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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전남편이 이렇게 섹시하면 (96/112)

#96화. 전남편이 이렇게 섹시하면2021.10.02.

결혼 생활이 1년은커녕 반년이나 되었던가. 온갖 유난은 다 떨며 결혼하더니, 이제 얼굴 들고 다니기도 힘들겠지. 거참 잘된 일이다.

“남에게 상처 주고 가서 잘 사는 사람 못 봤어.”

중얼거리는 박 여사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게다가 소란은 이 일에 있어 꽤 걸리적거리는 존재였다. 백 회장의 죽음이야 일찌감치 준비해왔던 터고, 백강호는 티 나지 않게 처리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기회를 보던 중이었다. 일의 하이라이트만 남은 셈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우소란이 끼어들어버렸다. 백 회장의 유산 상속자에 해당하니 소란도 제거해야 할 대상이긴 했다. 다만 소란까지 없애는 건 뭔가 찜찜했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증오스러웠던 소란이 그 집구석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니 한꺼번에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잘됐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을 따져보니 그건 아니었다. 강호에 백 회장도 모자라 소란까지 줄줄이 죽고 나면 분명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

“잘됐어, 잘된 일이야.”

소란이 이혼하고 서류까지 정리했다면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어진다. 더 이상 상속자가 아니기에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박 여사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 ◆ ◇ 며칠 후, 박 여사는 지난번에 봐두었던 건물 문제로 중간 소개자인 우 여사와 만났다.

“이번 주?”

“그래, 이번 주에 계약 진행하지 않으면 안 사장이 다른 사람에게 넘기겠다고 하더라. 이제 돈이 좀 급한가 봐. 오래 기다려줬지, 뭐.”

그녀의 말에 박 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이달 내로 모두 정리하려고 했다. 수중에 그 돈이 들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계약하고 잔금 때까진 여유가 있으니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조금 늦춰졌다. 백강호 때문이다. 아니, 백강호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지금 스스로 제 죽을 자리를 까는 중이다. 어떤 사고로 위장해야 하나, 화재만큼 좋은 건 없는데 더 이상 써먹기도 어렵고, 많은 고민이 들던 때였다. 구속 수사 중인 동생들과 의논할 수도 없게 되었고, 어쩌나 했다. 그런데 구 비서의 정보에 따르면, 백강호는 현재 의천시에 있는 공장을 매입한다고 했다. 다 쓰러져가는 공장을 사서 고쳐 쓰려고 한다나. 이거다, 싶었다. 공장 리모델링에 꽤 신경을 쓰는 백강호가 이틀이 멀다 하고 의천시에 내려가서 직접 살피고 있다니, 사고를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 노후화한 공장이야말로 화재가 일어나기에 최적의 장소일 테니까.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크게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사고가 가능하다. 그러니 박 여사는 백강호의 공장 매입 시기에 맞춰 일을 좀 늦춘 것이다.

“근데 자기 사정이 좀 어렵지 않아? 진상 아빠 사업도 그렇고, 친정 동생들도 무슨 회사 문제 때문에 검찰에…….”

“무슨 소리야, 내가 사정이 어렵긴 왜 어려워.”

우 여사의 말에 박 여사가 부인했다. 건물 살 돈도 없냐는 식으로 들려 자존심이 상했다. 가뜩이나 종종 자신을 무시하는 투로 말하는 우 여사가 아닌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그녀를 참아주긴 싫었다.

“내 동생들은 뭐, 어차피 출가한 나하고는 상관없고, 애아빠 하는 일이야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는 거지 어디 사업이 늘 빵빵 터지기만 하나.”

“난 또, 사정이 어려워서 계약 질질 끄나 그랬지.”

“질질 끌긴 누가.”

박 여사가 발끈했다.

“꼭 사게 해달란 때는 언제고 자꾸 이리저리 빼는 거 같아서. 아니야?”

사실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좀 끌어보려 하긴 했다. 백 회장네 돈만 제게로 굴러 들어오면 그깟 건물이야 열 채, 스무 채는 사고도 남을 텐데. 겨우 하나에 이렇게 자존심을 구겨야 하는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 정도 돈이야 내 호주머니에도 있어. 이번 주에 계약서 쓸 테니 다른 사람한테 건물 보여줄 생각이나 하지 마.”

박 여사는 턱을 치켜들며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이만한 물건은 놓치면 손해니까 일단 어떻게든 끌어모은 돈으로 계약부터 하고서 서둘러 일을 마치면 된다. 잔금은 그다음 일. 시기가 안 맞으면 사채라도 당겨 쓰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들어올 돈이 없어질 것도 아니니까, 이미 호주머니에 들어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긴 하다.

