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재혼 기념 (105/112)

#105화. 재혼 기념2021.11.02.

- 백화푸드의 백무영 명예회장을 비롯한 일가친척에 대한 살인교사 및 현주건조물방화치사의 교사,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는 박후길 사건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 사건에 장국철 박사가 연루돼 경찰이 내사에 착수하여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데요, 장국철 박사는 국내 호흡기 내과 분야 최고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전문의로서, 오랫동안 백무영 회장의 건강을 책임진 주치의로 알려져 더욱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 수사 결과 박후길 사건에 연루된 장국철 박사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병원 운영권을 약속받고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장 박사는 현재 막대한 빚을 진 상태로 수차례 해외 원정 도박을…….

- 새로운 소식입니다. 오늘 새벽 장국철 박사가 자택에서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여 가족이 이를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국철 박사는 최근 수사 중인 사건에 압박을 느껴…….

연일 박 여사에 대한 소식으로 시끄럽던 가운데, 주치의였던 장 박사의 죽음까지 더해져 난리가 났다. 인터넷 속에서는 물론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그 얘기로 떠들썩했다. 그토록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던 자가 뒤로는 더러운 일을 벌였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일주일. 강호에게 계획된 일 이후 백 회장의 죽음이 예고된 날은 불과 일주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죽은 건 백 회장이 아니라, 결국 장 박사였다. 있지도 않은 병을 만들고, 영양제일지언정 수개월에 걸쳐 가짜로 약을 처방하고,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망가뜨리고,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한 후엔 거짓으로 사망 선고까지 하려 했던 자. 저를 죽이려 했던 자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백 회장은 그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 박사의 마지막 가는 길은 초라하고 쓸쓸했다.

“여긴 뭐 하러 오자고 해서.”

장례식장 밖으로 나온 계 박사와 고 여사 내외는 마뜩잖은 얼굴로 백 회장을 바라보았다. 어디든 백 회장에게 끌려다니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장 박사의 장례식장까지 오자고 할 줄은 몰랐다.

“기분이 영 그렇네.”

“진짜 자네도 악취미일세. 꼭 눈으로 확인해야겠나.”

두 내외는 백 회장이 직접 이곳에 온 것이 탐탁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를 속이고 죽이려 했던 자의 마지막을 보는 건 정서상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니, 백 회장이 심적으로 부담을 갖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 이제 내 마음이 다 정리가 되는 기분이야.”

백 회장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충격에 충격이 더해진 이번 일 속에서 사실 장 박사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도 컸다. 큰 사업을 해나가던 입장으로 사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던 백 회장이었는데, 그래도 장 박사만큼은 믿었다. 그러니 제 건강을 온전히 맡길 수 있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장 박사가 일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제게 커다란 상처였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칼로 묵 썰 듯 또렷하게 갈리는 것이 아닌지라, 백 회장은 그가 밉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고, 그러다 증오스럽기도 했고, 다시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초라한 죽음까지 맞이한 걸 보니, 1퍼센트의 감정까지 전부 걷어진 기분이다.

“자업자득 아니겠어. 이제 끝난 일이니 다 잊으시게.”

“자네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야. 너무 마음 쓰지 말고.”

고 여사와 계 박사가 착잡한 음성으로 번갈아 위로했고, 백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진짜 놓아줄 때가 되었다. 백 회장은 제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장 박사의 존재를 훨훨 날려 보냈다.

“죗값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떠났으니, 그 사람 죽어서도 고생하겠군.”

쯧쯧, 계 박사가 옆에서 혀를 차며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다시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진리. 백 회장은 하늘에서 눈을 떼어 제 곁의 친구들을 보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세.”

“어디 좋은 데 있는가?”

백 회장이 옅게 웃었다.

“있지. 우성준이라고 아주 음식 맛깔나게 하는 젊은이가 있는데, 내 그 식당에 세 명 미리 예약해뒀지.”

계 박사와 고 여사가 발끈했다.

“내 손주사위 그만 귀찮게 하라고 했지!”

“성준이 가뜩이나 바빠서 우리도 보자 하기 미안한데 백가 네가 뭔데 우리 애를…….”

“오늘 메뉴가 명란솥밥이라던데. 그래서 안 먹을 거야?”

백 회장이 가뿐히 무시하며 내뱉는 말에 계 박사와 고 여사 부부는 입을 합 다물었다.

“잔말 말고 얼른 가기나 하세.”

나이 들면 점점 입이 텁텁하고 맛도 못 느낀다는데, 명란솥밥 위에 참기름을 똑 떨어드릴 생각을 하니 벌써 입맛이 돌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백 회장은 싱긋 웃으며 앞장섰다. 길지 않은 인생, 좋은 사람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살아도 모자란 시간이다. 꽃이 만발하는 봄이 찾아들었다.

