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천사가 내려와 해주는 말2021.09.25.
집으로 돌아온 강호와 소란의 화이트보드에는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되었다. 지금까진 전혀 연관성을 생각지 못했던, 성준의 식당 사건까지 함께였다. 한밤중 아무도 없는 상가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니,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는 아니다. 상가 화재 사건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소란이 입을 열었다.
“백진상이랑 헤어지게 하려고, 고작 그러려고 벌인 일이었을까요, 정말?”
“‘고작’이라니. 재미로 불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긴.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악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대놓고 반대하지. 그냥 헤어지라고 했어도 됐을 걸 어떻게 뒤에서 그런 짓까지 하죠.”
그 사고 때문에 힘들었던 생각을 하면 치가 떨렸다. 얼마나 절망하고 또 절망했었는데, 다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 머리가 얼마나 썩었으면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여자가, 아들 심기는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지.”
이제 숙모도 아닌 ‘그 여자’다. 강호에겐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여동생도 그러긴 했어요. 그 엄마가 백진상에게 일부러 여자를 붙이기도 했었다고.”
“그래, 그런 사람이야.”
“후우…….”
모르긴 해도, 이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엄청난 집안인 모양이다. 아까 태석이 얘기했다. 박 여사의 친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의 큰동생이 운영하는 비밀기업에 대해서도. 그런 집에서 자란 그녀 역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선 남의 목숨이나 재산 정도는 우습게 해치우는 사람이다. 주변도 마찬가지니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겠지.
“우리 부모님 사건이 조금 의아했는데, 그때부터 그 여자의 친정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겠어.”
설마 했던 일들을 하나씩 확인해나가니 의문이 풀리는 동시에 입속은 더욱 썼다. 정작 지금 진행될 수사에서 박 여사는 멀리 떨어져 있다. 비밀기업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그녀의 존재가 드러나진 않을 터다. 그녀의 죄는 강호의 집과 맞물려 있었다. 이건 일부러 끄집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안 그러면 묻혀버릴 것이고, 그렇기에 강호와 소란이 이를 악물고 다가서는 중이다.
“잘되겠죠. 아니, 잘되게 할 거예요, 우리가.”
소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목숨을 건 일에 실패가 있어선 안 된다.
“이리 와.”
숨을 길게 내쉰 강호가 품을 열었다. 복잡한 눈빛으로 서 있던 소란이 이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안겨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한데 섞이자 언제나처럼 숨통이 트였다.
“그래, 잘되게 할 거야, 우리가.”
나직한 음성에 고개를 끄덕인 소란이 아직 남은 걱정 하나도 조심스레 확신으로 바꾸었다.
“할아버님도, 괜찮으실 거고요.”
그래, 당연하지.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강호가 작게 대답하며 제 품에 안은 소란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 ◆ ◇ 주말 아침. 아니, 새벽에 가까운 시간. 일찌감치 출발하자며 강호와 소란이 본가에 들렀다. 세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다. 강호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는 소란이, 뒷좌석에는 백 회장이 탔다.
“할아버님,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없다. 다 좋구나.”
“일찍 서두르셔서 시장하시죠?”
소란이 살갑게 살피는 소리에 백 회장은 궁금증 반, 투정 반을 섞어 물었다.
“아직 괜찮다만, 얼마나 맛있는 걸 먹으려기에 아침도 거르게 하는 게냐.”
“일단 눈 좀 붙이세요. 가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요.”
강호가 대답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본가 대문 앞에 서 있던 구 비서가 떠나는 차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사이드미러로 보였다.
“구 비서님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있었네요.”
“그 사람이야 내가 깨어 있는 시간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백 회장이 오래도록 믿어온 사람이다.
“여기도 따라오겠다는 걸 말렸다. 구 비서가 따라와 수발들면 너희야 편하겠지만, 여행 느낌은 안 날 테니.”
“잘하셨어요. 저희만 가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강호는 소란과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출발.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다. ◇ ◆ ◇
“여, 여기가 어디냐.”
잠에서 깬 백 회장이 소란의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리다가 한 건물을 보곤 깜짝 놀라 물었다. 호텔, 아니면 식당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호텔로도, 식당으로도 보이진 않았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지에 지어진 커다란 건물 앞이다.
“같이 들어가요, 할아버지.”
“어, 어딘데.”
“병원입니다.”
“병원?”
커다란 건물에는 간판조차 없었다. 게다가 인적도 드문 곳으로 보였고, 누가 이런 곳에 와서 진료를 받는단 말인가.
“이호재단에서 VVIP 대상으로 운영하는 병원입니다. 극비로 검사나 진료를 받는 경우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에요. 보안과 비밀 보장은 확실하니, ……할아버지. 저희랑 같이 들어가세요.”
