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2화 (3/54)

Chapter 2

그렇게 다음 날부터 마리는 백합궁이 아닌, 황궁의 장미 정원으로 출근했다.

“잘 부탁합니다! 백합궁에서 온 시녀 마리입니다!”

그녀는 씩씩하게 인사했다. 이른 아침부터 한창 정원 조경에 열심이던 정원사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린 시녀님이네?”

“네,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은 무슨. 우리야말로 잘 부탁하지. 앞으로 잘해 보자고.”

그녀의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잘 부탁해요.”

“위험한 도구가 많으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다행히 정원사들은 친근히 그녀를 맞아주었다. 서로 안살림을 담당하는 내명부와 의전을 담당하는 궁내부로 소속이 다르기도 했고, 남자들만 득실거리던 정원사 사이에 어린 소녀가 오자 기뻐하는 눈치인 것 같기도 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부탁하는 것만 잘해 주면 돼.”

정원 조경을 총감독하는 책임 조경사 한스의 말대로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었다. 대부분의 일은 정원사들의 몫이고, 그녀는 그저 그들의 편의를 돌봐 주기만 하면 됐다. 식사를 가져다주고,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고. 어지럽혀진 작업 현장을 정리하고. 정말 간단한 일들이라 백합궁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편했다.

‘역시 특별히 할 일은 없구나.’

얼마 전 꾸었던 꿈 때문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역시나 그녀가 나설 일은 없어 보였다.

‘좋네. 일하기도 편하고.’

더운 여름날 밖에 있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모두 좋았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마리야, 더운데 햇빛 아래 있지 말고 저기 나무 밑에 가서 앉아 있어.”

“그래, 얼굴 다 타요. 지금 딱히 할 일 없으니 좀 쉬어요.”

특별히 그녀가 한 것도 없는데도, 정원사 모두 그녀에게 잘해 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총책임자인 한스는 그녀가 고향에 두고 온 딸을 닮았다며 각별하게 잘해 주었다.

“마리가 신경 써서 챙겨 준 것이라 그런지 더 맛있네.”

한스는 샌드위치를 뜯으며 웃었다.

“조금 더 있으니, 많이 드세요.”

“응, 고마워. 마리, 너도 앉아서 쉬어.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데.”

“아, 괜찮은데…….”

“앉아, 앉아. 아무도 안 보니까.”

“가, 감사합니다.”

마리는 엉거주춤 그의 옆에 앉았다.

“밥은 먹었니?”

“아직…….”

“이런.”

한스는 혀를 찼다.

“바빠도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더 마르면 어떻게 하려고.”

그 따뜻한 말에 마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국왕의 숨겨진 딸로 왕성에 들어갔지만, 굴러들어온 돌로 구박만 받았을 뿐이다. 왕국이 망한 후, 시녀가 된 뒤로는 말할 것도 없고. 한스의 따뜻한 말을 듣고 있으니 괜히 엄마 생각이 나, 마리는 화제를 돌렸다.

“조경하시는 것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

자신이야 심부름만 하지만 정원사들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다듬고, 자르고, 꽃을 심고, 화단을 옮기고 완전히 대공사였다.

“응? 당연히 힘들지. 그래도 재미있어.”

총책임자 한스는 말했다.

“우리 정원사는 정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니까.”

“행복을 주는 사람들…….”

마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왠지 멋진 말이었다.

‘나도 남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작고 보잘것없는 자신이지만, 언젠가는 그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한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걱정이구나.”

“……?”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셔야 할 텐데.”

“아…….”

그 말에 마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정원의 공사를 명령한 황태자가 어떤 인물인지 떠올랐던 것이다.

피의 황태자 라엘! 그 이름은 공포나 다름없었다. 서자로 태어나, 스스로 황태자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그 과정에서 그가 흘린 피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늘 쓰고 다니는 철가면에 피가 마를 일이 없다고 해서 혈가면이라고도 불리는 철혈의 군주.

‘우리 클로얀 왕국도 황태자의 손에 의해 멸망했지.’

그녀는 왕성이 함락되던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피에 물든 철가면을 쓰고 검을 휘두르던 그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설마 이제 와서 내 정체를 들킬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잔혹한 황태자이니, 그가 정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떤 벌을 받을지 몰랐다.

