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단 하나의 바람2021.10.19.
- 백강호 씨는 안전해요.
너무나도 바랐던 상황이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고.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서 내려와요.
소란은 무너지듯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울지 않으려고 해도, 이 순간 폭발하는 감정을 이겨낼 순 없다. 연희는 태석이 전화를 끊은 후 그녀를 조심스레 달래는 소리를 들으며 안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안전하다니. 걱정하지 말라니. 지금 그보다 더 반가운 말이 어디 있을까. 의천으로 향하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래도 직접 얼굴을 봐야 제대로 안심할 수 있겠지만. 게다가 지금 보니 두 사람은 역시 불화로 헤어진 것이 아니었구나, 싶다. 대외적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졌다고 말했지만, 그런 것치고 오늘 강호의 사고 소식을 들은 소란의 반응이 너무도 절절했다.
“그냥 저대로 보기만 하실 거예요? 어떻게, 말리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처음 소란과 강호가 이혼을 결정하고 절차를 밟는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연희는 성준을 찾아가 의논했다. 지나치게 당황스러운 결정이라 이를 바로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행여 소란에게 상처가 될까 봐 직접 캐묻지는 못하고 마음만 끓이다가 성준에게 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의외였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너무도 평온한 목소리였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싶어. 갑자기 저런 결정을 한 데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그래도요. 마냥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잖아요.”
“두 사람은 쉽게 헤어질 사람들이 아니야. ……그런 인연이 아니야.”
성준의 태평하기까지 한 음성에 연희마저 동화됐다. 하긴,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인들에겐 소란과 강호를 향한 강한 믿음과 애정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신뢰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
“선배님. 저 그 사람, ……그 사람 없으면 안 돼요.”
여전히 사랑하는 두 사람. 아니, 사랑하지 않은 때가 단 한 순간도 없었던 두 사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깊게 통하고 있다. 연희는 액셀러레이터를 길게 밟았다. 단 하나의 바람. 부디 강호의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길, 모두의 가슴을 가득 채운 바람이다.
◇ ◆ ◇ 박 여사의 집. 황 실장과 통화를 마친 박 여사는 곧장 구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뉴스 확인했죠?”
- 아아……,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구 비서는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석같이 내일 새벽으로 알고 일을 준비해왔을 텐데,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놀랄 수밖에.
“도와준다는 사람이 있어서 급하게 일을 처리했어요. 잘 끝나긴 했는데, 뒤를 좀 부탁할게요.”
어차피 백 회장의 수족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백강호의 죽음을 챙길 터다.
“앞으로 그쪽 상황은 어떤지 실시간으로 소상히 전해주길 바라요.”
박 여사는 다시 생각해도 구 비서를 미리 포섭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장 박사도 일찌감치 구워삶아두었다. 백 회장을 시한부로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섭외에 큰 공을 들이기도 했다. 그치는 가족에 대한 협박 때문에 억지로 가담했던 구 비서와는 달랐다. 겉으로는 권위 있는 의료인이자 학자로 살아갈지언정 실상은 뼛속까지 탐욕스러운 인간이다. 동생들의 뒷조사에 따르면 장 박사는 몇 번이나 해외 원정도박을 해왔고, 부동산 투기에도 목을 매는 사람이라, 금전적인 보상을 제대로 해준다면 제안을 덥석 물 거라 했다.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 장 박사의 실체를 알면 사람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박 여사는 그런 꼴도 참 우스웠다. 일이 성공할 경우 의료재단 설립과 함께 재단 지분과 운영 권한을 장 박사에게 주기로 약속했더니 역시나 바로 입질이 왔다. 사실 큰 모험이었다. 혹시 장 박사가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수를 드러낸 꼴이니 이쪽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장 박사를 협박할 때는 금전적 보상을 제시할 뿐 아니라 적절한 신체적 위협도 가했다. 꼼꼼히 신경 쓴 것이 무색하게도 장 박사는 넙죽 제안을 수락했지만. 생명을 다루는 자가 파탄 난 인성을 가지고 있다니, 박 여사는 혀를 끌끌 찼다. 그저 제 것을 되찾아오려 노력할 뿐인 저는 장 박사에게 댈 것도 아니다. 누가 절 욕하겠는가. 결국 사람은 다 제 이익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는 것을. 다만 본능을 앞세워 남을 해치는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제가, 짐승만도 못하다는 건 스스로 알지 못했다. 평생 악에 둘러싸여 악한 이로 자랐으니,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안다 한들 ‘어쩌라고.’ 하면 그뿐인 사람이지만.