  ◇ ◆ ◇

“소란아, 내가 얼마나 힘든지 너도 알잖아.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너까지 외면하면 나 진짜 못 살아. 내가 너 때문에 죽는 거 너도 원하지 않잖아.”

사람이 태어나 이렇게까지 이름값을 잘할 수 있을까. 소란은 신기하다는 듯 진상을 바라보았다. 귀찮지도, 거머리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이따위 인생을 사는 진상이 불쌍할 뿐이다. 진상은 로펌 앞으로 찾아왔고,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연희와 태석이 말도 섞을 필요 없다며 갈라놓으려 했지만 소란이 어디 뭐라 하나 들어나 보자 했다. 그리하여 카페 안에 마주 앉은 참이다. 물론 한 테이블 건너 연희와 태석이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진상을 향해 아주 날카로운 레이저 눈빛을 쏘아대면서.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어. 나 정말 너무 무섭고 힘들어.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

“…….”

“아, 거, 걱정하지 마. 나 엄마랑 절연할 거야. 아니, 했어, 이미 마음으론 다 끊어냈어. 아빠도 이혼할 거고, 진혜나 나도 더 이상 엄마 볼 일 없어. 그냥 내가 얼마나 힘든지 그것만 생각해줘, 응?”

그의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사건이 있던 날 밤, 서재에 들어갔던 진혜는 잠든 엄마 곁에 못 보던 전화기가 있는 걸 의아하게 여겼고, 그걸 열어보았다가 강호를 죽이는 영상을 발견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진혜가 그녀의 손가락을 펴서 전화기에 대어 지문으로 잠금 해제하고 영상을 볼 때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자면서도 히죽 웃는 얼굴이 악마처럼 느껴졌다. 끔찍한 사실에 충격받은 진혜는 영상과 통화기록 등을 제 휴대전화로 전부 전송했다. 엄마는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진혜도 증거를 보내기까진 수없이 고민했다. 이대로 모른 척할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엄마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하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 결국 그 재산도 다 오빠에게 물려주려는 거겠지.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그럴 수가 있을까. 진혜는 제 몸속에 흐르는 피까지 다 걷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번이나 토하면서 고민하던 진혜는 새벽이 될 무렵 경찰에게 증거를 보냈고, 결국 엄마는 오전에 체포됐다. 어차피 그리될 일이었다. 시간이 조금 빨라졌을 뿐. 엄마의 몰락으로 진혜는 물론 진상의 삶 역시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물론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전과 같았지만.

“너 백강호랑 이혼했잖아. 둘이 안 맞을 줄 알았어. 너한테도 나밖에 없는데, 우리 다시 잘해보자. 내가 더…….”

“음…….”

소란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다. 혹시나 희망에 찬 답을 줄까 봐 진상의 눈이 반짝거렸다.

“내가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말해, 다 얘기할게.”

“너 나한테 왜 이래?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어?”

네가 대답 못 하면 내가 하겠다는 듯 소란이 말을 이었다.

“아마 내가 널 많이 좋아했다면, 너는 이렇게까지 매달리지 않았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승부욕이나 소유욕 같은 거야. 내가 만약에 널 많이 좋아하고 사랑했다면 너도 흥미가 떨어졌을걸.”

“뭐?”

진상은 인정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끝을 못 봐서 집착하는 거지.”

“아니야. 나는 널 정말 사랑하고 그래서 네가 이혼했다는 얘기 듣자마자 날아온 거잖아.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네가 알면…….”

그때였다.

“꺄악!”

테이블 사이를 지나던 카페 손님이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 손에 든 쟁반이 위로 튀어 올랐다. 더불어 컵에 있던 토마토 주스가 시원하게 발사되듯 튀어나가 진상의 얼굴을 강타했다.

“어억!”

생토마토를 얼마나 알차게 갈아놨는지 뻘겋고 진득한 액체가 진상의 얼굴에서 뚝뚝 흘러내려 흰 셔츠까지 물들였다.

“이게 무슨…….”

“으악, 죄송합니다!”

진상이 난리를 치기도 전에 난데없이 일어선 사람은 옆에 있던 태석이다.

“제 발에 걸려서, 아이고, 죄송합니다!”

태석이 넘어질 뻔한 여자 손님을 붙들고 사과를 해댔다. 진상과 소란의 대화를 듣기 위해 점점 몸이 기울면서 태석의 발이 통로로 나간 게 화근, 아니, 다행이었다. 저도 모르게 살짝 튀어나온 태석의 발에, 지나가던 손님이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다.

