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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가장 큰 형벌 (104/112)

#104화. 가장 큰 형벌2021.10.30.

박 여사가 긴급체포되어 한창 조사받는 그 시간, 강호와 소란은 서울로 올라와 그들의 신혼집에 도착했다. 어젯밤 병원에서 강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연희와 태석은 먼저 서울로 갔고, 소란은 강호의 곁을 지키다가 퇴원 수속을 하고 함께 올라온 것이다. 박 여사의 체포 소식도 들었기에 홀가분했다.

“강호야!”

집에 미리 와 있던 사람은 백 회장이다.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그는 하나뿐인 손주를 맞이했다. 근심을 떨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선 백 회장을 보자, 강호는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할아버지.”

강호는 저벅저벅 걸어 백 회장의 앞에 가서 섰다. 사지에서 돌아온 손주를 보는 백 회장의 눈가가 촉촉했다. 하마터면 귀한 아이를 잃을 뻔했다. 아들과 며느리, 게다가 여동생 내외를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강호까지 죽을 수도 있었다니. 제 순서는 가장 나중이었다. 그건 참 잔인하고도 끔찍한 일이었다. 결국 사랑하는 이를 하나하나 보내는 아픔을 다 겪고, 종국엔 죽음을 맞이하여, 그 악마에게 재산까지 탈탈 털리는 결말이라. 아마 그 여자는 죽어서도 죗값을 다 치르지 못할 것이다.

“내 이……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백 회장은 새삼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강호가 넓은 품을 열어 그런 할아버지를 안았다. 나이가 들어 예전보다 체격이 작아진 할아버지가 느껴졌다. 강호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 악마는 돈 때문에 조종질을 했을지 몰라도 이쪽은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어떻게든 지켜야 했고, 결국 지켜냈다. 마침내 강호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숨이 밀려 나왔다. 할아버지의 온기가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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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너무 위험했어요. 예정과 달리 갑작스러운 상황이 생겼으면 일단 자리를 피했어야죠. 어떤 일이 있을 줄 알고요. 그 사람들한텐 진짜 흉기가 있었을 텐데.”

소란은 그에게 지난 시간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이 벌렁거렸다. 일이 다 끝난 후 듣는 것만으로도 조마조마한데,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강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덕에 하루 일찍 끝났잖아.”

소란과 떨어져 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그의 말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예끼, 이놈아. 하루 일찍 끝내려다가 몇십 년 일찍 끝날 수도 있어!”

백 회장도 역정을 내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는 손주의 계획이 못내 불안했던 터라, 강호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까진 백 회장도 마음고생했다.

“나도 동감.”

찬규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연희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린은 팔짱을 낀 채 쯧쯧, 혀를 차며 강호를 보았고, 성준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 역시 동감이란 뜻이다. 강호는 순간 억울한 감정이 스쳤다. 치밀한 준비와 빠른 판단, 훌륭한 연기력과 더불어 죽음에 맞선 강심장까지. 어느 하나 간과할 것 없이 다 칭찬거리인데 다들 저더러 너무 섣불렀다고만 하니 말이다. 적어도 소란은 제 능력을 인정해줄 줄 알았는데 타박만 하니 억울한 것도 당연했다.

“만약에 퇴로가 막혀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나린이 툭 치듯 말하자, 찬규가 얼른 보태었다.

“그래, 만약에 그놈들이 불 지르기 전에 진짜 널 죽이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상상이다. 하지만 강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었어.”

“그럴 일이 왜 없어. 만약에…….”

“만약이 어디 있어. 일은 다 끝났는데. 원래 지나간 역사에 ‘만약’은 거론할 가치가 없는 법이야.”

찬규가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넌 뭐, 위험에 대한 감각이 없냐? 불사조야? 터미네이터야?”

“그들의 최종 목적은 방화야. 사람에게 상해를 입혀 죽인다는 건 아무래도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데, 어차피 불로 끝낼 상황에서 이미 쓰러져 있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괜히 깨어나 저항이라도 하면 귀찮아질 테고, 원한 관계도 아닌데 제 손으로 반드시 죽여야만 할 이유가 없지. 굳이 두 번 고생하고 싶진 않았을 거야.”

강호의 생각은 적중했다. 진짜 괴한들, 그러니까 박 여사가 보낸 황 실장 일당이 도착했을 땐 그가 공장 바닥에 피를 토해내며 쓰러져 정신을 잃은 후였다. 아니, 그런 척하는 상태.  

“야, 야, 이 새끼 왜 벌써 피떡이 됐어?”

“뭐야, 누가 벌써 다녀갔나 본데?”

