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오늘 밤은 꼭 안아야겠어2021.10.12.
- 네, 그러면 세팅은 목요일 새벽으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준비하세요.”
자세한 사항은 다시 전달받기로 하고 박 여사는 전화를 끊었다. 구 비서가 척척 진행해주니 마음이 흡족했다. 처음엔 가족을 지킬 생각에 울며 겨자 먹기로 힘겹게 임하던 구 비서가 이제는 아주 열의가 넘치는 것도 좋았다. 돈이 그렇게 좋을까. 하긴,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다만 오랜 경험으로 보건대 한쪽에만 100퍼센트 맡기는 건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달이 날지 알고. 구 비서의 역할은 지금껏 알짜정보를 낱낱이 전해준 것으로 충분했다. 다만 구 비서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모든 사실은 크로스체크가 필수고, 또 모든 일엔 백업 장치를 마련해놓아야만 하기에 박 여사는 얼마 전 전달받아 외워둔 번호를 눌렀다. 동생의 용역회사에서 일을 받아서 하던 이들은 전부 잡혀갔거나 연락이 끊긴 줄 알았는데, 다행히 끈이 닿은 자가 있었다.
“접니다. 일할 날짜가 정해졌어요. 다음 주, 가능하죠?”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아야 하는 건 진리다. 박 여사의 얼굴은 벌써 성공이라도 한 듯 밝기만 했다. ◇ ◆ ◇ 아직 생일파티가 열리는 클럽. 바깥과는 다르게 조용한 분위기의 마스터룸 안으로 태석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서윤과 강호가 대화 중이다.
“얘기 잘돼?”
“어. 원래도 알았지만, 실상은 훨씬 더 쓰레기들이네.”
태석의 물음에 서윤은 분노에 찬 숨을 내쉬었다. 불의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감정이다. ‘제풍코퍼레이션’의 뒷일을 맡아 처리하던 용역회사에서 그간 강호의 집안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을 서윤 역시 알게 됐다.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라 현재 조사하는 사건들과는 관계가 없으니 서윤으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직전에 일어난 강호의 대고모 내외 사고까지 그 집단과 연관이 있다면 추가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처럼 실로 엄청난 범죄집단이 아닐 수 없다.
“용역회사와 임대 법인 등을 설립했다 폐업했다 하면서 계속 갈아치운 것도 끊임없이 기록과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겠죠.”
서윤은 이들이 덜미 잡기 굉장히 까다로운 타입이라고 덧붙였다. 법의 그물망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꼬리를 싹둑싹둑 잘라대니 이제껏 잘도 넘어갔지 싶다.
“삼 형제가 박후길이란 여자와 완전히 끊다시피 한 것도 일종의 꼬리 자르기예요. 박후길과 함께 있으면 더 많은 범죄 사실들이 밝혀질 테니까 잘라낸 거죠.”
“그런데도 박후길은 정신 못 차리고 지금 또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거지.”
태석이 혀를 내둘렀다. 강호의 집안 유산을 노리고 수십 년이나 판을 짜왔다니 그 노력이 가상하다고 인정해줘야 할 지경이다.
“일단 낱낱이 밝혀져야 할 일이고, 이런 건 내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서윤의 눈빛이 벼린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가히 믿음직스러운 이 시대의 참일꾼이다. 태석으로부터 이어진 인연이 어느덧 박후길 일당을 소탕하는 데 중요한 축이 되었다. 강호는 새삼 태석이 고마웠고, 눈앞의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헤매는 것마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결국 그 마음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도 모르는데.
“강호 씨의 계획을 공유해줬으면 합니다. 얘기 좀 들어볼게요.”
“네, 우선…….”
그는 서윤에게 앞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화려한 생일파티, 이질적으로 차분한 룸 안에선 진지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난 후, 강호는 두 사람보다 먼저 룸을 나섰다. 강호가 나간 다음 메모를 챙기는 서윤에게 태석이 슬쩍 물었다.
“근데 선물은?”
“선물?”
“내 생일이잖아.”
“생일 축하하려고 온 거 아니야.”
