었다. 알몬드는 이번에는 마리에게 고개를 돌려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 시선.

“네가 그 시녀군.”

“네?”

“너도 따라와라.”

마리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피의 황태자가 나를?’

마리와 바한은 입을 다물고 알몬드를 따라갔다. 둘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황태자가?’

특히 마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바한이야 황궁 악단의 책임자이니 불러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자신은 그저 일개 하급 시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을 부를 만한 이유가 없었다. 오로지 짐작되는 것이 있다면 그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설마 내 정체가?’

마리, 아니, 모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일개 시녀인 자신을 부를 만한 이유는 그것 외에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갑자기 정체를 들킬 이유가 없어.’

애초에 왕국 내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정확히 아는 이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당시 짐작으로 그려진 자신의 몽타주를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몽타주에 그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 뒤로도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4살 어린 소녀는 17살이 되었고, 인상도 많이 바뀌었다. 더구나 자신은 지금 왕녀가 아니라, 하급 시녀로 일하는 중이었고. 설사 이전 자신의 얼굴을 알던 사람이 본다 해도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다른 이유 때문일 거야. 긴장하지 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근위 기사인 알몬드가 비교적 자신을 정중하게 이끌고 있는 점도 안심이 되었다.

‘만약 정체를 들킨 거면 이렇게 친절하게 안내하지 않았을 거야. 밧줄로 묶어 감옥으로 바로 끌고 갔겠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알몬드가 말했다.

“도착했다.”

“……!”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예를 갖추도록.”

끼이익.

문이 열리며 넓은 방이 드러났다. 책상 주변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좌측의 남자는 단박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얀 턱 위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철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가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왕국 멸망의 날 봤던, 그 철혈의 황태자였다!

‘진정해. 난 클로얀 왕국의 왕녀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시녀일 뿐이야.’

황태자 옆에는 쾌활한 인상의 미남도 있었는데, 마리는 그의 정체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재상 오른 공작!’

생각지도 못 하게 제국 최고의 권력자 두 명을 마주해 버렸다. 그녀는 바한과 함께 예를 올렸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고개를 들라.”

마리와 바한은 공손히 황태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대가 황궁 악단의 악장 바한인가?”

“네, 전하!”

“그래, 수고가 많군. 그대를 부른 것은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다.”

“어떤 것이옵니까, 전하?”

황태자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집무실에 피아노가?’

마리와 바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황태자가 피아노 앞에 앉더니, 건반 위에 손을 올린 것이다.

“그대는 혹시 이 곡을 아는가?”

“……!”

그리고 울려 퍼지는 낮고 맑은 음색! 그 순간 바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일단 황태자의 피아노 실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어지간한 전문 건반 연주자보다도 완숙한 경지였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놀란 이유는 그가 연주한 곡이 바한에게 굉장히 익숙한 음악이었던 탓이었다.

‘이건 내 전원 풍경 교향곡! 어떻게 전하께서 내 곡을?’

놀라움은 끝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유려하게 그의 1악장을 연주하더니 뒷부분, 아직 손도 대지 못한 미완성 2악장 부분을 연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정체불명의 인물이 남기고 간 악보와 주 선율의 진행이 똑같았다!

‘어, 어떻게?!’

바한은 도저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어느 순간 손가락을 멈추었다.

“이 이상은 내 수준으론 치기 어렵군. 웬만한 비르투오소가 아니면 못 칠 난이도야. 어쨌든 그대는 이 곡을 알고 있는가?”

바한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건 누구의 곡인가?”

황태자는 반색하며 물었다. 지난번 조각사 때와 다르게 쉽게 곡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악장의 답변이 이상했다.

“……모르겠습니다.”

“방금 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모르겠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이 곡은 제가 작곡한 곡입니다, 전하. 하지만 동시에 제가 작곡한 곡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황태자는 바한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바한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땅이라도 꺼질 것처럼.

“사실은…….”

곧 그는 황태자에게 사정을 설명하였다. 바한의 말을 듣는 황태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네 미완성 교향곡의 뒷부분을 대신 완성했다고? 그리고 악보를 몰래 연습장에 놓고 사라졌다는 건가?”

지난번 조각사 사건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네, 전하.”

황태자는 물었다.

“악단의 인물이 벌인 일일 가능성은 없는가?”

“없습니다.”

바한은 단호히 대답했다.

“어째서지?”

“곡의 수준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준의 곡을 작곡해 낼 수 있는 인물은 악단에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선물을 남겨 주고 간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곡입니다. 비록 1악장을 제가 작곡했다지만, 그 뒤에 전개되는 주제들은 제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입니다.”

“……알았네. 그래도 혹시나 악단의 단원이 벌인 일일 수도 있으니, 그대는 돌아가서 한번 확인해 보게나.”

“네, 전하!”

바한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물러났다. 그리고 홀로 황태자와 재상 앞에 남게 된 마리는 속으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제 내가 연주한 곡 때문에 날 부른 거였어?’

일단 정체를 들킨 것이 아닌 것은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황태자 전하가 내가 어제 연주한 곡을 알고 있는 거지? 분명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 저 피의 황태자에게 들키다니! 그녀는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황태자가 재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묘하군.”

“그렇습니다, 전하. 지난번 조각사 때와 똑같은 패턴입니다.”

“그렇군. 이상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들의 대화에 그녀는 남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조각사 일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범인은 모두 그녀였다. 그때, 황태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는…….”

“마리라고 합니다.”

