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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이득을 얻는 자 (89/112)

#89화. 이득을 얻는 자2021.09.07.

“이 학원, 무슨 자금으로 차리셨어요?”

“네? 그거야 비, 빚내서…….”

“정춘기 씨가 가져다준 돈, 맞죠?”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강호를 위험에 처하게 할 목적이었다면 분명 대가를 받았을 터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그걸 확인할 방법은 요원하지만. 심증은 있으나 이렇다 할 물증이 없다. 그런 가운데 소란이 끈 하나를 잡아 올린 것이다.

“아니, 아니에요. 그, 그 사람이 무슨 돈이 있다고…….”

지금껏 제가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으니 여자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 웬 엉뚱한 소리냐는 얼굴이 아니라, 흠칫 놀라 하얗게 질린 표정이다. 소란은 여자의 앞에 앉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추궁할 생각은 없다.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

“남편이 잡혀간 후에야 사실을 알았고, 그 일이 일어난 후에 여기로 이사 오셨다고 했죠.”

“그, 그랬죠.”

“그런데 이 학원의 개업 날짜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잖아요.”

사건 후에 이사 왔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 전에 이미 교습소를 개업한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됐다. 여자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어리더니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

“그건 워, 원래 있던 원장이 개업한 날짜가 그런 거고…….”

“저 사진에는 본인이 있잖아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던 여자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은 복잡하여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나 마찬가지인 셈.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려든 여자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더듬더듬 털어놓았다.

“그게 어, 어떤 돈인지도 몰랐어요. 애아빠가 그냥 다 잘될 거라고, 마음 편히 같이 살 수 있으니, 다, 괘, 괜찮을 거라고만…….”

“그러니까 정춘기 씨가 돈을 가져왔다는 거네요.”

“……네.”

“그 돈은 ‘어떤 일’을 저지르는 대가로 받은 거고요.”

여자의 불안한 눈빛이 강호를 향했다. 애초에 여자는 이들이 저를 찾아올 거라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마냥 피할 수도 없는 피해자를 보며 두렵고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적반하장으로 소리라도 지르며 쫓아낼 심산인가 했는데, 꽉 쥔 주먹을 파르르 떨던 여자가 철퍼덕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말, ……정말 미안해요!”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였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나도, ……나도 살려면. 우리 아들 데리고 나도 살려면 어쩔 수가…… 흐흑, 미, 미안해요, 정말…….”

이미 죽은 노숙자가 대가로 받았던 돈을 쓴 사람은 가족,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였다. 진실만큼은 확인한 셈이다. 여자는 이대로 묻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끝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없다.

“그이가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고, 어차피 죗값은 자기가 다 치를 테니까 그냥 아이 데리고 살기만 하면 된다고…….”

“죗값을 다 치른 건 아니죠. 사주를 받아 계획적으로 납치하고 살해를 시도했다는 게 밝혀졌다면 형량을 좀 더 높게 받았을 테니까요.”

“저, 전 정말 제대로 아는 게 없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올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은 처연했다. 가족을 위해 범죄에 가담한 남자. 대가로 받은 돈으로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꾸린 여자.

“그 일로 이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어요.”

소란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 백강호는 지금 여기 없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하나뿐인 오빠 성준은 다리를 다치고 꿈을 잃었다. 세상의 어떤 악행이 가련한 사연만으로 이해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치졸한 핑계고 변명에 불과하다. 사람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는 거니까. 다만 여자를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 역시 이 일로 남편을 잃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분한 마음을 누르며 차분히 입술을 깨무는데, 강호가 소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이제껏 듣고만 있던 그는 예견했던 진실을 확인해 착잡했다. 더 걱정되는 건 소란의 마음이다. 제가 당했던 고통과 지금껏 겪은 트라우마보다도, 소란의 가슴에 상처가 더해지는 게 더 아프기만 했다. 그러니 괜찮다고, 나는 괜찮으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뜻을 그녀에게 전하는 수밖에.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소란이 가라앉은 눈으로 강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여자에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시죠.”

따뜻하진 않지만 정중한 음성이다.

“정말 미안하시다면, 사건 전후의 정춘기 씨에 대해 저희에게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 ◆ ◇ 노숙자였던 정춘기는 거액이 담긴 가방을 가지고 아내를 찾아왔었다고 했다. 일해서 모은 돈이고, 한 달쯤 후에 이만큼 더 가져올 거라며, 아이와 함께 멀리 이사 가서 자리 잡고 있으라고. 곧 따라가겠다고. 모든 게 이상했지만 캐묻고 싶지 않았던 건 본능이었을까. 여자는 그냥 남편의 말을 따랐다고 했다. 친정에서 나와 연고도 없는 서울 외곽에 정착해 집을 얻고 조그만 피아노 교습소를 열었단다. 다 잘될 거란 말만 믿었다. 돈을 더 가져올 거라 했던 남편은 구속되고서야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비관 자살을 하려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한 달 후엔 돈을 더 가져올 거라고, 같이 전처럼 행복하게 살자고 했었는데요.”

  죽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가져온 돈과 관련된 일이었단 걸 알 수 있었죠. 그런데 남편은 면회 중에도 그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았고요.”

