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외전. 열무야, 안녕? (1)2021.11.20.
#24. 천사 같은 여자 태석의 집에 병문안을 갔던 날이다.
“광고 봤어요. 와, 오빠 진짜 대박이에요.”
연희가 성준을 향해 감탄하며 말했다. 얼마 전 대기업 주방가전 광고 촬영을 했다는 말만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근사하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준의 부엌’ 영상 느낌을 그대로 살린 화면에 성준이 환한 주방 안에서 부드럽게 웃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모델인 줄 알았잖아요.”
“형님, 구독자도 엄청 늘고, 광고도 또 찍으신다면서요. 진짜 슈스네요.”
연희와 찬규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하자 성준은 어색한 듯 웃었다. 고맙다는 말도 쑥스럽기만 했다.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성준의 앞날엔 새로움이 가득했다. 식품회사와 협업으로 개발하여 진행한 면 요리 상품도 곧 출시된다고 했다. 이에 누구보다 행복해한 사람은 소란이다.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을 챙겨 보듯 소란은 눈만 뜨면 성준의 채널과 SNS를 훑고, 그의 이름을 검색하고, 새로운 정보를 스크랩하며 그의 활동에 기뻐했다.
“언니, 정말 고마워요.”
나린의 곁에 앉은 소란이 사근사근 말했다.
“뭐가?”
“언니한테 고마운 거야 너무 많지만, 오빠 잘 챙겨주는 게 제일 고맙죠.”
사실 성준의 모든 활동은 나린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상을 업로드하는 채널이야 성준이 직접 만들고 해왔다곤 하지만 그걸 제일 먼저 권했던 것도 나린이고, 마냥 사람 좋은 그의 곁에서 자를 건 자르고 취할 건 취하며 매니저처럼 관리하는 이도 바로 나린이다. 이른바 ‘우성준’이라는 브랜드를 새롭게 마케팅하는 중인 셈이다. 그건 나린의 전문분야였다.
“내 남편 일이라 하는 건데, 고맙다는 인사는 들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아, 그러네요.”
소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이제 성준에게 더 가까운 가족은 제가 아니라 나린이다. 동생이라 해도 아내보다 친밀할 수는 없으니까. 성준에게 그런 존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소란은 무척 좋았다. 성준의 힘들었던 날들이 나린으로 하여금 위로받는 기분이다.
“고맙긴 내가 고맙지.”
나린이 조금은 어색하나 그래도 용기 내어 덧붙였다.
“네? 언니가 뭐가요?”
“뭐. ……이것저것.”
꼽을 수 없을 만큼 다 고마웠다. 성준과 저, 그리고 열무까지 챙기는 소란의 씀씀이에 늘 감동하고 있다. 다만 표현에 서툰 나린은 그런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진 못했었는데, 항상 고맙다, 좋다, 열심히 말해주는 성준과 소란 남매를 보며 그녀도 느낀 점이 많았다. 난 저런 말 간지러워서 못 해, 하고 마냥 피하기만 할 게 아니다. 이들 남매와 함께 있다 보니 나린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평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걸 돌려주고 싶은 생각도 당연했다. 들어서 좋은 말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훗날 아기에게도, 예쁜 말만 들려주고 싶다.
“너한텐 그냥, 다 고마워.”
나린의 말에 소란은 말문이 막힌 듯 감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언니, 하며 팔짱을 끼었다.
“오빠가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났으면 하고 바랐는데.”
“…….”
“정말 만났네요. 천사.”
소란의 예쁜 말은 나린을 봄날 햇살처럼 따듯하게 해주었다. 천사는 아니지만 천사가 되어보고 싶을 정도로. 저를 좋은 사람으로 살게 하였다.
#25. 자격 없는 엄마 사람 사는 일에 마냥 좋으란 법은 없는 걸까. 성준에게도 힘든 일이 생겼다. 그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존재의 출현이다.
“누구…….”
“어떻게 낳아준 엄마도 못 알아보니, 너는?”
중년의 여인이 식당에 찾아왔다. 성준은 바쁜 와중에도 식당은 열려고 했다. 새로 하게 된 일들과 비교해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저를 지탱해준 곳은 바로 식당이었기에 바로 손 놓을 수는 없었다.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터전이기도 했다. 다만 성준의 유명세에 찾아드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에, 아예 찬규가 만들어준 어플을 통해 예약한 손님만 받고 있다. 그런데 그날의 점심 장사를 마치고 예약 손님들도 모두 빠져나갔을 무렵, 성준의 생모가 불쑥 식당에 들어온 것이다. 성준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친엄마로 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던가. 아버지는 이혼하고 저만 데리고서 멀리 떨어져 이사 왔었다. 그러고도 혹시나 엄마가 나타날까 봐 벌벌 떨고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이다. 난도질당한 아이의 가슴 위로 상처가 아물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의 30년 만에 나타난 생모는 성준의 그 상처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다시 후벼 파려 하고 있었다.