특히 총책임자인 한스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직 황태자가 그들 같은 아랫것들의 목숨을 취한 적은 없지만, 고래로 폭군은 내키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는 했으니까. 마리는 급히 말했다.

“저는 정원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정말 멋지게 꾸며지고 있는 것 같아요. 분명 황태자 전하께서도 흡족해하실 거예요.”

한스는 미소 지었다.

“뭐, 3황비 마마의 고향인 프랑스의 정원처럼 비스타 양식을 도입해 평면기하학적으로 꾸미고 있으니, 아마 싫어하지는 않으실 것 같아.”

비스타 양식. 권위를 상징하는 궁을 주축으로 선형으로 길들이 뻗어 나가며, 정원 내부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이루는 형식이다.

“정원 조경은 어떻게 넘어갈 것 같은데, 문제가 있어.”

“어떤?”

“3황비 마마의 조각상이 문제야.”

“아…….”

마리는 입을 가렸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정원의 중심이 되는 지점에 3황비 마마의 조각상을 만들 건데…… 그 조각상을 황태자 전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어.”

그러며 한스는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10년 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3황비 마마를 향한 황태자 전하의 효심은 워낙 유명하니까. 조금이라도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분노를 어떻게 감당할지.”

그렇게 말한 한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한테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구나.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고향에 있는 딸아이 때문인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딸애가 딱 너랑 동갑이거든.”

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쉬고 있는 정원사들에게 외쳤다.

“자! 밥 다 먹었으면 이제 그만 쉬고 일어나 일하자고!”

“네!”

분주히 다시 정원을 다듬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마리는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되어야 할 텐데.’

물론 그녀가 보기엔 정원도, 조각상도 다 잘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보는 기준은 모두가 제각각이니까.

‘만약 그 피의 황태자가 마음에 안 들어 하면.’

마리는 이전에 봤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모리나 왕녀는 어디에 있지? 반드시 찾아내라.”

피에 젖은 칼을 들고 자신을 찾던 모습. 만약 그때 시녀로 분장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냉혹한 철가면을 쓴 그는 한 치의 자비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으니까.

‘만약 조각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화를 피할 수 없을 거야.’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조각을 담당한 조각사는 큰 벌을 받으리라.

‘한스 정원사님.’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3황비 마마의 조각을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총책임자인 한스였다. 그가 황실 최고의 조경사이자 조각사였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그녀는 고민했다. 하지만 일개 시녀인 그녀가 무슨 수로 그를 돕겠는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면 다음 작품을 기대하지. 정원의 구도자(求道者), 피오나.」

얼마 전 꾼 꿈의 내용.

‘혹시?’

한 가지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그날 밤, 마리는 숙소 근처에 있는 창고에 몰래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실망한 표정으로 도구를 내려놓았다.

“안 되잖아, 역시.”

그녀가 내려놓은 도구는 정과 망치 등 조각 도구였다. 정원 손질용 가위도 있었다. 혹시나 꿈속에서 봤던 피오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나 안 되었다.

‘하녀 꿈을 꾸었을 때는 왜 능력이 생겼던 거지? 그냥 그때가 특별했던 걸까?’

마리는 고민했다. 사실 아무런 능력이 안 생기는 게 당연했다. 꿈을 꾼다고 꿈속 주인공의 능력이 생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지난번처럼 능력이 생기면 한스 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망치와 정을 만져도 아무런 능력도 생기지 않았다. 혹시나 꿈을 더 꾸어야 하는가 싶어 잠을 청했지만, 아무런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정원 조경을 감독하며 조각을 하는 한스의 얼굴은 점차 초조해졌다. 뭔가 조각이 뜻대로 안 풀리는 눈치였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뭔가 부족해.”

그런 그를 보며 마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예쁜데.’

생전에 굉장한 미인이었다는 3황비 마마의 조각상답게 조각상은 예뻤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긴 했다. 문외한인 마리도 그렇게 느낄 정도니, 전문가인 한스는 오죽하랴. 아마 과중한 부담감에 생각처럼 조각이 안 풀리는 것 같았다.

“하아.”

한스는 종종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중간에 한스를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황태자의 최측근인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이 중간에 감독을 나온 것이다.

“그래, 잘되고 있는가?”

“네, 백작님.”

