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빙산의 일각 (92/112)

#92화. 빙산의 일각2021.09.18.

“한번 꽂힌 건 죽어도 끝까지 파야 하는 놈인데, 말릴 수 있나.”

찬규의 말에 나린은 쯧쯧, 혀를 차고는 이내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다. 노후한 공장에 꽂힌 강호에게 답답한 것도 잠시,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화면 속에는 성준이 있다. ‘준의 부엌’에선 나오지 않았던 얼굴까지 그대로 담은 영상은 전문가들의 촬영과 편집으로 완벽한 퀄리티였다. 한 컷, 한 컷이 그냥 CF 촬영 현장이나 다름없다. 촬영 감독이 모니터를 바라보다 몇 번이고 히야, 캬아, 내뱉는 감탄사는 나린도 옆에서 똑똑히 들었다. 내 새끼 칭찬받는 것처럼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다. 티저만으로도 반응이 이토록 들썩거리는데, 첫 번째 영상이 공개되고 나면 얼마나 더 핫해질까. 성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준의 부엌’ 구독자들은 일제히 춤을 출 기세였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얼굴까지’ 잘생긴 성준이 지금껏 쌓아온 기존 영상과 레시피가 거듭 공유되었다. 구독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비욘드 더 테이블’의 새 기획 세트 선주문량도 폭발하는 중이다. 그야말로 대박이다. 미소 띤 채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는 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찬규가 덧붙였다.

“한번 꽂힌 건 죽어도 파야 하는 놈이 백강호만은 아니네.”

열무 아빠를 향한 열무 엄마의 눈에선 내내 하트가 뿅뿅 뿜어져 나온다. 그 모습이 낯설기도, 소름 돋기도 한 찬규는 조용히 팔뚝을 문질렀다.

“엄연히, 일하는 중이거든.”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나린이 답했다.

“영상 공개 오늘 저녁인데, 그 전에 잘못된 거 없나 확인하는 것뿐이야.”

세상 도도한 얼굴로 말하면 뭐 하나.

“지금까지 한 백만 번은 본 것 같은데, 너무 꼼꼼하게 체크하는 거 아니십니까.”

“꼼꼼해서 나쁠 것 없잖아?”

남편을 향한 덕질에는 출구가 없다. 나린은 찬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다시 화면 속 영상을 돌려 보았다. 찬규는 저걸 어떻게 말리겠냐는 듯 조용히 서후 사진첩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기 사진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고 베스트 컷을 셀렉트하여 보관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라도 하나 만들어야지 싶다. 이쪽은 또 이쪽대로 아들 덕질에 한창. 강호 없는 강호 집무실. 평화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 ◆ ◇ 박 여사는 미소 띤 얼굴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명품 매장이 줄지어 선 거리 안쪽에서, 머지않아 매물로 나올 예정이라는 빌딩 하나를 둘러보는 중이다. 위치며 외관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내 박 여사는 건물이 보이는 골목 한쪽에 주차된 제 차로 돌아갔다.

“사모님, 제가 화장실이 급해서 잠시 실례 좀.”

기다리던 기사의 말에 박 여사는 인상을 찡그리며 갔다 오라고 손짓했다. 혼자 남은 그녀는 차에 들어가 앉아선 차창으로 보이는 건물에 시선을 두었다. 보고 있자니 기분이 마냥 좋아진다. 그녀는 매물 정보를 알려준 지인 우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임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견제하며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도움이 되는 구석이 있을 줄이야.

“나 지금 자기가 말했던 빌딩 왔는데.”

- 정말 관심 있는 거야?

“그래. 정확히 언제 내놓는대?”

- 시기는 미정인데 안 사장이 조만간 정리한다는 리스트에 들어 있는 건 확실해.

우 여사의 지인이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알짜들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했다. 시장에 나오기 전에 채어야 할 물건이라면서 넌지시 하던 이야기였다. 박 여사는 역시 정보가 힘이란 사실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게 곧 내 건물, 아니, 진상에게 줄 건물이 될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떨렸다.

- 그런데 자기가 무슨 돈이 있어서? 우리 그이가 요즘 백 사장 회사 사정 별로 안 좋다고 그러던데.

우 여사의 바늘 침 같은 음성이 그녀를 쿡 찔렀다. 잘 나가다가 꼭 살살 건드리니 마음에 들 리가 없지. 박 여사는 마뜩잖았지만 애써 참았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야 도가 텄으니 부드럽고 살가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알잖아, 우리 친정. 내 앞으로 일찌감치 챙겨주신 것도 좀 있고, 내 동생들도 누나 걱정 얼마나 하는지. 괜찮다고 해도 그렇게 신경을 써주네. 말마따나 우리 남편 사정 안 좋으니까 나도 돈 틀어쥐고만 있을 게 아니라 이런 쪽 잘 알아봐놔야지.”