“괜찮으세요? 어휴, 어떡해. 저 때문에 놀라셨죠!”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놀라서 위로 던지다시피 한 쟁반에서 튀어 오른 토마토 주스가 정확히 진상을 덮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하필 맑은 청포도 에이드는 바닥으로 흘렀는데 토마토 주스가 진상에게 발사됐다. 우스꽝스러운 꼴이 된 진상을 뒤로하고, 태석은 손님에게 요란하게 사과를 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손님은 임신한 상태였다.

“진짜 죄송합니다. 주스는 제가 다시 사드릴게요. 다른 거 뭐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넘어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니, 나 지금…….”

외면당한 진상이 입을 뻐끔거리는데 저만치에서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달려왔다.

“언니! 윤희 언니!”

임신부를 향해 윤희라고 부른 여자는 혹시나 그녀가 다쳤을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다.

“괜찮아? 언니 어디 안 다쳤어?”

“어, 괜찮아. 그런데 이분이…….”

윤희가 저 때문에 토마토 주스 샤워를 한 진상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려는데, 여자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태석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이봐요! 저희 언니 잘못되면 책임지실 거예요? 매너가 아주 똥이시네! 발을 내밀고 있으면 어떡해욧!”

“제가 매너가 아주 똥이라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노여움 가라앉히시고, 정말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열띠게 화를 내는 여자에게 태석은 적극적으로 사과했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아니에요.”

본의 아니게 소 뒷발로 쥐 잡기는 태석의 전문 분야였다. 결론적으로 손님들에겐 아무 이상이 없고, 피해를 본 건 오직 진상뿐인데 이 난리통에 완전히 배제된 것도 오직 진상뿐이다.

“우리 언니가 얼마나 귀하게 얻은 아기인데, 놀라게 하시면 어떡해욧!”

“다영아, 난 괘, 괜찮다니까.”

희한한 광경이다. 참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생긴 동생이 어떡해욧, 어떡해욧, 하며 의외로 전투적이고, 찬바람 쌩쌩 불게 생긴 언니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느낌이니까. 친자매인지 그냥 친한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성격과 다르게 서로에게 닮아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유니 이모!”

그때 케이크 접시를 들고 오던 어린 여자아이가 바닥에 쏟아진 청포도 에이드를 밟고 쭈욱 미끄러지며 접시를 날렸다.

“어어!”

진상이 피하려 했지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가 놓친 접시에서 하얀 케이크가 날아올라 옆에 있던 토마토 진상의 정수리에 철퍼덕 안착했다.

“아이고, 애기야, 괜찮니!”

“소담아!”

이번에도 진상은 뒷전. 바닥에 미끄러진 아이에게로 온 관심이 쏠렸다. 태석은 연신 사과를 해대며 정신을 쏙 빼놓고, 연희와 카페 직원들이 바닥을 치우고, 그러는 사이 토마토 케이크가 된 진상은 얼빠진 얼굴로 서 있을 뿐이다. 소란은 한심하단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저만치 입구에서 환한 빛이 느껴졌다.

“어…….”

자연스럽게 소란의 시선이 옮겨졌다. 입구를 보는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강호다. 진짜 너무할 정도로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외모다. 토마토 케이크가 된 진상이 더욱더 초라하게 보였다.

“이 시간에 여기 어쩐 일이에요?”

소란은 잠깐이라도 보지 못하면 그리운 그가 반갑기도 하고, 또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랍기도 했다. 강호는 연희의 전화를 받고 카페로 온 참이다. 진상이 나타나 귀찮게 군다는 소리에 사무실에서 바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어서.”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소란의 허리를 감쌌다. 누가 이혼한 사이라고 믿을까. 두 사람의 눈빛은 사랑스럽고 애틋하기만 한데.

“백진상.”

그의 묵직한 음성에 진상이 움찔했다.

“우리, 다시 결혼해.”

“……결혼?”

“그러니까 내 와이프한테 들러붙지 말고 떨어져. 내가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진상이 황당한 얼굴로 외쳤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혼하고! 또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결혼이야! 니들 지금 장난해?!”

좋다가 만 게 이런 걸까. 줬다 뺏는 게 제일 잔인한 건데. 홀로 품었던 진상의 희망을, 강호는 무참히 깨주었다.

“네 어머니 때문에 소란이도 죽게 될까 봐 잠깐 이혼했던 건데, 이제 그럴 일이 없으니 다시 결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소, 소란이까지 죽이려고 했다고……? 우리 엄마가……?”

토마토 케이크 진상은 진심으로 충격받은 얼굴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잖아. 그런데도 뻔뻔하게 소란이 앞에 와 있다니.”