“그래, 그럼 이번 주로 안 사장한테 날짜 물어보고 다시 약속 잡자고.”

우 여사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근데 자기 그거 알아? 왜 자기네 시조카, 당질인지 뭔지 있잖아. 진상이랑 사귄 애랑 결혼했다던.”

“……왜?”

“이혼했다던데. 들었어?”

이제 슬슬 소문이 도나 보다. 언제나처럼 박 여사는 피해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혼했다고? 난 몰랐지. 내가 뭘 알겠어.”

“어머, 자기 몰랐어? 나도 오늘 아침에야 들었거든. 벌써 완전히 다 끝냈다더라. 요즘 애들 빠르기도 하지.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그걸 모르고 있었대?”

“난 우리 진상이 상처받은 거 생각하면, ……사실 그쪽은 보기도 힘들더라고. 소란이야 내가 워낙 우리 식구 됐으면 해서 예뻐했던 아이고 하니……, 알잖아. 걔들 오래 만났던 거. 거의 식구나 다름없지 뭐.”

“하긴.”

안타까운 박 여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 여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기네 친척인데도 상관없이 결혼하는 거 보고 다들 그 여자애 대단하다고 그랬잖아.”

그야 물론 박 여사가 하고 다닌 말들이었지만.

“어지간히 돈 밝히나 보다 해서, 이혼하고 나올 때도 한몫 단단히 챙겼겠다고들 했는데.”

“그런데?”

“거의 한 푼도 못 받고 맨몸으로 쫓겨나다시피 한 거라던데?”

“뭐?”

의외의 말에 박 여사는 놀랐다. 우소란 그 똑똑한 계집애가 위자료도 못 챙기고 쫓겨나다시피 할 정도라니. 확실히 백강호가 보통이 아니긴 했다.

“그 여자애가 무슨 잘못이라도 크게 한 거 아닐까?”

“나야 모르지.”

“아무리 뭔 잘못을 했대도, 그 집안도 참 매정하지.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혼녀 딱지 달게 하는 것도 모자라 빈손으로 나앉게 하다니. 돈이 없는 집도 아니면서. 하여튼 있는 집이 더해. 그 여자애도 안됐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소란이 조금 가여운 것도 같다. 그렇다고 보듬어주고 싶은 것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먹고 괴롭히겠단 생각은 좀 옅어진다.

“그래, 안됐네.”

“진상이 버리고 간 벌 받는 거 아니겠어? 직업도 변호사겠다, 앞으로 지 한 몸 알아서 잘 챙기겠지. 자기네 마음고생한 거에 비하면 뭐.”

아무튼 잘됐다. 우소란이 찰거머리처럼 백강호에게 들러붙어 있었더라면 일이 참 애매해질 뻔했는데,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보다 더 잘된 일은 없다. 사실 박 여사는 동생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면서 저와의 인연은 딱 끊은 듯 굴어서 기분도 상하고 앞일이 막막하기도 했다. 한창 벌여둔 일을 마무리하지도 못했는데, 원래 쓰던 인력이라도 그냥 주고 가면 좋으련만 모든 도움을 싹 거두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더럽고 치사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나눠 먹을 일이 없으니 이 또한 제겐 좋은 일인지 모른다. 동생들의 도움이 없어도 일이 술술 풀려가고 있으니까. 숙원 사업이 아름다운 결실을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뜨고 설레었다. 이성적인 판단은 전혀 하지도 못할 만큼. 일이 잘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 모양이다. ◇ ◆ ◇ 세간의 화제는 단연코 백강호와 우소란의 이혼이다. 갑작스러웠던 결혼보다 더 갑작스러운 이혼은 그들을 아는 모두에게 큰 놀라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 태석만은 예외였다. 진실을 아는 단 한 명의 주변인이기 때문이다.

“사이가 엄청 안 좋은 거 같긴 하더라.”

“역시 살다 보니 집안 격차 이런 건 무시할 수 없었나.”

“모든 걸 뛰어넘는 사랑 같은 건 동화 속에나 있는 거지. 현실은 이렇게 시궁창이라니까.”

“결혼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이혼이야. 우 변 속이 다 썩었겠네.”

휴게실에선 연일 소란의 이혼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제삼자 입장으로 듣기만 해도 짜증이 치미는데, 당사자들은 태풍의 눈 속에 있는 듯 어쩜 그리 태연할 수가 있는지.