그녀는 긴장한 속마음을 숨기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피에 젖은 검을 들고 자신을 찾던 그의 모습이 생생했다. 들켜서 그의 관심을 끌어선 절대 안 된다.

황태자가 물었다.

“그래, 마리. 어젯밤에 너도 피아노 연주를 들었겠지? 내가 방금 연주한 곡 말이다.”

“……네, 전하.”

“그러면 혹시 연주자를 보았는가?”

마리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상황이다. 반드시 잘 대답해야 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지 못했습니다, 전하.”

“그래?”

“네, 연습장 정리를 다 끝내고 나온 뒤에 음악 소리를 듣긴 했지만, 안에서 정리할 때 누가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답에 황태자가 마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

철가면 뒤에서 일렁이는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동자. 왠지 최근에 저 푸른 눈동자를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긴장에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런가?”

“……네, 전하.”

두근두근.

재차 묻는 그 질문에 마리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혹시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아무리 황태자라도 시녀인 내가 그 연주를 했다고는 어떻게 짐작하겠어?’

잠시 말없이 그녀를 보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면 나가 보도록.”

“네, 전하.”

‘살았다!’

마리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최대한 공손히 뒷걸음으로 방을 나가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잠깐.”

황태자였다.

“나가기 전에 저 피아노를 한번 쳐 봐라.”

“……!”

“피, 피아노 말씀이십니까?”

마리는 당황해 물었다. 황태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 어째서?

‘혹시 들킨 건가?’

마리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꼬였다.

‘치, 치면 안 돼. 들킬 수도 있어.’

사람마다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연주자도 모두 각자의 스타일이 있었다. 그건 지문 같은 것으로,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황태자가 들으면 어제 연주와의 유사성을 잡아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하겠는가. 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마리는 어쩔 수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전하, 제 피아노 실력은 보잘것없사옵니다. 귀를 어지럽힐까 걱정입니다.”

“괜찮다. 부담 없이 쳐 봐라.”

어떻게 부담 없이 치겠는가! 마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생각했다.

‘어쩌지? 어쩌지?’

긴장감에 건반 위에 올린 손이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부러 이상하게 칠까? 아니야, 눈치챌지도 몰라. 어떻게 하지?’

그렇게 그녀가 패닉에 빠져 있을 때였다. 황태자가 말했다.

“됐다. 너무 긴장하는군. 그냥 나가 보도록.”

“……!”

마리는 정말인가, 껌뻑껌뻑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가서 볼일 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혹시나 다시 붙들까,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황태자는 철가면 밑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저 시녀 말이다.”

오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어 보이는데요? 갑자기 전하 앞에서 피아노를 치라고 해서 당황한 것 아닙니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이상할 것이 없지.”

그는 자신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다. 피의 군주라 불리는 자신 앞에서 갑자기 피아노를 치라고 하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면 어떤 것 때문에 이상하다 여기시는 것입니까?”

“…….”

라엘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명확하지 않은 이유인 탓이었다.

‘눈빛.’

라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피아노를 치라고 하기 전, 문답을 나눌 때 시녀의 눈빛을 떠올렸다. 악명 가득한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맑고 차분한 눈동자. 그 맑은 눈동자는 일개 시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냥 착각인가?’

라엘은 손가락으로 철가면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오른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피아노를 쳐 보라고 한 것입니까, 전하?”

그 물음에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갑자기 이상한 감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저 시녀가 연주했던 것은 아니겠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황당한 생각이어서 중간에 멈추라고 했다. 너무 긴장해 떠는 모습이 도저히 어젯밤의 곡을 연주한 연주자라고는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도무지 모르겠군.’

그때, 오른이 다짐하듯 말했다.

“어쨌든 지난번 조각사도 그렇고, 이번 음악가도 모두 제 이름을 걸고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그러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리라고?’

왠지 눈에 밟히는 이름.

‘어쨌든 조금 더 지켜봐야겠군.’

그렇게 그녀는 처음으로 황태자 라엘과 얽히기 시작했다.

이후 몇 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축제가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고, 마리는 수정궁의 일을 마치고 새로운 일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수정궁을 떠나게 되는구나.’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겐 천만다행으로 끝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바한은 그녀가 적어준 모티브를 기반으로 교향곡의 나머지 부분을 훌륭하게 완성했다. 기쁜 일이었지만, 그가 틈만 날 때마다 범인(?)을 찾아서 문제였다.

“반드시 찾아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외치며 말이다. 그 배움에 불타는 눈빛은 음악에 영혼을 바친 이의 숭고한 것이었으나, 마리는 모골이 송연했다.

‘어쨌든 다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축제 때 공연할 곡도 훌륭하게 마무리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소행임을 안 들켜서 정말 다행이었다.

‘앞으로는 꼭 조심해야겠어.’

그녀는 황태자의 철가면을 떠올렸다. 조각사 때 일도 그렇고, 벌써 연달아 2번이나 그의 관심을 끌어버렸다. 천만다행으로 발각되지는 않았지만 황태자와 더 엮이는 것은 절대 사절이었다.

‘다음 근무할 곳은 어디지? 이곳 수정궁 근무가 끝났으니, 축제 전까지 다른 근무처에서 축제 준비를 해야 할 텐데.’

그러며 그녀는 생각했다.

‘힘든 근무처여도 상관없으니, 그냥 이번에는 누구의 눈에도 안 띄는 곳이면 좋겠다.’

그런 바람 덕분이었는지 그녀는 정말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에 배정받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백조 정원 정리요?”

