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외전. 마태석과 한서윤 (2)2021.11.09.
#6. 오랜만이야. 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물론 친화력이 남다른 태석과의 만남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만나는 시간은 서윤에게 정하라고 했다. 그래서 주말 낮으로 정했는데 그게 영 탐탁지 않았는지 태석은 카페에 오자마자 대뜸 타박부터 했다.
“내일도 있고, 아니면 이따 저녁도 있는데. 왜 하필 오늘 이 시간이냐.”
“바빠서 이 시간밖에 안 된다니까. 나 그냥 가?”
“에이, 무슨 소리를 또 그렇게 하시나!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뭘 그냥 가. 앉아, 앉아. 제일 비싼 걸로 사다 줄게. 뭐 마실래?”
부탁이 있는 모양이다. 갑자기 연락해온 것도 그렇고, 사근사근 구는 태도도 그렇고. 서윤은 검사가 된 후로 사적인 부탁은 절대 받지 않고 동료 외의 사람들과 더더욱 선을 그어왔다. 그러나 태석은 제게 아쉬운 말을 할 처지에 놓인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대체 무슨 일로 저를 찾는지 알고 싶었다. 부탁이 있다면 그게 뭔지도 궁금하고. 아니,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게 사실이다. 태석의 소식이야 듣고 싶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들려와 알고 있으니까. 그가 작은 로펌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비롯해 어떤 일을 하는지, 심지어 집안 얘기까지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늘 화젯거리였다. 심지어 부산지검에 있을 때도 그의 소식이 들려올 정도였으니. 태석이 커피를 주문하고 픽업대 앞에서 기다리다가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저도 모르게 태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윤은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상하게 더운 숨이 새어나왔다. 갑갑한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만나러 나온 게 잘한 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7. 한결같은 무지렁이 태석이 저를 찾은 이유는 놀라웠다. 서윤이 현재 준비 중인 비밀기업 ‘제풍코퍼레이션’에 대한 정보를 줄줄 꿰고서는, 그중 가장 잔챙이에 불과한 ‘박후만’까지 언급한 것이다. 워낙 거물들이 엮여 있으니 행여 박후만을 홀대할까 봐, 감방에 처넣을 때 빠뜨리지 말고 꼭 좀 챙겨달라고 말이다. 그 이유까지 엉뚱했다.
“제풍이고 뭐고 난 모르겠고. 박후만이 감방 가는 것만 보면 돼.”
“왜?”
“그놈이 내 차 박았거든.”
서윤의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아 진짜. 마태석 너 정말.
“웃지 마라. 나 진지하다.”
“미치겠다, 마태석.”
저런 대단한 정보력을 하찮게 낭비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서윤은 태석과 마주 앉아 있으니 경직된 일상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나이를 먹어도 넌 어떻게 그대로냐.”
“내가 좀 동안이야. 피부 봐라, 완전 아기 피부지?”
그의 너스레가 반가웠다. 오히려 대학 때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그때는 너무도 빛나는 태양 같아서 쉽게 다가설 수 없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태석은 여전히 빛이 나지만 한결 편안한 기분이 드는 건 서윤 자신에게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까.
“아는 게 많은 것 같진 않은데. 예나 지금이나.”
“뭐?”
“……아는 거 없어, 너.”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예나 지금이나 그는 한결같은 무지렁이다. 아마 사방팔방에 관심이 많아서겠지.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많고, 두루두루 챙겨야 할 것도 많고. 그러니 눈앞의 사소한 부분에 대해선 놓치는 게 많을 터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태석. 야속하거나 서운하진 않았다. 그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일 뿐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일단 수사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은 고마운 일이고, 그가 부탁해온 건 서윤으로서도 꼭 해야 하는 일이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닿은 인연의 끈이 어떻게 이어질지, 그땐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8. 엮이지 말아야지. 서윤은 태석과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되었다.
“정말 둘이 사귀는 거야?”
“소문이 자자하던데.”
“일을 죽어라 하면서 틈틈이 연애까지 하고, 한 검 대단해.”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태석과 왜 만나는지 말하고 다닐 수 없었으니까. ‘제풍코퍼레이션’을 치기 위해 태석이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벌릴 순 없다.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비밀 연애를 누가 대놓고 하나.”
“그것도 마태석이랑.”
검찰청 앞에 와서까지 기다리고 있는 태석이 남들 눈엔 영락없는 남자친구로 보이긴 하겠다.
“마태석이 알면 기분 나쁘겠어요.”
그는 전혀 의도한 일이 아닐 텐데.
