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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왜 저렇게 예쁜 거지? (97/112)

#97화. 왜 저렇게 예쁜 거지?2021.10.05.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강호와 소란의 키스는 뜨겁게 이어졌다. 입술의 감촉은 기억보다 부드럽고 진득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달콤하기도 했다. 얼마나 염원했던 순간인가. 폭발하는 감정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필요에 의한 위장 이혼. 상호합의하에 목적을 두고 잠시간 떨어져 있기로 한 것뿐이다. 서로를 향한 마음만은 그대로, 아니 이전보다 훨씬 끓어오르는 두 사람의 키스는 농밀하기만 했다. 다른 이들의 눈을 속여가며 어렵게 만나서일까. 몰래 먹는 사탕은 달고 짜릿하며 애틋했다.

“하아…….”

겨우 입술을 떨어뜨린 소란은 키스의 여운을 떨치지 못한 채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좀 더 깊이 안고 싶고, 좀 더 진한 행위를 나누고 싶어도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강호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데. 가짜 결혼보다 가짜 이혼이 훨씬 힘들다는 걸 확실히 알아버렸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이 사람과는 절대 헤어지고 싶지 않다.

“……나도.”

말이라고 할까마는 강호 역시 그녀가 없는 매 순간 미칠 듯 그리웠다. 수없이 고민하고 또 흔들렸다. 그냥 계획을 바꿀까. 그녀를 곁에 두고도 일을 진행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리어 소란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일단 박 여사 쪽은 유산을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그에 걸림돌이 되는 소란 역시 타깃이 될 수도 있다. 위험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가늠하는 것마저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일을 마치기 위해선, 소란을 제게서 떨어뜨려놓아야만 한다. 그게 최선이다. 소란 역시 이에 동의했다. 다만 절절한 그리움은 당연히 따라붙는 것이다. 난데없이 생이별을 겪자니 가슴이 찢어질 듯 너무나 괴로웠다. 얼마나 깨가 쏟아지던 신혼이었나. 서로 마음을 확인한 후로 눈만 뜨면 곁에 있어 좋았고, 회사에서 일하느라 떨어져 있는 시간마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는데. 매일 밤 통화를 하긴 했다. 일의 진행 상황을 이야기하고, 일과를 나누었지만 그리움을 달래긴 역부족이다. 강호의 시선과 손끝이 소란의 고운 얼굴선을 따라 흘렀다. 그의 엄지가 촉촉이 젖은 입술을 가만히 문질렀다.

“우리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

소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대답보다 강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듯, 두 사람의 타오르는 열기는 뜨겁기만 했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길 바랐다.

  ◇ ◆ ◇

“우 변 어디 갔어? 아직 안 왔나.”

“아까 온 것 같았는데?”

“나도 봤는데. 저쪽 화장실로 가지 않았나?”

소란을 찾는 동료들의 대화에 태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우 변은 아까 내가 의뢰인 통화 부탁한 게 있어서 잠깐 그거 하러.”

“대표님이 이런 데 와서까지 일을 시키셨다고요?”

“낯설다. 그런 분 아니시잖아요.”

태석은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내가 얼마나 인정머리 없는 사람인데.”

“누가요?”

“대표님이요?”

“어우, 다들 몰라서 그래. 나 피도 눈물도 없어. 장난 아니야.”

다들 태석의 너스레에 웃으며 흩어졌다.

“후우.”

동료들의 관심이 소란에게서 멀어지자 태석은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시선을 두었다. 소란과 강호가 바람처럼 밀려 들어간 룸 쪽이다. 순식간이었지만 강호를 보고 인사하기 위해 움직이던 태석의 눈엔 바로 보였다. 그들이 문을 닫고 사라진 후에는 오히려 태석의 심장이 벌렁거려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기도 했다. 다행히 본 사람은 저 말고 아무도 없었고, 눈에 띄는 위치의 룸도 아니긴 했다. 태석은 최근에서야 제가 소 뒷발로 쥐를 잡았다는 걸 알았다. 그로 인해 줄줄 이어진 결과와 현재 처한 상황, 진짜 잡아야 할 사람까지도. 또한…… 강호와 소란이 절대 이혼 같은 걸 할 리 없는 진짜 부부라는 사실 역시 태석이 유일하게 알았다. 이혼 전, 강호가 그를 찾아왔다.

