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2021.10.09.
그사이 클럽 안쪽 룸에서 한창 뜨거운 재회 중이던 부부, 강호의 휴대전화가 울려 몸을 떨어뜨렸다. 열기가 채 식기도 전, 발신인을 확인한 강호가 전화를 받았다.
“도착하셨습니까. 네, 가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마치자 소란이 입을 열었다.
“한 검사님 오셨대요?”
“응.”
아쉽지만 인사를 나누어야 할 때다. 지금의 작별이 영원한 안녕도 아니건만 왜 이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먼저 나갈게. 살피고 나와.”
“네, 밤에 전화할게요.”
애틋한 인사 위로 쪽, 쪽, 몇 번의 짧은 키스가 이어졌다.
◇ ◆ ◇
“와, 저분이 한 검사님이구나. 미인이시네.”
태석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사람이 말이야, 쓸데없이 예쁠 필요가 있나. 괜히 다른 사람 이목만 끌고.
“이야, 형수님 화해하러 오셨나 보네.”
찬규가 장난스레 팔을 툭 치며 하는 말에 태석이 깜짝 놀라 부인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 싸운 거 아니었어?”
“형수님 아니……, 하, 됐다.”
말을 말자 싶어 태석은 변명을 관두었다. 가만, 무조건 부정만 할 게 아니지. 차라리 잘된 건데. 어차피 서윤과 자주 만나게 된 계기도 박후만 때문이었고, 그 시작은 소란이었다. 하나 그 얘기를 동네방네 떠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칫하다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절대 밝히지 못할 것 아닌가. 주변인들에게 구구절절 다 말해 무엇 하겠나. 소란을 향한 마음이 이성적 관심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은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좋아한다. 강호와 소란의 이혼이 태석 때문이라는 헛소문까지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니 태석은 서윤과는 친밀한 사이로 지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데 서윤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도 했고. 저도 모르게 합리화가 이어지는 중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꾸만 서윤에게 눈이 가고 관심이 가는 이유,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고 당황한 이유, 모든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이유. 그게 태석을 움직이게 하고 있는데. 속을 알 수 없는 서윤의 마음에 오래전부터 누가 있는지 모르는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탓.
“우리 서윤이 이제 왔구나.”
태석은 서둘러 서윤에게 다가갔다.
“아, 마태석.”
“지금 완전 바쁘잖아. 그런데도 내 생일 축하해주려고 와준 거야?”
“일단 생일은 축하해, 근데 내가 여기 온 건…….”
“나 보고 싶어서지. 알지, 알지.”
사람 헷갈리게 하는 말에 넘어가지 않는 서윤이 왜 이래, 하는 얼굴로 경계하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한 검사님.”
나타난 사람은 강호였다.
“아, 백강호 씨? 그런데 여기서 조용히 얘기할 데가 있나. 사람 너무 많은데.”
그는 서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일 주인공이자 호스트인 태석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조용한 곳으로 얘기할 자리 좀 만들어줘. 형도 얼추 인사 끝나면 들어오고.”
“서윤이 네가 부른 거야?”
태석의 물음에 강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지금 강호의 일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니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만나는 것일 터다. 다만 서윤과 따로 만나는 모습이 외부에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혹여 박 여사가 사람이라도 붙여 알게 된다면 의심할 테니 말이다. 이제야 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서윤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이해가 되었다. 여긴 자신의 지인만 들어올 수 있고, 들어온 이상 이곳에서의 만남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니 행여 누가 본다 해도 의심스러운 상황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 강호는 서윤을 이곳에 부른 것이다. 치밀하고 무서운 놈. 이런 자리 하나까지 계산해서 잡다니. 그를 돕기로 한 태석은 매니저에게 받아둔 카드키를 순순히 꺼내 내밀었다.
“일단 바 뒤쪽에 마스터룸 쓰면 돼. 키는 여기.”
그와는 별개로, 뜻하지 않게 나타난 서윤의 모습에 심장이 날뛰는 제가 민망했으니 태석의 말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백강호 넌 지금 내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게 아니라 이 자리를 이용하러 온 거였어?”
“새삼스럽게. 여기 온 사람 절반 이상이 형을 이용하러 왔을 텐데.”
“뭐?”
알고 있지만 어쩐지 충격적인 지적이다.