“감추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그 집안이 좀 넘사벽이긴 하잖아. 알지? 이번에 마태석 아버지…….”
“한서윤!”
태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꾸 부딪칠수록 서윤은 더 불편해졌다. 어차피 잘될 사이도 아닌데 괜히 저만 희망고문당하는 것 같아서. 마태석 아버지라……. 그래, 그 집안 참 대단하지. 열심히 살아온 제게 부족한 점은 없다고 여겼다. 이만하면 성실하고 씩씩하지, 스스로 아끼며 살아왔다. 그러나 거대한 산처럼 보이는 태석과 그의 배경 앞에 서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는 제게 관심도 없을 텐데 굳이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고. 짝사랑의 ‘짝’도 제겐 해당이 안 된다며 싹둑 잘라냈다.
“내가 박후만 안 빼먹고 야무지게 잡아 처넣을 건데. 그거 말고 혹시 정보 제공에 대한 다른 대가가 필요한 거야?”
“대가?”
“너무 비싸면 곤란해. 알다시피 난 그럴 돈은 없어서.”
“대가라……. 그건 일단 킵.”
그런데 자꾸 태석은 엮일 일을 만든다. 대가를 킵하겠다니, 얼마나 거창한 대가를 요구하려고. 스케일이 큰 그에게 맞추려면 각오를 해도 단단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어서 일을 마치고 나면, 태석과는 절대 엮이지 말아야지, 서윤은 헛된 다짐을 했다. #9. 여우인지 오작교인지 정말 끝난 줄 알았다. 태석에게 들을 이야기도, 받을 정보도, 그걸로 다 끝이었다. 덕분에 서윤은 권력과 엮인 비밀기업에 맨몸으로 부딪치는 일에 든든한 철갑을 하나 두르게 되었고, 수사에도 활기를 띠어 연일 바쁜 날의 연속이었다. 초반에는 다들 힘들 거라 했다. 위험할 거라고도 했다.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라는 압박도 받았다. 그러나 서윤은 기어이 해냈다. 뺨 때리고 어르고 달래고 온갖 스킬을 구사하며, 목표로 잡은 ‘제풍’ 먼저 치기 위해 그와 관련된 권력자들을 하나하나 떨쳐냈다. 그들은 위험까지 무릅쓰고 ‘제풍’을 지켜줄 이유는 없기에 손익계산을 하며 눈치껏 빠져주었다. 그들의 죄는 나중에 물을 것이다. 서윤은 발톱을 감춘 호랑이였다. 태석이 신신당부했던 형제의 막내 ‘박후만’까지 잡아들이고 내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백강호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태석의 지인으로, 현재 그녀가 수사 지휘 중인 사건과 관련하여 전할 말이 있어 만나길 원한다고 했다. 그런 요청에 일일이 응하지는 않지만, 백강호는 여우였다.
- 검사님께서 오셨으면 하는 장소는 태석 형의 생일파티가 열리는 클럽입니다. 태석 형도 동석할 테니 그 정도면 위험해서 못 오실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중요한 이야기. 그리고 안전한 장소. 마다할 이유 따위 다 없애고 요청하는 만남에 서윤은 응할 수밖에 없었다.
“……마태석 생일.”
모임을 잘 나가지 않는 서윤은 태석의 생일파티에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궁금하긴 하네.”
여우의 탈을 쓴 백강호가 사실은 인간 오작교라는 걸 모른 채 서윤은 태석의 생일파티에 갈 날을 일정표에 입력했다. #10. 초대하지도 않았으면서
“우리 서윤이 이제 왔구나.”
“아, 마태석.”
클럽이라 해서 시끌벅적할 줄 알았더니, 그런 분위기의 클럽은 아니다. 요란함과는 거리가 먼, 고급스러운 장소였다. 입구에서 백강호가 보내준 파일로 확인을 받고 안으로 들어선 서윤은 두리번거리다가 제게 다가온 태석을 만났다.
“지금 완전 바쁘잖아. 그런데도 내 생일 축하해주려고 와준 거야?”
“일단 생일은 축하해, 근데 내가 여기 온 건…….”
“나 보고 싶어서지. 알지, 알지.”