한스는 갑작스러운 궁내부장의 방문에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길버트 백작은 정원을 쭈욱 훑어보았다.

“그래, 정원은 프랑스식으로 잘 꾸미고 있군. 기하학적인 면을 강조해 최대한 우아하고 품위 있게 꾸며야 해. 황태자 전하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3황비 마마의 조각상은?”

고개를 돌린 길버트 백작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게 뭔가?”

“네?”

“설마 우아함과 기품이라곤 한 톨도 느낄 수 없는 저 조각상을 3황비 마마의 조각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한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다른 이도 아닌 3황비 마마야! 바로 황태자 전하의 친모이신! 그런 분의 조각을 고작 저런 수준으로 해?! 자네 목숨이 여러 개인가? 목이 날아가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

그 엄포에 한스는 물론 정원사 모두가 겁에 질렸다. 저 엄포가 거짓이 아님을 모두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피의 황태자니까!

“전하의 진노를 피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손을 보게! 축제날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최대한 서둘러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궁내부장이 돌아간 후, 장내에는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국 황실 최고의 조각사는 다름 아닌 한스였다. 도대체 누구의 도움을 받아 수를 낸단 말인가? 외부에서 이름난 조각사를 초빙하는 방법도 있기야 했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일단 다시 일합시다.”

누군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뿔뿔이 자신이 맡은 영역으로 흩어졌다.

한스는 망연한 얼굴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 * *

그날은 늦은 밤부터 비가 왔다. 숙소로 돌아온 마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이 안 와.’

요란한 빗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아까 전 있었던 일 때문일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하아.”

결국,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 시녀, 제인이 부스스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마리? 어디 가?”

“나 잊은 게 있어서 잠시만 나갔다 올게.”

“응, 어두우니 조심하고.”

그녀는 우비를 챙겨 입고 숙소를 나서 공사 중인 정원으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가는 거였다. 그런데 정원에 가까워지니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를 뚫고 낮은 쇳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땅. 땅.

‘설마?’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과연 한스가 비가 오는 늦은 밤임에도 정과 망치로 조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비도 안 입고 있어서 전신이 홀딱 젖어 있었다.

‘한스 님.’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한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마리? 이 시간에 정원에는 왜?”

“……감기 걸리세요.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그 말에 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들어가야지. 그래도 조금만 더 손보고…….”

“안 돼요.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인 것 아시잖아요. 들어가세요.”

한스는 눈을 크게 떴다. 평소의 마리답지 않게 굉장히 단호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결국,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렇게 비 오는 날 망치를 두드려 봐야 감기만 걸리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러며 그는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고향에 있는 딸 생각을 하니 자꾸만 초조해져서…….”

“……한스 님.”

“너무 답답해서 누구라도 대신 저 조각상을 완성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드는구나.”

그렇게 말한 한스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또 너한테 쓸데없는 말을 했네. 미안하다. 나는 이만 들어가서 쉴 테니, 너도 감기 걸리기 전에 들어가서 쉬렴.”

힘없이 어깨가 처져 멀어지는 한스를 보며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그녀는 조각상에 손을 가져가며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런데 그녀가 조각상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마치 극장의 막이 내려오듯 그녀의 시야가 암전된 것이다! 그리고 지직 하는 잡음과 함께 이런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무슨 조각을 하고 있는가, 피오나? 태양, 달, 아니면 세상? 그것도 아니면 허무?」

“……!”

마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저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꾸었던 꿈에 나타났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대가 조각하는 모습은 어째서 이토록 경건해 보이는 건지. 하긴 그러니, 그대가 대륙 최고의 정원 조각사라 불리는 것이겠지. 안 그런가, 피오나?」

그렇게 마리는 간절한 바람 끝에 또 다른 꿈, ‘정원 조각사 피오나’의 꿈에 빠져들었다.

* * *

한편 그때, 황궁의 깊은 곳에 자리한 웅장한 사자궁. 피의 황태자 라엘이 기거하는 그곳에서 궁내부장 길버트 백작이 입을 열고 있었다.

“축제는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전하.”

그 말에 전하라 불린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별한 문제는 없는가?”

