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이혼하겠습니다2021.09.28.
“할아버님. 폐선암…… 아니시래요.”
백 회장은 입이 벌어지고, 머리가 멍해졌다.
“건강하시대요. 너무너무, ……건강하시대요, 할아버님.”
살면서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이 또 있었던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생각보다도 그저 고맙고, 또 고맙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죽을 날 받아놓고 살던 중에 죽을병 아니라는 말만큼 반가운 소리가 어디 있을까 말이다. 강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눈물이, 투두둑 쏟아졌다.
◇ ◆ ◇ 감격의 순간이 지나자 불처럼 뜨거운 노여움이 터져 나왔다.
“고얀! 장 박사 돌팔이 이놈!”
강호가 처음 본 건 할아버지의 눈물만이 아니었다. 이토록 길길이 날뛰시는 모습도 난생처음이었다. 늘 단정하고 기품 넘치던 할아버지도 생사의 기로 앞에선 본능이 먼저인 법, 누가 자신의 목숨을 두고 장난을 쳤나 싶어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다. 강호와 소란은 백 회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와서 검사를 마치고 확실한 소견을 듣기 전까지 두 사람도 마음 졸였던 건 마찬가지였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 진짜면 어쩌나 불안하기만 했다. 이제 실제 투병 중이 아님을 확인하게 됐다. 정신 차리고 다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은 백 회장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일이 우선이다.
“장 박사님은 협박을 당했거나 아니면 큰돈을 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결국 장 박사가 일부러 한 짓이라는 얘기로구나.”
“네,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누군가에게 속으셨을 리도 없고. 설령 누가 결과를 바꿔치기했더라도 지금껏 계속 치료해온 입장이니 장 박사님이 몰랐을 리가 없죠.”
사람 믿을 것이 못 된다더니, 반평생을 믿고 함께해온 주치의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백 회장에겐 너무나도 큰 충격이다.
“이건 어떻게 확인하게 된 게냐. 내 병이 가짜인 걸…… 너는 어떻게 짐작했고.”
이제야 백 회장은 원론적인 물음을 던졌다.
“여기요.”
강호는 알약 몇 개를 내려놓았다.
“이건 내가 먹는 약인데.”
백 회장이 처방받아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는 약 중 일부였다. 나이가 있어 힘든 치료는 견디지 못할 것이기에 남들 받는 치료를 전부 다 받을 순 없을 거라 했다. 돈이 있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말을 절감하며 백 회장은 장 박사가 권하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약 하나도 주는 대로 정말 열심히 먹어왔는데.
“이건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약이 아니라고 해요.”
“뭣이?”
병이 가짜인데 약이 진짜일 리가.
“그럼 이게 날 죽이는 약이란 말이냐!?”
“그건 아니고, 영양제입니다.”
“영양제?”
그게 더 놀랍다는 듯 백 회장이 되물었고, 소란이 대답했다.
“장 박사님이 할아버님을 해치고 싶은 건 아니셨던 모양이에요. 가짜로 주는 약도 영양제로 처방하신 거 보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강호가 천천히 설명했다.
“장 박사님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할아버지께 폐선암 확진 판정을 내리고,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거짓말한 것이죠. 항암이라든가 방사선 치료 같은 것도 나이 핑계로 진행하지 않고, 그저 죽을 날만 받아놓은 것처럼 꾸민 겁니다.”
“왜?”
그러니까 왜. 그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강호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을 내어놓았다.
“유산을 노린 자의 소행으로 보는 중입니다. 살해하더라도 의심하지 않도록 할아버지의 죽음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죠.”
“……그러니까 날 유산 때문에 일부러 죽이려고 계획하고, 그 밑바탕으로 깔아둔 게 폐선암이란 병이었단 말이냐.”
“네,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는데, 누가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단 게야. 유산을 노렸다면 네가 이런 짓을 꾸민 것도 아닐 테고.”
이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운 백 회장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
“전 가만히 있어도 받을 사람입니다. 물론 주신다면요.”
“네가 아니면.”
“방계.”
그러니까 백 회장의 직계인 강호가 아니라, 방계혈족을 따지자면…….