“영양가 없는 사람들 챙길 생각하지 말고, 형 실속을 차려. 빈 깡통 같은 천 명보다 속이 꽉 찬 ‘내 사람’ 하나가 더 귀한 법이니까.”
“뭐?”
2차 충격이다. 백강호에게 이런 충고나 듣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형한테 ‘내 사람’이 있긴 해?”
이 자식은 입에 칼을 물었나. 내뱉는 말에 살이 베이는 기분이다.
“왜, 왜 없어. 있지. 많지. 야, 나도…….”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한 사람, 있어?”
3차 충격. 태석은 분한 눈빛으로 강호를 보다가 이내 옆에 서 있던 서윤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흠칫하고 놀란 건 본인이다. 나 왜 쟤를 봐. 아, 내가 미쳤나 봐.
“여기 온 사람 태반이 형 인생에 별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이야. 심지어 형 대학 지인들은, 형이 굉장히 아끼는 후배의 이혼을 두고 함부로 떠들어대고 있던데. 입에 걸레를 물었나, 질이 별로 좋지 않더라고.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지금 다 이 자리에 와 있다는 소리야.”
태석이 눈을 크게 떴다. 굉장히 아끼는 후배의 이혼?
“내 전 와이프 말이야.”
“아아, 란이란이. ……뭐? 누가 소란이 뒷말해, 감히?”
내 이것들을 그냥. 팔을 걷어붙이려는데 강호가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이미 다른 사람한테 걸렸던데.”
그게 아니었다면 제가 벌써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투였다. 누군가 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상황을 맡긴 모양이다. 강호는 태석에게 용건이 끝난 듯 바로 서윤을 향했다.
“검사님. 마스터룸으로 가시죠.”
내내 이어지는 강호와 태석의 티키타카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태석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강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석이 후우, 한숨을 쉬는데 찬규가 스윽 얼굴을 디밀었다.
“뭐야, 뭐야. 형수님 왜 강호랑 같이 가는 건데? 둘이 무슨 사이야?”
“나도 금방 따라 들어갈 거야.”
“셋이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나중에 내 결혼식에 백강호가 사회 볼 거야.”
“……응?”
“비켜.”
둘러대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만, 사실 아무 말은 아니다. 어쨌든 태석은 찬규를 지나쳐 악의 무리를 찾아 나섰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대체 누가 남의 상처를 두고 지저분한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얼마 가지 않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다.
“나린 씨, 이제 그만…….”
“그만은 무슨 그만이에요. 남의 뒷말 아무렇지 않게 하는 분들이 대놓고 앞말 조금 듣는다고 타격이나 받겠어요? 전 아직 할 말 많이 남았거든요.”
사람들 사이에 팔짱 끼고 배를 내밀고 선 나린을 성준이 도닥이며 말리고 있다. 그 앞엔 태석의 학부 동기와 후배 몇 명이 떫은 감을 잘못 씹은 표정으로 서 있고. 태석의 생일파티에 온 지인들이니 그가 당연히 아는 사람들이다. 몇몇 후배는 소란의 결혼식 때도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 잘 간다며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하기도 했었다.
“말씀들 해보시라니까. 우소란이 백강호한테 돈 뜯어내고 사기 치는 거 직접 보셨는지, 그러다가 맨몸으로 쫓겨난 거 증명하실 수 있는지, 사회에서 한자리씩 차지하신 분들이 입이 없으신가, 뇌가 없으신가. 왜 대답을 못 하세요?”
나린의 말투는 뾰족뾰족 날이 서 있다. 욕하는 게 아닌데도 마치 심한 욕을 듣는 것처럼 옆에 있는 사람마저 가슴이 서늘해지는 분위기였다. 오죽하면 소란의 오빠 성준까지 그녀를 말리고 있을까. 백강호가 순순히 물러설 수 있던 이유. 바로 계나린이 먼저 나섰기 때문임을 태석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들은 것만 가지고 얘기한 거예요.”
“그래요. 별 뜻 없이 우린 그냥 진짜인 줄 알고. 악의는 없었어요.”