아름다운 미성. 그런데 미성과 다르게 남자의 외양은 기괴했다. 하얀 턱 위로 얼굴의 반을 가리는 철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길버트 백작은 그 철가면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늘 보는 것이지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 철가면만 마주하면 마치 맹수 앞에 놓인 먹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저 남자의 흉명(凶名) 때문일 것이다. 피의 황태자, 라엘! 그게 바로 남자의 정체였으니까.

“내전이 끝난 후 첫 축제이니, 문제가 없어야 할 것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궁내에 또 보고할 일이 있는가?”

“아닙니다. 특별한 사안은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궁내부장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아, 큰일은 아니오나, 3황비 마마의 장미궁 정원을 보수하던 중에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따끔히 혼내 주고 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3황비 마마의 기일을 맞아 인물상을 조각 중인데, 그분의 기품과 우아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듯하여 말입니다. 잘해 내지 못하면 큰 벌을 내릴 것이라 따끔히 말했으니, 조각사도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길버트는 주군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주길 바라듯 말했다. 그런데 황태자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네?”

“내가 언제 어머니의 인물상을 조각하라고 명했지?”

“……!”

생각지도 못 한 서늘한 음성에 길버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철가면 너머로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심연만큼 차가운 눈빛이었다.

“난 그저 정원의 잡초 같은 거나 정리하라고 했지, 조각상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 그건…….”

길버트 백작은 말을 더듬었다. 그건 그랬다. 황태자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오로지 궁내부장인 그가 황태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설마 정원을 아예 개․보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차피 쓰지도 않는 정원인데?”

“…….”

길버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면적으로 개․보축하고 있었다. 그것도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기,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황태자는 낮게 말했다.

“쓸데없는 일을 했군.”

황태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래서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길버트 백작은 내전 당시 황태자의 칼에 목이 날아갔던 대신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땅에 갖다 대었다.

“죄, 죄송합니다!”

“더구나 제대로 조각을 해내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릴 것이라니, 넌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지껄인 것이지?”

황태자는 낮게 경고했다.

“잊지 마라. 군주의 칼은 백성의 적을 베기 위한 것이지, 백성을 핍박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궁내부장은 이마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보며 황태자는 속으로 혀를 찼다. 궁내부장이 자신의 이름으로 으름장을 놓았으니, 정원에서 일하던 이들이 얼마나 사색에 질려 일하고 있을지 뻔했다.

‘가서 일하는 이들의 노고라도 위로해 줘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황태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장미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왠지 저 멀리서 빗소리를 뚫고 망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나가 보도록.”

궁내부장은 허리를 조아리고는 사라졌다. 전형적인 간신배의 모습이었다. 황태자는 그가 나가자 경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버러지 같은 것이.”

궁내부장의 속이 훤히 보였다. 오로지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겠지. 궁내부장은 책임과 의무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권력만 바라는 전형적인 아첨꾼이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쳐 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황태자는 뒤에 말없이 서 있던 근위 기사, 알몬드 자작에게 물었다.

“오늘 일정은 이제 끝인가?”

“네, 전하.”

“그렇군.”

그 말에 황태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철가면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면이 벗겨진 황태자의 얼굴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호위 기사 알몬드 자작은 힐끗 주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차가운 철가면 뒤에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아름다운 얼굴. 선이 여린 곡선은 여인과도 같은, 아니, 여인보다도 더 지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마치 천상의 것과 같은 외모. 다만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는 철혈의 군주란 별칭답게 얼음처럼 차가웠다. 닿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지치는군.”

“혹시 몸이 안 좋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안 좋은 데는 없었다. 그저 피로했다.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몬드가 물었다.

“어디 가시려고 하십니까?”

“조금 산책이나 하고 오지.”

“지금 말입니까? 빗줄기가 거셉니다.”

“괜찮다. 우비와 우산이나 준비하도록.”

알몬드는 더 만류하려고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면을 벗고 남몰래 산책을 나가는 것은 황태자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그러면 따르겠습니다.”

“아니야, 혼자 가지. 혼자 가고 싶은 곳이어서.”

“어디에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황태자는 우비를 입으며 짧게 답했다.

“어머니를 만나고 오겠다.”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건 3황비가 생전에 기거했던 장미궁에 갔다 오겠다는 뜻이었다.

‘오랜만이군.’