서윤은 그저 강호가 현재 조사 중인 자들과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으니 만나달라 하여 온 것뿐이었다. 안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중간에 태석이 껴 있고, 부른 곳 역시 태석의 생일파티 자리니 서윤은 흔쾌히 와주었다. 물론 태석의 생일을 알고는 있었지만, 매년 파티에 초대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생일 선물을 찾다니. 초대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도 왔으면 선물을 줘야지.”
“너는 내 생일 알아?”
대뜸 서윤이 묻는 말에 태석이 멈칫했다. 그가 제게 관심이 없는 건 당연하다.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고, 태석을 좋아하는 여자도 널리고 널렸다. 무뚝뚝하고 재미도 없는 저 같은 여자에게 태석이 호감을 둘 리가 없지. 그걸 알기에 서윤은 그를 욕심 내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껏 마음을 전부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좋아하는 것쯤은 알 줄 알았는데, 태석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아무것도 몰랐다. 하다못해 생일도 몰라.
“내 이름은 아니?”
“……그래서 네 생일이 언젠데.”
“알아서 뭐 하게.”
챙겨줄 것도 아니면서. 서윤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그가 알기 전에 자신이 먼저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 ◆ ◇ 한 주가 지난 후, 화요일. 소란은 사무실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으며 야근까지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신혼집에서 나온 후 단기로 오피스텔을 얻을까도 했지만, 강호와 떨어져 있는 기간이 별로 길지 않을 거라 호텔에서 장기숙박을 하기로 했다. 잠시 머문다고 생각하면 식사도, 세탁도 그리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제일 힘든 건 역시 남편을 못 보는 것. 소란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목요일에 공장에서의 일이 예정되었다고 했다. 이틀 후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이 코앞으로 닥쳐오니 이 정도야 참을 수 있다. 룸으로 들어선 소란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생사를 걸고 준비한 전쟁은 전쟁이고, 본업은 또 열심히 해야 했기에 오늘도 현실 전쟁터에 부지런히 땀 흘리고 돌아온 터였다. 소란은 슬립만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카락을 덜 말린 상태로 수건을 감싸는데 벨이 울렸다.
“응? 룸서비스도 안 시켰는데…….”
무슨 일이지. 호텔 측이 아니라면 이 시각에 벨을 울릴 사람은 없다. 소란이 의아해하며 배스로브를 꺼내 입었다. 앞섶을 단단히 여미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슬슬 문 쪽으로 다가갔다. 다시 딩동,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소란이 조그맣게 물었다. 안 들린 걸까. 대답이 없자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누구세요.”
“……나야.”
문 건너편에서 들려온 음성. 그립고 그리운 남편의 목소리다. 깜짝 놀란 소란이 문을 열었고, 강호가 빠르게 룸으로 들어왔다. 철컥, 문이 닫혔다. 그는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도 쓴 채였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는 가릴 수 없으니, 어찌 보면 운동선수나 모델이 일부러 얼굴을 가린 듯 보이기도 했다.
“강호 씨. 어떻게 왔어요…….”
소란이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고, 강호는 답답했다는 듯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냈다. 잘생긴 얼굴이 한순간에 드러나자 소란의 심장이 새삼스럽게 쿵쾅거렸다.
“오늘 밤, 같이 있으려고.”
이혼을 결정하고는 처음이다.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진 걸로 꾸며야 박 여사의 시선을 돌릴 수 있어 그간 만나는 것조차 조심했던 두 사람이다.
“어, 어떻게요. 누가 따라왔으면 어쩌려고.”
겨우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이대로 틀어질까 봐 소란은 그게 더 두려웠다. 하지만 강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그 여자가 미행을 시킨 건 맞아.”
“미행했어요?”
“했다고 치는 거지.”
“아아. 구 비서님.”
소란이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일 앞두고 불안한지 어제부터 구 비서에게 내 뒤를 쫓을 사람을 붙이라고 했다는데. 오늘 밤은 했다고 치기로 했어.”
