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3화 (4/54)

Chapter 3

더위가 한풀 꺾이며, 가을이 성큼 가까워졌다. 들판이 금빛으로 변해 갔고, 1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와 함께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축제는 정말 기대되네.”

“그러게, 농사도 풍년이고. 작년에는 축제 자체가 없었으니.”

제국민은 곧 다가올 축제에 들떠 말했다. 최근 몇 년간은 황제가 쓰러진 후 벌어진 황자들 간의 참혹한 내전으로 축제가 열리지 않았다. 평화가 찾아온 후에 개최하는 소중한 축제인지라 모두 축제에 많은 기대를 했다.

그리고 대규모 축제를 앞두고 있는 만큼 정신없이 바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축제를 개최해야 할 실무진들이었다. 그중에는 황궁의 시녀들도 있었다. 백성들의 거리 축제와 별개로 황궁에서도 대규모 연회와 축제를 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준비는 당연히 시녀들의 몫이었다.

“자, 자! 이제 축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정신 차리고!”

“네, 시녀장님!”

“그러면 모두 배정받은 곳으로 가서 지시에 따르세요!”

백합궁의 시녀들은 궁의 유지에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고 축제 준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새로운 곳에서 축제 준비를 해야 하는구나.’

마리는 생각했다. 장미궁의 정원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기에 그녀도 축제 준비를 위해 다른 곳으로 배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상급자인 수잔에게 새로운 근무처를 전해 들은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수정궁…… 말인가요?”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니?”

수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마리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러면 내일부터 바로 가면 돼.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그곳에서 준비하는 분들 도와주고, 뒷정리만 하면 될 테니까.”

“네.”

수잔은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장미궁 정원 공사 때 정원사들 사이에서 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던데, 그때만큼만 하면 돼.”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시녀장의 방에서 나온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정궁이라고?’

일이 어려울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잔의 말처럼 심부름 수준의 간단한 일만 하면 되니까. 다만 그녀는 얼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녀가 곤란해하는 이유는 바로 수정궁이 축제 때 오케스트라단의 음악 공연이 예정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곳에서 공연을 준비 중인 오케스트라단의 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일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었다. 다만 기이한 꿈을 꿀 때마다 그 꿈이 현실에서 실현된다는 점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설마 이번에도 또?’

모차르트. 꿈속에서의 그 단어가 그녀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마리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 천재라는 모차르트가 되는 꿈을!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꾸는 모차르트의 꿈이었다.

「모차르트! 모차르트!」

어린 소녀가 목소리를 높여 모차르트를 불렀다. 꿈속에서 모차르트가 된 마리는 손을 흔들었다.

「아, 누나!」

「뭐 해? 지금 바로 파리로 출발해야 하는데. 더 지체하면 연주회 시작에 늦을 거야.」

「풍경을 보고 있어.」

「풍경?」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리는 저 소녀가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이란 것을 눈치챘다.

「응, 풍경.」

그 말에 소녀는 시선을 돌렸다. 로텐부르크 성벽 아래로 한적한 시골 풍경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별것 없잖아?」

「음악 소리 안 들려?」

「음악 소리? 전혀 안 들리는데?」

인상을 찌푸리는 누이를 보며 모차르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리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했다. 아무것도 없는 전원이었건만, 정말로 음악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던 것이다.

산들산들 바람 소리, 낮은 개울 소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들판이 뻗어 나가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음악이 되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악보가 되었고, 음표가 되었으며, 선율이 되어 흘렀다. 그때 누이가 잔소리를 하였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자. 아버지가 기다려.」

「응, 알았어. 가자.」

그렇게 모차르트는 수없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서의 공연은 늘 그렇듯 대성공이었다.

거기까지 꿈을 꾼 마리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 또 꿨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두 번째 모차르트의 꿈이었다.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음악 소리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이번에도 능력을 얻게 된 것일까?’

오늘 꾼 꿈이 그냥 단순한 꿈인 것인지, 지난번 같은 능력이 생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은 특별한 느낌은 없는데, 모르겠다. 일단 빨리 출근하자. 늦겠어.’

아직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연습장에 도착해 정리를 끝내 놔야 한다. 그렇게 수정궁 연습장에 도착한 마리는 감탄을 뱉었다.

“와아, 악기들이다!”