“뭐? 이혼한다고? 내가 니들 헤어지면 가만 안 둔다고 했…….”

“이혼은 연막이야. 궁극적인 목적은 소란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 덫을 효과적으로 놓기 위해서이기도 해. 일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강호는 제 집안에 대한 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두 귀로 듣고도 믿지 못할 사건이 계속 이어져왔고 지금 강호와 소란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런데 잠깐, 너희 계약 때문에 가짜로 한 결혼이 아니었어? 제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누가 그래?”

강호의 까칠한 대꾸에 오히려 태석이 흠칫, 놀랐다.

“소란이 USB에 계약서가 있었어. 내가 그걸 봤고.”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태석은 사실대로 말했다.

“다른 이의 중요문서를 허락 없이 열람한 건 법적으로 문제 되는 행동 같은데.”

“그게 아니라, 내 건 줄 알고 보안 해제했던 건데, 우연히, 정말 우연히 보게 된 거야. 그런데 너희 정말, 가짜 아니야? 이혼 후 재결합은, 소란이도 동의한 거 맞아?”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진짜였고.”

“아아, 그런 것 같더라…….”

“설마 형, 그래서 지금껏 소란이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단 말은 아니겠지. 형이 그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태석은 펄쩍 뛰었다. 전엔 헷갈렸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소란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무슨 소리야,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형이 소란이 보는 눈빛이나 태도가 늘 거슬렸어. 가짜 결혼이라고, 형한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 아닌가.”

이대로 있다가는 유부녀에게 욕심낸 인간이 될 마당이다. 그런 불명예만은 사절이다.

“정말 아니야, 소란이는 그냥 아끼는 후배일 뿐이고…….”

“뿐이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어.”

“따로?”

“그래, 따로 있어, 따로. 하하, 야, 내가 무슨 유부녀를, 하하, 얘가, 얘가, 사상이 너무 불순하네. 어후, 나, 그런 놈 아니거든.”

일단 되는 대로 내뱉었다.

“한 검사라는 분과 사귀는 게 맞나 보네.”

“그건 아닌데.”

“따로 있다며. 좋아하는 여자. 그분 아니라고?”

덫에 걸린 심정. 집요한 백강호를 피해갈 순 없었다. 그가 큐피드로서의 남다른 자질이 있다는 건 태석이 알지 못했다. 나린과 성준의 재회 역시 강호의 작품이었는데. 태석은 일단 하하, 하고 웃었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아직 사귀는 게 아니라 형 혼자 좋아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일단 그런 걸로 해.”

그렇게라도 넘어가주는 강호에게 고마울 지경이다. 어쨌든 강호와 소란의 결혼은 시작부터 가짜였고, 이혼마저 가짜라고 한다. 다른 이들에겐 비밀인 사실을 왜 자신에게만 말하는 건지, 태석은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박후만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것, 그래서 한서윤 검사한테 꼬리를 잡아 넘긴 것, 그게 박후길에게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뒷걸음질로 잡아낸 것 전부 고맙게 생각해. 도움도 많이 됐고. 그래서…….”

“그래서?”

“이왕 도움 된 거, 끝까지 협조 좀 해.”

강호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주면 고맙겠어, 라고.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형을 괴롭힐 거야, 라는 뜻 같았다. 결국 태석은 멱살 잡혀 그 엄청난 일에 끌려 들어간 것이다. 이러려고 박후만의 뒤를 캔 것이 아닌데. 복잡한 세상, 그저 마음 편히 사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강호와 소란이 위험해질 상황이라니 도울 일이 있다면 무조건 도와야만 한다. 태석은 결의에 찬 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계나린, 왔어? 같이 들어가자.”