- 하긴, 자기야 워낙 야무지게 잘하니까.

호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매물이 너무 일찍 나와도 걱정이긴 하다. 박 여사 수중엔 막대한 잔금을 치를 돈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빌딩 덩어리가 크니 계약금과 중개료, 세금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일단 어떻게든 끌어모으면 그 정도는 충당할 수 있지만, 잔금까지 치르려면…….

‘한 달. 아니, 두 달. 그 안에는 끝내야지.’

일을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합법적으로 제 집안에 흘러들어올 돈. 그걸로 저 빌딩 하나쯤은 구멍가게 하나를 사들이는 것보다도 쉬울 것이다. 그뿐일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칠 터. 일단 눈에 보이는 좋은 기회부터 잡아두고, 남은 일을 도모해야겠지.

- 하여튼 이건 내가 돈만 있었으면 얘기 안 했을 텐데. 시세에 비해 임대료도 높은데 세입자들까지 안정적이고. 아까워 정말.

“자기한텐 너무 고마워. 안 사장 매물 정리할 때 꼭 연락 달라고 해야 해. 나 간 보는 거 아니고 확실하게 등기 칠 마음 있으니까.”

- 알았어.

전화를 끊은 박 여사는 제가 너무 안달한 티를 냈나 싶었다.

“됐어, 우스운 꼴 보이면 어때. 돈이 얼마인데.”

이건 다 자식을 위해서다. 진상에게 물려줄 재산 중에 저 빌딩이 포함된다면, 일하지 않아도 고정수입은 빵빵하게 챙길 수 있을 거고 추후 상승할 건물 가치는 덤이나 마찬가지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녹는 기분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막냇동생 박후만의 전화인 것을 확인한 박 여사는 여유롭게 받았다. 동생은 무척 다급한 목소리였다.

- 누나, 나까지 들어가게 생겼어.

“뭔 소리야.”

- 후성이 형은 이미 소환받았고, 다음은 나라고.

둘째가? 박 여사의 머리가 멍해졌다.

“네가 왜 들어가. 아니, 후성인 또 왜.”

이건 큰동생 박후영이 물려받아 운영 중인 회사에 관련한 일이다. 지난번에 후영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앓는 소릴 하긴 했지만 박 여사는 별로 걱정하진 않았다. 그쪽에 연루된 권력자가 어디 하나둘인가. 알아서 다 뒤를 봐줄 거고, 파헤치는 것도 결국 시늉뿐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첫째도 아니고, 왜 둘째, 셋째부터 불려들어간단 말인가. 안심하던 쪽에서 기습을 당한 기분이라 당황하고 말았다. 사실 둘째, 셋째가 하던 일이 더 문제긴 했다. 다만 잔챙이에 불과해 건드리지도 않을 줄 알았고, 그래서 지저분한 일들은 모두 동생들 선에서 처리하도록 해왔었다는데. 그런 까닭으로 둘째, 셋째를 건드리는 게 더 위험했다. 만져봐야 귀찮고 손만 가는 진흙탕을 부득불 헤치는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잘 해결될 거야. 너무 수선떨지 마. 어차피 후영이 한두 번 불렀다가 풀어주고 그러면서 일하고 있다 티 내려는 거니까.”

박 여사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첫째의 회사에 그녀가 직접 관련된 건 없다. 하지만 친정이 무너지면 저도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 힘을 빌어다가 지금의 일을 진행하는 중이니, 최소한 마무리될 때까지는 견뎌줘야만 했다. 만에 하나 저와 연루된 일이 털려 나올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 아니야, 이번에 진짜 작정하고 덤비는 것 같아. 아니, 나랑 후성이 형을 왜 터냐고, 왜.

박 여사는 침이 바짝 말랐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이 심각한 상황에 저건 또 뭔가. 바깥에 심술궂은 얼굴을 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뭐라 뭐라 삿대질을 해댔다. 아무래도 여기 주차를 왜 했냐고 성질을 내는 것 같다. 고급 빌라 출입구 쪽인데, 이 빌라의 경비원인 듯했다. 이 와중에 전화기 속에 막냇동생 후만은 절벽에 매달린 듯 다급하게 말하는 중이다. 통화에 집중하기도 벅차건만 대체 화장실에 간 운전기사는 언제 돌아오는 것인지 짜증이 치밀었다.

“후만아, 잠깐만 이따가 내가 다시…….”

- 지금 이것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어! 누나도 정신 좀 차리라고. 지금 그 일 계속 벌일 때가 아니라니까!

