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외전. 마태석과 한서윤 (3) (108/112)

#108화. 외전. 마태석과 한서윤 (3)2021.11.13.

  #13. 전화해준 건 고마워.

- 너 오늘 생일이잖아.

무슨 일로 전화했냐는 서윤의 말에 태석이 바로 대답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생일이, 이렇게 설레는 날이었던가.

“……그게 왜.”

- 파티해? 나 어디로 가면 돼?

“파티?”

어쩜 이렇게 노는 걸 좋아할까.

- 누구누구랑 해? 난 모르는 사람들 있어도 상관없는데.

“파티는 무슨. 나 그런 거 안 해.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럴 여유 없어.”

김 계장도 나가고 다른 직원들도 자리를 비운 검사실이라 혼자 남은 서윤은 편하게 얘기했다.

“그냥 집에 가서 쉴 거야.”

- 생파를 안 한다고? 집에서 그냥 쉬겠다고?

파티가 별건가. 아마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라고 해도 태석은 그냥 참석하겠다는 의지를 말한 것뿐이다. 하지만 생일파티를 아예 안 하고 그냥 넘어간다니, 그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가 먼저 제 생일을 알고 연락한 건 놀랍기도 하고 또 이상하게 마음이 몽글거리는 일이지만, 약속을 잡는 게 아니라 대뜸 파티에 오겠다니. 태석과 제가 평소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만 확인한 기분이다. 역시 친해질 수 없는 사이인가.

“피곤해서.”

- 하긴, 요즘 너무 바쁘다며. 뭐 요즘만 바쁜가. 너야 올 타임 바쁘지.

“생일이라고 전화해준 건 고마워.”

- 아,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혹시 오늘 저녁에 놀 일 생기면 나한테도 연락해주고.

혹시나 했지만 둘이서만 오붓하게 보자는 얘기는 당연히, 없다. 서윤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끊는다.”

통화를 끝낸 서윤은 내려놓은 휴대전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했어. 잘한 거야. 희망고문당할 일 없이 잘 잘라냈다며 스스로 칭찬했다.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드는 헛헛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서윤은 다시 일에 열중했다. #14. 인생 두 번 사는 것도 아닌데.

“한 검, 오늘 생일이라며?”

예정대로 일찍 퇴근하고 검찰청을 나서려는데 동료가 물었다. 그놈의 생일.

“축하해. 내일 이 검이랑 같이 점심 먹자. 오늘은 뭐 해?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

남친 만나러 가냐는 소리 안 하니 다행이다. 최근 태석과 만나는 일이 뜸해지자 그와의 관계를 물어보는 일도 줄었다.

“고마워. 고기 먹어야지.”

틀린 말은 아니다. 서윤은 집에 가서 배달 삼겹살이라도 시킬 심산이다.

“그래, 가뜩이나 요즘 분위기도 싸한데,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지.”

박씨 삼 형제의 도움을 받은 정계 인간들이 모두 순순히 물러선 것만은 아니다. 서윤이 새총의 고무줄을 잠시 느슨하게 늘였을 뿐, 뒤이어 탕 하고 당길 것을 예상한 이들 일부가 동요하고 있다. 그들이 잠시나마 침묵한 덕에 박 형제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으니 고맙긴 했다. 다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죄를 물어야 할 건 물어야 한다는 게 서윤의 생각이지만. 그리하여 불똥이 튀지 않겠거니 안심했다가 정신이 퍼뜩 든 이들이 서윤을 위협하는 중이다. 박 형제들의 뒤를 봐주며 더러운 돈을 숨겨두기 바빴던 이들이 참 뻔뻔하기도 하다.

“손 떼라고 협박한다며. 이 검이 그러더라.”

“상관없어. 나 건드려봤자 좋을 거 없다는 건 본인들이 더 잘 알 텐데, 뭘.”

“그야 당연하지만, 겁이라도 주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몸 좀 사리셔. 인생 두 번 사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아.”

“사실 우리같이 백 없는 평검이 무슨 힘이 있냐. 곧 조 의원이나 남 의원에 대해서는 적당히 끝내라는 압박 들어올 거야.”

예상하는 바다. 위협당하는 게 두려운 것보다도 그런 더러운 족속보다 힘이 약한 데에 화가 났다.

“돈 있고 백 있는 사람들 부러운 적 없었는데, 이럴 땐 좀 부럽네.”

