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니라는 말이 듣고 싶었어2021.09.11.
“진상아,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지? 그래, 너 마음 편하면 됐다. 끼니 거르지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엄마? 엄마는 잘 지내지. 그럼, 그럼.”
휴대전화를 붙든 채 다정하게 말하던 박 여사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번 주엔 돌아올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진상의 여행은 길어질 모양이다. 하루라도 빨리 와주었으면 좋겠지만 여행으로 마음이 회복된다면 그게 어딘가 싶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아직 소란을 떠올리면 열이 뻗쳤다. 귀한 내 아들 어디 유학이라도 갔으면 이해하겠다만, 고작 여자 하나 잊겠다고 해외에 나갔으니 이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그년부터 어떻게 처리할 걸 그랬나.”
홧김에 중얼거리다가 얼른 이성을 찾았다.
“아니지,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이제껏 오랜 시간 공들여온 일을 잠깐 눈이 뒤집혀 망칠 수는 없지. 한두 해 버틴 게 아니지 않은가. 아니꼽고 치사해도 일단은 참아야 했다. 안 그래도 지금 일이 잘되어가니까.
“진상 엄마! 뭐 해. 얼른 이쪽으로 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백 사장이 그녀를 불렀다. 이곳은 장례식장. 시고모 내외는 자식이 없어, 상주는 양가 조카들이다. 백 사장은 그중 한 명으로, 이쪽 일가 조문객을 챙겼다. 박 여사는 서둘러 남편 곁으로 가서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강호와 소란도 도착했다. 백 회장 쪽으로부터 강호의 비서에게로 소식이 전해졌고, 강호는 소란과 함께 집에 들러 의복을 갖추고서 장례식장을 찾은 길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한 마음으로 달려온 사람들 사이에서 강호와 소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 회장은 놀라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 했고 저녁에야 올 예정이라 들었다. 조문을 마친 소란의 시선이 백 사장과 박 여사에게 가서 닿았다. 지우고, 다 지우고, 이내 남은 곳으로 뻗친 줄기 하나가 거기 있다. 합리적인 의심. 이 정도면 이득을 얻을 자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다.
◇ ◆ ◇ 조문은 평범했다. 갑작스러운 사고사라는 점만 빼곤 다들 덤덤히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부부의 죽음이다. 나란히 사망한 데다 자녀가 없으니 가장 가까운 데서 챙기는 유가족은 아무도 없는 셈이다. 그저 가깝지만 먼 친척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 두 사람의 사고사에 의문을 품고 깊게 파고드는 이는 전혀 없단 의미이다. 강호는 백 회장의 상태가 어떤지 구 비서와 통화하기 위해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백 회장이 자택에 누워 수액을 맞는 중이며 지금은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홍 선생님께서 내일 오전부터 가실 예정입니다. 그분이 준비해주시는 요리로 식사하시면 되는데, 집사님께는 일정 말씀드렸으니 구 비서님께서도 잘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구 비서의 대답을 듣고서 강호는 전화를 끊었다. 홍 선생은 강호가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모신 보양요리 전문가로, 이제 매일 오전 본가로 출근할 예정이다. 백 회장은 유난을 떤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강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지금 그에겐 꼭 필요한 일이다. 안으로 들어오려던 강호는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멈추어 섰다.
“어쩌겠어. 누가 그런 사고를 피할 수 있다고.”
“뉴스에서나 봤지, 진짜 주변에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직접적 사인에 대해 묻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어 아직 정확한 사고 내용을 듣진 못했다. 워낙 경황이 없어 빨리 달려오는 길이기에, 자세한 건 따로 알아보게 해두었다. 노숙자의 가족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 인력을 쓴 참이다. 앞으로 알아볼 일이 많아서였는데 곧바로 또 일을 맡기게 될 줄은 몰랐다. 아직은 보고를 받기 전이라 강호도 대고모의 정확한 사인은 몰랐다. 조금 전 장례식장 안에서 보았던 이들은 들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검소한 양반들이라 해도, 무슨 김치냉장고를 그렇게까지 오래 써서 사달이 나나, 나길. 쯧쯧.”
“안됐어. 자다가 봉변이라니.”
“이러니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인 거지. 어휴, 씁쓸하니 마음이 안 좋네.”
김치냉장고, 사달, 봉변. 나온 단어들을 머릿속에 넣은 강호는 주차해둔 차로 걸어갔다. 운전석에 앉아 일을 맡긴 이에게 전화했다.
