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팝콘 준비해2021.10.23.
태석은 소란이 그렇게 날쌘지 처음 알았다. 눈썹이 휘날리게 뛴다는 게 어떤 건지도 처음 알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못 견뎌서 비상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는 사람이 드라마에만 나오는 게 아님도 처음 알았다.
“헉……, 헉……, 같이…….”
주말마다 산 좀 타본 태석도 이 순간 소란의 뒤는 쉽게 쫓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엘리베이터 기다렸다가 탔으면 벌써 올라갔을 것 같은데, 왜 그 잠시도 못 참고 굳이 계단으로…….
“후우…….”
그래, 먼저 가. 난 틀렸어. 태석은 우다다다 소리가 울리는 계단 위쪽을 바라보며 아련하게 고개를 저었다. 태석이 쫓아오는지 아닌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소란은 단숨에 7층으로 올라왔다. 가볍게 다친 정도라면 응급실에서 처치를 받고 끝냈을 텐데, 병실에까지 올라왔다니 걱정이 되었다. 다만 정말 크게 다쳤다면 서울로 이송되었을지 모르는데 여기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었다. 정신없이 찾아다니던 소란은 비상계단 입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백강*라고 이름이 적힌 병실을 보았다.
“여기구나.”
하아, 하아…….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내 사람, 내 남편. 그립고 또 그리운, 내 사랑하는 사람. 어젯밤이 일생의 마지막 밤이었을까 얼마나 절망했던가. 우리의 시간이 그걸로 끝이었을까 얼마나 두려웠던가. 몇 번이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였다. 강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당장 들어가 그를 볼 생각에 소란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데 간호사가 다가왔다.
“가족 외의 외부인 면회는 금하고 있어요. 환자분과 어떻게 되시죠?”
소란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돌아보았다.
“남편, ……제 남편이에요.”
이혼은 허울일 뿐, 서류 정리를 끝냈어도 그와 부부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아아, 네.”
지금 소란의 표정과 태도가 너무도 확실하게 부부라 말해주고 있기에,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소란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짙게 내린 하늘 아래 달빛이 스몄다. 창가의 침대에는 강호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곤히 잠든 얼굴이다. 심장이 철렁했다. 겉으로는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여 다행스러웠다. 침대에 다가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강호를 바라보며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진짜 온기가 느껴지자 소란은 무너지듯 앉아서 그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살아준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워. 그때 강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기에 기척에 깨어난 것이다.
“……소란아.”
그의 음성에 놀란 소란이 고개를 들었다.
“가, 강호 씨. 괜찮아요? 어때요? 어떻게 된 거예요?”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강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제 품에 당기기부터 했다. 긴 숨이 새어 나왔다. 저를 단단히 감싼 품에 비로소 소란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꽁꽁 묶여 일 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데, 당신이 잘못되었다면 나도 이 세상에 없었을 거야.
“사랑해.”
이렇게 듣는 그의 음성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평범한 삶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소란은 뼛속 깊이 느끼며 순간을 영원처럼 껴안았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울음 같은 고백이 지금의 행복을 말해주었다. 강호는 몸을 떨어뜨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둥근 이마부터 단아한 콧날에 모양 예쁜 입술까지, 소란을 다시 못 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이제 다 끝났어.”
할 이야기가 많다. 하루 일찍 기습공격을 당하듯 일을 겪어야 했지만, 대신 하루 일찍 모든 걸 끝낼 수 있게 됐다. 아직 그쪽은 돌다리가 와르르 무너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박 여사가 아무리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소용없는 일이다. 악독한 그녀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초를 겪었지만, 승리의 여신은 결국 선한 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강호는 그녀를 보는 애틋한 시선에 사랑을 가득 담아,
“결혼하자.”
다시 청혼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다.
◇ ◆ ◇ 남은 계단을 올라오던 태석은 다시 서윤의 전화를 받았다.
- 두 사람 만났어?
“어, 지금쯤 만났을 거야. 병실로 올라갔으니까.”
- 다행이다.
“넌 어떻게 된 거야? 지금은 또 어디고?”
서윤은 여전히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전화한 것인지 빠르게 말했다.
- 나 그쪽 상황 보고 다시 서울 올라가는 중이야.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거든. 얘기는 일 다 끝난 다음에 한꺼번에 할게. 지금은 설명할 시간 없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 곧 끝나. 아니, 이미 다 끝나가고 뒤처리만 남은 거야.