장미궁으로 향하며 황태자 라엘은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인 3황비의 무덤은 장미궁 옆 정원에 있었다. 황족이 안치되는 묘지에 가지 못한 것은 그녀가 억울한 누명으로 불명예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그녀가 죽은 후 장미궁은 아무도 방문하는 이 없이 계속해서 방치돼 있었다. 유일한 방문자는 그의 친누이동생인 7황녀뿐이었다. 하지만 누이동생이 독살당한 뒤에는 오로지 그 혼자만이 장미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몰래 찾아올 수밖에 없었지.’

그건 어머니에게 누명을 씌운 이가 다름 아닌 부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녀가 죄를 저질렀다고 믿지 않았으나, 그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황제의 뜻이었기에.

‘웃기는 일이지.’

황태자 라엘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미소였다. 그래, 참 웃기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일뿐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삶은 모두 웃기는 일들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생각에 잠긴 채 발걸음을 옮기며 장미궁과 가까워졌을 때였다. 빗방울을 뚫고 생각지도 못 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깡! 깡! 깡!

쇠와 돌이 규칙적으로 부닥치는 소리였다.

‘설마 조각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 비가 오고 있는데?’

라엘은 혀를 찼다. 도대체 궁내부장이 얼마나 으름장을 놓았으면 비 오는 이 저녁에 조각을 붙들고 있단 말인가.

‘그럴 필요 없으니 그만 들어가서 쉬라고 해야겠군.’

그런 생각으로 그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깡! 깡! 깡!

규칙적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이윽고 조각상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였다. 그는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아…….’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삼켰다.

‘이건…… 어떻게 이럴 수가?’

완성된 조각은 아니었다. 지금도 정이 조각상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

그 한 마디를 중얼거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의 길을 걸으며 애써 잊고 있었던 그 이름. 저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 안에는 바로 그의 어머니가 담겨 있었다. 언제나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던 그녀가 말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슬픈 삶을 이어 나갔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녀에겐 자신이 삶의 모든 것이었다.

“라엘, 라엘. 무서워하지 말렴. 엄마가 있잖아.”

마치 환청처럼 까마득한 먼 옛날에 들었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각상의 은은한 미소가 바로 자신을 향하는 미소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바보 같은.’

피의 황태자란 이름답지 않게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지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그는 지금도 조각에 열중인 조각사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어떤 조각사가 이런?’

두꺼운 우비로 전신을 두른 채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저 굉장히 작은 체구이고, 깡말랐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을 걸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깡. 깡. 깡.

조각상을 두드리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숭고했다. 그저 단순히 돌을 깎는 것이 아닌, 신께 예배라도 드리듯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방해하면 안 되겠군.’

그는 등을 돌리며 생각했다. 자신에게 다시 한번 어머니를 느끼게 해준 저 조각사를 크게 포상해야겠다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당장 궁으로 불러 포상해야겠군.’

* * *

날이 밝았다. 간밤에 내리던 비는 새벽에 모두 그쳤고, 정원사들과 한스는 다시 공사를 위해 정원에 나왔다. 그리고 조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조각상의 얼굴 부분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분명 어제 저녁만 해도 미완성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한스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조각상은 그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깊은 완성도를 품고 있었다. 단순한 외형적 아름다움만이 아닌, 조각상 안에 혼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 조각상의 입가에 어린 은은한 미소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어떻게 이런 조각을?’

황실 제일의 조각사인 한스이지만, 지금 이 조각을 완성한 이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분명 조각의 극에 달한 솜씨야.’

보고 또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간밤에 누가 와서 이런 조각을 했단 말인가!

‘도대체?’

그때, 옆에서 누군가 재채기를 했다.

“에취!”

마리였다. 그녀는 간밤에 감기라도 걸렸는지 빨개진 볼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마리? 감기 걸렸어?”

“아, 네. 훌쩍.”

“어쩌다가. 조심하지.”

“괜찮아요, 훌쩍.”

마리가 콧물을 훌쩍이며 물었다.

“저, 한스 님.”

“응?”

“저 조각…… 제대로 된 것인가요? 제가 볼 줄을 몰라서…….”

본인이 조각한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말투라서 한스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지금껏 본 조각 중 최고다.”

“최고요?”

“그래, 저 조각에는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어. 단순히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혼을 담는 수준이다. 나 같은 것은 흉내도 못 낼 솜씨야.”