“정확한 사인이 뭐였습니까.”
- 가정 내 오래된 가전제품의 폭발로 인한 화재 사고였다고 합니다. 새벽인 데다가 아파트 같은 공동 주거공간이 아니고 대지가 넓은 타운하우스라, 화재가 일어난 사실을 이웃에서 알았을 땐 이미 늦어서 부부가 사망한 후였습니다.
오래된 가전제품. 그리고 화재. 아까 흡연 구역에서 사람들이 한 말이 맞았다.
- 해당 가전은 김치냉장고였는데 문제가 된 연도에 제작된 제품이라고 합니다. 현재 화재 조사 중이지만 사고 내용이 워낙 명확해 금세 종결될 분위기입니다.
매우 그럴듯하게 짜인 스토리다. 게다가 오래된 가전을 쓴다는 건 대고모 부부의 성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졌기에, 저절로 일어난 화재가 아니란 사실은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누가 봐도 안타까운 사고 정도로 치부할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강호의 눈엔 다르게 보였다. 32년 전 부모가 당한 화재 사고. 17년 전 제가 당한 화재 사고. 그리고 현재, 대고모 부부가 당한 화재 사고. 남들은 연결점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역시 의심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이젠 다르다. 이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오랜 기간 설계된 일이 분명했다. 화살표는 한쪽을 명확히 가리켰다. 일을 꾸미는 데 한창인 그쪽에선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계속 모르게 해야만 한다. 턱밑까지 차오른 물에 숨이 다 막혔지만, 덜미를 잡으려면 견뎌야 했다. ◇ ◆ ◇
“강호가 잘해주나 보네. 얼굴이 아주 좋아졌어.”
사람 없는 틈에 다가와 박 여사가 건네는 말에 소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왕래가 잦지 않은 사이라 해도 친척인 이상 만날 일이 생기곤 하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박 여사는 톡톡, 소란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얼굴 펴.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난 예전 일 다 잊고 집안 어른으로서 좋은 마음만 가지고 있는데.”
“엄마. 거기서 뭐 해?”
소란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진혜가 쑥 나타났다. 네가 왜 끼어드냐는 얼굴로 박 여사가 돌아보는데, 진혜가 픽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되게 웃긴 거 알지? 그냥 적당히 모른 척하는 게 좋은 거야. 이 언니 붙들고 억지로 몇 마디 섞으면, 백진상이 진상이 아니라, 엄마가 진상이라고.”
“뭐어? 너 그게 무슨…….”
제 엄마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진혜가 폭탄 제거반이 되어 나서주었다. 누가 뭐라 해도 타격감 따위 전혀 못 느낄 것 같은 박 여사가 딸의 도발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걸 보니 자식이 특별한 존재긴 한가 보다.
“여기 있지 말고 아빠 쪽으로 가자. 괜히 얼굴 맞대고 불편한 사람끼리 있어서 뭐 해.”
진혜는 박 여사를 끌고 백 사장이 있는 쪽으로 갔다. 남들도 다 있는 곳에서 딸에게 어쩌지는 못하고 끌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가식적인 눈인사를 건네는 박 여사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진혜를 적 아닌 적으로 돌린 것도 다 그녀가 뿌린 씨앗 중의 하나. 어쩌면 극히 일부일지 모른다. 좋든 싫든 모든 열매를 수확할 날도 머지않았다. ◇ ◆ ◇
“이로써 확실해졌네요.”
집에 돌아온 후 소란은 내내 착잡한 얼굴이었다. 이제 노트, 메모 앱도 모자라 서재의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사건의 흐름을 정리해나갔다. 하나씩 제거하고 추리다 보니 의심스러운 건 백 사장 내외뿐이다.
“강호 씨 부모님 일도 관련이 있는 건가. 어떻게 생각해요?”
“관련, 있어. 진짜 가해자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화재’를 사용했다는 건 우연일 수 없겠지.”
같은 화재라 해도 이유가 각기 달랐다. 강호의 부모는 지나가던 이의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희생되었고, 강호는 노숙자의 납치, 방화로 큰일을 겪었다. 그리고 이번에 대고모 내외는 집 안 가전제품 폭발로 인한 화재니 엄연히 방화도 아니었다. 화재로 가장하면 일단 흔적을 찾기 힘들어진다. 그것도 작정하고 꾸민 일이라면 더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유산 차지하겠다고 엄청난 일을…….”
