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외전. 열무야, 안녕? (2)2021.11.23.
#28. 진심 성준의 생모는 다시 한번 애들 앞에 나타난다면, 모든 걸 걸고 망가뜨려주겠다는 나린 부모의 말에 기가 찬 얼굴로 물러섰다.
“하, 참……. 정말 별꼴을 다…….”
기세에 눌려 돌아서면서도 아들을 향한 애틋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성준은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 때부터 어디선가 엄마가 불쑥 튀어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방치, 폭언, 폭행에 이르기까지 학대를 일삼고 도박에까지 미쳐 있던 생모의 존재는 성준이 자라는 내내 큰 공포였다.
“엄마 인생 망하게 해놓고 너는 아무 생각이 없니? 세상에 태어난 게 미안하지도 않아? 엄마한테 어떻게 보상할 거야, 어?”
탄생 자체에 큰 짐을 지운 생모의 말이 여태 심장에 가시처럼 박혀 있다. 그런 성준에게 어쩜 그리 뻔뻔하게 ‘엄마’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을까. 감히. 그의 생모가 정말 돈만 보고 달려왔다는 게 느껴졌기에 나린의 부모는 더더욱 분노했다. 낳았다고 다 부모가 아님을 깨달으며, 자신들 역시 나린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던 건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됐다. 성준의 생모가 가고 난 후, 조용한 식당 안에 나린의 부모와 나린, 성준이 마주 앉았다. 나린은 엄마의 전화를 받고는 성준에게 험한 소리를 하려는 줄 알고서 일하다 말고 뛰쳐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허겁지겁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듣게 된 말은 “내가 성준이 장몬데!”였다. 놀라운 일이다. 당신 같은 사돈이라든가, 내 사위라든가, 엄마의 입에선 나린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곤 지금, 엄마는 다소 민망한 듯 시선을 떨군 채 앞에 앉아 있다. 이에 아빠가 먼저 성준을 향해 입을 뗐다.
“나린이 아빠, 엄마예요.”
“우성준입니다.”
성준이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넌 몸은 좀 어떠냐.”
나린의 배를 슬쩍 보고는 한 말이다. 어느새 딸의 배는 제법 불러 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싶을 정도였다.
“괜찮아요.”
“아들이라지.”
“네.”
짧게 이어지는 대답이지만, 아빠는 다시 질문했다.
“결혼식은, 안 하고 넘어갈 셈이냐.”
“하면 오시게요?”
나린이 덤덤히 묻는 말에 아빠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앙금이 대화 사이에 서걱서걱 걸려 있다. 엄마를 한번 본 아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야 가고 싶다만.”
“왜 이러세요. 적응 안 되게.”
나린이 아까부터 참았던 말을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이러시는 건데요. 두 분 다 뭐 잘못 드신 건 아니죠?”
제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엄마는 바로 따귀를 때렸다.
“정리해. 네 몸도, 이 집도, 회사도 전부 다.”
그때 들은 말이 아직도 나린의 가슴엔 생채기처럼 남아 있다. 그저 사춘기 딸의 반항 정도로 보이는 건지, 제 버릇을 잡겠다는 듯 강경하게 나오는 엄마 때문에 나린은 또 한 번 무너졌었다. 그랬던 엄마, 그리고 더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아빠, 두 분이 이제 와 결혼 운운하며 제 앞에 앉아 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행여 성준에게까지 상처를 주지 않을까, 그것만이 나린의 두려움이다.
“무슨 생각으로 오신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오시는 거 불편해요.”
그때 엄마의 입술이 열렸다.
“미안하다.”
“그래요, 미안……, 네?”
충분히 이야기하고는 왔지만 아내가 바로 사과부터 할 줄은 몰랐던 듯 나린의 아빠마저 놀란 눈이다. 여기에 엄마가 어렵게, 또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뻔뻔함으로 무장한 성준의 생모였다. 난 그러지 말아야지. 적어도 그런 인간과 동급은 되지 말아야지. 아이에게 아픔을 주는 그런 부모는, 이제라도 되지 말아야지. 그전에, ……사과부터 해야지.
“진심이야. 미안하다, 나린아.”
하, 나린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빙그르르 고였다.