공연장 뒤쪽에는 팀파니, 튜바, 심벌즈 등의 악기가 놓여 있었다.

“이게 금관악기구나. 멋지다.”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궁에서 일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늘 백합궁 안에서 허드렛일만 해서 공연이나 연회장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번 축제 때는 음악회를 들을 수 있었으면.’

그녀 같은 하급 시녀가 음악을 들을 기회는 흔치 않다.

‘그래도 이번에는 대규모 공연이 있다고 했으니 들을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였다. 단원들이 나오기 전에 악기들을 정리하고, 바닥을 청소했다. 그러다 우연히 추억이 담긴 물건을 발견했다.

“와아, 피아노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대신해서 최근 들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건반악기였다.

‘이전에 많이 쳤었는데.’

마리의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그녀가 이전에 살던 궁에도 피아노가 있어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났다.

‘피아노 참 좋아했었는데.’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건반을 누를 때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좋았다. 같은 건반을 눌러도 누르는 방법에 따라 다른 음색이 나는 것도 신기했다.

‘잠깐만 쳐 봐도 될까.’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런데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말렸다.

“조율 끝난 거라 지금은 만지면 안 되는데.”

“아……!”

마리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젊은 청년이 싱긋 웃고 있었다.

“오늘 새로 오기로 한 시녀님?”

“아, 네! 이번에 오케스트라단을 보조하러 온 마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난 바한. 황궁 오케스트라의 임시 악장이에요. 전임 악장이 몸이 안 좋아 급하게 은퇴해서 임시로 지휘를 맡고 있어요.”

그 말에 마리는 깜짝 놀랐다.

‘저렇게 젊은데 임시 악장이라고?’

아무리 임시라지만, 믿기지 않았다.

“혹시나 일하다 곤란한 문제가 있으면 나한테 말하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피아노는 나중에 시간 날 때 만지게 해줄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 젊은 임시 악장은 친절한 사람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단원들이 모이고, 오케스트라단의 정식 연습이 시작되었다.

“자, 다들 모였죠? 늘 연습하던 교향곡 다시 시작합니다. 탄신 축제 날 귀빈들을 대상으로 공연할 것이니 꼭 완벽하게 연습해야 해요.”

“네, 마에스트로!”

오케스트라단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축제 때 있을 정식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마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그들을 보조하는 것이었고. 수석 시녀 수잔의 말처럼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었다.

“자, 시작합니다!”

젊은 지휘자, 바한의 신호와 함께 연습이 시작되었다. 흐느끼는 듯한 클라리넷의 글리산도가 울려 퍼졌고, 곧 연습장은 수많은 악기의 음색이 흘러넘쳤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마리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했다. 일반 사람들은 평생이 가도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특히나 원 없이 듣는 것은 돈이 아주 많은 귀족이나 가능했다. 비록 연습 중이라지만, 이렇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일개 시녀인 그녀에게는 굉장한 호사였다.

‘좋다.’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음악을 감상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나 들었을 때일까? 마리는 기이한 느낌을 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이 거슬리는 느낌은?’

마치 어지럽혀진 방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왜 이런 느낌이 들지?’

곧 그녀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연주의 틀린 부분이 자꾸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2번 바이올린, 호른 틀렸구나. 아, 이번에는 팀파니 박자 틀렸네. 전체적인 템포도 조금 안 맞는데? 아, 바이올린 또 틀렸다. 저 부분의 트레몰로는 저렇게 처리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야. 나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지? 오케스트라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그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악기의 소리도 구분 못 하는 것이 정상인데, 너무나 선명하게 연주의 잘잘못이 들어왔다.

‘처음 들어본 곡인데 어떻게 틀린 부분을 아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곧 원인을 깨달았다.

‘모차르트! 모차르트야!’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라는 모차르트! 그의 꿈을 꾼 영향을 받는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 사실을 인식하고 보니 곡이 성부를 구분해 악보를 보듯 머리에 인식되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는 순간 모차르트가 되어 생각했다.

‘황궁 악단인데, 연주가 이래도 되는 건가? 단순히 연습 미숙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과연 모차르트랄까? 그녀는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곡 자체에 문제가 있어. 일단 테크닉적으로 너무 어려워. 곡의 주제에 비해 쓸데없이. 이렇게 과장된 테크닉을 쓰면 난잡하게만 들릴 뿐이야.’

