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외전. 마태석과 한서윤 (1)2021.11.06.
#1. 일부러였어? 대학교 때다. 한서윤, 그녀가 시험에서 늘 차석을 유지하다가 처음으로 수석을 해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된 즈음이다.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나씩 줄여도 되겠다는 생각에 숨통이 트였다. 확보한 시간엔 공부를 좀 더 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큰 이득이다.
“야, 네가 살인을 안 한 걸 믿으라고?”
“진짜 안 했다니까. 내내 놀다 보니 졸려서 그거까진 할 시간도 없었고.”
자판기 앞에서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씩 웃는 태석이 보였다. 남자 동기들과 함께였다. 서윤은 별생각 없이 바깥쪽으로 돌아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가 서윤의 발길을 붙들었다.
“마태석이 강도에 강간까지 다 하고 살인을 안 했다니, 말이 되는 소릴 해라.”
“하여튼 그렇게 됐어.”
언뜻 수상하게 들릴 수 있으나, 사실 내용만으로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법학과 학생끼리 지난 시험 범위를 얘기하는 중이라는 걸 대부분 알았다. 서윤이 멈춰 선 건, 태석이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는 얘기 때문이다.
“뭔 소리야. 얘 형법 각론 달달 외우던 거 내가 봤는데.”
“그래, 맨날 수석만 하던 애가 범위 하나를 날렸다는 걸 누가 믿겠냐.”
태석의 친구들은 그가 시험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며 의구심을 품는 중이다. 줄곧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던 태석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아닌지라 다들 의아해하긴 했다. 동기들 간 별 교류가 없는 서윤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안 그래도 망해서 속 쓰린데 그만 후벼 파고, 이따가 비 온다는데 막걸리에 파전 콜? 콜, 콜! 가자, 시험 망한 기념으로 내가 쏜다.”
태석은 집요하게 캐묻는 소리를 외면하면서 빈 종이컵을 툭 구겨 버리더니, 양쪽으로 팔을 올려 친구들에게 어깨동무했다. 그가 쾌활하게 웃으면서 친구들을 몰고 가는 뒷모습을 보고 서윤은 깨달았다.
‘일부러였어?’
늘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보아도 서윤이 수석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건 그 자리에 늘 태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가 시험을 망쳐 수석을 놓친 탓에 서윤이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다. 늘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것 같아도 태석은 학과 공부엔 진지하게 임했다. 게다가 공부할 때만큼은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보였고, 타고난 머리가 좋기도 했다. 그런 그가 시험 범위를 제대로 훑지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설마 나 때문인가.’
그가 제게 수석 자리를 주기 위해 양보라도 한 것일까. 누가 알면 자의식 과잉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서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발 넓은 태석이 조교나 다른 이를 통해 우연히라도 제 사정을 알게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고, 알게 된 이상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테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발 벗고 나서는 스타일인 태석에게 도움을 받은 학우들만 해도 수두룩했다. 어쩌면 정말 태석이 일부러 양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윤은 몸이 돌처럼 굳은 듯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마냥 바라보았다.
#2. 스며들다. 사실 태석이 수석 자리를 일부러 포기한 게 사실이라면 서윤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동정을 받고 있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절 가엽게 여겨 장학금을 내어준 건 아닐 테니까. 태석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돕는 일이 많았고, 그걸 잘 내색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마 드러난 것보다 감춰진 게 훨씬 많으리라. 서윤 역시 자판기 앞에서 태석과 친구들이 한 대화를 우연히 들은 게 아니었다면 내내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태석이 더 빛나 보였다. 이제야 그가 눈에 들어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금수저라 하여 누구나 여유롭고 넉넉한 건 아닐 터다. 그를 보면 가정 교육을 잘 받고 세상에 대한 예의와 교양을 갖추며 자랐다는 게 느껴졌다. 부럽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태석을 찾는지 알 것도 같았다. #3. 남친 아니거든.
“쌤, 쌤?”
제게 과외받는 학생이 부르는 소리에 서윤은 정신이 들었다.
“오올, 쌤 남친 생겼어요?”