“그래. 지금 다른 시녀들은 모두 다른 준비를 맡고 있어서 너 말곤 그 일을 맡을 사람이 없어. 어지럽혀진 정원을 간단히 정리만 하면 되니, 크게 어렵진 않을 거야.”

그때 상급자인 수잔은 평소와 다르게 조심히 말했다.

“무, 물론 가끔 귀신이 나온단 소문도 있지만, 그건 근거 없는 소문이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

한 가지 문제점. 그것은 백조 정원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백조 정원에는 귀신이 나온다! 황궁 시녀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백조 정원은 황궁 가장 으슥한 곳에 위치한 정원으로 비운의 7황녀가 그곳에서 독살당한 후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치된 있는 곳이었다. 마녀의 머리카락 같은 덩굴나무에 뒤덮인 정원은 마치 흉가처럼 으스스한 분위기여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종종 시녀들 사이에서 돌았다.

“최, 최근 백발의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런 건 다 헛소문이니 신경 쓰지 말고.”

“…….”

마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수잔을 바라보았다. 사감 선생님보다 매서운 성격이면서 귀신을 무서워하다니!

‘귀신보다 수잔 시녀님이 더 무서울 것 같은데…….’

평소 자신을 혼내던 수잔을 떠올렸다. 이전 자신이 실수할 때마다 눈을 치켜뜨고 불호령을 내리는 모습은 귀신도 도망갈 정도로 무서웠다. 물론 마리도 귀신을 안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궁 내에서 귀신이라니. 그건 정말 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귀신보다 황태자가 훨씬 더 무서워.’

차가운 철가면을 떠올린 그녀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만약 이 황궁에 정말로 귀신이 살고 있다면 그건 황태자일 것이다. 아니면 황태자의 검에 죽은 원혼이거나.

‘백조 정원에서는 절대 황태자와 마주할 리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면 내일부터 백조 정원으로 가면 될까요?”

* * *

그녀는 오랜만에 다른 인물이 되는 꿈을 꾸었다.

‘이번엔 무슨 꿈이지?’

혼몽 중임에도 마리는 비교적 선명하게 중얼거렸다. 자각몽(Lucid dream, 自覺夢)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씩 꿈속에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낮에 들었던 귀신 이야기와 관련된 꿈은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밀! 밴! 밥 먹고 나가야지!」

「바빠요, 엄마!」

「아니, 그래도 밥 거르면 어떻게 해? 여기 계란빵이라도 가져가!」

마리는 꿈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꿈이지?’

지난번 꿈들과 다르게 일반적인 가정집 모습이었다. 꿈속에서 마리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 되어 있었다. 두 아들의 어머니인 그녀는 마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었다. 굳이 특징을 찾아보자면 요리를 무척 잘한다는 것? 그녀가 만든 감자 수프의 구수한 맛은 마을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일은 힘들지 않았어, 아들?」

「에이, 괜찮다니까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만 걱정해요.」

「그래도 위험하니 꼭 조심해야 해. 알았지?」

꿈은 별다른 내용도 없이 굉장히 길었다. 중년 여인과 두 아들의 삶이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잔잔히 지나갔다. 말썽만 부리던 두 아들은 커서 직업을 가졌고, 따로 독립도 했고, 결혼도 했다. 그런 와중 즐거운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고, 슬플 때도 있었으며, 기쁠 때도 있었다.

삶 속의 지극히 평범한 나날. 꿈속의 중년 여인은 아들들이 커 가는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아플 때는 본인들보다 더 아파하면서. 자식들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하며 잠을 뒤척였다. 그러며 그녀는 늘 기도했다.

주님, 늘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그렇게 물 흐르듯 꿈속의 시간이 지나갔고, 마리는 언제인가 모르게 꿈에서 깨어났다.

마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무슨 꿈이지?”

너무 평범한 일상이어서 무슨 꿈을 꾼 것인지 오히려 헷갈렸다. 왜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지?

“그냥…… 별 꿈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꾸는 꿈이 모두 특별한 의미를 가지진 않을 테니까. 평범한 꿈을 꾸는 날도 있을 것이다.

‘아니야. 그냥 의미 없는 꿈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내용이 없긴 했어도 꿈의 내용이 너무 선명했다. 마치 실제로 그 중년 여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

“모르겠다. 일단 조금 더 자자.”

아직 첫 닭도 울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오늘 하루도 힘내기 위해서는 좀 더 푹 자야 했다. 하지만 왜일까? 눈을 감았지만, 멀뚱멀뚱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꿈이 여운처럼 계속 떠올랐다.

‘이번 꿈도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지금껏 경험으로 봤을 때, 꿈은 늘 앞으로 벌어질 일과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되는 꿈이라니!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난 남자 손도 안 잡아 봤는데…….’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마리는 새로운 근무처인 백조 정원으로 향했다. 중간에 상급자인 수잔 시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해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마리, 며칠 전에도 귀신을 봤다는 제보가 있었단다. 금발 머리의 귀신이라던데…….”

“……지난번에는 백발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아, 그건! 낮에 나오는 귀신이고, 금발은 밤에 나온 귀신이래.”

“…….”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낮에는 백발 귀신이고, 밤에는 금발 귀신이란 말인가.

“무, 물론 모두 헛소문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귀신을 보면…….”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그으며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한다느니, 따위의 대처 방법을 들은 후 정원에 도착했다.

“……진짜 으스스하긴 하네.”

