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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거짓말 (88/112)

#88화. 거짓말2021.09.04.

사실 태석이 음주운전자 박후만 때문에 한서윤을 만나기 시작했고, 그녀의 일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엉뚱하게도 연애 중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이다. 태석은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룸미러로 이마 위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했다.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한 행동이다. 이 일을 시작하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카페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단골이 되었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선 태석이 창가 구석 자리에 앉은 서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태블릿PC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 쏟아지는 햇살이 서윤의 머리를 스쳐 아래로 떨어진다. 잠시 멈춰 선 태석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마디로 설명할 순 없는데, 여하튼 이상했다. 만날 시간만 되면 정신없이 달려오는 것도, 자신은 이미 손을 떼어도 충분한 일에 매일 관여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상황이 전부 이상하기만 했다.

“흐음…….”

태석은 그녀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제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화면을 바라보는 서윤은 엄지손톱을 입으로 야무지게 뜯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톱을 깨무는 입술로부터 서윤의 손을 떼어냈다. 단번에 손이 잡힌 그녀가 깜짝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맛도 없는 걸 왜 자꾸 뜯어 먹냐.”

태석은 자신이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잘 정돈한 손톱 중 유독 왼쪽 엄지손톱만 엉망이다. 집중하면 손톱 하나만 내내 뜯는 버릇, 이거 고쳐야 하지 않나.

“뜯어 먹든 볶아 먹든.”

서윤이 네가 무슨 상관이냐 받아치려는데, 그 손을 잡은 그대로 태석이 옆자리에 앉았다.

“이래서 손톱이 남아나겠냐고. 어린애처럼, 쯧.”

“쯔읏?”

“그래, 쯧. 내가 이런 것까지 해줘야 하고, 요즘 여러 가지로 아주 귀찮아 죽겠다고.”

“그럼 놔.”

“보던 거나 봐. 어디까지 정리됐어? 대충 끝났지?”

“어, 내주에 소환 들어갈 것 같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엮느라 준비가 좀 오래 걸리긴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어.”

손톱을 뜯지 못하도록 여전히 서윤의 손을 꽉 잡은 채다.

“제풍에 돈을 넣어 맡기고 뒤를 봐주는 의원이 몇 명 있긴 한데, 이쪽에 엮인 문제가 워낙 많으니 알아서 꼬리 자를 거야. 난, 자르고 뒤로 빠질 수 있도록 틈을 좀 벌려줄 생각이고.”

원래는 그 의원들 때문에 난항이 예고돼 있다. 상부에서 서윤에게 자중하라 경고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검은돈이 활개 치는 바닥에 권력 쥔 자들이 빠질 리 없다. 다만 서윤은 아주 꽉 막힌 스타일은 아니다. 너구리를 잡는 굴에선 너구리만 잡는다. 멧돼지 덫은 멧돼지를 위해 따로 놓으면 된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그게 서윤이 상황을 장악하는 방식이다. 의원들이 몸을 뺄 수 있도록 풀어주고, 이번 일을 마치면 다시 꽉 조일 터다. 지금이야 한서윤이라고 별수 있나, 결국 권력에 굴종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과는 그리 순순하지 않을 것이다. 서윤은 이후까지 계산에 넣어 움직이고 있다. ‘잡아 처넣는 것’에 특화된 인재였다.

“제풍에서만 손 떼게 하려는 거구나.”

“그렇지.”

이제 뒤를 봐주는 권력이 없으니 제풍코퍼레이션은 추풍낙엽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셈이다. 그것도 갑자기 등판한 마태석 덕분에 속도가 빨라졌다. 태석의 정보력은 서윤으로선 닿지 않았던 부분까지 싹싹 긁어다 줘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불쌍하다, 그 의원들. 한서윤은 봐주는 게 아니라 뒤를 치려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모르긴, 다 알지. 알고도 하는 싸움이야, 이런 건.”

“아아, 역시 나는 그쪽 판은 정말 별로야.”

무조건 정의감만으로 악을 처단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 악을 이용해 또 다른 악을 잡고, 기회를 노려 기존의 악을 청산하는 등 복잡하고 유기적인 고리가 존재했다.

“도련님이 뭘 아시겠어. 온종일 꽃노래만 부르고 싶으시겠지.”