“우리가 널 아프게 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걸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에게 큰 잘못을 한 것만은 사실이야. 엄마, 아빠가 너무 늦게 알았어. 어떻게 알아야 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널 낳기만 했지, 어떻게 해야 좋은 부모가 되는지도……, 모르고 살았어.”
낳기만 하면 부모가 되는 줄 알았다. 아이 하나 낳은 걸로 할 일을 해치운 듯 여겼다. 저절로 크는 줄로만 알았다. 등지고 선 채 아이의 눈물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모든 건 널 위해서야, 그 말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아이가 어떤 삶을 사는지, 진정 모르고 있었다.
“너무너무 미안해, 나린아.”
한번 터진 사과는 물꼬가 트인 것처럼 거침없이 이어졌다. 엄마 역시 묵힌 응어리를 떨쳐내듯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다. 나린이 손으로 입가를 막으며 일어서서 주방 쪽으로 향했다. 가슴이 미어져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성준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주었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순간 참았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엄마, 아빠를 진심으로 미워한 적은 없다. 사과를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사랑하기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상처받았고, 그래서 외로웠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굳게 닫았던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제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세상에 뚝 떨어진 순간부터, 오직 믿고 의지할 곳은 제 생명의 기원인 부모였다. 그런 부모에게서 받은 외면이 얼마나 커다란 아픔인지 저조차 모른 채 힘겨운 마음을 안고 버텨냈다. 미안하다, 나린아. 그 말의 힘은 엄청났다. 지금껏 나린을 힘들게 했던 모든 것이 씻겨져 내릴 정도로, 엄마의 미안하다는 사과는 상상 이상의 강력한 힘을 품고 있다. 엄마, 아빠가 단번에 다정하고 자상한 부모가 되어줄 리는 없겠지만, 오늘의 용기가 조심스러운 시작으로 이어질 걸 알기에 나린은 감정이 북받쳤다. 울고 있는 엄마를 이미 사랑하는 열무가, 배 속에서 콩콩 두드렸다. 마치 괜찮아, 괜찮아, 어루만지듯. 부른 배에서 태동이 느껴지자 나린은 더욱 뭉클해졌다. 저를 연신 쓰다듬어주는 성준의 품에 안긴 채 나린은 그날 해묵은 감정을 오래도록 쏟아냈다. #29. 생이별
“성준 씨,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요.”
“새벽일 텐데.”
“상관없다니까요.”
“……알았어요.”
공항. 나린을 두고 가는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 출국 게이트 앞에 선 성준이 머뭇거렸다. 강호가 나섰다.
“형님, 얜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들어가세요.”
“그래, 오빠. 우리가 언니랑 열무 잘 돌보고 있을게.”
강호와 소란이 안심시키며 번갈아 말했지만, 여전히 성준은 나린과 손을 붙든 채 떨어지지 못하고 있다.
“아휴, 이러다 비행기 놓쳐. 빨리 가.”
결국 소란이 두 사람을 떼어내고, 성준의 등을 억지로 밀었다.
“나린 씨, 열무 나올 것 같으면 소란이한테 바로 연락해요. 아니, 나 돌아오기 전에 절대 나오지 말라고 해요. 아아, 그냥 나 가지 말까.”
이러다 울겠다 싶을 정도로 절절한 이별이다.
“걱정하지 말고, 잘하고 돌아와요. 그때까지 열무 배 속에 잘 데리고 있을 테니까.”
“꼭이요.”
나린의 의연한 다짐에 성준이 겨우겨우 발을 떼어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생이별의 현장이다.
“후우.”
간신히 두 사람을 갈라놓은 소란이 한숨을 내쉬었고, 성준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자 나린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아, 언니. 아, 왜 또 울어요오.”
“나도 몰라, 자꾸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 흐어어엉.”
그나마 성준 앞에서 참고 있던 게 다행이다. 앞으로 두 달이나 그를 보지 않고 견딜 수 있을지, 열무의 출산 예정일을 아슬아슬하게 두 달 반 앞둔 상태에서 성준을 떠나보낸 나린은 마음이 헛헛해 공항에 눈물을 흩뿌렸다. 두 사람의 한시적 이별은, 계 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30. 두 달만 참아.
“수술, 말입니까……?”