정원을 둘러본 마리는 살짝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렁치렁한 덩굴, 죽어 있는 꽃나무들, 메마른 백조 연못.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황량하다 못해 삭막한 정원의 모습을 보니 왜 이곳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진짜 귀신이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가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화, 황궁에 무슨 귀신이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자.”

그녀는 고개를 홱홱 저어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 내었다.

“오늘도 힘내자!”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어지럽게 방치된 정원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어려울 것은 없는 일이지만, 원체 오래 방치되던 곳이라 치워야 할 것이 적지 않았다.

‘일단 쓰레기 먼저 치우고 덩굴도 정리하자. 최대한 열심히 하면 빨리 끝낼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으스스한 기분을 떨치려고 일부러 콧노래를 부르며 일을 시작했다.

“열심히, 씩씩하게~”

그런데 그렇게 얼마나 일했을 때일까? 높게 떠오른 태양빛 아래, 땀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할 때.

휘잉.

돌연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

마리는 깜짝 놀라 쓰레기를 모으던 손길을 멈추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그냥 바람 소리인가 싶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바람 소리치고는 너무 거칠었고, 무엇보다 정원에는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았다.

‘뭐, 뭐지?’

그때 정체불명의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휘잉!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쯤 되니, 아무리 그녀라도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정말 귀신?’

“백조 정원에는 귀신이 나온데. 낮에는 백발 귀신, 밤에는 금발 귀신.”

‘이, 일단 도망칠까?’

하지만 마리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무슨 귀신이야. 다른 소리일 거야. 가서 확인해 보자.’

그녀는 소리가 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혹시나 정말 귀신일까 봐 속으로 소심하게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하게…….’

그렇게 덩굴이 무성한 정원 건너편에 도착한 그녀는 ‘귀신’의 정체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

누군가 있긴 있었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잘생긴 남자가. 수잔 시녀의 말처럼 백발, 아니, 찬란한 은발의 젊은 남자가 조각 같은 인상의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제가 일하시는 데 방해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마리는 생각했다.

‘역시. 귀신은 무슨 귀신이야. 그나저나 엄청 잘생겼다.’

정면에서 남자의 얼굴을 본 마리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녀가 살면서 본 가장 잘생긴 남자는 지난번 수정궁에서 피아노 연주를 끝내고 나오며 우연히 마주친 금발의 남자였는데, 지금 이 남자도 그에 못지않았다.

선이 굵은, 마치 조각을 연상시키는 얼굴선. 바다를 연상시키는 깊고 푸른 눈동자. 비단같이 길고 부드러운 은발.

‘귀신이 아니라, 다들 이분을 보고 착각한 것이구나.’

멀리서 저 은발을 보고 백발의 귀신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돈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귀신으로 착각할 수 있었을까?

“아니에요. 저야말로 수련하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전 마리라고 해요.”

“마리 양이시군요. 저는…….”

그러며 남자는 어째서인지 자신을 소개하기 전 잠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는 황실 친위대 소속의 키엘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마리는 깜짝 놀랐다.

‘황실 친위대라고?’

이 황궁에는 두 개의 기사단이 있었다. 바로 근위 기사단과 황실 친위대였다. 그중 황실 친위대는 황궁을 넘어 제국 최고의 무력 집단으로, 오로지 현 황제인 토른 2세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작위를 받은 정식 기사는 아니겠지? 스콰이어인가 보구나.’

스콰이어. 기사를 지망하는 종자를 뜻한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가 입고 있는 복식이 황실 친위대의 제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황궁 내에서 친위대 소속 기사는 의무적으로 제복을 입게 되어 있다. 예외적인 경우는 아직 기사 자격이 없는 종자와 친위대의 수장인 친위기사단장뿐이었다.

저 남자가 제국 최강검이자, 서북방을 수호하는 변경백(邊境伯)의 직위를 겸임하는 친위기사단장일 리는 없으니, 종자일 것이다.

“그러면 키엘 님께서는 왜 이곳 정원에?”

“아, 검을 연습하러 왔습니다. 조금 생각할 것도 있고요.”

마리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검을 수련하기 위해 인적 없는 정원까지 찾아오다니.

‘역시 친위대의 종자답게 열심이시구나.’

남자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 전 저쪽에서 수련하겠습니다.”

“아, 네! 그러면 수련 열심히 하세요!”

그렇게 둘은 각자의 일을 시작했다.

마리는 정원을 정리하며 검을 수련하는 남자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와, 멋지다.’

파앙!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검술에 대해선 당연히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저 남자의 검이 범상치 않은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저런 실력으로도 종자라니? 친위대의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아니면 혹시 무슨 다른 문제라도?’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검을 멈췄다. 혹시 자신이 훔쳐봐서 그런 것인가 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남자가 긴 한숨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하아, 쉽지가 않군.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며 그는 한참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에는 고뇌가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마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강하고 멋져 보이는 검술이었지만, 방금 남자의 한숨 때문일까? 이상하게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우연히 스치듯 처음 만난 사람인데, 이 이상의 관심을 갖는 것도 실례일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마리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분이 백발 귀신이면…… 밤에 나타난다는 금발 귀신은 누구지?’

곧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황실 친위대의 종자인 키엘이란 남자는 해가 지자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리 양. 더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도와주실 필요 없는데. 바쁘신데 너무 감사해요.”

키엘은 놀랍게도 검 수련을 마친 후 그녀의 청소를 도와주었다.

‘아무리 종자라도 황실 친위대 소속이면 분명 이름 높은 명문가 출신일 텐데.’