“……할 얘기 없으니 그만 나가시죠.”
“천륜을 어떻게 끊으려고? 그건 안 되는 거야. 넌 내가 배 아파 낳았고, 정신이 망가지면서까지 젖 먹여 키운 내 아들이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성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고통이었다.
“낳아준 엄마를 홀대한다고 내가 인터뷰 한 번만 하면, 지금 네가 누리는 것들 다 한 방에 끝낼 수도 있어.”
성준의 말문이 막힌 걸 보고, 여인은 주름이 팬 눈가를 접어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래, 이제야 얘기 들을 준비가 된 것 같네.”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은 것인데 그녀는 아들이 제게 순종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본 사이에 낳은 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돈을 뜯으러 온 사기꾼으로만 보였다.
“요즘 광고도 찍고 여기저기 잘 나오더라. 설마 너인가 했는데, 알아보니 정말 내 아들이라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네 아빠가 나한테서 너 빼앗아 가더니 그래도 재주 하나는 좋게도 키워놨구나.”
생모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마주하니 소름 돋게도 어릴 때의 기억에 닿아버렸다. 그 얼굴 그대로 나이 든 모습이다. 생각보다는 조금 더 추하게.
“집안도 짱짱한 여자랑 결혼까지 할 예정이라면서? 애도 생겼다던데.”
“저한테 진짜 어머니는 한 분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요. 더 이상 말씀 나누고 싶지 않으니 이만 가세요.”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고 하잖니.”
생모는 성준이 꺼낸 ‘진짜 어머니’ 소리를 싹 무시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이 있으니까.
“다 됐고, 너 유명해졌는데 돈 많이 벌어놨을 거 아니니. 나 너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은 거야. 오죽 엄마가 힘들면 널 다 찾아왔겠어. 너도 엄마가 고생하며 사는 건 싫을 테고. 이번에 얘기만 잘 끝내면 다시는…….”
“이봐요.”
그때 열린 식당 문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생모가 휙 고개를 돌렸다. 세련된 차림의 한 여자가 서 있다.
“나도 참 자격 없는 엄마지만, 당신은 진짜 막장이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서 행패야?”
나린의 엄마였다. #26. 애 핑계 대지 마.
- 가지 마. 나 진짜 화내.
“이미 도착했어.”
- 엄마, 제발 좀!
나린의 엄마는 성준의 식당 앞에 도착했다. 골목에 차를 대고서 나린에게 전화해 성준을 만나겠다고 통보했는데, 역시나 딸은 길길이 날뛰었다.
“여하튼 끊어. 잘 만나고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
- 만나지 말라고!
딸의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끝으로 엄마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린이 남자를 만나 임신했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그 남자를 집까지 끌어들여 살고 있다는 말에 얼마나 기함했던가. 임신한 딸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딸이 밉기도 했다. 마치 저를 골탕 먹이려는 셈으로 일을 벌인 것만 같아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전부 착각이었다. 자식은 제 부속품이 아닌데, 저만의 감정과 사상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인데, 그걸 인정하지 못한 탓이다.
“다시는 나린이도, 태어날 아기도 못 보고 살고프면 계속 그런 식으로 해라. 이제 우리도 더는 못 참겠다.”
나린의 엄마와 아빠를 앉혀두고 계 박사와 고 여사가 말씀하셨다. 잔소리는 자주 했지만 그런 식의 엄포는 처음이었다.
“너희 일하느라 바쁜 거 우리가 잘 알고, 그래서 안쓰러운 마음도 컸던 건 사실이야. 손녀도 귀하지만 내 아들, 내 며느리가 우선이고 너희들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동안 최대한 존중하고 도우며 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됐니? 딸 하나 있는 거 팽개치다시피 하고…….”
“팽개친 게 아니라, 워낙 잘 케어해주시니까 저희가 믿고 맡겼던 거죠.”
“나린이 외롭게 자란 건 생각 안 해봤어? 우리가 보살핀다 한들 부모 빈자리를 완벽히 메울 수 있었겠냔 말이야. 차라리 죽어 없는 부모라면 몰라,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가 일에만 빠져서 절 본체만체했는데. 나린이 어릴 적에 휴일이면 인형 안고 너희들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거, 기억이나 하니? 항상 저리 가, 바빠, 소리 입에 달고 산 부모에게 늘 내쳐지기만 한 애가 불쌍하단 생각도 안 들어?”
부모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애써 외면했을 뿐. 아이와 함께 보낼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나린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그건 정말 아니었는데.
“돈을 많이 벌어 아낌없이 해줬다고 착각하지 마라. 애를 공들여 안아준 적도 없으면서, 결국 그리 일을 열심히 한 것도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 성취와 만족 때문 아니었니? 그걸 가지고 같잖게 애 핑계 대지 마.”