서윤은 말하면서도 스스로 덧없다 느끼며 피식 웃었다. #15. 피해! 서윤의 차가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멈춰 섰다. 작고 낡은 이 오피스텔은 곧 허물고 새 건물이 지어질 예정이라, 세입자들이 대부분 나간 상태였다. 한창 바쁜 서윤은 이사 갈 집을 알아볼 시간조차 없어 아직 살고 있지만 그녀 역시 곧 어디로든 나가야 했다. 늘 밤늦게 도착할 때마다 을씨년스럽게 느껴진 지하주차장인데, 이른 저녁에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간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빨리 이사 가긴 가야 할 텐데. 문을 열고 내려서는 그녀의 손에는 중간에 들른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 봉지가 들려 있다. 등 떠밀리듯 일찍 퇴근했지만 결국 집에 가서도 봐야 할 서류들이 있기에 서윤은 얼른 들어가 저녁을 먹고 일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지하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려던 때다.

“피해!”

뒤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차에 붙이며 돌아보았다. 동시에 벌어진 광경에 서윤은 굳어버렸다. 태석이 검은 옷에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를 붙들어 돌리더니 퍽, 하고 주먹을 날렸다. 불시에 얻어맞고 나동그라진 괴한이 다시 태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윽.”

순식간에 태석의 허리가 접혔다. 괴한은 몸을 떨어뜨리더니 재빨리 차가 들어오는 출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마태석!”

“저 새끼, 자, 잡…….”

그게 문제가 아니다. 태석에게 달려간 서윤이 그를 받쳐 안았다. 셔츠가 찢긴 태석의 옆구리에 붉은 피가 번졌다. 괴한의 손에는 칼이 있었다. #16. 미쳤어.

“미친 거야, 미친 거. ……미쳤어, 진짜.”

서윤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지혈과 치료를 끝낸 태석이 병실 침대에 잠들어 있고, 서윤은 옆에 앉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칼에 찔린 부위가 위험하진 않다고 했다. 치료만 잘 받으면 금세 회복될 거라고도 했고. 그래도 칼은 칼이다. 오이를 썰다가 손가락만 베여도 피가 철철 나고 아픈데, 옆구리를 찔린 그의 고통이 오죽 심했을까. 서윤의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아까 지하주차장엔 케이크가 떨어져 있었다. 구급차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태석을 제 차에 태우려던 때, 투명 케이스 안에 담긴 예쁜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져 뭉개진 것을 보고 서윤의 심장도 쿵 떨어졌다. 급히 케이크까지 차 안에 밀어 넣고는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치료까지 마치고 한숨 돌린 이제야 서윤도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겁도 없이 달려든 태석의 행동이 먹먹하게 다가왔다. 생일이 뭐라고. 케이크가 뭐라고 거기까지 와서 이 변을 당하냔 말이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괴한이 뭘 들고 있는 줄 알고 맨손으로 달려들어, 들기를. 수없이 타박하며 그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지금 저 때문에 다친 태석이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태석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나…… 물 좀.”

서윤이 벌떡 일어나 옆에 두었던 생수를 따서 얼른 종이컵에 따라 대령했다. 마른 입술을 물로 축인 태석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서윤을 훑어보았다.

“괜찮아? 다친 데 없지?”

서윤은 기가 막혔다.

“다친 건 너야.”

내 걱정을 할 게 아닌데. 칼에 찔려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넌데. 태석은 그제야 고개를 숙여 제 모습을 살폈다. 환자복을 슬쩍 들어 허리에 감은 붕대를 확인하고는 울상을 짓듯 눈썹을 내렸다.

“야, 나 아프다.”

“아프겠지. 칼에 찔렸는데.”

“그게 다야?”

“그럼.”

태석이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

“너 철벽인 건 알겠는데.”

내가? 서윤이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갑자기 철벽이 여기서 왜 나오는데.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내 마음도 좀 알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

으. 길게 말했더니 통증이 느껴지는지, 기대앉아 있던 태석이 살짝 상체를 숙이며 눈썹을 찡그렸다. 동시에 서윤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괜찮아?”

“나 안 괜찮다고.”

태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녀가 한없이 야속하다는 듯.

“너 일도 바쁘고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잘 알겠는데.”

아닌데. 관심 없는 거 아닌데. 아, 진짜 얘는 아무것도 모르네.

“저번에 킵한 대가, 나 지금 써야겠다.”

그가 제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서윤의 턱을 살짝 잡았다. 좁아지는 거리에 서윤은 그만 심장이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다.

“싫으면, 고소해.”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상태에서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일, 이, 삼 초가 지나고, 이만하면 많이 기다렸다는 듯 태석이 입술을 깊게 맞추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서윤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의 숨이 밀려 들어오는 순간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태석이 나 때문에 칼에 찔리고, 마태석이 지금 나한테 키스하는 거야? ……미쳤어. 정말 미쳤어.