그녀가 당황하며 괜찮다고, 자신이 하겠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그는 친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많이 남아서요. 그리고 옆에서 고생하시는 것을 하루 종일 보니 왠지 죄송하기도 하고요.”

그 말에 마리는 생각했다. 이 남자 어마어마하게 착한 사람이다! 무지막지하게 잘생겼는데, 친절하고 착하기까지 하다니!

‘나중에 정식 기사로 임명되면 귀족가의 영애들이 줄을 잇겠구나.’

“그러면 수고하십시오. 날이 저물어 어두운데 조심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키엘이 돌아간 후, 홀로 남은 마리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밤이 되니 더 스산하긴 하네. 나도 빨리 마무리하고 돌아가자.’

정월이라 달빛이 밝긴 했지만, 황량한 외진 정원에 혼자 있으니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었으나, 정해진 기간 안에 일을 마무리하려면 밤에도 일해야 했다.

“최대한 열심히 해서 빨리하자! 씩씩하게, 힘차게~”

콧노래를 통해 으스스한 기분을 떨치며 마리는 다시 열심히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원 어느 한구석에 도착한 마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아, 여기가 바로 그곳이구나.”

말라 버린 연못 옆에 있는 빛바랜 정자. 이곳이 바로 비운의 7황녀가 독살되었다는 그 장소로 보였다.

‘굉장히 착한 분이셨다고 하던데.’

그녀가 황궁에 들어오기 전 사망한 분이라 이야기로만 들었다. 황족답지 않게 어진 심성으로 이름 높은 분이셨는데, 황위 다툼에 휘말려 죄 없이 죽임을 당했다고.

‘이 백조 정원이 암묵적인 금지(禁地)가 된 것도 그분의 죽음 때문이라고 했지?’

왠지 숙연한 마음이 들어 그녀는 살짝 묵념 후, 정자 주위를 조금 더 신경 써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정자 주위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려왔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생각지도 못 한 목소리에 마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누, 누구?”

순간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동자가 화들짝 커졌다. 지난번 한번 만났던 남자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수정궁에서 봤던 남자!’

찬란한 금발과 백옥 같은 피부, 마치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선. 지난번 피아노 연주를 한 후, 우연히 수정궁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였다! 워낙 인상적인 외모여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분이 이 백조 정원엔 왜? 수정궁 시종이 아니었나?’

남자의 복장은 지난번과 같이 수수한 평복이었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 축제를 맞아 이곳 백조 정원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그러며 마리는 손에 들고 있던 청소 도구를 보여 주었다. 남자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마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백조 정원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푸른 눈동자로 말없이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왜일까? 정원을 둘러보는 눈동자가 한없이 가라앉아 있어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정원, 특히, 7황녀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정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마리라고 했나?”

“아, 네.”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내 이름을? 지난번 우연히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때 내가 이름을 알려 줬었나?’

몇 주나 지났고 워낙 정신없이 지나갔던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안 났다.

“이 정자, 그대가 정리한 건가?”

마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정리했어요. 왜요?”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금발의 남자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

마리의 눈이 의문에 물들 때, 남자는 돌연 등을 돌려 사라졌다.

“뭐, 뭐야?”

다시 혼자 남게 된 마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저러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이상한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정원을 둘러보는 눈동자가 지극히 무거웠던 것이다. 보는 그녀의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로.

“그나저나 혹시 금발 귀신이란 게 저분을 이야기하는 건가?”

맞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면 저 찬란한 금발만 눈에 들어올 테니까.

“백발 귀신이랑 금발 귀신이랑, 아예 헛소문은 아니었네.”

둘 모두 귀신이 아니라, 귀신마저도 설레게 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들이서 그렇지. 이윽고 그날 해야 할 정리를 다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며 마리는 생각했다.

‘어쨌든 참 특이한 하루네. 백발 귀신, 금발 귀신 둘 다 만나고.’

그리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설마 둘 다 내일도 또 오진 않겠지?”

또 왔다! 그것도 다음 날뿐 아니라, 그다음 날에도. 심지어 그 다다다음 날에도! 둘 모두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황실 친위대의 키엘은 정원 구석에서 검을 수련하다 돌아갔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금발 남자는 늘 늦은 저녁에 정원에 도착해 마치 산책이라도 온 것처럼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갔다.

‘도대체 뭐지?’

마리는 그런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둘 다 뭔가 이상했다. 도대체 이 정원에 왜 오는지 알 수 없는 금발 남자도 그렇고, 황실 친위대의 키엘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백조 정원은 별로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위치도 가장 으슥하고, 관리가 안 돼 경관이 예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려고? 하지만 검을 굳이 이런 곳에서 수련할 필요는 없잖아. 친위대 전용 수련장이 있는데.’

키엘도 그렇고, 이름 모를 금발 남자도 그렇고 다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에 카엘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을 정리할 것도 있고 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검을 수련하는 중간중간 키엘은 이유 모를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건 키엘뿐이 아니었다. 금발 남자도 정원을 둘러볼 때 늘 무거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둘 모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 백조 정원에 오는 건가?’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머리가 복잡하거나 우울해 남들의 눈을 피하고 싶을 때 말이다. 백조 정원은 남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였으니까. 마리는 한번 조심히 물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우연히 마주친 사람일 뿐이니까. 쓸데없는 관심을 갖는 건 실례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는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이제 며칠 뒤면 축제가 시작되니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 했다. 그런데 왜일까? 괜히 쓸데없는 오지랖이 들었다.

‘뭐, 혹시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마리, 너 할 일이 산더미잖아. 일단 네 일이나 잘해. 쓸데없이 남 신경 쓰지 말고.’