성준을 부른 계 박사가 다리 수술을 한번 받아보겠냐고 권유했다. 사고를 당했을 당시 이미 수술도 받고 치료에 재활까지 충분히 해왔으나 후유장해는 피할 수 없었다.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고, 나름대로 적응하며 잘살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 수술이라니.
“내, 그동안 알아보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만. 지인들을 통해 미국에 있는 한인 의사 중에 종골 골절 수술로 뛰어난 실력자를 소개받았네. 그 사람에게 자네를 보낼 생각인데, 어떠한가.”
“아…….”
성준은 할 말을 잃었다. 나린의 할아버지 계 박사가 이제껏 저를 위해 그런 노력을 하고 계신 줄 전혀 몰랐다.
“자네가 다리 저는 게 보기 불편해서라든가, 우리 나린이에게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 느껴서가 절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게.”
계 박사는 다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다만, 열무가 태어나면 자네가 그 애랑 공차기도 하고 싶고 뜀박질도 하고 싶고 목말도 태워주고 싶을 텐데. 그럴 때마다 좌절할까 봐, 그걸 염려해서였어. 그래서 좀 알아봤는데, 일단 그쪽으로 가서 재수술을 받고 재활치료를 더 받아보면 지금보다는 상태가 훨씬 좋아질 거란 견해를 들었네. 어떤가. 가보겠나.”
이게 최선인 줄로만 알고 살아왔는데, 또 다른 길이 열리다니. 성준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코가 시큰해졌다.
“자네만 괜찮으면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하는 걸로…….”
“아, 아닙니다. 비용은 제가…….”
“그냥 받아주게. 내 증손주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아기에게 아버지의 튼튼한 다리를 선물로 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쪽으로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다행이네만. 자네만 오겠다면 그쪽에선 바로 준비하겠다고 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출발하게.”
“할아버님…….”
감격한 성준이 고개를 떨구었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심정이다.
“두 달만 참아.”
그런데, 두 달이라고?
“두, 두 달이나요?”
“자네 상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만큼은 예상하라고 하던데.”
“혹시 열무가 일찍이라도 나온다면…….”
제가 없을 때 출산한다니, 상상할 수도 없다. 애초에 나린은 저 없이 혼자 출산하고 양육할 생각으로 숨어 다니기 바빴다는 사실은 잊은 지 오래다. 그녀의 곁에 제 부재란 있어선 안 될 일이기에, 성준은 심각해졌다.
“열무가 기다려줄 걸세. 염려 말고 후딱 다녀와.”
애달픈 마음은 본인의 것일 뿐, 이 일을 알게 된 모두가 성준에게 서둘러 떠나라고 했다. 예정일대로만 나와도 보름의 시간이 있다. 첫애라 빨리 나오지도 않는다며 다들 안심하라 했다.
“나린 씨, 만삭인데 나 없이 어떻게…….”
“소란이가 잘 챙겨줄 거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린은 담담한 태도로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떠나기로 결정한 후, 성준은 나린의 배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애타게 말했다.
“열무야, 기다려줘. 먼저 나오면 안 돼. 아빠 올 때까지 꼭 기다려야 해.”
나린은 웃으며 성준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이 남자 없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앞으로 두 달이 너무도 길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31. 디데이 예정일을 보름 앞두고, 저녁 비행기로 성준이 도착하는 날이다. 지난 두 달이 어찌나 더디게 흘러갔는지 나린에겐 하루가 천년 같았다. 드디어 그가 온다니 무거운 몸으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그사이 이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린의 배는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하리만치 무섭게 불렀고, 다른 한 커플이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악의 무리는 착착 재판을 받고 있으며, 태석과 서윤은 동거에 돌입했다. 이사할 집을 알아볼 짬이 도저히 안 났다나 뭐라나. 같이 살고 싶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것 같지만 어쨌든 두 사람 나이도 있으니 조만간 결혼 얘기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미 태석의 집에선 서윤을 반긴다고 했고. 성준은 어떠려나. 그는 치료 경과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영상통화를 할 때도 늘 상반신만 비추었기에 나린은 성준의 상태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수술은 잘 받았고, 사실 경과가 좋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긴 했다. 아무래도 성준은 기쁘게 해주고 싶어 일부러 감추는 모양이다. 그래도, 궁금한데. 그렇기에 나린은 실제로 볼 날을 애타게 기다려왔다. 드디어 디데이다.
