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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부부의 설계 (91/112)

#91화. 부부의 설계2021.09.14.

“그러니까 이혼이니 뭐니,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집어치우고.”

“…….”

“키스해줘요.”

강호는 심장이 멎을 듯했다. 소란은 생각보다 더 강했고, 더 아름다웠으며, 더 현명했다. 마음이 끌려 사랑한 여자가 단단하게 엮인 운명이었던 데다가 근사한 사람이기까지 하니, 목숨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강호는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겨우 짧게 내쉬었다.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사람. 너는 내 삶이고, 내 숨이고, 내 모든 것이야.

“키스하면, 그걸로 끝내진 않을 건데.”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목이 졸리는 기분도, 칼끝이 턱 아래를 찌르는 듯한 느낌도, 물속에 세차게 처박히는 기분도, 전부 아득하게 멀어진다. 생이 끝나도, 세상이 무너져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녀 역시 애틋하게 깊어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 역시, 끝까지 가는 게 좋아요.”

당신과 함께라면. 아픔이 가득한 생의 한가운데서도, 위험이 도사리는 전장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 역시 사랑뿐이다. 겹친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섞였다.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소란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익숙한 손길에 옷가지가 떨어져 내리는 동안 새삼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서로를 보는 눈빛은 언제나처럼 뜨거웠고, 도무지 식을 리 없는 사랑에 애절함까지 더해졌다. 모든 걸 걸고 지키겠다는 마음이 작은 틈에까지 깊이 배어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하나였다. 젖은 손을 꽉 잡고 수없이 아찔한 고지를 넘는 동안, 두 사람은 아주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영원의 세계가 존재하길 바랐다. 그 안에 갇힐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불꽃처럼 터지는 절정 속에서 애타게 소망했다. 위험도, 불안도, 녹일 만큼 뜨거운 사랑만이 가득한 밤이다. ◇ ◆ ◇ 해가 제법 길어진 늦겨울. 소란은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로 영상 하나를 확인하는 중이다. 아까도 봤지만, 보고 또 봐도 마음이 뿌듯하기만 했다. 바로 강호와 나린의 회사 ‘비욘드 더 테이블’의 새로운 기획 티저 영상이다. 기획을 대표하는 여러 명의 셰프 가운데 한식 가정식 분야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성준이다. 편안한 니트에 정갈한 앞치마를 두르고, 화면을 향해 제법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은 눈부시기만 했다. 이토록 빛나는 사람인데. 그 빛을 이제야 세상에 드러냈다는 생각에 소란의 코끝이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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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나 다를까, 뜬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영상을 두고 연희가 부랴부랴 전화를 걸어왔다.

- 성준 오빠 진짜 난리 났네. 반응 봤어?

“싹 다 챙겨 봤지.”

- 너무 좋다, 잘됐어, 정말.

연희가 기뻐할 정도니 소란의 마음은 오죽할까. 이제야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아기도 태어날 예정인 데다, 일까지 잘 풀리니 정말 다행이다. 게다가 소란이 건물을 인수하면서 식당 운영에 대한 걱정도 상당 부분 덜었다. 성준과 나린 쪽으론 모든 게 평화로웠다. 현재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소란으로선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어, 연희야. 내가 나중에 다시 할게.”

전화를 끊은 소란은 인터폰으로 다가가 화면을 확인했다.

- 찾아뵙기로 한 배민숙이라고 합니다.

“네, 들어오세요.”

문 열림 버튼을 눌러주고 현관까지 마중 나가 기다리자, 정원 끝에서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란은 다가온 여인을 맞이하며 안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소란을 따라 다이닝룸에 도착해 권하는 자리에 앉은 여인이 서류를 꺼냈다. 도우미 자리를 소개받아 온 사람이다. 집안일을 봐주는 가정관리팀에 공석이 생겨 인력을 충원한다는 말에 강호는 직접 사람을 추천하겠다고 했다. 먼저 면접을 보고 괜찮으면 가정관리팀에 연결해주기로 하고 오늘 자리를 만든 것이다. 다만 강호는 다른 일을 보러 가야 했기에 소란 혼자 면접을 보기로 했다. 서류를 적당히 살핀 소란은 입을 열었다. 사실 면접만이 목적은 아니다.

“워낙 이 일을 오래 하셨고 깔끔하게 잘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이 자리는 형식적으로나마 얼굴 뵙자고 마련한 거고, 가사팀에는 바로 연락드릴 테니 일정 조율해서 합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휴, 감사합니다.”