“정답.”

“그런데 넌 이 일에 왜 이렇게 열심이야?”

순간 태석이 멈칫했다. 왜, 라. 왜, 였더라. 서윤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손에 더운 땀이 배었다. 뭔가 찌르르 미약한 전기가 팔을 타고 올랐다. 그래, 처음엔 소란 때문이었지. 소란에게 해를 가한 음주운전자 박후만 때문에 열이 받아 눈이 빙글 돌아서. 어떻게든 엿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서윤을 찾아왔다. 그런데 과연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 소란 때문일까. 서윤에게 적당히 뜻만 전하고 대충 손을 떼었어도 됐을 텐데.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워낙 바쁘게 지내다 보니 소란을 언제 봤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데. 심지어 소란과 강호의 집들이에 갔던 날조차 만나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떠올렸다. 태석은 힘껏 달리던 트랙 위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이유도 목적도 잃어버렸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애초에 왜 달리기 시작했는지 잊어버렸다. 어느새 소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태석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니었던 걸까. 소란의 오빠와 비슷한 마음이었나. 동생처럼 사랑스럽고 예뻐서 챙겨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그런 동생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니 괜히 경계심이 들고 기분이 상하는 그런 감정?

“너는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오래 알고 지내는 동안 좋아하는 줄도 몰랐다가 나중에 깨달은 거야.”

충격에 휩싸인 태석이 옆에 있는 서윤에게 마구 털어놓았다. 물론 소란이란 부분은 빼놓고.

“그런데 실은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이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돌발적으로 들어온 연애 상담에 서윤은 어이없어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애초에 이성으로 좋아한 게 아니라 착각을 했던 거겠지.”

“애초에, 아니었다고…….”

“본인 감정도 모르는 바보가 다 있네.”

그래, 그게 나다. 태석은 혼란스러웠다. 소란을 향한 마음, 일찍 잡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강호에 대한 질투, 그 모든 게 너무나도 가볍게 사라졌다. 서윤의 말처럼, 애초에 이성으로 좋아한 게 아니었단 듯이. 햇살 아래 눈사람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져버렸다. 태석이 모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햇살 아래 놓인 눈사람이 되었는지. 그 햇살은 어디서 내려온 것인지도, 그는 아직 몰랐다.

“참고로 난, 과거는 상관없어. 보다시피 쿨해서.”

“무슨 말이야, 여기서 과거가 왜 나와.”

“넌 아는 게 뭐냐?”

서윤이 쯧쯧, 하며 그에게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거나 떼. 땀 나.”

“손톱…….”

“안 뜯을 테니까 그만 좀 놓으라고.”

그제야 태석이 손을 놓아주었고,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좀.”

간단히 일러두고 휙 돌아선 그녀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내내 차분하던 서윤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저 멍청이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 아주…….’

예전에는 태석의 주변에 워낙 사람이 넘쳐나니 제 마음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성격 좋고, 잘생기고, 훈훈하고, 만사 여유롭고, 무엇보다 주변을 항상 밝게 하는 사람이라 그를 좋아한다 공언하고 다닌 동기, 선후배도 많았으니 자신은 그 허다한 짝사랑녀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마태석은 ‘마성의 태석’이란 장난스러운 별명처럼 그냥 다들 한 번쯤은 좋아하고 지나가는 그런 상대랄까. 물론 서윤에겐 그를 마음에 품은 계기가 확실히 있긴 했지만, 서로 통하고 싶단 욕심은 내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뜻밖의 기회로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묵혀두었던 마음이 다시금 설레기도 했다. 옆에 있으면서 태석이 제 감정을 눈치챌 법도 한데 왜 몰랐을까 생각하니, 그간은 다른 사람을 품고 있던 모양이다. 예전에도 모르더니 지금도 모르고, 나아가 본인 감정까지 모른다니 저 귀여운 무지렁이를 어쩌면 좋을까. 화장실에 들어간 서윤은 세면대 앞에 서서 제 왼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지손톱, 이제 뜯지 말아야겠다. 아니지, 뜯고 있으면 또 손잡으려나.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이 아직도 뜨겁게만 느껴졌다. 범죄자들과 보내는 진흙탕 같은 나날 위로 보석 알갱이가 흩뿌려지는 기분이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며.