“진상 애비란 말이야?”
깜짝 놀라 외치는 백 회장의 머릿속도 빠르게 돌아갔다.
“아니지, 진상 애비가 아니라 애미 쪽일지 모르겠구나. ……그래, 그럴지도 몰라.”
드디어 백 회장도 감을 잡았다.
“실은 내가 소란이 건물을 산 건 일부러였다. 소란이가 우리 집 식구가 된 후에도 진상 애미가 들러붙어 이간질하려는 꼴이 미심쩍어 내 알아봤더니 그 동생이 법인 대표였더구나. 일부러 건물을 매입해 소란이 남매를 괴롭히고 곤란하게 했다는 걸 알게 됐지.”
그래서 백 회장은 그들로부터 건물을 사서 소란에게 선물했다.
“사기에 가깝게 시세를 속여 파는 걸 보니 제 무덤 제가 판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결국 진상 애미와 한통속이라는 게 드러날 수밖에 없을 텐데, 동생 놈이 머리가 나쁜 편인 게지.”
박 여사는 철저히 존재를 감추려 했는데, 박후만이란 자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일을 망쳤다.
“그래서 진상 애미가 눈에 보이는 것만큼 선한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다만.”
소란의 건물 건은 박 여사의 이면을 보여주는 한 예였을 뿐이다. 더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말해주었기에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악행으로 인해 결국 그 꼬리가 밟히게 생겼지만, 그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터다.
“선한 사람을 논할 정도가 아닙니다. 사실 더 많은 일에 연루되어 있으니까요.”
강호는 백 회장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최근 대고모 내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당했던 납치, 거슬러 올라가 부모님의 죽음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여기에 백 회장의 병까지 꾸며낸 짓이란 게 밝혀졌으니 이건 의심의 영역을 벗어났다. 밑판까지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이나 다름없었다.
“하……,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는 백 회장의 눈이 붉어졌다. 수십 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유산을 차지하려 했다니. 그 더러운 욕망에 치가 다 떨렸다. 희생당한 건 결국 제 가장 소중한 가족들이 아닌가. 거기에 하나뿐인 손자를 노리고 마지막엔 자신까지. 큰 사업을 벌이고 이끌어오면서 돈 때문에 악행을 벌이는 자들이야 심심치 않게 보아왔지만, 이토록 오래, 티 나지 않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 줄이야. 하긴, 백 회장 일가를 노리려면 이 정도 공은 들여야 했겠지만 말이다.
“할아버님, 물 좀 드세요.”
소란이 물잔을 가만히 내밀었고, 백 회장은 심호흡하며 이를 마셨다. 차분한 강호와 소란을 보자 자신이 흥분할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병이야 아까 장 박사나 병원이 의심스러워 알게 됐다고 해도, 내 약은 어떻게 구한 게야.”
강호와 소란이 모든 걸 다 알아내고, 뒤에서 치밀하게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중이란 걸 깨달은 백 회장이 물었다.
“혹시 홍 선생이냐.”
“네, 맞습니다.”
백 회장의 팔에 약한 전율이 일었다. 홍 선생은 강호가 제 건강을 걱정하며 보양식 전담으로 보낸 사람이다.
“그러니까 보양식 때문이 아니라…….”
강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들을 살피기 위해 미리 심어둔 것이다. 백 회장은 치료 중이라는 사실을 손자에게 숨기기 위해 병원에서 본가까지 007작전에 가깝게 재빨리 움직여야 했는데, 그날 뒤따라왔던 강호는 순순히 물러나는 듯 보였다. 잘 따돌렸다고 생각했지만, 한 발 물러선 강호는 홍 선생을 고용하고 할아버지의 곁에 붙여둔 것이다. 이건 일부일 뿐, 아마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있겠지. 백 회장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부모를 잃고도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제 품에 안겼던 아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강호가 장성하여 스스로 지켜낼 힘을 길렀다니, 어쩌면 이대로 눈을 감았더라도 여한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강호의 존재는 백 회장의 가슴을 빈틈없이 꽉 채워주었다. 고맙고, 고마운 나의 아기. 나의 손자. 내 아들의, 귀한 아들.