학생이 서윤의 노트를 들여다보며 장난스레 물었다.
“남친?”
“마태석이 누군데요? 쌤 남친 아니에요?”
태석의 이름을 듣는 순간 서윤이 화들짝 놀라 제 노트를 보았다. 구석에 마태석, 마태석, 하고 굵게 색칠하듯 덧쓴 그의 이름이 있다. 학생이 문제를 푸는 동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는데 그게 어느새 마태석에게로 흘러간 것이다. 서윤은 당황한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아니야, 문제나 풀어.”
“다 풀었다니까요.”
“아, 그래, 보자.”
아무렇지 않게 문제 풀이를 봐주려는데, 건수라도 잡았다는 듯 학생이 싱글싱글 웃었다.
“쌤 로봇이신가 했는데 아니었네요.”
“뭐?”
“남친 혹시 군대 갔어요? 저는 쌤이 순정파인지 몰랐어요.”
매번 집중이 흐트러질 때마다 서윤에게 바짝 몰아침을 당했던 학생은 이 역공의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모양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 봐.”
서윤은 탁탁, 펜으로 문제 위를 치며 엄한 얼굴을 했고, 네, 네, 하고 대답하던 학생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쌤 남친 잘생겼어요?”
“남친 아니거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태석이 보는 것도 아닌데 창피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아니면 아니지 왜 발끈하세요.”
한마디도 안 진다. 이래서 틈을 안 보이려고 했던 건데, 완전히 말려버렸다. 서윤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한 머리를 감싸며 진지한 표정으로 문제 풀이에 들어갔다. ……하아, 그래, 남친 아니거든. 남친이 될 일도 없는 사람이고. 과외를 마치고 나오는 길, 또다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반짝이는 빛을 내뿜는 태석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서윤은 고개를 흔들어 태석의 잔상을 떨치려 노력했다. #4. 몰랐으면 했지만 정말 모르네.
“이여, 한서윤이 종강파티에도 다 왔네. 이쪽으로 앉아.”
어색하게 들어선 호프집. 과 대표가 신기함 반, 반가움 반인 얼굴로 서윤을 맞이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올까 말까 백번 고민하다가 들른 참이다.
“나 그냥 이쪽에 앉을게. 어차피 알바 때문에 일찍 가야 해서.”
“그래? 그래, 그럼.”
서윤은 출입구에서 최대한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끼리끼리 친한 무리가 벌써 술잔을 주고받으며 종강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강의를 듣는 것 외에는 과 행사에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었다. 동기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어머니는 빚 갚을 돈을 버는 것만도 버거워했다. 마음으로는 서윤을 응원할지라도 재정적 도움은 전혀 줄 수 없는 분이셨다. 그러니 대학에 들어온 것부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버는 것까지 모두 서윤의 몫이다.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돈을 버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어떻게든 끝까지 공부를 마치고 목표대로 검사가 될 작정이다. 그렇기에 서윤은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대학 생활을 누리는 건 꿈처럼 먼 이야기였다. 그나마 서윤이 수석, 차석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었다면 과에서의 존재감이 먼지만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동기들에게 인식된 그녀의 존재감이라는 게, 집안이 어려워 늘 알바로 바쁜 애라는 정도였겠지만. 가까이 앉은 동기들이 서윤을 반기며 맥주도 따라주고 안부도 물었다.
“맨날 시간 없다고 빠지더니 오늘은 왔네, 잘했다.”
“자, 잔 채우고.”
“오늘도 알바 가? 밤엔 곱창집에서 한댔나?”
“거기 맛있냐? 지하철역 앞에 있는 거 맞지? 그 집 손님 많아 일 힘들다던데 넌 되게 오래 하는 것 같다.”
“얘야 성실하잖아. 과외도 몇 개나 뛰면서 알바도 하고, 이번엔 수석까지 했어요. 자, 건배, 건배.”