  ◇ ◆ ◇ 소란은 강호와 함께 그를 납치했던 이의 가족을 만나러 갔다.

“어떻게 만나겠다고 했어요?”

가는 길에 소란은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다. 남편에게 납치를 당했던 피해자를 순순히 만나려고 했을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 교차할 텐데. 그것도 다 잊고 살아가는 중일 텐데. 물론 피해자는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 끔찍한 기억이지만, 이미 가해자는 죗값을 치른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고, 실상 가족들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다.

“안 만난다고 했지. 설득했어. 가해자의 지난 잘못으로 가족을 힘들게 할 생각은 없고, 그냥 묻고 싶은 게 있어서라고.”

강호는 담담하게 말했고, 곧 납치범 아내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서울 외곽의 한 작은 도시, 납치범의 아내는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맑은 풍경 소리가 울렸고, 원생은 아무도 없는 시간인지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테이블 앞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백강호 씨?”

“네.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소란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강호를 납치한 범인이자, 어쩌면 자신을 끌고 가려 했고 성준을 다치게까지 했던 남자. 그 사람의 아내라는 사람을 마주하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얼굴이 굳어 있다. 납치범의 아들이 강호와 동갑이었다더니, 여자는 오십 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어머니뻘이다. 차를 내어온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묻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요.”

“네. 17년 전 일에 대해서요.”

“그전에, ……죄송합니다. 사과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과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그냥 죄송합니다. 저희 애아빠 때문에 많이 힘드셨을 텐데.”

꾹꾹 눌러 건네는 말에 강호는 말없이 입술을 닫았다. 괜찮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사과를 받지 않을 수도 없다. 여자의 진심은 잘 전해졌다. 껄끄러운 마음으로 잠시 침묵을 지킨 강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춘기 씨가 사업에 실패한 후 수년째 노숙 생활을 하다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그 일 전후로 정춘기 씨와 연락하거나 무슨 말을 들으신 적 없으십니까? 혹은 큰돈을 전해줬다든가.”

마지막 말에 여자의 눈빛이 흔들렸고, 소란은 기민하게 동요를 감지했다. 여자는 재빨리 어색하게 입꼬리를 늘이며 대답했다.

“아뇨, 전혀. ……애아빠는 집 나가고 연락이 끊겼어요. 저도 그런 일이 있고 나서야 상황을 알게 됐고요. 어디 가서 밥은 먹는지, 잠은 어떻게 자는지 알지도 못하고 저는 애 데리고 친정에서 고생하고……, 사는 게 아주 지옥 같았어요. 그러다가 애아빠가 죽으려던 마음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전 그 사람이 잡혀가고서야 알았어요.”

여자가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소란은 학원 내부를 훑었다. 곳곳에 스치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강호가 여자에게 질문을 더 했다.

“여기선 얼마나 사셨습니까?”

“그 일 있고 멀리 이사 왔죠. 애 데리고 원래 동네에서 어떻게 살겠어요. 애아빠가 학생을 납치해 같이 죽으려고 하다 잡혀갔다고 소문이 퍼졌는데.”

여자는 일관되게 답했다. 남편이 죽으려고 했다고. 그러니까, 학생을 살해 목적으로 납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이 죽으려 했던 것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설정값이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엇나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소란이 천천히 일어나서 벽에 걸린 액자를 향해 다가갔다. 행사 때 찍은 사진들이 보기 좋게 걸려 있다. 찬찬히 살피던 소란은 그중 지금의 피아노 교습소 개업 기념 현수막 아래, 아들로 보이는 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아주 작은 글씨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현수막 안에는 개업 연도와 날짜가 적혀 있다. 17년 전 그 사건이 있기 직전, 그러니까 보름 전 날짜였다. 이 와중에 여자는 강호 앞에서 내내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 소란이 느릿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그쪽 거짓말을 들으려고 저희가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에요.”

저만치서 낮은 음성으로 날아든 일침에 여자가 흠칫 놀라 눈썹을 올렸다. 소란이 이어 물었다.

“이 학원, 무슨 자금으로 차리셨어요?”

“네? 그거야 비, 빚내서…….”

또 거짓말. 소란은 빙빙 돌릴 틈 없이 쐐기를 박았다.

“정춘기 씨가 가져다준 돈,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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