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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또 하나의 공통점 (93/112)

#93화. 또 하나의 공통점2021.09.21.

“박후만. 강호의 당숙모 박후길, 그 사람 동생이야.”

소란은 진상의 어머니 이름은 알지도 못했고 알 생각도 없었다. 강호는 당숙모 이름이야 알았지만, 건물 매도자 법인의 대표 이름을 알 일이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상속과 유산, 화재 사건에 집중했기에 뜬금없이 건물 매입 건에 신경 쓸 일도 없었다. 태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법인 대표의 이름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품고 있다. 분명 여기에 뭔가 있다.

  ◇ ◆ ◇ 몇 시간 전, 태석은 검찰청 앞에 서 있었다. ‘굳이’ 박 남매 끄나풀들을 털고 있는 자. 저도 얼마나 거대한 줄기 끝을 붙든 건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자. 그는 또 서윤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 검, 혹시 저쪽에…… 마태석이지?”

점심시간에 맞춰 찾아온 그를 보며, 서윤과 함께 나오던 동료들이 물었다.

“정말 둘이 사귀는 거야?”

“소문이 자자하던데.”

“일을 죽어라 하면서 틈틈이 연애까지 하고, 한 검 대단해.”

서윤은 뚱하게 대답했다.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비밀 연애를 누가 대놓고 하나.”

“그것도 마태석이랑.”

많은 이의 관심을 끄는 마태석이다. 친분이 없는 자들조차 건너 건너 그를 알 정도로 태석은 집안이나 스펙, 제 능력 등 모든 걸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런 태석과 몰래 연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다. 그러니까, ……연애하는 거 정말 아닌데.

“마태석이 알면 기분 나쁘겠어요.”

쟨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인데.

“감추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그 집안이 좀 넘사벽이긴 하잖아. 알지? 이번에 마태석 아버지…….”

“한서윤!”

서윤을 발견한 태석이 팔을 흔들며 웃었다. 그녀의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우리 이제 좀 그만 봐도 되는 거 아닌가?”

한정식집 개별 룸에 앉은 서윤은 메뉴를 주문하자마자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태석이 오지 않았다면 일하면서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때우려고 했던 점심이다.

“와, 한서윤. 매정하네. 받을 정보 다 받았다 이거지?”

“애초에 네 목적도 그거였잖아. 박후만 잘 챙겨주기.”

태석은 그래서 저를 찾아왔고 박후만을 잡아들이는 것은 물론,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관련된 일에까지 도움을 준 것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학부 시절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지금도 마주하니 여전히 좋아하는구나 깨닫게 되어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그걸로 끝이다. 서윤이 더 바라는 건 없었다. 관계의 발전이야 그럴 생각도, 그럴 가능성도 없으니까. 가까이 앉아 있지만 마태석은 여전히 먼 하늘의 별이다. 손에 쥘 수 없는 존재.

“내가 박후만 안 빼먹고 야무지게 잡아 처넣을 건데. 그거 말고 혹시 정보 제공에 대한 다른 대가가 필요한 거야?”

“대가?”

“너무 비싸면 곤란해. 알다시피 난 그럴 돈은 없어서.”

“대가라…….”

태석이 생각지도 못한 보석을 발견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건 일단 킵.”

서윤이 괜히 찝찝해 바라보는데, 태석은 싱글싱글 웃으며 서류를 잔뜩 꺼냈다.

“마지막으로, 이것 좀 확인해줘.”

“이게 뭔데.”

“박후만 업체에서 이런 것도 했더라고. 부당하게 취득한 건물 가지고 장난질을 좀 쳤던데. 이번에 매도한 건물은 개발 계획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시세를 올려 팔았더라고. 가지가지 했어.”

그건 박후만이 한 짓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놓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혐의에 넣을 게 아주 풍년이네.”

서윤은 본능적으로 눈빛을 번뜩이며 태석이 물어다 준 것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 ◆ ◇ 점심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온 태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윤의 전화를 받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박후만 누나가 누구라고?”

  꼬리를 붙들고 흔들었더니 엉뚱한 몸통이 튀어나왔다.  

- 백강호의 당숙모.