“그러면…… 황태자 전하께서도 벌을 안 내리시겠죠?”

“당연하지. 이건 누가 봐도 최고의 조각이니까 벌을 내리진 않으실 거다.”

그러며 한스는 생각했다.

‘벌은커녕 큰 포상을 내릴 수도. 그런데 도대체 누가 조각한 거지? 간밤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갔을 리도 없고.’

사실 한스는 간밤에 간절히 기도했었다. 어떤 기적이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 달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한스의 말을 들은 마리는 감기로 빨개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헤헤, 정말 다행이네요.”

그때였다.

저벅저벅.

거친 군화 소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독수리 문양을 단 근위대의 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난 황태자 전하의 호위 기사 알몬드 자작이라고 한다.”

“……!”

갑작스러운 근위 기사의 출현에 모두 긴장했다. 호위 기사가 왜 정원 공사 현장에 온단 말인가.

“누가 이곳의 조각사지?”

“제가 이곳의 총책임자이자, 조각을 맡고 있습니다.”

한스가 주춤주춤 손을 들었다. 기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대를 찾으신다. 따라오도록.”

한스는 잔뜩 겁에 질린 채 호위 기사를 따라갔다.

‘나, 나를 왜?’

황태자가 조각상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온갖 두려운 상상을 하였다.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리고 스스로 황태자 위에 오른 라엘은 일반인에게 공포의 존재였다.

‘매일 밤마다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한다던데. 인육을 먹기도 하고. 사람을 고문하는 것을 즐기고.’

한스는 세간에 퍼진 황태자의 소문을 떠올렸다.

‘설마 날 고문하고 인육을 먹으려고?’

한스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알몬드 자작이 그런 그를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따라오고 뭐 하나?”

“저, 기사님. 저는 오늘 황태자 전하께 죽는 건가요?”

“뭐?”

“아이고!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고향에는 저만 바라보는 원수 같은 마누라와 두꺼비 같은 딸이…….”

알몬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자네 지금 꿈꾸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빨리 따라와.”

그렇게 한스는 공포에 넋을 반쯤 놓은 채 알몬드를 따라갔다. 그 공포는 사자궁에 들어간 후, 황태자의 철가면을 마주하는 순간 극에 달했다.

‘혀, 혈가면!’

내전 당시 피가 마르지 않았다는 그 가면이 분명했다. 이제 저 가면에 자신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스는 딸꾹질을 하였다. 그런데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생이 많군.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상을 내리기 위해서네.”

“네, 목숨만 살려……! 네?”

반사적으로 빌다가 한스는 놀라 입을 벌렸다. 황태자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알몬드를 바라보았다.

“목숨? 뭔가 오해가 있나 보군. 알몬드, 내가 정중히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나?”

“……정중히 데려왔습니다.”

“어쨌든 이름이 한스라고 했나?”

한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네! 전하. 이 미천한 것의 이름은 한스라고 하옵니다.”

“그래, 자네를 부른 것은 아까 말했다시피 상을 내리기 위해서야.”

그 말에 한스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죽이지 않는다니 천만다행이었지만, 갑자기 상이라니? 도대체 왜? 하지만 곧 이어진 황태자의 말에 한스는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자네가 조각한 조각상을 어젯밤에 보았네. 정말 훌륭하더군.”

한스는 깜짝 놀랐다. 황태자는 말을 이었다.

“내 살면서 그렇게 훌륭한 조각상을 본 적이 없어. 혹시 바라는 것이 있나? 가급적 모두 들어주도록 하지.”

“…….”

이 생각지도 못 한 상황에 한스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그가 대답하지 않자,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나? 부담이 되어서 그런 거면 괜찮네. 무엇이든 말해봐.”

“……제가 아닙니다, 전하.”

“뭐?”

한스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황비 마마 조각상의 조각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그대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궁내부장은 그대가 조각했다고 하던데?”

“전체적인 조각은 제가 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감탄하신, 깊은 혼이 느껴지는 그 부분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미천한 것은 조각에 그런 영혼을 불어넣을 재주가 없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한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체구가 다르군.’