그녀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푸가 형식이 지나치게 난해하게 꼬여 있고. 그래서 듣기에도 별로 좋지가 않아.’

푸가(Fugue). 하나의 주제를 대위법적인 기법을 사용해 끝없는 모방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형식의 곡을 뜻한다. 작곡적으로 난해한 만큼 음악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만 듣기에는 편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건 마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곡 같잖아. 듣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고.’

자신이라면, 아니, 모차르트라면 절대 이런 곡을 만들지 않으리라.

‘전혀 그런 성격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마리는 의외란 시선으로 바한을 바라보았다. 배려 깊은 성격으로 보였는데 이런 곡을 만들다니. 뜻밖이었다.

“자, 여기까지. 잠시 쉬겠습니다.”

“네, 마에스트로!”

단원들은 잠시 악기를 내려놓고 땀을 닦았다. 마리는 시녀로서 막간에 자신이 할 일은 없는지 살폈다. 그런데 그때 임시 악장인 바한이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마리 양.”

“네, 마에스트로! 시키실 일이라도?”

“아니, 그런 것은 없고요. 뭐 물어볼 게 있어서요.”

“어떤?”

“방금 우리 연주 들었죠? 어땠어요?”

“……!”

마리는 뜻밖의 물음에 놀라 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그냥 남들이 듣기에 어떤지 궁금해서 그래요. 편하게 말해도 돼요.”

“그게…….”

엉망이었다.  모차르트의 평가대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하다가 마리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마리! 정신 차려! 큰일 날 뻔했잖아!’

아슬아슬하게 대형 사고를 피한 그녀는 말했다.

“그…… 나쁘지 않았어요. 웅장하고…… 뭔가 어려워 보이고…….”

왠지 저 하늘 어디선가 모차르트의 순수한 영혼이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꿋꿋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바한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래요? 이상하다.”

“네?”

“듣는 데 답답하진 않았어요?”

“……!”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곡을 그렇게 말하다니?

‘혹시?’

바한은 한탄하듯 말했다.

“사실 이거 우리가 하고 싶었던 곡이 아니거든요. 내가 지은 곡도 아니고. 전임 악장의 곡인데.”

“아…….”

역시나. 그의 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리는 조심히 물었다.

“그러면 왜 마에스트로의 곡으로 안 하시고요?”

이 시대에는 보통 지휘자가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물음에 바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건…….”

그때, 둘의 대화를 엿듣던 한 단원이 외쳤다.

“마에스트로! 그냥 이 답답한 곡 말고 마에스트로의 곡으로 합시다!”

“그래요! 우리도 이 허영만 가득한 전임 악장의 곡보다는 마에스트로의 곡을 연주하고 싶어!”

그들의 외침에 바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 돼요. 아시잖아요. 제 교향곡은 미완성이란 것을.”

“미완성이면 뭐 어떻소? 곡이 그렇게나 좋은데. 대충 종결부 마무리 짓고 그 곡으로 합시다. 공연을 들을 청중들도 마에스트로의 곡을 훨씬 좋아할 거요.”

“맞소!”

마리는 그들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곡이 얼마나 좋기에 미완성인 곡을?’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완성인 곡은 공연에 올릴 수 없다. 미완성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완성도를 지닌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급기야 단원들은 이렇게 외쳤다.

“이 답답한 곡 더 이상은 못 하겠소! 공연까지 무리라면 기분이라도 전환할 겸 한 번만 연주해 봅시다.”

“그래, 우린 마에스트로의 곡을 연주하고 싶어요!”

“옳소!”

젊은 악장 바한은 곤란한 얼굴로 지휘석에 올라갔다.

“그러면 공연은 무리이고. 기분 전환 삼아 한 번만 갑시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시끄럽게 떠들던 단원들이 악기를 잡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교향곡 1번, G장조, 전원 풍경(The country), 1악장. 시작합니다.”

이윽고 그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며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선율을 들은 마리는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방금 연주했던 것처럼 복잡한 기교가 사용된 곡은 아니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였다. 먼저 비올라가 잔잔한 바람을 흘려보냈다. 그 뒤에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가 고음부와 저음부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터뜨렸다.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는 현악기의 소리 끝에 팀파니가 낮은 북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펼쳐지는 전원 풍경.

‘편안하다.’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복잡하게 들렸던 아까의 곡과는 전혀 다른 편안하고 기분 좋은 곡이었다.