태석은 잠시 멈춰 서서 침묵했다.
- 뭐야, 여보세요? 끊었나?
“너는.”
대답이 없자 연결이 끊긴 줄 알고 말하던 서윤이 멈칫했다.
- ……나 뭐?
“너는 괜찮냐고.”
- ……내가 안 괜찮을 게 뭐 있는데?
“위험한 거 하지 마.”
- 뭐, 뭐래.
불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밤낮으로 피의자들을 만나고, 혐의를 인정하게 해야 하고, 벌을 내려주십사 구형하는 게 직업인데, 범죄 속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한테 위험한 거 하지 말라니. 밥줄을 끊을 셈인가.
“몸 좀 사리고, 뛰어다니지 말고, 적당히 뒤로 빼고, 알았어?”
- 네 걱정이나 해. 끊는다.
서윤이 지체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를 걱정하는 말을 쏟아내던 태석은 후우우,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지.
“운동 부족이야, 운동 부족.”
아득한 계단을 바라보던 그는 이쯤에서 남은 층은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야지 하고, 비상계단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올라타자 그 안에 연희가 있었다.
“선배님, 왜 4층에서 타세요?”
“뛰어 올라가다가 중도 포기. 주차는 잘했고?”
“네, 자리가 없어서 좀 돌았어요. 소란이는 지금 강호 오빠하고 같이 있다는데. 괜찮은가 봐요. 다행이에요, 정말.”
그것만은 사실이다. 강호가 무사하다는 것, 소란과 함께 있다는 것, 모든 게 다행스럽고 기쁘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서후는? 경황이 없어서 이제 물어보네.”
“찬규 오빠랑 있죠. 서후까지 대동할 수가 없어서 그냥 저만 온 거예요.”
평일 저녁에 난데없는 화재 소식에 놀라 한달음에 여기까지 왔다. 땡, 7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내리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일이 갑자기 오늘 벌어졌다느니, 그게 다 무슨…….”
“쉿.”
연희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태석은 주변을 돌아보며 쉿, 하고 검지로 제 입술을 막았다. 연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협조했다.
“이따 조용한 데서 얘기하자.”
“아아, 네.”
“너무 심각할 필요는 없고. 팝콘 준비해. 우리는 이제 팝콘만 먹으면 될 일이야.”
태석이 싱긋 웃었다. ◇ ◆ ◇ 다음 날 목요일. 박 여사는 아침부터 구 비서의 보고를 받고 여전히 기분이 좋은 상태다.
- 화재 현장의 잔해가 심해서 새벽부터 수색 중이라고 하는데 곧 확인이 끝날 것 같습니다. 백강호의 시신이 거두어지는 대로 장례 준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회장님은 몸져누우셨고요. 링거를 맞고 계시는데 헛소리처럼 허공에 대고 계속 웅얼거리고 계십니다.
구 비서는 그 전화를, 홍 선생이 깎아주는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드시는 백 회장 옆에 앉아서 했다. 이미 의천 병원에 있는 강호, 소란과 영상통화까지 마치고 안심한 백 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혈색이 좋았다. 오히려 좀 더, 더 해보라며 손으로 부추기기도 했다.
- 아무래도 오늘내일하시는 거 같습니다. 이대로면 크게 손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일단 상황을 두고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 여사는 오호호, 웃음을 참지 못했다. 3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제 곧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후련했다. 남편은 회사에 갔을 테고, 침실 안 드레스룸에서 몰래 통화하고서 홀가분하게 거실로 나오던 박 여사는 흠칫 놀랐다. 거실 소파에 앉아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진혜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후, 깜짝이야!”
요즘 쟤가 왜 저래, 진짜.
“할 말이 있으면 하든가,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고 있니, 너는?”
“딸이 엄마도 못 쳐다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왜 자꾸 소름이 돋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 멀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우미가 무슨 일인가 하여 뛰어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오전인데 남편이 벌써 돌아왔나 싶어 박 여사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현관 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 화들짝 놀랐다.
“네가 왜 여기 있니? 언제 왔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진상이 들어오는 중이다. 보고 싶었던 내 아들. 드디어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다.
“아침에 도착했어.”