“백진상 어머니라는 말이야?”

  관계가 그렇게 연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후만의 가족관계를 알아보긴 했다. 위로 누나 하나와 형이 둘 있고, 대부분 형들과 관련된 일뿐이라 시집가서 장성한 자녀를 두고 조용히 사는 누나 쪽으론 신경 쓸 새도 없었다. 이름을 안다 해도 그게 백진상의 어머니요, 백강호의 당숙모인 것까지 파내진 못했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 그런데 좀 이상해서. 백강호의 할아버지가 백화푸드의 백무영 회장이지? 그분이 건물을 매입해서 손주며느리에게 준 걸로 나오는데, 그 정도 되는 양반이 개발 계획이 있단 말에 속아서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샀다는 게 말이 돼?

  서윤이 의아해하며 이어 물었다.  

- 그만큼 돈이 있으면 사고 싶은 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사나? 알아보려면 백번도 알아볼 수 있는 사안인데 무턱대고 매입했을 리는 없고. 백강호와는 친척이라면 친척이잖아. 물론 박후만 쪽은 대부분 대리인한테 맡겨서 처리하니, 신경 안 쓴다고 치면 누구한테 팔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백 회장 쪽은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상대가 누군지 백 회장은 알고 샀을 거라는 게 서윤의 의견이다.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고. 미심쩍은 부분이 가득한 건물 매입 건에 대하여 결국 태석은 강호와 소란을 불러 말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이유였다.

“그 사람, 박후길 씨 동생이야. 박후길 씨가 누구냐면, 강호의 당숙모. 백진상의 어머니 말이야.”

소란은 놀랐지만 천천히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간 골치 아프게 굴던 건물주 법인이 박 여사의 동생 소유였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박 여사와는 상관없는 일일 수 있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강호와 소란은 박 여사에 대해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다. 무엇 하나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이쪽에서 장난질을 좀 쳤어. 헛소문으로 시세를 올려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팔았거든. 여기에 강호 할아버님께서 사기에 가깝게 당하신 셈인데…….”

태석은 말끝을 흐렸다. 그럴 리가 없는 분 아닌가, 하는 말이 생략되었다. 강호 역시 눈썹을 살짝 구겼다. 그건 할아버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희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란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전에 할아버님께서 식당에 찾아오셨다는 얘길 듣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셨다고 했다. 그때의 방문으로 소란의 엄마가 강호 부모님과 이웃이었고, 그 화재에서 강호를 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소식 때문에, 애초에 할아버지가 왜 식당을 찾았는지에 대해선 까맣게 잊었다.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은데.”

강호가 서늘한 음성으로 내뱉는 말에 소란이 불현듯 생각난 사실에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화재.”

식당에서 불이 나 소란과 성준이 금전적으로 곤란을 겪어야 했던 바로 그 화재.

“설마 그것도 혹시, 연관이 있을까요?”

“어쩌면.”

붙잡은 끈에서 또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 ◆ ◇ 백 회장 본가. 소란을 옆에 태운 강호의 차가 부드럽게 멈추었다. 아까 태석이 이상한 듯 물었다.  

“화재?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형까지 알 건 없고.”

  강호가 덧붙였다.  

“일단, 고마워. 요즘 검사랑 사귄다더니, 수사 관련 정보 들은 걸 막 뿌리고 다녀도 되나?”

“누가 무슨 정보를 뿌렸다고. 너희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얘기……, 근데 내가 검사랑 사귄다고?”

“한서윤 선배님이요. 한 검사님이랑 사귄다고 다들 얘기하던데요.”

“란이란이 너까지, 그게 아니라, 걔는…….”

“잘 어울려. 잘해봐.”

  태석의 핑크빛 소문인지, 핑크빛 연애인지 모를 것을 일단 뒤로하고 두 사람이 온 곳은 본가였다. 할아버지에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두 사람은 대놓고 박 여사와 임대 법인과의 관계를 아는지, 그걸 알고 매입한 것인지 물어보진 않을 생각이다. 백 회장의 주변으로도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하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들어가자.”

숨을 깊게 내쉰 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내가 오늘 꿈을 아주 좋게 꾸었더니, 너희를 보는구나.”