강호가 조용히 설명했다. 그제야 백 회장이 밭은 숨을 토해냈다.
“내 병을 알고 있던 게냐.”
“네.”
알지만 믿지 않았다. 그래서 강호는 이번 여행을 준비했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어떤지,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 ◆ ◇ 얼마 전 일이다. 지난번 병원에서 주치의 장 박사가 보인 모습,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느껴진 수상한 낌새. 그날 강호는 일부러 본가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병실이 아닌 집에 계신 할아버지를 제 눈으로 확인하긴 했지만 의심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분명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강호는 계 박사를 은밀히 찾아갔다.
“저한테는 사실대로 말씀해주세요. 제가 꼭 알아야 할 얘기, 있지 않습니까.”
흐으음, 길게 한숨을 내쉰 계 박사가 어렵게 입을 뗐다.
“백가가 너한테 자기 입으로 얘기한다, 얘기한다, 했던 게 언제인데. 아직도 말을 못 해 이리 끙끙 앓고 있을꼬. 결국 네가 먼저 눈치를 채고 왔구나.”
안타까운 음성으로 이어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폐선암, 4기란다.”
누구보다 건강하다고 믿었던 할아버지가, 투병 중이었다니.
“신변을 다 정리할 때까진 말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더구나. 그게 작년이었으니 그사이 네 결혼도 서두르고, 네 애비 꿈이었던 집도 지어주고, 백가가 무척 바쁘게 지냈었다.”
“하아……, 어떻게 그렇게 편찮으시도록, 제가 그것도 모르고…….”
할아버지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에 강호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겼다. 따로 나와 살았던 데다가 방문이나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던 제가 원망스러웠다. 결국 말도 안 될 정도로 결혼을 종용하고 우기던 것까지 전부, 백 회장이 삶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탓하지 말아라. 그런 건 아무 소용 없는 일이야. 폐선암이라는 게, 원래 초기 증상이 없고 진행이 어느 정도 된 후에도 일반 호흡기질환이랑 별 차이가 없어서 진단이 아주 어려운 병이야. 그마저도 백가가 기존에 약하게 앓던 질환과 증상이 겹쳐서, 폐선암 쪽은 장 박사도 생각 못 했던 게지.”
계 박사의 말에 커다란 슬픔의 해일에 휩쓸렸던 강호의 이성이 천천히 제자리를 되찾았다. 장 박사. ……장 박사, 라.
“그나마 장 박사가 백가를 이만큼 잘 케어했으니 상태가 크게 악화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거 아니겠니. 백가가 이 사실 밝히고 싶지 않아 해서, 장 박사 그 친구도 비밀 지켜가며 특별 진료하느라 꽤 고생인 모양이더구나.”
“……그러니까 검사도, 진료도 지금 장 박사님이 맡아주고 계시다는 거죠.”
“그래. 마침 장 박사 분야니 다행이지 뭐냐.”
하필 폐선암인 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강호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그길로 소란에게 달려갔다. 일하던 그녀를 주차장으로 불러 차 안에서 사실부터 전했고 소란은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할아버님, 어, 어떡하죠…….”
백 회장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제게 처음부터 따뜻하게 건네주시던 말씀, 다정한 웃음, 든든한 지지, 그 모든 것이 너무도 귀한데, 할아버지를 빨리 보내드릴 순 없었다. 강호가 결혼하길 그토록 바라셨던 분이다. 둘이서 정말 잘 사는 모습도 계속 보여드려야 하고, 좋은 곳 모셔가 좋은 음식 함께 먹고, 많이 웃게도 해드리고, 나중엔 아기가 크는 모습도 꼭 보셔야 하는데…….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어.”
슬픔에 잠긴 소란에게 강호는 더없이 냉철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타깃이 나라면, 그다음은 할아버지야. 상속자를 없앤 후 할아버지까지 제거하는 게 완성인 거지.”
소란의 머릿속 피도 돌연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그럼 할아버님을 병환이 있는 것으로 꾸며서…….”
“그래. 몇 달에 걸쳐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거야. 할아버지의 죽음을 설계하는 게 사고를 내는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우니까.”