하지만 자꾸 은발의 젊은 남자, 키엘의 답답한 한숨이 떠올랐다.

‘명문가 출신 귀족답지 않게 참 착한 사람인데.’

그는 종종 수련이 끝난 후 그녀의 일을 도와주었다. 다른 귀족들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착하고 친절한 모습이었다.

‘귀족들은 나 같은 허드렛일하는 시녀는 같은 사람으로도 안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가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으면 그녀도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녀가 된 후 그녀의 일을 도와주면서까지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도와주고 싶단 마음이 들어도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고작 일개 시녀일 뿐이니까. 도와줄 능력도 안 되고, 주제넘은 간섭은 상대측에서 불쾌하게 여길 수 있었다.

‘역시 그냥 모른 척해야 하나.’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주제넘게 나서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밀, 밴. 이것 먹고 일해. 위험하니 꼭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고.」

‘얼마 전 꾼 중년 여인의 꿈!’

마리는 자리에서 퍼뜩 일어났다. 꿈속의 중년 여인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많았었다. 아들들이 밖에서 고민을 안고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중년 여인은 아들들에게 기운 내라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곤 했었다.

‘나도 우울해하고 있으면 엄마가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주곤 했었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주제넘게 나설 수는 없어. 그럴 사이도 아니고.’

그들의 고민은 그들의 몫이다.

‘그래도 기운 내라고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운이 나니까.’

특히 은발의 키엘은 언제나 자신의 일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그 답례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마침 정원 정리도 내일이면 끝나니까 마지막 감사의 인사라고 하면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일이 끝난 후, 백항궁의 주방장 피터를 찾아갔다.

“오, 마리. 무슨 일이니?”

털이 수북한 피터가 푸근한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사람 좋은 그는 마리에게 항상 잘해 주곤 했었다. 이전 일을 못할 때, 주방 담당 시녀에게 혼날 때도 감싸 준 적이 있었다.

마리는 그에게 주방을 잠시만 사용하고 싶다고 조심히 부탁했다. 다행히 피터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대신 깨끗하게 정리해 놔야 한다?”

“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은혜는 무슨. 네가 지금까지 주방에서 고생한 게 얼마인데 잠깐 쓰는 것 정도야.”

그는 인심 좋게 남는 재료들도 써도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리, 너 요리는 할 줄 아니? 어차피 지금 할 일도 없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백합궁의 마스터 쉐프인 피터는 황궁 내에서도 손꼽히는 요리사였다.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방에 도착한 그녀는 팔목을 걷었다.

“자, 해보자. 쓸 수 있는 재료가…….”

그녀는 주방에 남아 있는 재료들을 살펴보았다.

‘고기나 과일은 당연히 쓰면 안 되고. 고가의 초콜릿도 곤란해. 밀가루나 우유, 계란, 버터…… 이런 정도만 쓸 수 있겠구나.’

크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만들려는 것은 고급 코스 요리가 아닌, 그저 간단히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과자류니까.

‘버터를 넣은 부르고뉴 쿠키와 계란 흰자로 만든 과자, 다쿠아즈, 그리고 타르트 정도로 준비할까?’

꿈속의 중년 여인은 프랑스식 과자를 즐겨 만들었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도 않고 만드는 게 복잡하지도 않으니,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자, 시작하자.’

먼저 부드러운 버터와 벌꿀을 비빈 후 파우더에 넣었다. 그리고 소금, 계란 노른자를 열심히 섞어주었다.

“Etoiles, amour~”

마치 꿈속의 중년 여인이 된 것처럼 그녀의 입에서 프랑스 민요가 흘러나왔다. 마리의 손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맛을 돋울 술, 럼주를 반죽 통에 소량 붓고 준비한 파우더를 섞은 후, 반죽을 빚었다.

‘그리고 모양을 예쁘게 한 후, 주변에 얕게 달걀 물을 칠하고…….’

그렇게 완성된 부르고뉴 쿠키 반죽을 화덕에 구우며 그녀는 다음 차례의 과자를 준비했다.

‘다음은 계란 흰자 과자.’

계란 흰자 과자는 수도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흰자를 계속해서 버리게 되자 수사들이 그 흰자를 이용해 만든 과자이다.

‘버터를 일단 냄비에 끓이고.’

마치 늘 요리해 왔던 것처럼 그녀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였다. 버터를 끓이고, 체로 거르고, 계란 흰자를 섞고, 그걸 식힌 후, 화덕에 굽고. 그렇게 과자와 다쿠아즈, 타르트까지 열심히 요리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거 근데 제대로는 되고 있는 건가?’

꿈속 중년 여인의 기억대로 손을 움직이고는 있는데,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맛있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꿈속 중년 여인은 늘 아들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며 요리를 했었다. 꼭 그 중년 여인이 아니더라도,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은 요리하는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마리도 그들이 이 과자를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좋겠다, 란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밤늦게까지 열심히 과자를 만든 후, 다음 날 백조 정원으로 향했다.

“이건?”

황실 친위대 키엘은 마리가 내민 바구니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마리는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그냥…… 지금까지 저를 도와주신 게 감사해서 만들어 봤어요. 저 이곳 백조 정원에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거든요.”

“오늘이 마지막이란 말입니까?”

“네, 이제 다른 곳에 가서 일해야 해요.”

“……그렇군요.”

키엘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바구니를 열어 보았다. 안을 들여다본 그는 놀란 눈을 하였다.

