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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그 사람 없으면 안 돼요 (100/112)

#100화. 그 사람 없으면 안 돼요2021.10.16.

- 지금도 계속 전화하는데 안 받고, 공장엔 부……, 불이 났다고 하고……. 너 혹시 통화돼……?

전화기 너머 연희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며 들렸다. 소란의 정신이 아득해지고 어딘가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 나, 지금, 가야겠…….”

- 잠깐, 잠깐만 기다려. 너 혼자 움직이지 말고. 내가 호텔로 빨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놀란 마음에 소란 혼자 나섰다가 큰일이라도 날까 봐 연희가 서둘러 그녀를 진정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소란은 겨우 정신을 다잡고 강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무응답.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무사할 거야.  

“모든 대비는 마쳤으니 걱정하지는 마.”

  그래, 괜찮을 거야. 애써 중얼거리는 소란의 입술이 한없이 창백해졌다. 세상에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고, 어떤 일이든 변수는 생길 수 있는 법이다.

  ◇ ◆ ◇ 그 시각, 박 여사는 전달받은 영상을 보며 홀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다.

“일을 이렇게나 깔끔하게 끝내주다니. 역시 이쪽에 맡기길 잘했단 말이야.”

영상 속에는 백강호가 정신을 잃은 채 땅에 널브러져 있다.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다 쓰러져가는 공장 내부에서 물먹은 휴지처럼 완전히 늘어져 있는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입에는 피를 토한 자국이 역력하기까지 했다. 박 여사는 영상을 몇 번이나 연속으로 돌려 보았지만 질리지도 않았다. 하이라이트는 이다음이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쓰러져 있는 백강호를 비추어 확인시켜준 어떤 남자 앞으로 또 다른 남자가 멀리 구석 쪽으로 향하더니 늘어놓은 기계들 사이로 액체를 뿌려댔다. 여러 번 봐서 절정의 타이밍을 알고 있는 박 여사가 벙긋 웃으며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이내 화면 속에선 불씨가 던져지고 발원지가 될 지점에서 화르르 불길이 치솟았다. 번지는 건 순식간이리라.

- 빨리 나가자.

- 이쪽으로!

남자들은 서둘러 공장 밖으로 빠져나왔고, 몸을 피하는 가운데에서도 불이 난지도 모른 채 쓰러져 있는 백강호를 마지막까지 화면에 담았다. 밖에 나와서도 동영상 촬영은 이어졌다. 공장 불은 삽시간에 커져 검은 하늘에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입구까지 불길이 번져 봉쇄되는 모습이 화면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행여 백강호가 정신이 든다 한들, 그 안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일이 너무나도 깔끔하게 잘 끝났다. 막판에 백강호과 우소란이 이혼한 건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백강호 하나만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우소란이야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났다 하니 건드릴 상대도 못 된다. 모든 게 잘 맞아떨어졌다. 한참 뿌듯해하는 그때, 박 여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씩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에, 박후길입니다아.”

기분 좋은 투의 콧소리가 울렸다.

- 사모님, 보내드린 영상은 다 확인하셨습니까.

이번에 일을 치른 황 실장이란 자다. 영상 속에서 직접 불을 지른 남자. 동생들의 용역회사에서 일을 받아서 하던 이들 중 하나로, 용케 잡혀가지 않고 잠적했다가 박 여사와 끈이 닿은 이였다. 그쪽은 밀항을 위해 돈이 필요하고, 이쪽은 전문적으로 일 처리해줄 인력이 필요하니 이보다 더 합이 잘 맞을 수 없는 만남이다. 구 비서를 믿고 맡겼지만, 막판에 황 실장과 연락이 닿아 기습적으로 하루 당긴 날짜에 이쪽에서 일을 진행하도록 했다. 물론 구 비서가 짜둔 계획을 모두 이용하긴 했다. 제법 간결하고도 훌륭한 계획이니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날짜와 동원 인력만 바꾸어서. 황 실장이 꼼꼼히 찍어 보낸 영상까지 확인하니 역시 적임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구 비서는 백 회장에게만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럼요. 다 확인했어요.”