이후로 시시각각 바뀌는 대화의 주제를 따라가긴 어려웠다. 어느 교수가 어떻고, 학교 앞 어디가 어떻고, 다음 축제 때 뭐가 어쩌고, 서윤에겐 와닿지 않는 얘기들뿐이다. 그녀의 눈은 뒤늦게 도착해 사람들과 인사하기 바쁜 태석에게로 향했다. 태석은 제 시선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모르겠지. 서윤은 이상하게 손끝이 저릿했다.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왔나…….’
딱히 무슨 목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반드시 태석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뭔가에 이끌리듯 온 것뿐이다. 기회가 되면 얘기라도 해보고 싶긴 했다. 정말 수석 자리를 일부러 양보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건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만약 아니라면 제가 창피해질 질문이다. 결국 서윤은 멀리서 태석을 보기만 하고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마음속에 고구마를 착착 쌓아가던 무렵,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할 때쯤 맞은편에 누군가 앉았다.
“우와, 한서윤 술 잘 마시는구나.”
일어나려니 반도 더 남은 맥주잔이 민망해 이거나마 비우려던 차였는데, 때마침 온 태석은 서윤이 원샷이라도 하려는 줄 알고 감탄했다.
“마셔. 내가 한 잔 더 줄게.”
갑자기 앞에 나타난 태석 때문에도 놀랐지만, 술까지 받아마실 순 없기에 서윤이 잔을 그냥 내려놓았다.
“아니, 나 술 잘 못 마셔. 한 잔이 끝. 두 잔 마시면 취해.”
“그랬구나? 몰랐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알 기회가 없긴 했으니까. 아르바이트 때문에 술을 따라준다는 제안을 잘라내자 딱히 이어갈 말이 없긴 했다. 그냥 마실 걸 그랬나, 서윤이 잠깐 후회하는 사이 태석이 입을 열었다.
“아르바이트 많이 한다며? 안 힘들어?”
“힘들지.”
“아, 힘들겠지.”
짧게 돌아온 대답에 태석이 수긍하며 또 물었다.
“방학 때는 뭐 해? 계획 있어?”
강의가 없을 뿐, 공부하고 일하는 날은 똑같을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려니 서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재미없게 느껴졌다. 태석은 거의 대화를 끊어놓는 수준의 대답에도 당황하거나 서먹해하지도 않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얘기하든, 제 페이스를 잃지 않고 자기중심이 단단한 태석이 서윤의 눈엔 특별해 보였다.
“방학 때…….”
딱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뭔가 대답을 성의껏 해보려고 노력해보려는데.
“마태석, 마태석.”
“어디 갔나 했다. 야, 아까 저기서…….”
우르르 몰려든 동기들이 쓰나미처럼 테이블을 휩쓸더니, 태석이 둥둥 떠밀려 갔다. 이내 덩그러니 남겨진 서윤은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곧 아르바이트 가야 할 시간이다. 바깥에 나와 선 그녀는 시선을 돌려 안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가 있다. 태석은 알까. 제가 바라보는 모습을, 그는 알 틈도 없어 보였다. 몰랐으면 했지만 정말 모르네. ‘난 뭘 바라는 거야.’ 서윤은 다시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밤하늘엔 별도 보이지 않는 밤이다. #5. 잊고 살다가 짝사랑이라 하기엔 거창하고, 동경이라 하기엔 애매한 감정이었다. 호감일 수도 있겠고, 관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태석과 관계를 발전시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어본 적 없다. 일단 서윤 자신이 너무나도 바쁘고 여유가 없으며, 결정적으로 태석이 제게 특별한 감정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참 많았다. 굳이 저까지 거기 보탤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서윤은 마음을 접을 필요도 없이, 감정을 그저 시간에 흘려보냈다. 잊고 살았다. 서윤도 자리를 잡았고 목표도 이루었고 열심히 살아온 보람도 있다. 그래도 바쁘게 지내는 건 마찬가지였던 어느 날. 걸려온 전화를 무심코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한서윤 검사님? 안녕.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 마태석이라고, 너랑 같은 과 동기였거든.
잊고 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여보세요? 아닌가, 한서윤 휴대전화.
“아아…….”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맞아, 나 한서윤.”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