“그게 아니라, 내 차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비원은 들고 있던 경고문에 무언가를 척척 바르더니 앞 차창에 떡하니 붙여버렸다. 아악, 저건 강력접착제! 박 여사가 차창을 내려 따지려고 할 때 저 멀리 화장실에 갔던 운전기사가 “안 돼!” 하고 외치며 뛰었다. 그러다가 돌멩이에 걸렸는지 푹 넘어지기까지 한다. 경비원은 기사에게 다가가 아까 차 빼라고 했더니 여태 안 빼고 뭐 했냐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박 여사는 성질이 나서 밖으로 나왔다. 감히 내 차에 경고문을 붙여? 예의도 교양도 없는 불법주차, 지옥으로 썩 꺼져버려. 경고문 자체가 강력했다. 시뻘건 글씨가 정말 지옥 소환장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열불이 다 뻗쳤다.

“아니, 그렇다고 이걸 이렇게 붙이면 어떡해? 이것도 다 고소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박 여사는 짜증이 나서 중얼거리며 경고문을 휙 떼어내려고 했지만 역시 강력접착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우!”

저만치서 운전기사와 경비원은 싸우고 있고, 떨어지지 않는 경고문을 떼어내다가 손톱까지 부러져버렸다. 혹시 이 동네 터가 안 좋은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 ◆ ◇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될 무렵, 소란은 태석의 부름을 받고 대표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갔다.

“선배님, 저 왔습니다.”

“어, 앉아.”

일부러 부르기까지 했으니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했다.

“아아, 별건 아니고.”

태석은 소파에 앉은 소란에게 커피를 내려다 주곤 손목시계를 보았다. 소란은 그가 커피를 두 잔 더 내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가 또 오나. 그때 문이 열렸다.

“사람을 왜 오라 가라 해.”

들어선 사람은 강호다. 남편을 본 소란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환해졌다.

“강호 씨, 여긴 웬일이에요?”

“내가 불렀어.”

태석이 강호 몫으로 미리 내린 커피를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호는 소란의 옆으로 다가와 머리카락을 귀 뒤에 넘겨주었다.

“피곤한가, 눈이 좀 빨간데.”

“괜찮아요. 모니터를 너무 오래 봐서 그래.”

“좀 쉬어야지. 집에 가서 찜질해야겠다.”

“좋아요. 그 팥 넣은 주머니…….”

“둘이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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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부부의 깨소금 볶는 대화를 듣던 태석이 멀뚱히 서 있다 말고 물었다.

“여기 내 사무실이거든.”

“하하, 네.”

소란이 머쓱하게 웃으며 강호와 나란히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태석은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애정을 드러내는 소란과 강호가 신기할 정도다. 이런 게 연기일 수 있나. 배우도 아닌데, 일반인끼리?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계약서 파일을 본 후로 두 사람의 결혼은 가짜란 걸 알았고, 소란이 덜 힘들게 해주고 싶어 기회를 보려고 했다. 만약 소란이 헤어지고 싶다면 헤어질 수 있게 돕고,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해줄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제가 왜 ‘기회’를 봐야겠다고만 했는지 알 것 같다. 소란을 이성으로 보고 사랑했더라면, 계약서에 눈이 뒤집혀 당장 이혼부터 하게끔 모든 수를 썼을 것 같은데 자신은 지나치게 신사적이었다. 소란이 상처받지 않길 바랐던 것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남자 대 여자로서 그녀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그저 소란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어떤 힘든 일이든 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다. 지금 눈앞의 두 사람은 너무나도 다정해 보였다.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게다가 두 사람을 마주 바라보는 지금, 태석은 그렇게까지 마음이 쓰리고 아프진 않았다. 여동생 부부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오빠의 심정이 이런 걸까.

“두 사람, 사이좋네.”

“나빠야 해?”

까칠하게 되묻는 강호의 눈빛에서 아직 적대감이 읽혔다. 워워, 그럴 것 없어. 태석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아니, 누가 나빠야 한댔나. 보기 좋다는 거지.”

다만 가짜라는 건 아직 좀 신경이 쓰인다. 태석이 소란을 아끼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괜히 힘든 상황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 것이다.

“두 사람 계속 좋았으면 해서. 절대 헤어지지 말고.”

“형 걱정이나 해.”

강호가 가시를 바짝 세웠다. 태석은 오히려 안심했다.

“일단 두 사람을 오늘 부른 이유는.”

태석은 책상에서 서류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얼마 전 강호 할아버지께서 소란이네 식당이 있는 건물을 매입해 증여해주셨다며. 매도자는 한 법인이고, 일 처리는 대리인이 해서 대표는 서류상으로만 접했고.”

“그걸 다 어떻게 아세요?”

지금 태석이 말한 건 빙산의 일각이다.

“박후만.”

법인 대표의 이름이 태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사람, 박후길 씨 동생이야. 박후길 씨가 누구냐면, 강호의 당숙모. 백진상의 어머니 말이야.”

뜻밖의 끈이 이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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