  쓰러진 강호를 발로 툭툭 차다가, 한 남자가 그의 눈을 까뒤집어보기도 하며 상태를 살폈다.  

“맛 갔는데요. 일어나지도 못하니까 그냥 이대로 불 지르면 될 것 같습니다.”

“잘됐네. 빨리하고 튀자. 문이나 제대로 막아. 찔려죽든 타죽든 죽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박 여사는 사람이 다 자기 마음 같지 않다는 걸 간과했다. 일을 시키면 돈 준 만큼 제대로 하는지 꼼꼼히 살펴야 하거늘, 뒤에 앉아서 입만 놀리던 공주가 무엇을 알겠냔 말이다. 탐욕스럽게 머리만 굴릴 줄 알았지, 행동대장 노릇하던 동생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간 상황에서 그녀는 허깨비나 다름없다. 황 실장은 마치 제가 때려눕힌 것처럼 영상을 찍어 보냈다. 여기서부터 화재까지 전부 화면으로 본 박 여사는 만족스러워했고.

“구 비서님 통해서 가짜 괴한 투입한 것보다 이쪽이 훨씬 나은 결과였어. 실제로 범행을 시도한 자들이 잡혀갔으니, 우리가 그 과정에 대해 소명할 이유도 없고.”

강호 말이 맞긴 했다. 어쨌든 가짜 괴한을 써서 계획대로 방화까지 실행했더라면 후처리가 다소 까다로운 부분은 있었으니까. 강호는 서윤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도 여러모로 잘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소란이나 다른 이들에게 알려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할아버지는 여태 타박하시는 중이다.

“백강호, 넌 이성적이라 좋겠다. 우리 심장은 다 쪼그라들었는데.”

찬규의 말에 나린이 입을 열었다.

“쟨 원래 저래. 남이 옆에서 뭐라 하든 말든 다 지 맘대로지.”

그건 모두가 강호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타박이요, 투정. 바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조금 전에 한서윤이랑 통화해보니까, 증거가 워낙 넘쳐나서 진행이 빠를 거라고 하던데.”

속전속결로 구속에 검찰 송치까지 이뤄질 예정이다.

“우리 쪽에서 대기 타고 있다가 증거를 넘긴 것도 아닌데, 박 여사가 보낸 사람을 두고 어떻게 증거 확보가 그렇게까지 빨랐대요?”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수사엔 엄연히 절차가 있는데, 검거부터 증거 확보까지 하룻밤 사이에 전부 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증거를 제보한 자가, 바로 박 여사에게 가장 커다란 벌을 안기는 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 ◆ ◇ 박 여사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구치소 수감 이후로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꽃밭을 거닐다 발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꿈은 예지몽이었을까. 멀쩡한 발목에서 자꾸만 통증이 느껴졌다. 대체 누가 내 발목을 틀어쥔 거야.

“내 참, 당신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였어? 그러고도 사람이야?”

기껏 진상과 진혜까지 대동하고 접견을 온 남편은 박 여사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대답조차 바라지 않는 얼굴이다. 제가 한 이불 덮고 살아온 여자가 이토록 끔찍한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누명 쓴 거라니까. 내 말을 왜 안 믿어, 글쎄. 당신은 내 편이 되어줘야지.”

“편?”

“변호인단도 최고로 빵빵하게 꾸려주고, 날 여기서 꺼내주고, 그래야 할 것 아니야. 당신이 밖에 있으니 백방으로 알아보고 애써줘야…….”

“이혼할 사이에 그딴 걸 내가 왜 해주지.”

백 사장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박 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혼? 지금 이혼이라고 했나?

“이혼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구치소에 갇힌 제게 저 무슨 잔인한 소리란 말인가. 그것도 애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보는 앞에서.

“애초에 나한테 애정도 없었으면서 뭘 그리 기함하지? 무능력하다고 사사건건 무시만 해댔으면서 어째서 이혼 소리만은 꺼내지 않나 했더니, 그게 다 내 백부님 유산 때문이었다니. 당신 정말 끔찍한 여자야.”

전후 상황과 함께 그간 박 여사가 어떤 짓을 꾸며왔는지까지 알게 된 백 사장은 도저히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야, 다 조사해보면 나온다니까. 나는 절대 그런 일 한 적 없어. 내가 우리 진상이 걸고 맹세해. 정말이야.”

급기야 거짓을 두고 아들을 걸겠다니, 백 사장은 통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여자를 아내로 두고 살아온 지난 세월에 칼을 휘두르고 싶다.

“뻔뻔하게 굴지 말고 죗값 받아. 당신이 정말 인간이라면, 무슨 짓을 했는지 정도는 깨달으라고.”