- 확실하게 처리했습니다. 보셨죠?

“네에, 잘 봤어요.”

잘 보다마다. 이보다 더 생생하게 백강호의 마지막을 기록할 순 없을 것이다. 아주 흡족한 일 처리에 박 여사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가능만 하다면 백강호의 코앞에다가 카메라를 설치해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게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화재가 진압되고 난 후 수거될 만한 증거는 그 무엇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백강호를 묶지 말라고도 지시했었다. 범행에 쓰인 도구가 혹여 완전히 타지 않고 발견이라도 된다면 큰일이다. 하물며 카메라 설치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위장하는 데는 이게 최선임을 안다. 이 정도로도 박 여사는 크게 만족했다.

- 다 확인하셨으면 잔금 바로 보내주십시오.

이제야 박 여사는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일을 시켰으니 돈 얘기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황 실장에게 애프터 서비스를 요구해야 하니, 섣불리 잔금부터 치를 수는 없다. 그녀는 목소리를 늘였다.

“일이 완전히 끝나야죠오. 장례 치르는 것까지 다 본 다음에…….”

- 말이 달라지셨습니다?

말은 달라졌을지언정 생각은 같다. 당장 돈이 있어야 주지. 영혼까지 싹싹 끌어모아 새 빌딩 계약을 했으니 박 여사 수중에 현금이 있을 리가 없다. 영혼만 끌어모았으면 다행이게, 사실 질이 그리 좋지 않다는 대부업체 돈까지 싹싹 끌어다가 계약금을 치렀다. 그뿐인가. 이전에 소유한 건물, 진상 앞으로 미리 떼어둔 건물까지 담보로 하여 턱밑까지 차오르게 대출을 받아다가 일의 진행비로 사용했다. 그전에는 동생들이 알아서 다 해주었다. 저는 앉아서 말만 하면 됐는데. 원래 동생들이 밥 먹고 하는 일이 죄다 그런 거라 저는 숟가락만 얹는 정도였고, 그 정도야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동생들의 부재 이후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박 여사 본인이 챙겨야 하니 사람 데려다 쓰는 돈까지 뭉텅이로 나가게 됐다. 하지만 박 여사에게 두려움은 없다. 막대한 재산이 곧 제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이깟 푼돈이 무슨 대수라고. 곧 일을 끝내고 나면 한 방에 당길 돈이 얼마인가. 그때부턴 이런 귀찮은 짓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올 터다.

“말이 달라지긴요. 일을 확실하게 하자는 것뿐이지.”

- 바로 떠나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들 돈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황 실장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쫓기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박 여사에게 돈을 조달하기 위해 연락을 해왔겠지. 박 여사는 그런 황 실장의 입장을 충분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처리하고 바로 돈을 받아 이곳을 뜨려고 했는데, 망할 아줌마가 미적거린다며 황 실장은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그나마 착수금을 쥐꼬리만큼이라도 받았으니 다행이지 밀항은 아예 시도하지도 못할 뻔했다. 그 역시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

“금방 드려요.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걸 떼어먹을까. 황 실장도 나 믿으니까 같이 일하겠다고 한 거잖아요. 너무 보채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급한 불을 끈 박 여사가 느긋하게 나오니 황 실장은 열이 찼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무리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해냈어도 돈을 쥔 자가 안 주면 그만인 것을. 다만 어째 등이 선득한 게 예감이 좋지 않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야 할 것 같은데.

-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늦어도 모레 안으로 준비하세요.

박 여사가 장난질을 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다 제가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이 입이 폭탄이란 걸 모르지도 않을 테고.

“알아요, 알아. 황 실장이 무사히 한국 떠야 좋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엉뚱한 생각이야 하겠어요? 보수는 약속한 것보다 더 빵빵하게 쳐서 드릴 테니 아무 염려 말아요.”