강호는 제 선에서 일을 막는 것에만 신경 썼다. 그런데 그쪽에선 할아버지에 대해 미리 손을 써둔 것이다. 연세가 높으신 분이 스스로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면 더욱더 나약해질 게 분명하다. 게다가 실제 죽음에 이르도록 무슨 짓을 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적당한 시기에 죽음이 할아버지를 먹어치우도록, 차근차근 준비해나갔겠지. 사람이 어쩜 이렇게 치밀하고 근성 있게 악랄한 걸까. 이 모든 걸 미리 파악하지 못했더라면, 강호와 소란은 언제 어떤 사고로 생을 마감했을지 모르며, 백 회장은 꼼짝없이 병으로 숨을 거두었을지 모른다. 그게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이. 대외적으로 꼭 집어 이상한 점을 찾을 수도 없을 테지. 그저 한 집안에 연이어 닥친 불행 정도로 보일 것이다. 유산은 당연히, 물이 깔때기 속으로 모여 들어가듯 백진상의 집안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고. 참으로 끔찍하다.
“작정하고 꾸몄다면, 어디서부터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주치의를 매수했을 테니 그쪽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그 전에 가장 중요한 게 있어.”
소란이 알았다는 듯 숨을 삼키고 대답했다.
“네, 우선 할아버님의 상태부터 살펴봐야겠죠. 저희 쪽에서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그래, 준비해야겠어.”
말이 통해 더없이 좋다는 듯 강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위험한 이 결혼에 그녀를 끌어들이게 되어 미안하지만, 지금 제 곁에 소란이 있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힘이다. 그녀가 없었으면 견딜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걸 버텨낼 수 있었을까. 아니, 장담할 수 없다. 강호는 그녀의 어깨를 당겨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
숨 쉬는 순간마다. 모든 순간 영원히, 너를, 너무 사랑해. 불안함을 단숨에 덮어버릴 묵직한 사랑의 기운이 그들 위로 가득하였다. ◇ ◆ ◇ 의전을 위해 나온 병원 관계자들과 함께, 강호와 소란, 백 회장은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여러 통로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다른 일행과는 절대 맞닥뜨릴 수 없는 구조였다. 병실 내 커다란 창을 통해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풍경이었다.
“이런 곳은 또 어찌 찾은 게야.”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에도 주식이 곤두박질치는 위치에 계신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던데요. 이런 곳도 모르시고, 주식 시장에서 할아버질 내놓으셨나 봅니다.”
“예끼, 나 일할 땐 이런 거 없었다, 이놈아.”
“여긴 할아버지가 현역에 계실 때부터 이미 있었…….”
“고얀 놈, 언제 이리 말대꾸가 늘었어.”
농담까지 주고받는 백 회장과 강호를 보며 소란도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차라리 이번 일은 악랄한 이들의 계략인 편이 낫다. 할아버지가 정말 병에 걸린 것보다는. 아무렴. 그걸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악행이길 바라기는 또 처음인 듯하다.
“뭐 하러 이 먼 곳까지 날 데려와 검사를 또 받게 해. 어차피 우리나라 호흡기내과 명의가 바로 장 박사인데.”
“한 번만 저한테 져주시고, 그냥 여기서 검사 받아주세요. 손주 소원입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잠시 대기하던 백 회장은 검사를 위해 의료진과 함께 병실을 떠났다. 특수한 목적의 병원인 만큼 동선이나 절차가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금세 진행될 것이다. 둘만 남은 병실. 강호는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내내 괜찮아 보이던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본 소란이 천천히 다가갔다. 옆에 가서 보니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다. 상처 입고 쫓기는 짐승처럼 애처로운 눈물이, 차마 떨어지지도 못하고 눈 안에 맺혀 있었다. 마법의 말을 돌려주기로 한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소란은 그를 당겨 안았다. 토닥, 토닥, 토닥.
“다 잘될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반짝임이 흩뿌려진다. 희망의 말, 사랑의 공기는 빛을 타고 가만히 퍼져나간다. 잠시 후,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백 회장은 고단한 잠에 빠져 있었다. 종일 이어진 검사를 위해 내내 공복을 유지한 터라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얼마나 오래 잠들었을까. 정신이 든 백 회장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목이 탔다. 물을 달라고 해보려는데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 손을 잡았다. 강호였다. 기다렸다는 듯 물이 든 컵을 입으로 가져오는 이는, 소란이고. 예쁘기 그지없는 손주와 손주며느리는 언제 잠에서 깰지 모를 제 곁을 내내 지키고 있었나 보다. 백 회장의 코가 찡해졌다. 이 아이들을 두고 눈을 감을 생각을 하니 스스로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리만치 삶에 미련이 생긴다. 아직은, 조금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언제 떠나도 떠나겠지만, 그래도 그게 당장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강호가 등을 받쳐주고 소란이 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후우, 단 숨을 내쉬는 백 회장의 귓가에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소란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할아버님. 폐선암…….”
“…….”
“아니시래요.”
잘못 들었나 했다. 어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해주는 말은 아닌가 싶다.
“건강하시대요. 너무너무, ……건강하시대요, 할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