“사실은.”

소란이 입술을 떼자, 일자리를 바로 구해 얼굴이 밝아진 여인이 귀를 기울였다.

“전에 일하시던 댁이 저희 남편 친척 어르신 댁이었어요.”

“어머.”

강호의 대고모 집에서 일하던 도우미였다. 부부의 사망에 관해서는 특이점이 없었기에 조사가 빠르게 종결되었다. 모든 일 처리가 지나치게 깔끔하여 오히려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마치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착착 움직이는 것처럼. 그러던 중 일자리를 잃은 도우미가 새로운 근무처를 알아본다는 것을 알고 강호가 자리를 제안했다. 그렇게 닿은 인연이다.

“일하시던 댁 안주인이 남편의 고모할머니세요. 여사님께서 그 댁에서 오랫동안 일하셨다고 들었는데, 일자리를 새로 구하신다는 걸 알고 모신 거예요.”

“그런 줄도 모르고. 아휴, 감사해서 어쩐대요. 안 그래도 많이 곤란하던 차였거든요. 빚이 있어서 다달이 상환해야 하는 돈이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돼서…….”

여인은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분들 두고 내가 너무 내 걱정만 하는 것 같아 염치가 없지만, 다른 데 갈 곳도 마땅치 않았거든요. 워낙 보수를 후하게 쳐주셔서 그걸로 원금도 갚고 생활도 하고 했던지라, 그보다 더 적게 받으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러셨군요.”

“좋은 분들이셨어요. 당신들 생활은 참말로 정갈하고 검소하게 꾸리시면서, 제 월급 하나는 어찌나 정성스럽게 챙겨주시던지. 어려울 때마다 도움도 참 많이 받았더랬죠. 오래오래 일해달라 하셨는데…….”

내외의 죽음이 아직 가슴에 박힌 듯 마음 아파하는 얼굴이다. 오랜 시간 가까운 곳에서 집안일을 돌보았으니 가족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소란은 슬퍼하는 여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살살 두드리며 위로를 나누었다.

“그런데 김치냉장고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었길래 폭발했다는 거예요?”

“아, 그거.”

살림에 대해선 아마도 대고모보다 여인이 더 많이 알 터다. 역시 여인은 술술 말을 이었다.

“그 브랜드 초기에 바로 사셨으니까 15년은 됐을 거예요. 이제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고장 한번 안 나는 걸 뭐 하러 바꾸냐 하시고. 성능은 나쁘지 않아서 이제껏 쓰시던 거죠.”

“다른 곳에서 폭발 사고가 또 있었다고도 하던데요.”

“저도 얘길 듣긴 했는데 진짜 그런 화재가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아무래도 자기 일이 아니고는 실감할 수 없으니까요.”

소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그 집의 일을 봐주던 이조차 화재 사건의 이면을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가 막히게 설계를 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빈틈이 어디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때 여인이 덧붙였다.

“그렇다고 점검 다녀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폭발까지 하다니. 하필 다 주무시는 새벽에 그러는 통에 대처도 제대로 못 하고……. 너무 안타까워요.”

“……점검 다녀갔어요? 김치냉장고 회사에서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한마디도 소란의 그물엔 확 걸려들었다.

“네, 다녀갔죠.”

“신청하셨던 거예요?”

“신청은 안 했는데, 생전 나오지도 않던 정기점검을 와서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연식이 오래된 제품을 대상으로 서비스 형식으로 하는 거라고.”

드디어 건져 올렸다. 나이가 제법 있는 여인도, 대고모 내외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렌털 관리도 아닌데, 이미 판매가 끝난 제품을 상대로 어느 회사가 정기점검을 해준단 말인가. 그것도 15년 전에 구매한 고객 정보를 가지고, 서비스 신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연락이 왔다, 라.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마침 잘됐다 했죠. 점검 와서 어디가 안 좋다 하면 사모님께 좀 바꾸시라고 말씀드릴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점검하러 온 양반들이 여기저기 살피더니 아주 튼튼하다고 하대요. 5년은 더 쓰겠다면서, 자기네 회사가 물건을 참 잘 만든다고요.”

자신만만했던 제품이 폭발까지 하다니. 여인은 기가 찰 노릇이라 했지만 애초에 그들은 해당 회사 직원들도 아니었을 터다.