‘아직 연습이 부족해서인지 틀린 부분들은 조금 있지만.’

그런 미스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음악에 위로받는 것 같아.’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지치고 힘들 때, 흐르는 강물이나 하늘을 보며 위로받을 때. 딱 그렇게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계속 있고 싶어.’

마치 흐르는 강물을 보며 멍하니 있듯이, 그렇게 계속해서 있고 싶었다. 바한의 지휘에 따라 오케스트라는 계속해서 다른 음색을 표현했다. 시원한 바람이 되기도 했고, 거침없는 강물이 되기도 했고, 넓은 바다가 되기도 했다. 다양한 그 음색의 공통점은 듣는 사람을 향한 위로와 평안함이었다.

‘좋다.’

그렇게 그녀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돌연 바한이 손을 내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까지예요.”

“바한?”

“여기서 더는 진행 못 시키겠어요.”

단원들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너무 좋은데. 이대로 주제부를 발전시키다 클라이맥스로 끝맺으면 안 될까요?”

바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또 다른 주제를 전개해야 곡을 제대로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렴풋한 악상만 떠오를 뿐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제 능력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아요.”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주제를 더 전개하겠다는 거예요?”

바한은 짧게 답했다.

“삶.”

“삶?”

“네, 이 곡에는 전원만 있을 뿐 삶이 없어요. 저는 이 곡 안에 삶을 녹여내고 싶어요. 그래서 듣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전달하고 싶어요.”

그 말에 단원들은 아쉽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래도 아쉬운데…….”

바한도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아쉬운 건 저예요. 어떻게든 곡을 완성시키고 싶은데 능력이 안 되어서 못 하겠으니. 마음 같아서는 누구에게라도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렇게 바한과 단원들은 아쉬움을 접고, 아까 전 그 복잡하고 난해한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쉽다.’

좋은 곡인데, 이렇게 접는다니. 만약 저 곡이 완성되면 얼마나 멋진 곡이 될까? 그리고 저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들어보고 싶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순간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선율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오로지 그녀의 머릿속에만 흐르는 선율이었다.

‘이, 이 선율은?’

선율의 정체를 깨달은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까 들었던 전원 풍경이야!’

그냥 머릿속에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각 파트 성부들의 음표와 박자가 정확히 머릿속에 인식되었다. 마치 악보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그냥 전원 풍경도 아니었다. 주 멜로디 밑으로 다른 주제가 숨어 있었다. 바로 바한이 말한 ‘삶’이란 주제가!

‘1악장, 2악장, 3악장……!’

바한이 작곡한 부분이 끝나도 멜로디는 멈추지 않았다. 멜로디는 스스로 뻗어 나가 2악장을 이루고, 3악장을 이루었다. 그러며 주제는 변화를 거듭하고, 완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한 과정이 어렵지도 않았다. 실타래에서 실을 풀어내듯 자연스레 곡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 때일까? 머릿속에서 곡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양, 마리 양?”

“아, 아, 네! 마에스트로!”

바한이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혹시 몸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닙니다!”

“그래요? 계속 멍하니 서 있어서.”

그 말에 마리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연습이 한번 끝났는지 오케스트라단은 악기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한 시간 넘게 멍하니 있었던 거야?’

놀라 주춤하고 있자, 바한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몸 안 좋으면 바로 말씀하시고요.”

오케스트라단은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마리는 머릿속을 살폈다.

‘곡이…… 완성되었어. 전원 풍경(The country) 교향곡, 총 4악장.’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절대 안 믿을 이야기였다. 시녀인 그녀가 교향곡을, 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머릿속으로 완성하다니. 하지만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오선지 위에 악보가 흘러 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쩌지?’

마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으로 완성한 이 교향곡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머릿속에서 묻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한에게 무턱대고 말하기도 곤란한 일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그가 자신이 완성한 교향곡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이 완성한 교향곡을 무시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떠올린 교향곡은 ‘모차르트’의 시선으로 보아도 훌륭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지나친 주목을 받을까 봐 문제였다. 음악과는 연관도 없는 하급 시녀인 자신이 교향곡을 완성한 것을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다.

‘정말 어쩌지?’

마리는 바한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와 오케스트라단은 여전히 답답한 전임 악장의 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 * *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그날의 연습이 끝났다. 모두가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였다.