어떤 일이든 직접 나서는 일이 없는 박 여사를 대신한 창구는 구형익 비서였다. 백 회장의 비서인 그가 박 여사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 건 애초에 협박을 받아서였다. 강호, 소란과 따로 방문한 병원에서 폐선암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백 회장은, 자신을 속인 측근들에게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사이 강호가 심어둔 홍 선생은 구 비서가 누군가와 몰래 통화하는 모습 등을 찍어두었고, 이를 통해 구 비서가 박 여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증거를 내밀자 구 비서는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사죄했다.
“딸아이가……, 딸아이가 위험합니다, 회장님……. 제 아내도……, 어, 어쩔 수 없었습……, 죄송합니다. 끄으윽,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쳐 죽일 사람은 구 비서가 아니라, 소중한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한 자였다. 홍 선생이 몰래 찍은 영상으로 봐도, 구 비서는 죽을힘을 다해 참아내며 그쪽에서 지시하는 최소한의 일만을 겨우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판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수록 늪에 발이 빠진 듯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구 비서는 백 회장을 배신했지만, 바꿔 말하면 박 여사에게 닿을 수 있는 키가 되어줄 수 있는 인물이다. 강호는 다시 구 비서를 이쪽 편으로 만들었다. 외국에 있는 아내와 딸의 안전을 보장하는 건 물론이고. 소중한 가족과 신의 사이에서 괴로운 선택을 해야만 했던 구 비서도 한층 편안해졌다. 박 여사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건 그도 마찬가지다. 강호와 백 회장에게 ‘협조’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그가 열의를 다해 박 여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강호의 계획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니 강호에게 들킨 이후 한 달 사이, 구 비서는 박 여사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박 여사가 구 비서를 시켜 강호를 미행하게 한 일도 실상은 한낱 소용없는 짓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데 괜히 위험한 거…….”
소란이 노파심에 하는 말을 강호는 뜨거운 키스로 덮었다.
지독하게 외로운 사투 속에서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위장 이혼으로 강호의 몸이 가벼워진 덕에 박 여사가 기회를 손쉽게 잡아 일은 더 빨리 진행이 되었고, 이제 그 일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어그러질까 두려운 마음은 전혀 없다. 내내 그녀를 안지 못하는 밤이 훨씬 두려웠다. 입술과 입술, 그 사이로 야한 살이 부딪치고 얽히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렸다. 소란의 로브 사이로 차가운 강호의 손이 들어갔다. 슬립 끈을 만지다 어깨 옆으로 내리는 사이에도 입술은 떼지 않았다. 더운 숨마저 쉽게 내뱉지 못하고 서로의 안으로 삼켜졌다. 입술에서 목으로, 쇄골로, 어깨로, 뜨거운 숨결이 번졌다. 오늘 밤은 꼭 안아야겠어. 너를 반드시, 안고야 말겠어. 작정하고 달려온 남자의 기운이 소란을 어지럽게 했다. 나도 당신 없는 밤은 싫어. 내 몸이 부서져도, 오늘 밤은 꼭 안아줘요. 소란의 로브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그의 목을 꽉 안고 매달렸다. ◇ ◆ ◇ 몇 번이나 정신을 놓을 뻔한 밤이었다. 본능만 살아 있는 짐승처럼 한없이 거칠게 몰아치다가도, 손끝이 섬세한 예술가처럼 한없이 부드럽게도 굴었다. 내내 예쁘다고 속삭였으며, 너 없이는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그는 밤새 사랑을 말했다. 정말 꿈처럼 흘러간 밤이었다.
“내일 새벽에 화재가 있을 거고, 모든 대비는 마쳤으니 걱정하지는 마.”