동생들까지 줄줄이 잡혀 들어간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곳은 남편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다니. 박 여사는 지금 줄 끊어진 연의 심정이다. 이대로 남편까지 돌아서면 누가 자신의 구명을 위해 힘써준단 말인가.

“그리고 당신 꺼내려고 애써줄 돈도 없어.”

“아니, 돈이 왜 없어. 진상이 앞으로 돌린 건물이랑, 우리 땅이랑, 상가랑, 또 내가 일전에 계약한 건물까지…….”

현금은 탈탈 털어 진행비로 썼으니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나마 적지 않은 부동산이 있으니 안심했는데.

“회사 곧 넘어갈 거야.”

기어이!

“급한 구멍 좀 막으려고 봤더니 대출한도를 남김없이 싹싹 끌어다가 썼더군.”

“아아, 그건…….”

곧 당겨올 돈이 있으니 과감하게 벌인 일들이다. 제 앞에 떨어질 유산이 이미 제 돈인 줄 착각했다. 그 돈만 있으면 나머지를 메우는 건 일도 아니라 생각했다.

“게다가 새로 매입한 건물은…….”

후우, 백 사장이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왜!”

불안한 마음에 박 여사가 유리창을 팡 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게 왜! 그 건물이 왜!”

“당신 수감됐다는 소식 듣고 우 여사가 연락했는데, 중도금은 치를 수 있겠냐고.”

박 여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때문에 백 회장까지 처리할 일을 서둘렀던 것인데, 이제 보니 제가 구속된 게 문제가 아니라 건물 매입을 마무리 지을 수 없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어떻게 겁도 없이 그 큰 물건을 덥석 계약해?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사람 죽이는 것 말고는 없었으면서. 그러니까 당신이 인간도 아니라는 거야.”

정황도 너무나 완벽하다. 없는 돈에 건물까지 매입한 건 유산을 노렸다고밖에 할 수 없고 시기까지 맞아떨어졌으니 박 여사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중도금이며 잔금이며, 불가능한 상황이야. 그 건물 포기해야 하는데 문제는 위약금이지.”

그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잠자코 있던 아들딸 중 진혜가 입을 열었다.

“위약금만이 아닐걸.”

초췌한 박 여사를 보는 진혜의 눈빛에는 미약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엄마 사채까지 끌어다 썼잖아. 재산이고 뭐고 싹 다 정리해서 위약금이랑 사채며 대출까지 해결해야 할 텐데.”

진상이 기가 찬 얼굴로 박 여사를 바라보았다.

“사실이야?”

진상은 엄마가 친지들을 다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보다 그게 더 충격이라는 듯 물었다.

“아니지? 설마 그 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게 말이 돼?”

“오빠도 정신 차려.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재산이 아니라 엄마가 몇십 년 동안 해온 일의 대가라고.”

진상은 아직 엄마가 했다는 짓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진혜는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박 여사는 검거되기 전, 집안에서 몇 번이나 절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혜의 눈빛이 떠올라 기시감이 느껴졌다. 멀쩡한 발목이 다시금 쓰라렸다.

“너 정말 엄마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니?”

통증을 느끼며 묻는 말에, 진혜가 급기야 헛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공허하게 웃는 그녀를 보는 박 여사, 백 사장, 진상 모두 당황했지만, 진혜는 개의치 않았다. 웃음이 그친 진혜의 눈엔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었다.

“경찰에 증거 넘긴 사람.”

“설마…….”

“나야.”

그나마 마지막까지 엄마의 혐의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던 진상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딸마저 돌아서게 한 엄마의 죄가 이제야 심장을 도끼로 내리친 듯 거센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이었구나. 진짜였어. 진상의 깨달음을 바로 알아챈 박 여사가 애타게 외쳤다.

“아, 아니야. 진상아, 진혜 저게 거짓말하는 거야. 증거는 무슨!”

진혜는 싸늘한 투로 말했다.

“그만해, 엄마. 엄마가 그럴수록 내가 쓰레기통에서 태어난 기분이니까.”

끝까지 뉘우치지 않던 박 여사에게 내려진 가장 큰 벌은, 오랫동안 하게 될 감옥살이도,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진혜야, 그게 아니라…….”

“엄마가 내 엄마라는 게 소름 끼쳐.”

“하아……, 지, 진상아. 너는 엄마 믿지? 엄마 믿어야 해, 진상…….”

“내 이름 부르지 마.”

“…….”

“끔찍해.”

치 떨리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들과 딸의 눈빛. 끝내 돌아서는 남편의 등. 가족에게 받은 처절한 버림이 박 여사에게 주어진 최대의 형벌이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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