“제가 정리할게요.”

“고마워요. 그러면 내일 봐요, 마리 양.”

“네,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장 뒷정리는 마리의 몫이었다. 그녀는 청소하며 힐끗 악장 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습장 구석에서 악보로 보이는 오선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는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미완성 교향곡, 전원 풍경 악보구나.’

힐끗 살핀 것이지만, 악보가 어떤 음악을 담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꿈에서 얻은 모차르트의 능력 덕분이다.

“아, 마리 양? 무슨 일이죠?”

기척을 느낀 바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리 양?”

마리가 주저할 뿐 아무런 말도 안 하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마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저, 마에스트로,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뭐죠? 편하게 물어보셔도 돼요.”

마리는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해서 여쭈어 보는데…… 전원 풍경 곡을 완성하는 데 누군가 도움을 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

바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죠? 누군가 도움을 주다니?”

마리는 긴장감에 횡설수설 말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천사님이라도 내려와 곡을 완성해 준다면.”

“천사님이요?”

“아니, 꼭 천사님이 도와줄 거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런 비슷한 일이 생기면…….”

바한은 돌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많이 우울해 보이긴 했나 봐요. 그런 말씀도 해주시고. 위로 고마워요.”

“아, 위로 아닌데…….”

바한이 미소 지은 채 말했다.

“누군가 도와주면 당연히 고맙겠죠.”

그 말에 마리는 다른 것을 질문했다.

“혹시…… 기분이 나쁘진 않을까요?”

“기분요?”

“네, 그래도 마에스트로의 곡이니까. 다른 사람이 도움을 주면 혹시나 기분 나쁘실까 해서요.”

마리는 음악가들의 유별난 자존심을 생각해 물었다. 하지만 바한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곡의 경우에는 달라요.”

“……?”

“그런 자존심보다 이 곡이 완성되는 것을 너무 보고 싶거든요. 다른 누구보다 제 자신이. 그래서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으면 영혼이라도 바치고 싶다는 심정이에요.”

“……그렇군요.”

마리는 무언가 생각이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한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이런 건 왜 묻는 거예요? 혹시 마리 양께서 곡을 대신 완성해 주시려고요?”

“아, 아니요!”

그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바한은 그런 그녀의 어색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저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수고해 주시고요. 내일 뵙도록 해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홀로 남은 마리는 연습장 정리를 마무리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몰래, 아무도 몰래 도와드리자.”

만약 바한이 도움을 원하지 않으면 그녀도 자신이 떠올린 곡을 묻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는 곡의 완성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어떤 도움을 받더라도 말이다.

촤악!

그녀는 연습장 바닥에 두루마리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정신없이 악보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요한 주제가 되는 부분의 모티브만 적자.’

오케스트라 모든 파트의 악보를 적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모든 부분을 적으면 그건 바한 님의 곡이 아니게 되는 것이니까.’

그녀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바한이 막힌 부분을 뚫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면 그가 나머지 부분은 알아서 채워 넣을 것이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누가 오기 전에 빨리 마무리하자. 그리고 몰래 바한 님의 자리에 넣어 두면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거야.’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일개 시녀가 이런 일을 했다고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현장에서 들키지만 않으면 문제없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바쁘게 악보를 적어 내려갔다.

* * *

한편 그때, 사자궁에서 황태자 라엘은 하얀 가운을 입은 어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면은 어떠신지요, 전하?”

“비슷하다.”

그 말에 어의, 고돈 준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소신이 불민하여.”

이전부터 황태자는 고질적인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2~3일 밤을 새워도 좀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리 피로해도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가 더 많았다.

“어쩔 수 없지.”

라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약의 용량을 조금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그래.”

어의가 나간 후, 황태자는 의자에 몸을 기대 잠시 눈을 붙였다. 불면으로 어제도 거의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다. 하지만 잠시 쉬기도 전에, 시종이 다른 인물이 왔음을 알렸다.

“재상께서 방문하였습니다.”

“들라 하라.”

곧 쾌활한 인상의 미남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무슨 일인가?”

“으악, 못 찾겠습니다, 전하!”

“무슨 말이지?”

“그 조각사 말입니다! 아무리 뒤져도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전하, 이렇게 여쭈옵기 송구스러우나, 정말로 확실히 보신 것은 맞는지요?”