- 언니, 몇 시에 출발할 거예요? 강호 씨랑 같이 가서 언니 태우고 공항으로 갈게요.
“음, 여기서 5시에 출발하면 될 것 같은데?”
- 네, 그럼 이따 전화할게요.
소란과의 통화를 끝낸 나린은 옅게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세차게 뛰어댔다. 그리고 소란 부부가 데리러 올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양수가 터졌다. #32. 열무야, 안녕? 이후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공항에 가기 위해 나린을 데리러 온 소란 부부는 그길로 병원에 향했다. 열무는 예정일보다 보름 일찍 세상에 나오려고 서두르는 중이라 했다. 전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아빠가 한국에 들어오는 때에 맞춰 나오려 한다니. 기막힌 타이밍에 나린이 조급해졌다. 혹시 진행이 빨라, 성준이 병원에 오기 전에 열무가 나와버리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분만을 준비하는 동안 나린은 설레고 떨리고 무섭고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모든 감정이 다 사라지고 짐승이 되었다가, 이러다 죽겠다 싶을 무렵 아기를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아직은 감정이 생생히 살아 숨 쉬기에 진통을 느끼는 나린의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언니, 오빠 택시 타고 오고 있대요. 한국 도착했대요.”
소란이 손을 잡아주었고, 나린은 이성을 잃어가는 걸 느끼며 외쳤다.
“빨리 오라 그래! 허억, 나 주, 죽을 거 같아!”
무서워. 무서워 죽겠어.
“아악, 아퍼, 아퍼!”
엄살은 전혀 부려본 적 없는데, 제가 요란한 사람인 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병원 도착 멀었대? 멀었대? 아아악! 나 무통! 무통 좀 놔줘요!”
“무통 아까 놨잖아요.”
“근데 왜 아픈 건데! 흐어억!”
무통이 듣지 않는 몸이라니, 이보다 더 괴로울 순 없는 출산 준비가 계속되고 있다.
“으아아아악!”
“계나린 산모님, 진행 더 돼야 해요. 아기 덜 내려왔어요.”
“흐억!”
“남편분 조금 더 늦게 오시면 분만실 안으로는 못 들어오세요.”
내진의 고통과 진통 사이에서 서서히 짐승이 되어갈 무렵이다.
“소, 소란아. 오지 말라 그래. 오, 오지 말라……, 끄아악!”
처참한 분만 현장이라면, 제가 괴물처럼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성준이 오지 않는 게 나을 수 있겠다 싶다. 오지 말라는 소리를 분명 또박또박 뱉었다고 생각했지만, 듣는 사람의 귀에는 그저 울부짖음일 뿐이다. 그때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린 씨!”
성준의 목소리가 이렇게 컸나.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드는 음성이다. 나린은 정말 울고 싶다고 생각하며 엉망이 된 얼굴로 가족분만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
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제가 헛것을 보나 싶었다. 무균복을 입은 성준이 입구에서부터 저에게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나린 씨, 늦어서 미안해요. 비행기가 연착…….”
“뛰어봐요. 빨리, 점프, 점프!”
나린은 눈물, 콧물, 땀으로 뒤범벅된 채 정신없이 성준에게 외쳤다. 그가 눈물을 참으며 제자리에서 뛰어 보였다. 그가 정말로, 뛰고 있다. 옆에 선 소란 역시 놀라고 감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남편분 빼고 나가세요! 분만 들어갑니다!”
산모의 남편이 왜 제자리에서 콩콩 뛰고 있는지, 산모와 시누이는 왜 그걸 보며 울먹거리는지, 분만을 준비하는 의료진들은 알 턱이 없다. 그저 이상한 사람들이네 하며 소란을 쫓아낼 뿐이다.
“언니, 힘내요. 열무야, 힘내!”
소란이 마지막까지 힘껏 외치면서 등 떠밀려 분만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있던 강호의 옆엔 어느새 나린의 부모, 계 박사와 고 여사까지 전부 도착해 긴장한 얼굴로 서성거렸다. 안쪽에선 여전히 나린의 비명이 들려오고, 밖에 선 사람들은 그때마다 흠칫 놀라며 손톱을 뜯고 주먹을 쥐며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으애애애앵!”
나린의 비명보다 훨씬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열무가 세상에 온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