아침에 강호는 호텔을 떠나기 전 그렇게 일렀다. 전화로 간략하게 들었던 계획에 대해 보다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박 여사의 동생들이 구속되기 전에는 그쪽에서 일을 맡아 해주었고, 작은 일 하나까지 다 쪼개어 맡았기에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박 여사는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짜고 맡기는 것만이 그녀의 소관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구 비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총괄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잘 관리가 되는 느낌이라 좋다고 했다나. 그게 지금 박 여사의 발등을 야무지게 찍는 중이다. 편하게 해서 좋은 악행이 세상천지 어디 있던가. 안일하게 굴며 구 비서에게 모든 걸 맡긴 탓에, 그 계획들은 고스란히 강호에게로 흘러들어와 철저히 대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애초에 판을 짠 건 박 여사가 아니라 강호였다. 화재 사고를 계획할 수 있게 일부러 노후화한 공장을 골라 매입했고, 리모델링 핑계로 자주 내려갔다. 주변에서 다들 말려도 꿋꿋이 감행한 이유였다.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이를 피하지 못해 강호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시기까지 손수 잡아주었다. 이 덫에 박 여사는 차근차근 발을 넣으며 들어와주었다.
“몸, 조심해야 해요. 정말.”
아무리 알고 짠 판이라고 해도, 결국 강호가 직접 위험한 현장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범죄 사실을 굳히고 이를 토대로 박 여사의 덜미를 잡을 수 있도록 강호 스스로 미끼가 된 것이다. 이전의 모든 범행까지 줄줄이 캐낼 수 있게 하려면 이번 일이 정말 중요하다.
“알잖아. 모든 건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거.”
강호가 차갑고도 달콤한, 예의 그 아이스크림 같은 미소를 옅게 지었다. 지금껏 그래왔다. 대부분의 일은 강호의 손바닥에 있는 듯 흘러갔다. 사물과 현상을 보는 통찰력이 뛰어났고, 다른 이의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그러니까 안심해.”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에 돌아올 거니까. 강호는 아직 시트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돌아올 때는, 다시 남편으로 올게.”
전남편이 아니라 처음이자 마지막, 유일한 남편으로. ◇ ◆ ◇ 수요일. 그렇게 아침에 강호가 떠난 후 소란은 깊은 잠에 빠졌다. 밤새 그와 보낸 시간으로 한숨도 제대로 못 잔 탓이다. 미리 태석에게 말해 연차를 내고, 급한 일은 연희에게 부탁했다. 그렇기에 쏟아지는 잠에 마음 편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얼마나 잤을까. 강호가 오후에 의천시에 내려간다고 했으니까, 저녁에는 통화해야지 생각했더랬다. 잘 도착했는지 묻고, 공장 상황도 전해 듣고, 내일을 위해 대비한 일들도 다 이상이 없는지 물어봐야지, 했다. 무엇보다 그냥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밤새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음성이 그리웠고, 빨리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릴없이 누워 바다만 바라보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둘이서 한 몸처럼 안고 뒹굴며 아무 걱정 없이 시간을 죽이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흐음…….”
사위가 컴컴한 걸 보니 저녁이 다 되었나 보다. 더듬거리며 전화기를 잡았다. 그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가고, 곧 들릴 목소리를 기다리는데……, 이상하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이나. 나른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리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올 때쯤 전화가 걸려왔다. 연희였다.
“응, 연희야. 퇴근했어? 내가 좀 이따…….”
- 뉴스 틀어봐! 아니, 인터넷, 뭐든, 아, 아무거나 좀 봐봐!
선득한 느낌이 등줄기를 스쳤다. 휴대전화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 빨리! 빨리!
잠시 멍해 있던 소란은 연희의 재촉에 눈에 보이는 TV 리모컨을 쥐고 익숙한 케이블 뉴스 채널을 틀었다. 한눈에 봐도 낡은 외관의 대형 공장 위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소란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연희야, 오늘 혹시 목요일이야……?”
설마 자신이 24시간을 꼬박 잔 걸까. 창밖이 어두운 건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서일까. 그러니까 목요일 새벽이, 바로 지금인 걸까.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이상한데. 연희가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무슨 소리야. 오늘 수요일, 지금 수요일 저녁이잖아.
역시 아니었다.
- 후우……, 저기 찬규 오빠가 그러는데 오빠네 공장이라며. 오늘 강호 오빠 공장에 내려갔다는데 아까부터 여, 연락이 안 된대. 지금도 계속 전화하는데 안 받고, 공장엔 부……, 불이 났다고 하고……. 너 혹시 통화돼……?
일이 계획된 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