“직접 만드신 것입니까, 이걸?”

“아, 네. 그냥 간단히…….”

“대단하군요.”

은발의 남자, 키엘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화려한 과자들은 아니다. 평소 그가 저택이나 파티에서 접하던 과자들에 비하면 수수하기 그지없는 종류. 하지만 그는 과자에 굉장한 정성이 들어가 있음을 눈치챘다.

‘늘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 같던데 언제 이런 과자를…….’

더구나 정갈한 빛깔, 폭신한 감촉, 은은한 향기가 나는 과자는 굉장히 맛있어 보였다.

“그, 그냥…… 지금까지 도와주신 게 감사해서 만든 거니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민망함에 더듬더듬 말하는 그녀를 보며 키엘은 가만히 웃었다.

“마리 양은 참 착하군요.”

그러며 그는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귀엽기도 하고요.”

“네, 네?”

생각지도 않은 말에 마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노,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것 아닙니다. 진담입니다.”

그의 진지한 목소리에 마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 남자 혹시 바람둥이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진중한 얼굴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키엘은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로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

물론 대단한 선물은 아니다. 그의 ‘신분’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의 저택에 쌓여 있는 수많은 선물 중 진귀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성의가 담긴 선물은 도대체 얼마 만일까?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했는데.’

오랜만에 경험하는 기분 좋은 느낌에 그는 미소 지으며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

순간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 찮나요?”

그가 잠시 후 대답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진짜요?”

“예, 원래 과자를 즐기는 편은 아닌데…… 이건…… 정말 맛있군요.”

예의상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가 눈을 감으며 과자의 맛을 음미했기 때문이다.

‘이건…… 이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쿠키와 비슷한 맛 아닌가.’

어릴 적,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도 종종 그에게 과자를 만들어주었다. 그때 어머니가 해준 과자도 이런 맛이 났었다.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맛이었다.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헤실 웃으며 말하는 소녀를 보며 키엘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꼭 소중히 간직하며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며 키엘은 말했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귀한 선물을 받은 보답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것이요?”

“네. 제 이름을 걸고 가능한 것이라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이야기였다. 그의 ‘이름’. 그것의 의미는 결단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키엘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이렇게 정성을 다해 준 소녀에게 워낙 감사한 마음이 들어 하는 이야기였다.

“…….”

소녀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사실…… 원하는 건 아니고…… 드릴 말씀이 하나 있긴 했어요.”

“무엇입니까?”

“아무 말이나 돼요?”

“네, 말씀하십시오.”

키엘은 소녀가 자신에게 어떤 소원을 말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 한 것이었다.

“혹시…… 힘든 일 있으면 기운 내셨으면 좋겠어요.”

“네?”

그가 놀라 되묻자, 소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러니까…… 최근 계속 힘들어 하셨잖아요. 착각일 수도 있고,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된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실례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종자님이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며 소녀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했다.

“혹시나…… 잘 알지도 못 하는데 주제넘게 말해 기분 나쁘시면 죄송해요.”

키엘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전혀. 오히려…….”

그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착하고 귀여운 인상. 그녀의 얼굴이 똑똑히 그의 눈에 박혔다.

“힘을 내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정말로.”

다음은 금발 귀신 차례였다.

“……이게 뭐지?”

냉막한 그의 반응에 마리는 과자를 준 것을 곧바로 후회하였다.

‘역시 종자님 과자만 만들걸.’

사실 그의 과자를 만들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키엘의 경우 자신의 일을 도와주어 감사의 표시를 한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금발 남자의 경우엔 과자를 만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이왕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들었는데, 역시나 반응이 떨떠름하다.

“그, 그냥 과자예요. 만들다가 생각이 나서……. 싫으시면 안 받으셔도 돼요.”

남자는 말없이 바구니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평소 차가운 그의 태도를 생각할 때, 마리는 당연히 그가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의외의 말을 하였다.

“만드느라 고생했겠군. 잘 먹겠다.”

“……!”

마리는 놀라 남자를 바라보았다. 생각 외의 반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자가 나직이 이렇게 중얼거린 것이다.

“우연인가…….”

어딘지 아련함이 담긴 목소리에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아니다.”

역시나 평소처럼 불친절하게 남자는 아무 대답도 안 해주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남자가 사라지기 전,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말을 하였다.

“그간 정원 정리하느라 고생하였다. 고맙다.”

그가 사라지자 마리는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고맙다니? 뭐가?”

과자가 고맙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정원 정리는 자신이 맡은 일이라 열심히 했을 뿐인데, 왜 저 남자가 고맙다고 말하는 거지?

* * *

백조 정원에서 나온 금발의 남자, 황태자 라엘은 과자 바구니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과자라니.”

그는 자신에게 과자 바구니를 건넨 소녀를 떠올렸다. 과자 굽기는 이 정원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누이동생, 7황녀가 즐겨 하던 취미였다. 그가 최근 이 정원을 계속해서 방문했던 것은 이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 누이를 기리기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과자를 선물 받게 되다니. 그렇게 생각한 그는 쿠키를 하나 꺼내 물었다.

아삭.

“……!”

쿠키의 맛을 본 그는 살짝 놀랐다. 생각보다 맛이 굉장히 훌륭했다.

‘나쁘지 않군. 괜히 시럽만 잔뜩 넣는 사자궁의 파티시에보다 훨씬 낫군.’