사과답지 않은 사과가 이어졌다. 비단 그들뿐일까. 강호와 소란의 이혼은 그저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널리 소비되고 있다. 그 뒤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럴듯한 추측으로 깎아내리기만 바쁜 사람들이다. 그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그저 인간의 입은 그토록 가벼울 뿐이다. 별 뜻 없다는 말이 가장 정확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태석은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엔 여기 온 사람 태반이 형 인생에 별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이야.”
강호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조건 없이 사람을 믿었다. 천성이 밝고 유쾌하여 많은 이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주변에 사람이 넘쳐났고 그게 재산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를 닮아 본능적으로 세를 과시하길 좋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집안 배경과 스펙, 친절한 성격 등이 때로 주변 사람들에겐 이용할 거리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이 또한 제가 사람들을 많이 끼고 있는 한 당연히 겪는 일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제게 남는 건 무엇일까.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한 사람, 있어?”
이런 게 ‘현타’라는 건가. 빈 수레가 요란하기만 했지, 그 안에 반짝거리는 보물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소란 제 가족이고, 백강호 제 친구라서 잘 아는데요. 두 사람, 댁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삶 산 적 없습니다. 남녀가 만나 사랑할 수도, 결혼할 수도, 또 헤어질 수도, 이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자연스러운 상황을 놓고 어디서 또 얼토당토않은 얘기가 들려온다면, 다른 분들께도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나린은 똑똑히 뜻을 전하곤, 성준에게 “가요.” 하며 싸늘히 돌아섰다. 나린을 말리던 그 순한 성준도 결국 형형한 눈빛으로 그들을 찌를 듯 쳐다보곤 함께 돌아섰다. 나이 들수록 입이란 무거워야 한다는 걸 몸소 체험한 그들이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소동이 이어진 후 나중에야 모습을 드러낸 소란을 데리고 나린이 구석으로 갔다.
“너 진짜 괜찮아?”
“아, ……괜찮아요. 언니 괜히 저 때문에 열무 태교에도 안 좋은 상황을 겪으셨네요.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해할 때냐고. 둘이 그렇게 좋다더니 하루아침에 이게 뭐야.”
뒷말 도는 거야 예상했으니 괜찮지만, 주변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 것만은 미안한 일이다. 연희에게도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고, 성준은 자신을 찾아와 심각한 얼굴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나린은 지금 화를 내고 있고. 소란은 그런 그들을 찬찬히 떠올리고, 또 눈앞의 나린을 바라보며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결국 다 자신과 강호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임을 알고 있다. 몇 번이고 이건 위장 이혼이니 염려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아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일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밝힐 수가 없었다. 대신 소란은 팔 벌려 조심스레 나린을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나린이 놀라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뭐, 뭔데.”
“잠깐만 안을게요.”
좋은 에너지는 잔뜩 받아 갈 셈이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잠시 아픔도 참아낼 줄도 알아야겠지.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화사한 무지개가 뜬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 실망 안 시킬게요.”
그녀를 안은 채 소란이 조용히 말했다. 순간 진실을 밝히지 않아도 뜻만은 전해졌는지, 나린이 손을 올려 느릿하게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 ◆ ◇ 박 여사는 구 비서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그러니까 다음 주란 말이죠.”
- 네, 공장 전기 설비를 다음 주 목요일부터 교체한다고 합니다. 백강호는 수요일에 미리 내려갈 예정이라 하고요.
드디어 디데이가 다가왔다. 노후화한 시설로 인한 화재 사고로 위장할 예정이라, 설비 교체 전이 적기였다.
- 백강호 성격상 목요일 당일에도 새벽부터 나가 직접 살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 계속 그래왔듯 말입니다.
그는 늘 인부들이 오기도 전에 먼저 도착해 그날의 공정을 꼼꼼히 살핀다고 한다. 지금껏 한 번도 틀어지지 않은 백강호의 루틴이라고 했다. 그 틈을 파고들어 때를 만들었다. 얼마나 천금 같은 기회인가. 지루할 만큼 오랜 시간을 참아내 잡은 타이밍이다. 완벽한 때를 만들기 위해 이제까지 그토록 신중하게 몸을 낮추고 있었다. 백강호는 이른 새벽부터 아무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공장에 나가 직접 살피는 그 완벽주의가 저를 사지로 몰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으려나. 박 여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날짜는 목요일로 하죠. 백강호 혼자 있을 때로.”
- 네, 그러면 세팅은 목요일 새벽으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준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