“연락처 아직 있으세요? 점검 다녀간 지 얼마 안 되었다면 얼굴도 기억하시죠?”

“얼굴까진 기억 안 나요.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했었으니까. 나도 그 와중에 그네들 얼굴 뚫어지게 봤던 것도 아니고.”

“그렇군요.”

“처음 전화도 사모님 댁 유선으로 와서 번호가 남아 있진 않고, 아, 서비스 점검 후에 주고 간 명함은 있어요.”

여인은 얼른 휴대전화를 열었다.

“내가 명함 같은 건 다 사진으로 찍어놓거든요. 자, 여기.”

회사 로고까지 박힌 진짜 서비스센터 직원의 명함이다. 소란은 여인이 보여준 명함 사진을 제 휴대전화로 다시 찍었다. ◇ ◆ ◇ 확인하니 명함은 가짜였다. 당연한 일이다. 전화번호도 가짜, 이름도 가짜였다. 다시 전화를 걸 일은 거의 없으니 점검 다녀간 후에도 그들이 가짜였다는 건 알지 못한 모양이다.

“연식이 오래된 가전이 집에 있다는 것까지 알고 사고를 만든 거라면, 그 전에도 집에 침입한 적이 있었던 거겠죠?”

“그랬겠지. 어쩌면 수도 없이 들어가 파악했을지 모르고.”

밤늦게 돌아온 강호를 맞이한 소란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얘기했다. 짐작했던 일이 사실로 굳어졌을 뿐이지만 묵직하게 받은 충격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결국 대고모 내외도 살해당한 것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고로 가장하여.

“타운하우스 출입구 쪽 CCTV로 차량 번호 확인하고, 유선전화 통화목록도 살피면 일에 가담한 자들은 쉽게 찾아낼 수 있어요. 이거, 수사 요청해야 해요.”

“끄나풀을 찾아 그들을 사주한 이를 잡는다. 단순하고도 명확한 방법이긴 해.”

“그런데요?”

“지금은 안 통할 거야.”

강호가 단언했다. 그렇게 끝낼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30년에 걸쳐 이어온 작업이다. 순순히 잡혀들어갈 상대는 절대 아닐 것이다. 빠져나갈 방법까지 다 마련해두었겠지.

“설령 잡혀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게 진짜 배후는 아닐 거고.”

“……그러면 어떡하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결국 타깃은 나야.”

강호의 굳건한 시선엔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끼가 될 수 있는 것도, 나란 소리야.”

“미끼?”

번지는 불길을 잡는 것이 아니라, 불덩이를 등에 지고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가겠다는 말인가. 소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하지 마요. 위험한 건 하지 마.”

“너 두고 위험한 짓 안 해. 대신 끝은 꼭 봐야만 하는 싸움이야. 미끼를 무는 놈이 누구인지 보려면 낚싯대를 던져야겠지. 그냥 품에 안고만 있으면 결국 아무것도 잡을 수 없어.”

미끼라 하기에 그는 너무 강인했고 담대했다. 단숨에 상대를 먹어치울 것처럼 눈빛이 형형했다. 소란은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생각했어요?”

“일단 내 생각엔…….”

설계는 그쪽만 하는 게 아니다. 이쪽도 그럴 능력 정도는 충분히 가진 인재들이다. ◇ ◆ ◇

“그런데 백강호는? 오늘도 출근 안 한 거야?”

강호 없는 강호의 집무실. 아침부터 나린과 찬규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전마다 강호의 집무실에 들러 참견하던 일과는 주인이 없어도 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의 행방을 묻는 나린에게 찬규가 넌 그것도 모르냐는 듯 답했다.

“바로 의천시에 출장 갔잖아.”

“저번에 얘기했던 공장에 간 거야, 또?”

“그렇지. 요즘 거기 완전 꽂혔으니까.”

나린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거 별로라니까 걔 진짜 왜 그런대? 다 쓰러져가는 공장이잖아. 보수하느라 피, 땀, 눈물 흘리느니 차라리 새로 지으라니까. 하아, 애가 안 그런 것 같은데 가끔 보면 미련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답답해 죽겠네.”

“한번 꽂힌 건 죽어도 끝까지 파야 하는 놈인데, 말릴 수 있나.”

서울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의천시에 나온 공장 매물을 살피러 하루가 멀게 출장을 가는 강호였다. 모두가 반대해도 강호는 반드시 그 공장을 매입할 예정이다. 부부의 설계는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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