아내 연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던 찬규가 고개를 돌리다가, 뒤쪽에 오는 나린을 보고 멈추어 섰다. 나린의 옆엔 성준도 있다.

“형님, 안녕하세요.”

이런 자리에 오는 게 어색하기만 한 성준은 나린의 인사만 하고 빨리 돌아가자는 말에 잠시 들렀다. 찬규와 연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그 역시 안녕, 하고 웃으며 조금 풀어진 미소를 내보였다. 어두컴컴한 통로가 다 환해지는 웃음에 나린은 흐뭇해졌다. 태교가 따로 없는 열무 아빠의 미소다.

“언니. 이제 배가 제법 나왔네요. 예정일이 언제랬죠?”

“6월 초.”

“와, 석 달쯤 남았나? 시간 빠르다. 입덧은 좀 괜찮아요?”

“응, 괜찮아.”

연희는 나린에게 몸 상태에 대해 묻다가 성준을 보며 웃었다.

“성준 오빠가 오죽 잘해주시겠어요.”

나린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조심히 보듬는 성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곁에서 한결 편해진 나린의 얼굴도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함께 있어 보기 좋은 두 사람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 사이로 태석이 보였다.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가까이 간 연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선배님,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세요?”

어느새 옆에 다가온 연희의 목소리에 태석이 고개를 돌렸다.

“생일날 땅 꺼져라 한숨 쉬는 거 보면 무슨 사연 있는 게 분명한데.”

“여자친구랑 싸웠나 보지.”

“여기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진짜 싸웠나 봐.”

찬규와 나린이 주거니 받거니,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와의 불화설을 제기했다. 태석은 루머 따위 가볍게 무시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얼른 표정을 화사하게 바꾸었다.

“다들 와줘서 고마워. 왔으면 앉아야지. 자리 저쪽에 많아. 일단 가자, 가자. 근데 서후는 맡기고 온 거야? 데리고 오지. 아, 여긴 너무 정신없으려나. 참, 나린이 몸은 괜찮지? 아기 아들이라며? 성준 씨는 아주 대박이던데요. 영상 잘 봤습니다. 이제 탄탄대로 걷는 일만 남았…….”

태석은 네 사람을 양을 몰듯 우르르 몰고 가면서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쏟아내다가 우뚝 멈춰 섰다. 멀리 입구 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몰아치던 태석이 멈춰 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자유롭게 서 있는 이들 사이를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으니, 한서윤 검사다. 태석은 숨 쉬는 것도 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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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생일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파티에 오겠냐고 물어본 적도 없다. 단지 최근에 박후만의 일로 자주 만났던 것뿐, 평소 친분이 깊은 사이도 아니었기에 생일이라고 초대하는 건 서윤의 입장에서 생뚱맞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서였다. 게다가 박후만 건물 건으로 만났던 게 마지막이지 않았던가. 이후 그 형제들이 갖가지 혐의로 줄줄이 불려 들어가고, 이에 서윤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태석은 조금 당황했고, 더불어 가슴이 쿵쿵 울렸다. 이런 반응은 평소의 저답지 않다. 초대 여부와 상관없이 자리에 온 지인이라면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하며 웃기 바빴을 텐데, 지금 태석은 발끝부터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실내는 다소 어두웠지만 그녀의 주변은 별빛이 흩뿌려진 듯 반짝거렸기에 태석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돌렸다. 멀리 떨어진 태석은 보이지도 않는 듯 휴대전화를 꺼내 버튼을 누르곤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서윤이 누군가와 짧게 통화하며 끄덕이는 모습까지 태석의 눈엔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클럽이나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도 아니다. 여긴 오직 태석의 생일파티를 위해 전체 대관한 장소다. 그렇다면 자신을 찾아온 게 분명할 텐데 제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태석이 의아해하며 휴대전화를 꼭 쥐었다. 설마 서윤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자신을 찾길 기대하는 걸까. 그 와중에 오랜만에 본 서윤은 왜 저렇게, 왜…… 저렇게.

‘예쁜 거지……?’

태석의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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