황태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봤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으악! 이 혈견을 이렇게 골탕 먹이다니!”

혈견(血犬). 내전 당시 목표로 삼은 적을 반드시 궤멸시켜 그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오른은 이를 갈며 말했다.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난 그 조각사에게 고마움을 표하려고 찾는 거다. 벌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요! 절 이렇게 고생시키고 있으니 벌도 주고, 상도 주어야지요!”

그러며 오른은 말했다.

“클로얀 왕국의 모리나 왕녀 이후로 절 이렇게 골탕 먹이는 인물은 처음입니다.”

그 말에 황태자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모리나 드 브란덴 라 클로얀. 지금도 그들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3년이나 되었군, 그녀를 찾기 시작한 것이.”

“네, 전하. 도대체 어디에 숨었는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오른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아닐 거다. 아무도 시체를 본 적이 없으니.”

“하지만 살아 있다면 아직까지 발견이 안 될 리도 없지 않습니까? 클로얀 전역뿐 아니라, 인근 지방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이제 저는 모리나 왕녀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생김새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요.”

“가상의 인물은 아닐 거다. 가상의 인물이라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왕국 백성들에게 그렇게 인상에 남는 일을 하지도 못 했겠지.”

모리나 왕녀가 공주로 왕궁에 머문 것은 불과 몇 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워낙 짧은 기간이었고, 형제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다시피 해서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한 점 있었던 초상화는 전란 중 불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기간에 백성들에게 힘닿는 대로 선행을 했어. 대단한 일이지.’

당시의 일로 그녀에게 생긴 별명은 ‘얼굴 없는 성녀’였다. 황태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형편없는 놈들만 있던 클로얀 왕족 중 내가 유일하게 감탄을 한 인물.’

3년 전이니 모리나 왕녀 14살 때의 일. 그렇게 어린 소녀가 남들의 눈을 피해 백성들을 돕다니. 물론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왕가에서 천시받던 힘없는 어린 소녀가 선행을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내탕금을 남몰래 시녀를 시켜 빈민들에게 전달하거나, 병자를 위한 약을 사게 하는 정도? 큰 규모의 금액도 아니었다.

하지만 큰일은 아니었지만, 쉬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넉넉한 상황에 있다 해도 남을 위한 선행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까. 더구나 당시의 모리나 왕녀는 빈말로도 넉넉한 상황이라 할 수 없었다. 왕가의 폭정에 시달리던 클로얀 왕국의 백성들이 크게 감동한 것은 당연한 일. 그들은 지금까지도 모리나 왕녀를 잊지 않고 있었다.

“클로얀의 백성들은 아직도 그녀를 잊지 않고 있어. 그러니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리나 왕녀는 반드시 찾아야 한다.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모리나 왕녀를 찾으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오른은 가만히 물었다.

“역시 죽이실 것입니까?”

황태자 라엘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최악의 경우엔 죽여야겠지. 그녀에겐 아무런 죄도 없지만, 아직도 그녀를 찾고 있는 클로얀의 백성들이 있으니까.”

피의 황태자다운 냉혹한 말이었다. 그러나 오른은 그 말에서 다른 뜻을 발견했다.

“최악의 경우란 말씀은? 그러면 죽이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클로얀의 백성들을 완전히 제국으로 복속시키려면 왕가의 마지막 핏줄인 그녀를 죽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건 하책(下策)이다. 클로얀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어떤?”

의아해하는 재상에게 황태자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말씀은?”

“그래, 그녀를 내 비로 삼겠다는 것이다.”

“……!”

오른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황태자의 말이 훌륭한 비책임을 깨닫고 감탄했다.

“그렇군요. 모리나 왕녀를 전하의 품에 거둔다면 그녀를 바라던 클로얀의 백성들도 자연스레 전하에게 복종하겠군요. 훌륭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모리나 왕녀를 찾아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오른은 한 가지 떠오른 문제점을 생각하고 물었다.

“그런데 전하.”

“왜 그러지?”

“그렇게 하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이지?”

“모리나 왕녀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잖습니까. 그런데 비로 맞아도 괜찮으실지.”

황태자 라엘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른. 난 이 제국을 지배하는 자다. 중요한 것은 제국에 이득이 되냐, 안 되냐일 뿐. 여인을 받아들이는 데 내 감정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황태자다운 대답이었다. 오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면 만약 모리나 왕녀가 전하의 비가 되는 것을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황태자는 짧게 답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지.”