“아무래도, 가족이 걱정됐겠죠.”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끝까지 숨긴 셈이다. 제게 일을 준 상대가 무서운 존재란 걸 아는 이상 배후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겠지. 만약 성공했더라면 보수를 더 받았을 터다. 그러나 그건 이미 물 건너가버렸고, 노숙자는 비밀을 지킴으로써 가족의 안전이라도 보장받고 싶었을 터다. 출소하던 날, 그는 영영 밝히지 못한 비밀을 남긴 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사고도 그 일과 관련됐을 거라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확인할 방법도 없고, 알게 된다고 해도 제가 뭘 어쩌겠어요. 어쨌든 이 학원 운영해서 아들 이만큼 키워 장가도 보내놨고, ……전 제 할 일 다 했어요. 남편도 그걸로 됐다, 할 거예요.”

  그녀에게도 죄가 없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검은돈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남편이 돈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끝내 숨기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했으니까. 그러는 동안 늘 불안 속에서 살아왔겠지. 남편이 비밀을 감추려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그 화가 언제 어떻게 제게 미칠지 몰라 두려웠을 것이다. 그때 남편을 설득해 진실을 밝히게 했다면 강호를 위험에 처하게 한 자는 잡아냈을지도 모른다. 아마 백 회장이 지구 끝까지라도 뒤져 찾아냈을 터다. 그러나 그랬더라면 정춘기는 물론 그의 가족까지 어떻게 되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보복을 당했을 수도 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저와 가족까지 죽게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라고 해도 힘든 일을, 그 누가 선뜻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죄책감과 괴로움 속에서 보낸 세월은 미약하나마 그녀가 받은 형벌인지도 모른다. 교습소를 나서 차에 탄 강호와 소란은 착잡했다.

“일단 궁금했던 건 알게 됐는데…….”

소란이 태블릿을 열어 메모 앱을 켜고 방금 정춘기 아내와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적었다. 우연이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닌, 계획적인 살해 시도였다는 건 확실해졌다. 다만 정춘기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누가 사주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정춘기의 아내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요? 누가 강호 씨를 해치려 했는지……, 비슷한 일이 있었다든가.”

“그 일 이후로는 의심스러운 사건이 없었어, 전혀.”

17년이나 지났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그때 실패한 일을 언제든 다시 해치우려 했을 텐데,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했다. 후우, 한숨을 내쉰 강호가 덧붙였다.

“이후로 잠잠한 데 이유는 두 가지겠지.”

“두 가지요?”

“하나는, 날 죽일 필요가 없어졌거나.”

그건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했다. 소란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또 하나는, ‘아직’ 죽일 필요가 없거나.”

그 말은, 언제든 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소란은 미칠 듯 답답해졌다. 실체 없는 악령이 주변을 맴도는 것처럼 상당히 찝찝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줘봐.”

강호가 소란의 태블릿을 달라고 했다. 받아들고는 빈 페이지를 열어 슥슥 써나갔다. ‘백강호가 죽음으로써 남는 것들’, ‘이득을 얻는 자’.  

“내가 죽으면, 우선 내 회사가 남겠지. 그런데 이건 17년 전 상황과는 무관해. 누군가 지금의 회사를 노리고 벌인 일은 아니라는 거야.”

“회사가 아니라면 혹시 강호 씨 앞으로 남겨질…….”

“그래, 유산.”

‘회사’를 지우고, ‘유산’을 남겼다. 그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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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호가 죽으면, 그 앞으로 올 유산이 갈 곳을 잃고 다른 주인을 찾게 된다. 그게 정해진 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액을 주고 살인을 청탁할 정도라면 남는 게 상당해야 할 텐데, 제게 남겨질 막대한 유산이 아니고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럼 강호 씨가 죽게 됨으로써 얻는 이득이 바로 그 유산이겠네요.”

“그렇겠지.”

“유산이 어디로 가게 될지 짚어보면 알 수 있겠어요.”

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 백 회장 중심으로 가족 관계 표를 그렸다. 친척이 많지 않아서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장남 백 회장 직계로는 강호뿐이고, 이미 죽은 차남 부부의 아래로는 아들 백 사장 내외와 진상, 진혜 남매가 있다. 그리고 삼녀는 슬하에 자녀 없이 부부뿐이다. 이들 중 유산을 노리는 이가 누구일까.

“설마.”

고모할머니 부부는 아니겠지. 작은할아버지 내외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백 회장의 남은 형제는 강호의 대고모뿐이다. 백 회장의 여동생이자 강호의 대고모는 조용한 성품에, 돈에는 큰 관심 없으시다고 들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모든 것조차 의심해야 할 때다. 그때 강호의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비서다. 안 그래도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바쁜 연락인가 싶어 강호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가 통화하게 두고서 소란은 가족 관계 표를 바라보았다. 사실 가장 가능성이 큰 쪽은 대고모이긴 했다. 백 회장과는 남매간으로, 강호를 제외한다면 상속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테니까. 일단 ‘유산’을 노리는 상대를 핏줄 위주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게 상식적인 선에서 이뤄지는 합리적 추측이다. 퍼즐 조각들은 하나씩 얻고 있는데 맞춰질 그림판이 보이지 않으니 이리저리 헤매는데, 강호가 받은 전화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아아……. 지금 바로 출발하죠. ……그래요. 우선 집으로 갑니다.”

그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이나 입술을 꾹 닫은 채 침묵했기에 소란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 걸까. 왜 회사가 아니라, 집으로 간다는 거지. 마침내 강호가 입을 열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모할머니 내외분이.”

“…….”

“돌아가셨대. 오늘 새벽에.”

의심했던 이들 중 두 사람이 사라졌다. 그것도 피해자가 되어. 해가 높아지고 그림자가 점점 좁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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