더욱이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과자의 맛이 오래전 누이가 해준 과자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 과자들은 누이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누이는 좋아하기만 했지, 별로 솜씨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과자의 맛에서 그녀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정성 때문이었다. 간단해 보이는 과자이지만, 굉장한 정성이 들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라버니! 란! 이것 먹어 봐요!”

“뭐야, 또 태웠잖는가?”

“그래도 먹어 봐요. 열심히 만들었단 말이야.”

라엘은 간만에 떠오르는 누이의 추억에 잠시 눈을 감았다.

‘마리라고 했나?’

지난번 음악가 사건 때부터 들었던 이름. 조사해 보니, 조각사 사건 때도 저 시녀가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계속 겹치는군.’

그는 다시 과자를 꺼내 물었다. 입안에 버터향이 퍼졌다.

“어쨌든 이 과자는 고맙군.”

잠시 과자의 맛을 느끼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간이 됐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은 간만에 떠오른 추억을 회상하던 빛은 온데간데없이 지극히 냉막했다. 공포의 존재로 경외시되는 피의 황태자의 얼굴로 돌아간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둠에 묻힌 나무들 사이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찬란한 은발에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아까 전까지 마리와 대화를 나누던 키엘이었다! 키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예를 표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라엘은 무릎 꿇은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실 친위대 단장, 키에르한 후작.”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마리가 들었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키에르한 후작! 그 이름은 제국 최강의 기사단, 황실 친위대의 기사단장이자 제국의 서북방을 수호하는 변경백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문에 소속된 군단병의 숫자만 해도 무려 3만! 명실상부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이자, 황실을 제외하고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최강의 군벌(軍閥)이 바로 이 은발의 남자, 키엘의 정체였다.

황태자 라엘은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키에르한에게 말했다.

“요즘 계속 백조 정원에 오더군.”

“…….”

“주인을 지키지 못한 개가 왜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것이지?”

주인을 지키지 못한 개. 그 말을 들은 키엘의 표정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7황녀가 죽음을 맞이할 당시 그녀의 기사는 다름 아닌, 바로 키에르한이었다.

“죄송합니다.”

라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때의 일을 탓하려 만나고자 한 것은 아니니.”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지난번에 한 제안은 생각해 보았나?”

“…….”

고개를 숙이고 있는 키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보며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해라. 난 너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었으니.”

결국, 키엘은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라엘의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게 너의 대답인가?”

“…….”

“그게 너의 대답이냐고 물었다, 키에르한.”

“죄송합니다.”

라엘은 입을 열었다.

“키에르한, 아니, 키엘. 한때 내 소중했던 친구여. 너는 황제인 토른 2세가 정말로 다시 깨어날 거라고 믿고 있는 건가?”

토른 2세. 라엘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현 황제. 클로얀 왕국과의 전쟁부터 시작해, 황가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의 원흉이었다.

키에르한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폐하는 아마 회복되기 어려우시겠지요.”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의미 없는 충성을 낭비하는 것이지?”

“제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

라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음성에 무거운 분노가 깃들었다.

“이유도 따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황제를 수호해야 하는 너의 그 세이튼 가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냐?”

“…….”

“그래서 깨어나지도 않을 황제를 위해 나에게 맞서겠다고? 토른 2세가 나를 황태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키에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엘은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건국 때부터 황제를 수호해 온 세이튼 가문은 오로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정통성 있는 후계자만을 제국의 황태자로 인정한다. 반면 라엘은 원래의 황태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직접 황태자의 지위에 올라섰다. 그 때문에 세이튼 가문의 키에르한에게 있어 라엘은 황태자가 아니라 피의 찬탈자일 뿐이리라.

“그래, 너의 뜻은 잘 알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한 가지만 이야기하지, 키에르한, 아니, 나의 친우 키엘.”

“무엇입니까?”

피의 황태자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감정하지만, 그래서 더욱더 차갑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내가 왜 너에게 그런 제안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 너의 조력이 필요해서?”

“…….”

“아니야. 난 이미 너의 도움 따위는 전혀 필요가 없어. 원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토른 2세의 황관을 벗기고,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있으니까.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키에르한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그런 제안을 한 이유는 단 하나. 과거의 친우였던 너의 목을 내 손으로 베고 싶지 않아서이다.”

“……!”

“너는 내가 너를 죽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대로 이루어지겠지요.”

라엘은 푸른 눈동자를 시리게 빛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다. 진정 뜻을 굽힐 생각은 없느냐, 키에르한 후작?”

키에르한은 조각 같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래, 알겠다. 너와 너의 가문의 뜻을 존중하지.”

라엘은 등을 돌려 자리에서 멀어졌다. 이로써 둘은 과거의 친구에서 언젠가는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적이 되고 말았다.

“하아.”

홀로 남은 키에르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란.”

그는 씁쓸히 황태자의 이전 아명을 불렀다. 그와 황태자, 그리고 재상 오른과 7황녀까지. 그들은 소중한 친우들이었다. 어릴 적 그들은 이 백조 정원에 모여 7황녀가 구운 과자를 나누어 먹곤 했었다.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기억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실의 잔혹한 손은 7황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고, 그 죽음을 시작으로 그들의 행복도 끝이 났다.

“답답하군.”

그는 중얼거렸다.

“답답해.”

그런데 왜일까? 갑자기 오늘 낮에 만났던 시녀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지만, 기운을 내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오랜만에 듣는 누군가의 걱정.

“마리…… 라고 했었나?”

그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몸집의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이지만, 어딘지 씩씩해 보이고 귀여운 인상의 모습이었다.

“과자나 다시 한번 먹고 싶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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