경제적인 보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다는 건 바쁜 부모의 착각이다. 아무리 바빠도 잠시나마 따뜻하게 안아줄 틈을 내어주었다면, 아이는 그렇게까지 외로워하지 않았으리라. 계 박사와 고 여사가 번갈아 내뱉는 쓴소리는 계속됐다. 이제껏 나린의 부모가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가슴을 아프게 후려치는 소리기도 했다.
“사과해라. 나린이에게 사과하고, 가서 성준이도 만나보도록 해. 나린이 데려다가 니들 사업에 도움 되는 자리에 시집 보내려던 거, 진짜 그리했다면 우리가 먼저 말렸을 거다. 너희들 뜻대로 되는 거, 우리가 더는 두고 볼 생각도 없었어.”
“…….”
“이만하면 너희도 깨닫는 게 있어야지. 그래야 새끼 품어 낳은 부모고, 자식 앞에 들 낯짝 있는 거야. 니들 죽을 때까지 나린이 안 보고 살려는 거 아니면, 정신 똑바로들 차려.”
나린의 부모는 뼈아픈 질책에 며칠을 고뇌했다. 이제껏 부모로서 잘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아니었다니. 그저 나린의 타고난 성격이 모나서 차갑게 굴고 정 없이 대한다고만 여겼는데, 전부 우리의 잘못이었다니.
“갑시다. 가서 그 아기 아빠라는 남자부터 만나봐요. 나린이가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겠지. 어머니 아버지도 좋은 청년이라고 그리 칭찬하시고.”
나린의 아빠가 먼저 성준을 보러 가자고 했다. 성준에 대해서는 계 박사와 고 여사를 통해 자세히 듣게 됐다. 그의 가정사부터 다리를 다친 일, 운동을 포기하고 식당일을 해온 것, 그리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일에 이르기까지 전부 들었다. 나린이 그를 만난다는 게 놀랍기까지 했다. 콧대 높은 나린은 보다 쟁쟁한 스펙을 가진 남자를 선호할 줄 알았는데. 얼마나 대단한 남자를 만나길래 이렇게까지 속을 썩이는 건지 더욱더 열불이 뻗치기도 했다. 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린은 그저 사랑을 원했을 뿐이었다. 나린의 엄마, 아빠, 두 사람은 따로 도착할 예정이라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창하게 약속을 잡는 게 상대에겐 더 부담일 수 있어서 가볍게 들른 정도로 인사만 하고 나오기로 했다. 그리고 나린과 얘기해 다시 날을 잡을 예정이었다. 먼저 도착한 나린의 엄마는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성준의 식당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시부모의 성화에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발이 쉬이 떨어지진 않았다. 중년에 이른 나이에 제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에게 사과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린의 엄마는 머릿속이 복잡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해 기를 굽히지 않고 서로 맞부딪치기만 했던 모녀다.
“후우…….”
남편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한숨을 쉬는데, 식당 안을 기웃거리는 한 여자가 눈에 보였다. 빠른 눈썰미로 간파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손님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우성준이 요즘 들어 세간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라더니, 날파리라도 꼬이는 건가. 나린의 엄마는 저도 모르게 차에서 내렸다. 여자가 식당 안으로 쑥 들어가는 걸 보며, 나린의 엄마 역시 이끌리듯 그쪽으로 향했다. #27. 내 사위 문가에 서서 보게 된 풍경은 아주 가관이었다.
“낳아준 엄마를 홀대한다고 내가 인터뷰 한 번만 하면, 지금 네가 누리는 것들 다 한 방에 끝낼 수도 있어.”
여자가 하는 말로 성준의 생모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더없이 형편없는 엄마.
“다 됐고, 너 유명해졌는데 돈 많이 벌어놨을 거 아니니. 나 너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은 거야. 오죽 엄마가 힘들면 널 다 찾아왔겠어. 너도 엄마가 고생하며 사는 건 싫을 테고. 이번에 얘기만 잘 끝내면 다시는…….”
“이봐요.”
듣다 듣다 참을 수 없어진 나린의 엄마가 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참 자격 없는 엄마지만, 당신은 진짜 막장이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서 행패야?”
날이 바짝 서 쨍쨍한 말투에 안에 있던 여자가 당황했다.
“뭐, 뭐야, 당신. 누구야?”
“나?”
나린의 엄마가 성준을 한번 바라보고는 숨을 크게 삼키며 훅 대답했다.
“내가 성준이 장몬데!”
성준이 놀라거나 말거나 발동이 걸린 나린의 엄마는 이어서 말했다.
“나 당신 같은 사돈 둔 적 없으니까 여기서 썩 꺼져.”
“아니, 그게 무슨…….”
“당장 안 꺼지면 협박죄로 확 처넣어버릴 거야.”
“협박이라니…….”
“당신 지금 내 사위한테 한 방에 끝내니 뭐니 협박했잖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엄마.”
“여보.”
나린, 그리고 나린의 아빠가 막 도착한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