분명 그가 어제 빗속에서 본 조각사는 굉장히 체구가 작았었다. 마치 깡마른 소녀처럼. 물론 그 조각사가 여자였을 리는 없겠지만, 덩치가 산만 한 이 한스란 자와는 맞지 않았다.

“그렇군. 그러면 그 조각을 한 조각사는 누구지? 훌륭한 조각을 한 대가로 내가 크게 포상을 하고 싶군.”

“……저도 모르겠습니다.”

“뭐?”

“정말로 전혀 모르겠사옵니다. 간밤에 누가 몰래 조각을 하고 갔는데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천사님이라도 왔다 간 것 같습니다.”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알몬드.”

“네, 전하.”

“궁내에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있는가?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절대 불가합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곧바로 체포하거나 사살합니다.”

“그러면 궁내의 인물이 조각했다는 말이군.”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누가 그 조각을 했는지 찾아내도록. 꼭 만나 보고 싶으니 말이야.”

그는 어젯밤 조각상을 봤을 때의 느낌을 떠올렸다. 10년의 세월을 넘어 어머니를 느끼게 해준 조각사에게 꼭 사례하고 싶었다.

‘어차피 궁 안의 인물일 테니 찾는데 어렵지는 않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엘의 생각과 다르게 조각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고?”

“네, 궁내에서 전하께서 말씀하신 체구의 남자 중 조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알몬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없다고? 그럴 리가. 분명히 내가 이 눈으로 조각하는 것을 직접 봤는데.”

그때,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한 젊은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닙니까, 전하?”

황태자는 고개를 돌렸다.

“오른.”

오른 공작! 제국 최고 가문인 소비엔 공작가의 당대 당주이자, 내전 당시 황태자를 도와 최고의 공적을 세운 전략가였다. 동시에 현 제국의 재상이자, 황태자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다.

“아니다. 분명히 제대로 봤어.”

“하지만 이상한걸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여자애, 그것도 여자 중에서도 작은 몸짓이나 가능한 체구인데.”

오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쾌활한 인상의 대단한 미남인 그는 금발의 곱슬머리가 잘 어울렸다.

“여자가 대리석 조각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뿐 아니라, 전 유럽을 통틀어도 석재를 조각하는 여자 조각사는 없었다.

“흠.”

오른 공작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조각사, 제가 직접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황태자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직접?”

“뭐, 전하께서 궁금해하시니 충신 된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는 잘생긴 입가를 재미있다는 듯 비틀었다.

“누가 황궁 한복판에서 남몰래 이런 일을 벌였는지 저도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시녀 마리는 뜻하지 않게 제국에서 가장 지고한 2명의 관심을 끌어버렸다.

* * *

“에취!”

마리는 정원사들을 도우며 크게 기침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코를 훌쩍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마리, 감기가 심하네. 가서 쉬어도 된다니까.”

한스가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 훌쩍.”

이전과 다르게 정원 공사장의 분위기는 좋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조각상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이제 마무리 공정만 하면 공사도 끝이었다.

‘다행이야, 정말로.’

마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녀처럼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도대체 누가 저 조각을 마무리했는지 의문을 풀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리, 정말 그날 아무도 못 봤니?”

그날 밤에 마리가 공사장에 왔던 것을 알고 있는 한스가 물었다. 뜨끔한 마리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네, 아무도 못 봤어요. 저도 바로 숙소로 돌아가서.”

“그렇지?”

마리는 자신이 한 일이란 것을 말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자신이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쳤다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난 황태자의 눈에 띄면 안 돼.’

피의 황태자가 직접 조각사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식겁했는지. 물론 이제 와서 자신이 클로얀 왕국의 왕녀란 것을 들킬 가능성은 적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애초에 천대받는 왕녀여서 왕궁 내에서도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가 적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국왕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왕궁으로 데려왔어도, 본인의 부끄러운 핏줄인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꺼렸다.

‘그 덕에 시녀로 변장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만약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가 많았다면, 아무리 시녀인 척했어도 단박에 들켰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왕궁 내에서 구박받으며 남들의 눈을 피해 살았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특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대 그 잔혹한 황태자의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신께서 천사님이라도 내려 주셨나?”

그때, 한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리는 난처한 얼굴로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조각사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 것을 빼고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그날 밤 마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녀는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었다. 어린 소년의 꿈이었는데, 그 소년의 이름은 이러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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