“오면 온다고 미리 연락하지. 엄마가 공항에 나갔을 텐데. 아휴, 얼굴 탄 것 좀 봐. 밥은 먹었어? 뭐 차려줄까?”
얼떨떨한 것도 잠시, 박 여사는 진상을 보니 좋았던 기분이 더더욱 좋아졌다. 이렇게 돌아온 건 아마도 소란에 대한 마음 정리가 끝나서겠지. 돈벼락 맞을 일도 머지않았겠다, 이제 새 마음 새 뜻으로 새 인생을…….
“엄마, 소란이 이혼했대.”
“……뭐, 뭐?”
원래 알고 있던 얘기지만, 진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우소란의 이혼 소식은 결이 달랐다.
“그 얘긴 왜.”
“소란이 다시 혼자 됐다고. 얼마 살지도 않고 이혼한 거니까, 이혼녀니 뭐니 하면서 반대할 생각 절대 하지 마. 나 소란이랑 잘해볼 거야. 지금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어. 내가 가서…….”
“너 그래서 들어온 거야?”
“어, 소식 듣자마자 바로 온 거야. 나 일단 씻고 소란이한테 좀 가볼…….”
“이 미친놈이?”
박 여사는 급기야 아들을 향해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여우와 떼어내려고 제가 별별 짓을 다 했는데. 이제야 겨우 정리된 관계에 안심했는데. 그런데 뭐? 이혼했으니 잘해보겠다고?
“너 돌았니? 돌았어?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년한테 미련을 못 버리고 매달려, 매달리길!”
복장이 터지고 성질이 뻗쳤다.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일만 남았는데 진상이 정신 못 차리고 진흙을 뿌리는 것 같아 박 여사는 그만 눈이 회까닥 뒤집힐 지경이다. 다만 진상은 이토록 폭발하는 엄마의 모습은 처음 보다시피 하여 당황스러운 얼굴이다. 제 말은 무조건 다 들어주던 엄마가 왜 이만한 일로 소리를 높이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진혜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눈치를 보던 도우미가 재빠르게 현관을 열고 대문으로 나갔다. 분위기도 안 좋은데 옆에서 인터폰을 받기 껄끄러워서였다. 그런데.
“경찰입니다.”
“네? 경찰이요?”
“박후길 씨 안에 계시죠?”
육중한 대문 안으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정원 너머 소란스러움을 감지한 박 여사가 열린 현관문 앞으로 나와 섰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박후길 씨 되십니까.”
“그, 그런데 무슨…….”
철컥, 철컥. 차디찬 금속 수갑이 박 여사의 손목을 감쌌다.
“박후길 씨를 202X년 3월 8일 오전 10시 32분부로 살인교사 및 방화사주 등의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그녀를 검거하며 경찰의 입에서 줄줄 미란다원칙이 흘러나왔다.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 박 여사가 대뜸 소리 질렀다.
“뭐야, 당신들! 영장 있어!? 체포영장 있냐고!”
경찰이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긴급체포라고요, 긴급체포. 얼마나 죄질이 불량하면 일단 잡아가기부터 한 다음에 영장을 청구하겠습니까.”
그만큼 대단한 짓을 벌였다는 소리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짓 한 적 없어, 없다고.”
일단 부인부터 하고 보는데 진상과 시선이 부딪쳤다. 얼빠진 아들의 얼굴에 박 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너머 진혜의 경멸스러운 눈빛까지도 뇌리에 칼날처럼 박혔다. 차라리 이 자리에 진상이라도 없으면 좀 나았을까. 박 여사의 숨이 턱턱 막혔다. 다 잘되고 있다고 믿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이렇게 쉽게 밝혀질 일이 아닌데. ……완벽했는데!
“뭔가 잘못 아셨겠죠.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겨우 이성을 찾은 박 여사가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우아하게 말했다. 아들, 괜찮아. 엄마 걱정하지 마. 진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은 경찰이 입을 뗐다.
“황복태 씨 아시죠.”
황 실장?
“밀항을 시도하다가 검거됐습니다. 그자가 다 자백했어요. 제보 들어온 증거도 넘쳐나고. 일단 서로 갑시다. 시간 없으니까.”
“아아…….”
멍하니 서 있는 박 여사를 경찰들이 끌어당겼다. 우아한 태도를 고수하던 그녀가 순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아악! 아니야! 아니라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