그 뒤 오른은 이런저런 국정을 더 상의한 후 방에서 나갔다.

“후우.”

황태자는 가면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 전 오른과 나눈 대화 탓일까, 아니면 지독한 불면 때문일까. 몹시 피로했다.

“위스키라도 내오라고 할까요?”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호위 기사 알몬드가 물었다.

“아니, 술을 마시면 더 못 잘 것 같군. 차라리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조용히 다녀오겠다.”

“하지만…….”

“괜찮아.”

그 강한 어조에 알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홀로 산책을 다니는 것은 황태자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경호에 문제가 생기니 알몬드는 곤란했다.

“걱정하지 말도록.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이전이라면 몰라도. 뼈가 있는 말이었다. 황궁 안에서 그를 죽이려던 자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의 손에. 결국, 알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꼭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황태자 라엘은 홀로 산책에 나섰다. 눈길을 끄는 것이 싫어, 옷도 평범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어디로 가지?’

선선한 저녁 여름 바람을 맞으니 국정에서 온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한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수정궁이군. 아직 공연 연습 중인 건가? 시간이 늦었는데 기특하군.’

그는 생각했다.

‘가서 오랜만에 음악이나 들어볼까.’

수정궁 바로 뒤편에는 공연장의 창문과 맞닿아 있는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에 누우면 공연장 안에 들어갈 것 없이 창을 통해 들리는 음악 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과거 때 묻지 않던 어린 시절, 그렇게 종종 몰래 음악을 듣곤 했었다.

‘음악을 듣다 잠든 적도 많았었는데. 그러다 어머니랑 누이에게 혼도 나고.’

그는 추억을 떠올리고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가급적 편안한 음악이었으면 좋겠군. 편안한 음악을 들으면 불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라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정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에게 불행인지, 행운인지 지금 수정궁에는 오케스트라가 없었다. 수정궁에 있는 것은 오직 시녀인 마리뿐이었다

“끝났다!”

마리는 자신이 적은 악보를 보며 외쳤다. 최대한 간단하게,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부분만 적었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머지 부분은 바한 님이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재빨리 종이를 접어 바한의 자리에 넣었다.

‘본 사람은 없겠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한테도 안 들킨 것 같다. 그녀는 연습장의 등불을 끄고 서둘러 나갔다. 그런데 밖으로 향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어둠 속에 위치한 피아노였다.

‘피아노.’

그녀는 우뚝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직도 떠돌고 있는 모차르트의 기운 때문일까? 문득 기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한 번만 연주해 봐.

마치 모차르트가 속삭이는 듯한 충동.

-너 한 번도 네가 떠올린 교향곡 들어 본 적 없잖아. 피아노로 연주해 봐. 직접 연주해 보고 싶지 않아?

해보고 싶었다. 그 충동에 따르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망설여졌다.

‘괜찮을까?’

이미 너무 오래 연습장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한 번만 연주해 봐.

결국, 그녀는 충동에 못 이겨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진짜 한 번만. 한 번만 쳐 보고 가자.’

그렇게 그녀는 연주를 시작했다. 낮지만 맑은, 그러면서도 마음에 스며드는 음색이 연습장으로, 그리고 수정궁 밖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운명이었던 것일까? 그곳에는 황태자 라엘이 있었다.

“음악 소리가?”

라엘은 중얼거렸다. 수정궁에 왔는데, 불이 꺼지기에 연습이 끝난 줄 알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선율이 들려왔다.

‘피아노?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한 건가?’

그렇게 선율을 듣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좋군. 정말로…….”

낮게 깔리는, 그러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맑은 음색이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라엘은 이 음색이 최고 수준에 다다른 연주 소리란 것을 눈치챘다.

‘대단한 비르투우소(Virtuoso, 명연주자)이군. 궁정 악단에 이 정도의 건반 연주자가 있었나? 누구지, 악장인가?’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아직 진정한 놀람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수정궁 안 마리의 오른손이 옥타브를 올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라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피아노의 멜로디 안에 흐르는 강물이 굽이쳤다. 강물뿐이 아니었다. 따뜻한 바람, 깊은 바다, 넓은 들판. 그 모든 풍경이 피아노 소리에 섞여 그에게 다가왔다.