소란의 이혼을 반가워만 했는데 그런 식으로 엮여 있었다는 게, 하나만 알고 둘 이상은 생각하기도 귀찮아하는 진상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끌어내기 전에 꺼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진상이 입술을 꽉 물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러다 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이제 모든 희망이 깨어졌음을 깨달았다. 진상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 ◆ ◇ 아무런 방해와 걱정 없이 그와 보내는 밤은 언제나 그렇듯 특별했다. 얼마나 바랐던 순간인가. 사랑을 속삭이고, 미래를 약속하고, 수없이 많은 절정을 나누며 별빛 아래 보낸 밤. 그들의 신혼집은 완벽히 그들만의 공간이다. 루프톱에서 시작한 사랑은 새벽녘 다시 부부 침실로 이어졌고, 욕실에서 함께 보낸 시간을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다. 늦은 아침에야 소란은 겨우 일어났다. 손을 뻗어도 그가 닿지 않는 걸 보니 강호는 이미 일어나 침대를 비운 모양이다. 소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어?”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분홍색 상자 하나가 있다.

“저게 뭐지?”

소란은 일어나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열어보니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속옷 한 벌이 담겨 있다. 고개를 드니 열린 방문 밖으로 살굿빛 플리츠스커트가 놓여 있다.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더 떨어진 곳엔 흰색 블라우스가 있고.

“나오면서 입으라는 건가……?”

알몸이었던 소란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나왔다. 무슨 일인지 서둘러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길을 따라 옷을 내어둔 것 같은 느낌이다. 눈치가 빠른 소란은 가장 먼저 놓인 속옷부터 입고, 스커트, 블라우스를 입었다. 현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열려 있는 상자 속 귀걸이가 보였다. 봄에 어울리는 플라워 디자인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머리핀이 든 상자. 소란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차례차례 놓인 것들을 몸에 하나둘 걸쳤다. 현관에는 소란이 평소 좋아하던 브랜드의 새 플랫슈즈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것까지 다 신고 현관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자, 화사한 모습의 여자가 서 있었다. 꽤 마음에 드는 차림이다. 소란은 후우, 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너무 예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오두막이다. 꽃으로 장식된 오두막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에는 이미 갖가지 꽃이 피어 있지만, 오두막 외관의 꽃은 일부러 장식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계단 제일 위에 앉아 있는, ……제 남편.

“강호 씨.”

일어나길 내내 기다렸던 듯 강호가 소란을 보고 미소 지었다.

“이리 와.”

팔랑팔랑 뛰어오는 소란은 그야말로 나비 같고 꽃 같아 어여뻤다.

“나 입고 나오라고 둔 거 맞아요?”

계단 아래에서 묻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이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키스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밤새 물고 빨았던 입술도 순간 새삼스럽게 달콤하기만 했다. 입술을 떨어뜨린 그가 제일 먼저 한 건, 오늘 아침에 소란이 본 상자 중 가장 작은 상자를 내미는 것이다. 그가 연 상자 속에는 햇살을 받아 촤르르 빛나는 반지가 놓여 있다.

“우리 결혼반지 있잖아요.”

“이건 재혼 기념.”

강호가 소란의 손가락에 새 반지를 끼워주었다.

“주말에 사람들 초대했어. 이따가 드레스 보러 가자.”

“반지에 드레스까지 새로요? 아무리 제일 가까운 친구들만 초대한다고 해도, 꼭 그렇게까진 안 해도 괜찮은데…….”

“내가 하고 싶어.”

선물처럼 찾아온 일상, 매일매일이 소중했다. 기념하고, 또 기념해도 모자랄 만큼 아름다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이러다 밥 먹는 것까지 기념하겠어요.”

“할까?”

소란의 입술 사이로 꽃망울 같은 웃음이 터졌다. 누가 믿을까. 천하의 백강호가 이런 이벤트 마니아가 될 줄이야.

“사랑해.”

그는 소란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혀 안고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고백을 안겨주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

“사랑해왔어.”

너와 내 인연의 끈이 엮인 줄 몰랐던 때부터. 인연의 시작을 알지 못했던 그때부터 너를, 사랑하는 게 내 운명이었어.

“아주 오랫동안.”

“…….”

“계속 사랑할게.”

남편의 고백에 소란의 심장이 녹아내렸다.

“나도.”

그녀가 강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아주 오래오래, 사랑할게요.”

몇 번을 말해도 변함없는 진실이다. 사랑으로 가득한 오두막에 두 사람의 미소가 꽃비처럼 흩날렸다. 아니,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을 알지 못한 이때 역시, 사실은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돌아올 크리스마스에 찾아올 아기 천사가 이미 그곳에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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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n. -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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