“그래, 그래…….”
벅찬 감정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 백 회장이 입을 열었다.
“뭐든 하마. 내가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전부 다 할 테니, 말만 하렴.”
박 여사고 누구고 당장에 잡아다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손자를 보니 그 뒤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이다. 백 회장은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강호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했다.
“우선, 저희가 허락받을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다 얘기해라. 뭐든지.”
강호와 소란을 향한 백 회장의 믿음은 지금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후, 손을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사람들처럼 꽉 잡은 손에 백 회장의 시선이 닿았다. 손자 내외의 금실이 좋은 거야 익히 알고 있고 더없이 흐뭇한 일이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소란이와 저, 이혼하겠습니다.”
“……허락해주세요, 할아버님.”
다정하게 잡은 손과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두 사람 모두 동의한 듯 너무나도 당연하단 목소리로 번갈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백 회장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이혼?”
이혼이 언제부터 이렇게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단어였던가. 아무래도 강호와 소란은 다른 뜻이 있는 게 분명했다. ◇ ◆ ◇ 박 여사가 진상 때문에 소란을 몰래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박후만이 음주운전을 하고 사고를 내지 않았더라면. 또한 박후만이 욕심을 내어 건물을 올려받고 팔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들의 덜미가 잡히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사건이 다 벌어진 후 늦게서야 알게 되었든가. 강호와 소란이 아무리 의심하고 다가섰다고 한들, 건물 때문에 박후만과 박 여사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았거나 태석이 박후만의 뒤를 파지 않았더라면 진실에 다가서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나비 효과. 어이없게도 박후만과 박 여사가 해댄 아주 작은 날갯짓이 풍파를 몰고 오는 중이다. 한 달여가 흐른 후. 박 여사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뭐……?”
놀라서 되물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진짜인가 싶었다.
“백강호랑 우소란이 정말 이혼했단 말이에요?”
- 네, 오늘로써 서류 절차까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느니, 급기야 따로 살기 시작했다느니, 이혼할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진짜로 이혼할 줄이야.
- 방금 백강호가 본가에 다녀갔고, 회장님께선 길길이 날뛰시다가 혈압이 크게 올라 안정을 취하는 중이십니다. 충격을 크게 받으신 것 같습니다.
백 회장의 수족과도 다름없는 구형익 비서를 포섭해둔 건 정말 잘한 일이다. 구 비서를 협박하기 위해, 외국에 나가 있는 그의 딸과 아내 주변에 사람을 두고 인질 삼아 위협하느라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늘처럼 백 회장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구 비서에게만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최근 한 달여 간 얻은 정보가 꽤 쏠쏠했다. 이런 알짜정보들이 있기에 박 여사는 다음 일들을 착착 해나갈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처음에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억지로 협조하던 구 비서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일에 가담하는 중이다. 박 여사가 막대한 성공보수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평생 남 밑에서만 일했던 구 비서가 어디서 그런 돈을 만져보겠는가. 제시한 금액에 눈먼 구 비서는 아예 발 벗고 나섰다. 구 비서는 박 여사의 계획 중 남은 일을 실행에 옮겨줄 인력들을 섭외하고 총괄하고 있다. 참 믿음직스럽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알 만큼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달리 백 회장이 오랜 시간 끼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런 구 비서가 이제는 제 편이라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동생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고 있어 믿고 의지할 데도 없어진 박 여사로서는 구 비서가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렇듯 돈만 있다면 세상을 제 손바닥에 두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박 여사는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들 진상은 저보다 더 큰 돈을 쥐고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수고했어요. 백강호 공장 건도 새로운 소식 생기는 대로 바로 알려줘요. 한시가 급하니까.”
- 네, 그러겠습니다.
보고를 받은 후 박 여사는 전화를 끊었다.
“아니, 그 난리를 치면서 결혼한 게 언젠데 벌써 이혼을 해. 참 나.”
어이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박 여사의 입가엔 미소가 맴돌았다. 내 아들 가슴에 대못을 박고 가서 얼마나 잘 사나 보자 했더니, 결국 이혼했다. 생각할수록 고소해서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