“독해, 독해…….”

태석은 두 사람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강호와 소란은 이런 과정이야 다 예상하고 내린 결정이며, 견딜 자신이 있다고 했다. 하긴, 목숨이 걸린 문제에 이까짓 가십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이따 대표님 생일에 둘 다 올까, 설마?”

“우 변이야 당연히 올 거고, 백강호 대표는 안 오지 않겠어?”

“왜 안 와, 대표님이랑 엮인 인맥만 해도 얼만데. 당연히 오겠지.”

오늘은 태석의 생일로, 저녁에 파티가 예정되어 있다. 자타공인 슈퍼핵인싸 마태석의 생일파티는 개인의 기념일이라기보다는 만인의 행사 같은 느낌이다.

“허, 이혼하고도 계속 봐야 하는 사이만큼 불행한 건 없지.”

“두 사람 그럼 이혼하고 오늘이 처음 보는 거려나. 우 변 정말 가기 싫겠다…….”

동료들은 걱정 어린 말투였지만, 그 시각 사무실에 있는 소란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드디어 오늘 보네…….”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재차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썹이 짝짝이 같은데, 아이라인을 다시 그릴까. 화장을 아예 다시 할까. 얼마나 보고 싶은 남편인가. 합의하에 위장 이혼을 결정하고 진행하는 동안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사이가 나빠진 부부처럼 보여야 했기에 편히 만날 수조차 없었다. 집에서 나와 호텔에서 지낸 지도 꽤 되었으니 강호를 향한 그리움은 극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며칠 전 법원에서였는데, 이혼이고 뭐고 그냥 품에 꽉 안기고만 싶은 걸 간신히 참고 돌아와야 했다.  

“이혼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서류에 도장 찍으면 기분이 너무 이상할 것 같아요.”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기로 한 두 사람이다. 다만 박 여사가 목숨을 노리는 건 강호뿐이 아니라, 자신까지였다. 난 괜찮아요, 당신 곁에 있을래요, 하고 우기기엔 상황이 심각했다. 맥없이 당하고 있을 게 아니라 강호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기에 그의 몸은 최대한 가벼워야 했다. 그러려면 강호의 의견대로 자신과 떨어져 있는 게 낫다는 데 동의했다. 그저 형식적인 이혼일 뿐이니까,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도 수긍했다. 대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보여야 하니 이혼한 부부인 척하겠지만, 오히려 마음은 더욱 절절 끓어올랐다. 막으면 막을수록 더 뜨겁게 타오르는 법. 지금 소란은, 그 어느 때보다 열렬히 그를 원하고 있다. 그러니 다들 두 사람의 재회를 걱정하지만, 소란은 이렇게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는 중이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좋을 것만 같다. ◇ ◆ ◇ 그날 저녁. 회원제로 운영되는 한 클럽 하나가 마태석의 손님들을 위해 문을 열었다. 태석이 매년 생일파티 때마다 전체 대관하는 곳이다. 그의 동료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선후배들, 다양한 곳에서 인연을 맺은 지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사람이 많아 정신이 없는 메인홀에서 떨어져 나온 소란은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화장실에서 얼굴을 다시 한번 살피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나왔다. 그녀는 작년에도 이곳에서 강호를 본 적이 있다. 그땐 그가 절 알 거라곤, 아니, 그가 절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 여기고, 멀리서 스쳐보았을 뿐이다. 그는 사람들 많은 곳에 섞이기 싫은 듯 그때도 조용한 곳에서만 머물다 자리를 떴었다. ……지금처럼. 강호가 중앙이 아닌 사이드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시야에 들어온 남편, 아니, 전남편을 본 소란의 심장이 멎어버린 것만 같았다. 부유하는 모든 공기가 일제히 움직임을 잃고, 가장 강렬한 빛만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 세상에 강호만 존재하는 듯 보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소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전남편이 이렇게 섹시하면 어쩌자는 거야…….’

차츰 그가 가까워졌다. 강호는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지 않고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 소란의 몸이 굳어버렸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마음과는 달리 발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생각하던 찰나. 순식간에 그가 제 손목을 잡았고, 동시에 바로 옆에 있던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탁, 문이 닫혔다. 벽에 등이 닿은 소란의 앞을 가로막은 건,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였다. 지금 이 순간 더없이 위험한 전남편. 얼마 만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지.

“보고 싶었…….”

소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가 고개를 기울여 깊게 입을 맞추었다. 몹시 뜨거워 델 듯한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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