박 여사가 호언장담했다. 그건 그녀의 진심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황 실장을 무사히 떠나게 해주어야만 한다. 백강호의 장례만 시작되면 다소 무리해서라도 돈을 더 끌어모아 황 실장에게 줄 것이다. 아깝지 않은 돈이다. 물론 일을 끝까지 잘 확인해야겠지만.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을 터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건 자신 있다. 두드리기 위해 올라선 그 다리가 언제 무너질지, 그녀는 모를 일이지만. ◇ ◆ ◇ 끼이익! 호텔 로비 앞에 SUV 차량 한 대가 거칠게 정차했다. 비상등을 켜고 내린 운전자는 연희였다.

“소란아!”

그녀는 소란을 발견하고 얼른 달려왔다. 저를 데리러 온 연희를 보자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아직 강호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화재가 일어난 의천 공장에서는 건물 설비의 문제로 진화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뉴스만 확인했다. 인명 피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장 내부에 실종자가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런 경우 실종자는 곧 사망자로 바뀌겠지만, 소란은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일단 타, 나랑 같이 가자. 괜찮을 거야.”

연희 역시 애써 차분하게 말하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소란을 불렀다.

“소란아!”

태석이었다. 그 역시 사색이 되어 달려온 참이다.

“아아, 선배님. 잘됐다. 제 차로 같이 가요.”

연희의 말에 태석은 부랴부랴 직원에게 주차를 맡기고 소란과 함께 차에 올랐다. 부우웅. 연희의 차는 세 사람을 싣고 의천시를 향해 출발했다. 공장으로 가는 동안 소란의 눈에선 이내 참지 못한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너무 안심했던 걸까. 모든 걸 다 준비했다고 믿었고, 빈틈은 하나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구 비서는 일이 목요일 새벽에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박 여사로부터 전달받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강호에게 흘러들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수요일 저녁, 예정보다 이르게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설마 구 비서가 배신한 건 아니겠지. 기습이나 다름없다. 목요일 새벽만 바라보던 강호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테고, 그럼 결국…….

“아니야, 아니야…….”

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상상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심장을 바스러지게 했다. 뉴스에서 본 화재 장면이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낡고 커다란 공장에 치솟은 불길과 함께 엄청날 정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라고 했다. 16년 전, 강호가 납치되었던 창고 화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규모였기에 소란은 지금 제정신일 수가 없다.

“소란아.”

그녀의 울음이 커지자,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태석이 숨을 몰아쉬며 다독였다.

“괜찮을 거야. 강호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 역시 진정이 필요하다. 태석 또한 내일로 생각하던 일이 오늘 벌어진 데 놀란 터다. 게다가 강호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으로 안절부절 어찌할 바 모르는 소란을 보니, 제 오해가 얼마나 터무니없었나 싶다.

“선배님. 저 그 사람, ……그 사람 없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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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의 여지 없이 강호와 소란, 그들은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 가짜 결혼이든, 가짜 이혼이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이, 오직 두 사람의 마음만이 진짜였다. 그때 태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서둘러 확인하니 발신인은 서윤이다.

“아, 한서윤, 지금…….”

- 너 어디야?

“나? 나, 지금 의천 공장 가는데, 갑자기 내일이 아니라 오늘…….”

- 우소란 씨 같이 있어? 지금 옆에 있어?

서윤은 다짜고짜 소란부터 찾았다. 이 상황을 이미 다 안다는 듯이.

“어? 어어. 지금 옆에.”

- 바빠서 빨리 얘기하고 끊어야 해. 스피커폰으로 돌리든가, 우소란 바꿔주든가, 얼른.

몰아치는 서윤의 말에 태석이 재빨리 통화 상태를 스피커로 돌렸다.

“됐어, 스피커폰이야. 얘기해.”

- 소란 씨, 듣고 있어요?

“아, 네, 선배님. 우소란입니다.”

갑작스러운 서윤의 연락에 눈물이 쑥 들어간 소란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뭔가 생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 진작 알려줘야 했는데 그럴 경황이 없었어요. 이쪽도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무슨 일인지…….”

- 백강호 씨는 안전해요.

심장이 쿵 울렸다.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서 내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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