“이제, 그 할아범 하나 남았으니 앞으로 일주일 안에 해결 봅시다. 지금까지에 비하면 그건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으니 지체하지 말고 진행해요. 하나뿐인 손주의 죽음으로 병세가 더욱 심해지는 거야 너무 뻔하니까.”
이 또한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것이다. 제 설계가 딱딱 맞아들어가자 박 여사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격한 희열감을 느꼈다. 아아, 너무 완벽해. 아무래도 제가 아버지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긴 한 모양이다. 이대로 재능을 썩히기 아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악이 스스로 몸집을 불리는 건 너무도 쉽고 간단했다. 박 여사는 이번 일을 끝내고 재산을 끌어와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고 나면, 이후 더 큰 부를 쌓기 훨씬 수월하겠단 느낌이 들었다. 그땐 지금처럼 쪼들리면서 진행비를 쓰고 사채까지 끌어올 일은 없을 테니까. 역시 돈이 돈을 먹고,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구 비서는 앞으로 백 회장 케어에 더욱 각별하게 신경 써요.”
- 네, 알겠습니다.
그와 통화를 마친 박 여사는 1인용 소파에 깊게 몸을 묻고 편안하게 앉았다. 다리를 쭉 뻗어 스툴에 걸치고 앉자 마음이 느른해졌다. 영상이나 한 번 더 볼까. 실컷 보고 어서 지워야지. 그리고 백 회장 일까지 끝내고 나면 이 전화기는 아예 부수어야겠다. 또 뭘 해야 하더라. 앞으로의 일을 가늠해보는 것조차 이젠 즐겁기만 했다. 긴장이 풀어져서일까. 노곤하니 잠이 밀려온다. 잠시 눈을 감았다. 꿈속엔 끝도 없는 꽃밭이 펼쳐졌다. 햇살이 드리우고 반짝거리는 빛이 환히 번져나갔다. 세상에, 이렇게 예쁠 수가. 박 여사는 황홀한 얼굴로 그 안에 들어갔다. 오색빛깔 영롱한 꽃들 사이에서 박 여사는 아하하, 소리를 내어 웃으며 뱅글뱅글 돌았다. 그때, “아.” 하고 날카로운 아픔을 느낀 그녀는 그만 주저앉았다. 원피스를 입어 드러난 발목이 날카로운 가시에 스쳤는지 쫙 그인 상처를 따라 피가 흘렀다. 그런데……, 단순히 스친 상처라고 하기엔 출혈이 너무 심했다. 발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뭐, 뭐야……!”
아픔보다 공포심이 밀려왔다. 피가 얼마나 많이 나면서 튀었는지 얼굴에까지 핏방울이 들러붙었다.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박 여사는 잠에서 깨어났다.
“……바, 발목!”
내 발목! 눈을 뜬 박 여사는 저도 모르게 발목부터 살폈다.
“하아…….”
멀쩡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의 발목은 너무너무 멀쩡했다. 그러나 섬뜩한 기분은 전혀 없어지질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든 박 여사는, 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 질렀다.
“꺄악!”
서재 안 맞은편 소파에 진혜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니!”
용건이 있으면 깨우든가. 자는 걸 봤으면 나가든가. 어째서 귀신처럼 가만히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지, 박 여사의 등줄기가 서늘했다. 딸인데도 멀게만 느껴지는 저 시선은, 요즘 들어 더더욱 탐탁지 않았다. 제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다며 볼멘소리를 해대는 진혜가 박 여사로선 마치 진상의 몫까지 다 빼앗아가는 존재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욕심 많은 계집애 같으니. 편애란 그러했다. 한 아이를 그저 조금 더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아이만을 사랑하여 다른 아이에겐 내어줄 마음조차 없는 것이다. 적어도 박 여사에겐 진상과 진혜를 구분하는 사랑이, 그런 거였다. 어느 쪽에게도 엄마의 자격은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잠이 와?”
다소 냉랭하게 묻는 말에 박 여사는 반감부터 들었다. 진혜는 꼭 저런 식으로 타박하듯 말을 한다. 예뻐하려야 예뻐할 수가 없다.