‘따뜻하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치 위로받는 듯한 느낌. 하늘도, 강물도, 바람도, 바다도, 모두 다 그를 위로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라엘은 눈을 감았다.

‘편안해. 마치 마음이 치유되는 듯한 음악이다.’

최근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안함이었다. 이 음악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면 지긋지긋한 불면도 치료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음악을?’

그때, 음악의 풍이 바뀌었다. 점차적으로 느려지는 리타르단도.

마치 들판에서 황혼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황혼의 끝에는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떨 때는 웃고, 어떨 때는 울며, 어떨 때는 기뻐하고, 슬퍼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 낮게 깔리는 단조의 선율은 삶이 평안하지만은 않다고, 때로는 괴롭고 슬프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괴롭고 힘들어도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있는 것은, 소중한 사람이 있기에 삶이 따뜻하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

황태자 라엘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같이 있기에 삶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그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아.”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곡은 도대체…….’

고작 음악에 불과하건만, 이토록 가슴을 진동케 하다니.

‘도대체…….’

그렇게 라엘은 음악이 끝났음에도 곡의 여운에 휩싸여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가 이 곡을 만든 것이지?”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 전 조각사처럼 놓치고 싶지 않아 그는 연습장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야 하지?’

수정궁 안으로 들어온 그는 주변을 살폈다. 수정궁 안에는 당연히 연습장만 있는 것이 아닌지라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헷갈렸다. 더구나 대부분의 등불이 꺼져 있어 길을 걷기도 어려웠다.

‘이러다 설마 또 놓치는 건?’

인상을 찌푸리고 발걸음을 바삐 움직일 때였다. 그 순간 가슴 부위에 무언가 부닥쳤다.

“꺄악!”

“……!”

깜짝 놀라며 보니 작은 소녀였다. 이제 17살 정도로 보였는데, 귀엽고 착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아야. 아야. 아파.”

엉덩방아를 강하게 쪘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인상을 찌푸리던 소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보고 다녀서.”

라엘은 생각했다.

‘시녀인가?’

복장을 보니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하급 시녀 같았다. 착한 인상에 나름 귀여운 외모였지만, 라엘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방금 기적 같은 연주를 들려준 음악가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라엘은 일단 자신 때문에 넘어진 시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나? 일어나라.”

“아, 가, 감사합니다.”

시녀 마리는 손을 잡고 일어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와아, 잘생겼다.’

부드러운 금발, 그림 같은 얼굴선.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차가운 눈빛이 흠이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아름다워 비현실적이게 느껴질 정도였다.

‘누구지? 평복인 것을 보니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시종인가?’

늘 철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에, 설마 그 공포의 황태자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목소리마저 미성이었다.

“오케스트라단의 연습장은 어디 쪽이지?”

“아! 저쪽이에요!”

마리는 자신이 온 방향을 가리켰다.

“알겠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녀가 자신이 찾는 연주자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혹시 이쪽으로 누군가 오는 것을 못 봤나?”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 말고는 이 방향으로 아무도 안 왔어요.”

황태자는 곧 연습장에 도착했다.

“이런!”

역시나 불안한 예감대로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연습장에는 금관 악기들과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간 거지?”

그는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온 문 말고도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몇 개 더 있었다.

‘다른 통로로 나갔나 보군.’

방금 자신이 온 통로에는 시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그 방향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엘은 다른 통로로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연주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디로 간 거지?”

하지만 없었다! 주변을 다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혹시나 싶어 근처에서 일하는 시종이나 경호대에도 확인해 봤으나 아무도 그 연주자를 본 사람은 없었다.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군. 내일 악단 단원들을 불러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지라 황태자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당연히 황궁 악단의 단원이겠지. 악장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군.’

하지만 지난번 조각사의 일 때문일까? 이유 없이 괜히 안 좋은 느낌이 들었지만, 황태자는 곧 고개를 저었다.

‘방금 연주는 최고의 대가나 가능한 연주. 이 정도의 음악성을 가진 음악가는 황궁에도 거의 없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까 전 만났던 시녀도 다시 불러서 물어봐야겠군. 연습장 근처에 있었으니, 분명 연주를 들었을 터. 누가 연주했는지 봤을 테니까.”

라엘은 아까 전 마주했던 귀여운 인상의 작은 시녀를 떠올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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