16615905892122.jpg

  #17.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한 사람 태석은 어떻게든 서윤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게 참 쉽지 않았다. 그녀는 바늘구멍만큼의 틈도 없어 보였다. 매사 야무지고 칼 같은 여자에게 들이대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둘이서 만나자고 하면 당연히 안 될 게 분명했다. 볼일 끝났으니 그만 좀 보자던 서윤이 아니었던가. 드디어 그녀의 생일이 되었고, 핑계 삼아 그녀가 누굴 만나든 거기에 껴보겠다는 심산으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누굴 만날 여력도 없이 집에서 쉬겠다니.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싶어 방해할 수도 없고, 알았다 하며 전화를 끊었다.

“와, 선배님. 오늘 완전 멋있게 입으셨네요.”

“데이트 가세요? 한 검사님이랑?”

후, 아니거든. 주변에서 서윤과 저를 엮을수록 점점 더 외로워졌다. 강호와 소란의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는, 서윤을 향한 제 마음만 남아 있었다. 일이 끝나 볼 일이 드물어지자 더욱더 확실히 깨달았다. 아무래도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태석은 로펌에서 빨리 나와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예쁜 케이크를 만드는 숍으로 향했다. 정성껏 고른 케이크를 들고 그녀의 집 주차장으로 향했다. 다 허물어질 듯 낡은 오피스텔엔 지하주차장도 한 층뿐이었다. 텅텅 비다시피 한 주차장 한쪽에 차를 대고 보초 서듯 그녀를 기다렸다. 케이크만이라도 전해주고 가야지. 이걸 왜 주냐고 물어보면, 네가 한번 생각해보라고 숙제를 내줘야지. 저만 종일 그녀 생각에 마음 태우는 게 억울해서라도, 서윤이 조금이나마 저 때문에 혼란스럽기를 바랐다. 흔들어대고는, 한 달이라도 만나달라고 졸라봐야지. 만나보고 무르자 해도 좋으니까 한 달이라도.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정말 잘해줘야지. 나 아닌 남자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 진짜 진짜 잘해줘야지. 나름 원대한 계획을 세우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때 드디어 그녀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일찍 퇴근해서 쉴 거라더니 정말 생각보다 빨리 왔다. 태석은 심호흡하며 내릴 준비를 했다. 제 차에서 떨어진 곳에 주차하는 걸 확인하며 태석은 조용히 케이크를 들고 내렸다. 그런데. 비상구 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스스슥 걸어 그녀 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서윤은 뒤돌아 있어 확인하지 못할 위치였다. 놀란 태석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피해!”

서윤에게 경고하는 동시에 괴한을 붙들어 돌리고 퍽, 주먹을 날렸다. 태석의 손에서 떨어진 케이크 박스가 나뒹굴었다.  

“형한테 ‘내 사람’이 있긴 해?”

“왜, 왜 없어. 있지. 많지. 야, 나도…….”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한 사람, 있어?”

  순간 강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머리를 쾅 치던 그 말.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한 사람. 괴한 너머 놀란 얼굴의 서윤이 보였다. 그래, 있어. 무엇을 내줘도 아깝지 않을, 내 귀한 사람. 있어.

“으윽!”

지금 칼에 찔리는 사람이 서윤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 생각뿐이었다. #18. 한 달만 만나줘. 키스는 길고 달았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덤벼볼 것을. 태석은 그녀를 당겨 안고 오래도록 키스했다. 서윤이 저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녀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태석이 입을 열었다.

“한 달만 만나줘.”

서윤의 눈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인가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더는 바라지도 않아. 일단 한 달만 나 만나주면…….”

“한 달만?”

“그래, 내가…….”

“넌 진짜.”

서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뭘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니.”

“내가 뭘 몰라.”

“나 한 달만 만나기 싫어.”

청천벽력이다. 태석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서윤, 이러는 거 아니다. 내가 칼까지 맞고 하는 말인데, 이 정도면 내 마음이 갸륵해서라도 한 달 정도는 만…….”

“더 만나.”

“그래, 더 만나야지. 더 만……, 뭐?”

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킵한 대가에 대신 칼 맞아준 은혜까지 합친 게 겨우 한 달이야? 마태석 스케일 큰 줄 알았더니 너무 소박하네.”

이번엔 태석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단 무기한으로 만나봐. 종료 시점은 지금 말고 추후 상호협의 하에 정하는 걸로.”

태석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얼떨떨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너 바쁘잖아.”

“연애할 시간도 없을까 봐.”

하아, 들뜬 숨을 내쉰 그가 서윤을 품에 당겨 안았다.

“꿈이면 나 꼬집지 마. 안 깨고 싶어.”

태석의 말에 그녀가 풋, 웃었다. 꿈일까 봐 두려운 건 저도 마찬가지다. 내내 비어 있던 서로의 마음이 가득히 차올랐다. 아픔 끝에 새로이 시작되는 사랑이, 이제야 서로를 향했다. 그녀 인생 최고의 생일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