“잠이 오니까 자지, 무슨 질문이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아빠 회사가 넘어가게 생겼다는데, 엄마는 걱정도 안 돼?”
응, 안 돼. 그 걱정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니. 그러나 딸 앞에서도 검은 속을 낱낱이 드러낼 수 없는 박 여사는 애써 상황을 포장했다.
“아빠를 믿으니까 그렇지. 사업하는 사람들이야 다들 시련 몇 번씩 겪으면서 해나가는 거고, 옆에서 일일이 호들갑 떨면 될 일도 안 돼. 나라도 중심 잡고 아빠가 버틸 수 있게 잘…….”
“참 잘한다.”
“뭐?”
“엄마는 말을 참 잘해.”
오늘따라 진혜의 태도가 차가웠다. 진혜가 박 사장의 회사 부도가 코앞이라는 사실에 예민해진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제가 뒤에서 갖은 고생을 해가며 돈 떨어질 구석을 마련하고 있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툴툴대기는. 곱게만 자라 힘든 걸 모르는 탓이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해.”
아무리 진상 위주로 재산을 물려줄 계획을 짠다고 해도, 진혜 역시 그 수혜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마운 줄 알고 고분고분하면 좋으련만. 그러니 앞으로는 진혜를 조종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조금만 보여줘도 희미한 무지개를 따라 쫓아오기 마련이니까.
“엄마가 우리 딸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로 고생 안 시킬 테니까, 진혜 너는 마음 편하게 갖고 하는 공부나 신경 써. 곧 좋은 자리 알아봐 시집도 가야지. 알겠지?”
후.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묘한 것이 진혜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다시금 박 여사의 등골이 선뜩했지만, 지금 진혜가 많이 비뚤어진 상태라고 생각할 뿐 그걸로 끝이었다. 큰일을 하면서 진혜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게다가 진혜는 남도 아닌 제 피붙이니까. 불안할 것도, 이상하게 여길 것도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잠시 눈을 붙이고 꾼 꿈속에서 발목에 철철 흘러넘치던 피가 너무도 생생해서 그게 영 꺼림칙할 뿐이다. ◇ ◆ ◇ 의천시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공장의 불길은 이제 어느 정도 잡혀 진화 작업이 잘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공장으론 갈 필요 없고, 내가 보내주는 주소 보고 병원으로 와요. 지금 응급실에 있고 곧 병실로 옮긴다고 했어요.”
서윤은 태석을 통해 병원 주소를 하나 보냈다. 의천시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강호는 지금 안전하다고 했지,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고는 안 했다. 소란은 서윤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마음을 졸였다. 어떻게 된 상황일까. 얼마나 다쳤을까. 오늘 갑자기 벌어진 일은 저와 태석도 몰랐는데 서윤은 그와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걸까. 왜 뉴스에선 구조했다는 얘기가 없었을까. 대체, 공장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서윤은 급히 용건만 전달한 후 전화를 끊었기에 자세한 상황은 가봐야 알 것 같았다. 연희의 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소란은 용수철 튕기듯 차에서 튀어 나갔다.
“소란아! 같이 가!”
“선배님, 얼른 소란이 따라가세요. 전 주차하고 갈게요!”
“어어, 그래.”
연희가 태석을 먼저 보내고 차를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사이 태석은 재빨리 소란을 따라 응급실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이는 의료진을 붙들고 애타게 말하는 소란의 뒷모습이 보였다.
“백강호, 백강호요. 삼십 대 젊은 남자고, 키가 이만큼 크고, 얼굴은 너무 잘생겼는데, 화재가 일어난 공장에서 실려 온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 와중에 잘생긴 얼굴을 강조하는 남편의 미모 부심은 감출 수 없다. 소란이 정신없는 가운데 기껏 설명한 인상착의라고는 키 크고 잘생긴 게 다였다.
“좀 아까 불이 난 공장이라면, 거긴 사람이 없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데요. 공장 화재로 들어온 환자는 하나도 없…….”
“그럼 백강호 씨는요? 응급실 실려 온 사람 중에 백강호라고…….”
애타는 소란의 머릿속엔 오직 강호뿐이다. 아무리 무사하고 안전하다고 해도, 제 눈으로 봐야만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환자라면 병실로 올라갔어요. 7층에…….”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소리에 소란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