저를 너무나 반기는 태석을 보니 은근히 마음이 상했다. 초대하지도 않았으면서. 차라리 어쩐 일이냐 물었으면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약속 있어서 왔다, 하고 말았을 텐데, 제 생일을 축하해주러 왔다며 무턱대고 반기는 모습을 보니 제 참석 여부는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나 싶다. 나는 왜 초대 안 했냐, 우리 이 정도면 좀 친해진 거 아니었냐, 너 아무리 챙길 사람 많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정말. 지금까지 애써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했다.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데 여기 괜히 왔나. 짝사랑 상대에게 느끼는 소외감이라니, 최악이다. 감정이야 어쨌건 일은 해야 했다. #11. 설마 걱정해준 건가. ‘제풍’의 형제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맏이인 박후길이란 여자가, 백강호의 집 유산 문제에 얽혀 있다는 사실에 서윤은 기가 찼다. 그야말로 악으로 똘똘 뭉친 남매들이 아닌가. 유산을 노린다는 건, 목숨과 재산을 한꺼번에 취하겠다는 의도였기에 서윤은 어떻게든 그들이 죗값을 받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호의 계획을 찬찬히 듣고,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했다. 이후, 계획과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강호는 대범하게 임했고 마침내 끝장을 보았다. 황 실장 일당이 의천 공장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 의천으로 갔던 서윤은 상황이 종료된 것을 확인한 후 그곳을 떠났다. 서윤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소란을 데리고 의천으로 내려갔다는 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도착했는지 빨리 확인만 할 셈이다.
- 넌 어떻게 된 거야? 지금은 또 어디고?
“나 그쪽 상황 보고 다시 서울 올라가는 중이야.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거든. 얘기는 일 다 끝난 다음에 한꺼번에 할게. 지금은 설명할 시간 없어.”
황 실장 일당이 밀항할지 모른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후 황 실장 일당과 박 여사까지 치려면 서윤은 아직 할 일이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태석이 너는, 하고 물었다. 나 뭐, 하고 되물으니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묻는다.
- 너는 괜찮냐고.
“……내가 안 괜찮을 게 뭐 있는데?”
- 위험한 거 하지 마.
일순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쿵, 떨어진다. 범죄자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게 내 직업인데, 위험한 걸 하지 말라니.
- 몸 좀 사리고, 뛰어다니지 말고, 적당히 뒤로 빼고, 알았어?
“네 걱정이나 해. 끊는다.”
전화를 툭 끊은 서윤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걱정. 설마 정말 걱정을 해준 건가. 말 한마디로 결국 저를 온통 흔들어놓는 태석이 미울 뿐이다. 이제 정말 끝인데. 곧 박 여사까지 검거되고 나면 관련 사건을 맡은 제게 배당이 될 테고, 공소제기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면 사실상 태석과의 일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더 이상은 엮일 일이 없는 사이. 후우. 태석을 다시 만난 후로 늘어난 건 한숨이다. #12. 생일 아침부터 정신없는 날이다. 현재 가장 공을 들이는 사건 외에도 배당받아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라 서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점심 먹을 시간은 당연히 없다. 출근길에 사 온 팥빵을 입에 물고 서류를 넘기는데 수사관 김 계장이 말렸다.
“잠깐이라도 나가서 점심 들고 오시라니까요. 그러다 탈 나요.”
“괜찮습니다.”
“하긴, 저녁에 일찍 퇴근하시려면 바쁘시겠네요.”
“저녁에요? 왜요?”
김 계장의 말에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모르는 무슨 일이 있던가, 하고.
“허허, 검사님 정말.”
김 계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일이잖아요.”
“아, 오늘 계장님 생일인가요?”
“검사님이요, 검사님.”
그제야 서윤이 탁상 달력을 바라보았다. 맞네, 내 생일이네. 순간 태석의 생일파티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왔으면 선물을 줘야지.”
“너는 내 생일 알아?”
그가 얄미워 불퉁하게 툭 던졌던 말. 모른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태석에게 서윤은 실망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당연한 일이다.
“내 이름은 아니?”
“……그래서 네 생일이 언젠데.”
“알아서 뭐 하게.”
끝내 태석에게 제 생일은 알려주지 않았다. 정신없는 사이 시간은 흘러 생일이 되었다. 그러면 뭐 해. 어차피 함께할 사람도 없는데. 친구는 원래 없고, 어머니도 돌아가신 지 3년이 되었다. 그녀와 소통하는 이들이라곤 범죄자와 동료들뿐이다. 적적한 생일, 축하받을 사람 없으니 동료들에게 회식하자고 하기도 참 모양 빠지고. 그러니 생일이라고 특별할 것 없이 그냥 흘러가는 날 중 하루로 여겼다. 그래도 생일에 제가 늦게까지 일에 매달려 있으면 다들 불편해할 걸 알기에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찍 퇴근해야죠.”
그때 드르륵, 하고 서윤의 책상 위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뒤집어보니 낯익은 이름이 떠 있다. 마태석, 그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