소란은 기가 막히고 소름이 끼쳤다. 대체 죽은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백 사장인지, 박 여사인지,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아마 형제가 더 많고 관계가 복잡했더라면 시작도 하지 못했겠지.”
강호의 말이 맞다. 그나마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 긴 세월을 두고서라도 해치워 나갔겠지. 놀라울 만큼 인내심이 강하고 차분한 상대다. 절대 얕보아서는 안 되었다.
“당숙은 그럴 배포가 없을 것 같긴 한데.”
화이트보드 앞에 선 강호가 백 사장의 사진 옆에 마커로 물음표를 그려 넣었다. 의심스러운 건 아내인 박 여사 쪽이다.
“그러면 아버님 어머님 사고와는, 무관한 거 아닐까요. 아마 결혼 직후였을 것 같은데.”
갓 결혼한 새댁이 유산을 노리고 일가친척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새댁의 배후에 악랄한 친정아버지가 있었다는 건 이들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일단 두 사람이 제일 유력해. 이유나 상황은 우리가 모르는 게 더 있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모든 걸 다 울타리 안에 넣고 생각해야 해.”
어떤 것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놓치는 게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강호 씨, 사설 경호원이라도 고용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란이 조급한 마음으로 말했다. 이제 타깃은 이쪽뿐이다. 정말 유산을 노린다면, 상속자가 될 직계 혈육을 끝내 제거해야 할 테고 그 칼의 끝엔 강호가 있다.
“티 내면 안 돼. 그러면 더 위험해져.”
그래서였을까. 장례식장에서 강호는 백 사장과 박 여사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지극히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섣부른 의심도, 막연한 분노도,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는다. 그 또한 대단한 인내를 지녀야만 가능한 일이다. 수십 년에 걸쳐 설계한 일을 치밀하게 이행하는 쪽의 인내심이 더 강할까, 아니면 목이 졸리는 중에도 상대의 덜미를 잡기 위해 숨을 참는 쪽이 더 강할까. 재산과 생명의 싸움이라면 아마 승자는 후자가 아닐까. 재산을 차지하기 위함보단,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목숨보다 더 소중한 누군가를 지켜야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한 건 나뿐만이 아니라서.”
소란을 마주 바라보는 강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분노다.
“더 조심해야 하고.”
그래서 나는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참을 수도 있어. 안전하게 목줄을 쥐기 전까지. 내 모든 걸 걸고 널 지킬 거야. 강호의 심장이 불로 지진 듯 뜨겁게 타들었다. 타깃은 저 하나가 아니다. 저와 결혼하고 호적상으로도 가족이 된 여자, 눈앞에 있는 소란도 이제 그들의 목표이리라. 강호는 그 점이 가장 힘겨웠다. 사랑해서 하나가 되었고 그 기적으로 미친 듯 행복했는데, 저로 인해 소란까지 위험에 처하게 된 현실이 미치도록 괴로웠다. 어쩌면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는 길은, 이혼인지 모른다. 서류상으로 전혀 엮이지 않은 남남이 된다면 유산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는 일 따위는 겪지 않아도 되겠지.
“혹시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강호가 물었다. 애틋하고 아픈 눈빛으로.
“그 결혼, 제가 해드릴게요.”
“후회할 텐데.”
처음에도 소란이 후회할까 걱정했다. 그녀가 제 마음의 크기를 알게 된다면, 부담스럽고 버거워 도망치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감정을 누르고 사랑을 감추며 그녀와 보폭을 맞추어 걸으려 노력했다. 겨우 사랑 하나 걱정했던 시작인데, 지금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왔으니 결국 소란은 제 곁에 있게 된 걸 후회하지 않을까. 소란은 그때 했던 대답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글쎄요. 전 후회할 결정 따윈 애초에 하질 않아서요.”
마주 선 그녀의 눈은 별이 빼곡하게 박힌 듯 반짝거렸다. 강호의 심장에 그 별이 무수히 쏟아졌다. 하얗게 점멸하듯 모든 우려가 사라졌다. 그래, 아니라는 말이 듣고 싶었어. 네가 없으면 안 되는 난,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거야.
“그러니까 이혼이니 뭐니,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집어치우고.”
소란이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싸며, 매혹적인 입술을 움직였다.
“키스해줘요.”
사랑할 시간도 부족하잖아,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