백 회장은 흐뭇한 얼굴에 연신 웃음을 머금었다. 갑자기 들른 손주 내외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한 듯 보였다.

“할아버님, 얼굴이 수척해지셨어요. 아까 식사도 많이 못 하시던데요.”

“아니다, 많이 먹었다. 늙은이는 신경 쓰지 말고 너희 건강이나 잘 챙겨. 일하느라 바쁘지?”

백 회장은 소란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바쁘긴요. 놀면서 일하는데요. 할아버님이 저 건물주 만들어주셔서 막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요.”

“예이, 능청은.”

소란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백 회장을 향해 강호가 싱긋 웃으며 입을 뗐다.

“할아버지, 사기당하신 것 같던데요.”

“뭐? 사기?”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백 회장을 보며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연히 말하면 사기가 아니긴 합니다. 건물 매입은 제대로 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바가지를 좀 쓰신 것 같긴 한데. 그 건물이요. 이전 건물주였던 법인이 개발 계획에 대한 헛소문을 고의로 흘려 시세를 올려 팔았다고, 곧 수사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때 강호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백 회장의 입가에 찰나 스치는 미소를.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인상을 쓰며 백 회장은 노발대발했다.

“바가지를 씌워? 아니, 그런 고얀 놈이 다 있단 말이냐? 지저분하게 돈놀이하는 것들은 싹 다 용암에 처넣어야 하는 것을, 아이고, 내가 그런 놈에게 당했다니.”

일단 할아버지는 연기에 소질은 없으신 것 같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분노 연기에 강호와 소란은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진정하세요.”

“너무 흥분하시면 안 돼요. 수사한다고 하니 곧 잘못한 일들이 다 밝혀질 거예요.”

백 회장이 애써 화를 삭이는 듯 숨을 내쉬었다.

“수사는 제대로 한다고 하지? 관련된 사람들 싹 다 잡아들이는 거 맞지?”

역시다. 알면서도 당해준 건, 덜미를 잡기 위해서였다. 소란은 좋은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옆에 있는 강호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피는 속일 수 없던 것이다.

“우리 손주며느리 건물에 관련해선 아주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야. 내가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거니, 어떤 피해 사실이 있는지 지난 일까지 싹 다 쓸어내야 해.”

백 회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박 여사가 동생을 내세워 건물을 사고, 진상 때문에 일부러 화재를 내어 곤란을 겪게 했음을 백 회장 역시 짐작하고 있었단 걸 확인했다. 언제고 문제가 불거질 것을 기대하여 그 건물을 매입했던 것이다. 마치 덫을 파고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 백 회장 덕분에 동생과 박 여사의 연결 고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그들이 ‘화재’를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에도 확신을 얻었다. 백 회장은 아직 유산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까진 모르는 눈치지만, 이것만으로도 그 끝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강호와 소란이 확실히 알 수 있게 됐다. 지금 하는 준비에 한 치의 흔들림도 있어선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강호는 멀찌감치 주방 쪽에 서 있는 홍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눈만 지그시 내렸다 들었다. 강호가 할아버지의 보양식 조리를 위해 일부러 본가에 보내둔 사람이다. 시선을 옮기자 소파 끝에 서 있던 구 비서가 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매우 찰나, 본능적인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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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는 백 회장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주말에 저희랑 여행 가시죠.”

“여행?”

백 회장이 기쁘면서도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미 말을 맞춘 소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할아버님. 이제 날도 따뜻해졌겠다, 경치 좋은 곳에서 바람도 좀 쐬고, 맛있는 것도 드시고 오시면 좋을 것 같아요.”

“너희들이나 가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지, 다 늙은 나랑 뭐 하러…….”

“할아버님 안 가시면 저희도 안 가요.”

소란이 애교 있게 웃었다.

“모시는 분들 쉬시라고 하고, 강호 씨랑 할아버님, 저, 셋이서 바다 보이는 곳에 다녀와요. 네?”

백 회장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그러자, 가 아니라 고맙다, 였다. 정말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처럼 손주 내외를 보는 눈빛이 절절하고 애틋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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