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실마리를 찾다2021.08.31.
박 여사가 소란과 백 회장, 강호를 떠올리며 비웃는 사이 침실 문이 열렸다. 남편인 백 사장이 집에 돌아온 참이다.
“당신 아까 나간다고 하더니 안 나갔어?”
백 사장이 박 여사에게 물었고, 그녀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곧 나갈 거야.”
“요새 뭘 하고 다니는데 바쁜 거야? 사람들이랑 모임이 있는 것 같지도 않던데.”
“내가 뭘 하든.”
박 여사는 약간의 짜증이 섞인 눈초리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당신 일이나 신경 써. 이러다가 그 코딱지만 한 회사까지 날릴 판 아니야?”
“아니, 안 그래도 자금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처남한테 연락해서 자리 좀 만들라니까. 내가 만나서 얘기…….”
“지난번으로 끝내라고 했지? 후영이한테 손 벌리지 말고 제발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 내가 아주 걔 앞에서 면이 안 서.”
“내가 오죽하면 그래. 식구 좋다는 게 뭐야. 어려울 때 좀 돕고…….”
“그놈의 식구 소리, 어휴, 지겨워.”
요즘 들어 특히 남편에게 부아가 치미는 건 그 때문이다. 무능하고 한심한 건 어찌어찌 참고 살겠는데, 남의 돈마저 자기 것인 양 구는 흐리멍덩한 경제 관념이 갈수록 꼴불견이다. 가뜩이나 저는 큰동생 후영의 힘을 끌어다가 일을 도모하고 있는 와중에 자중하라는 경고까지 들었다. 그 상황이야 남편이 모르는 일이지만 남편 회사 때문에 손까지 벌리는 건 말이 안 됐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남편 때문에 박 여사는 성질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가 아니었으면 남편은 일찌감치 깡통을 찼을지 모른다. 하여튼 재산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건 대를 이어받았지. 시부모가 장남인 백 회장에게 밀려 유산을 제대로 못 챙긴 것이 아니라, 당신들 과실로 날려먹었다는 걸 박 여사 역시 은연중에 인지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명분이 없어지지 않는가. 그러니 사실을 외면한 채 백 회장을 탓하며 스스로 억울하다고 최면을 거는 것이다. 그래야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니라, 미처 못 챙긴 재산을 정당하게 되찾아오는 셈이 되니까. 모든 일엔 명분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그게 옳다고 믿고 끝까지 가는 신념까지도. 그런 의미에서 백 회장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이쪽으로 끌고 오는 데 남편은 한낱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했다. 애초에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실은 내가 널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단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절 불러 넌지시 건네던 말.
“결혼시키고 보니 네 시댁이 ‘빛 좋은 개살구’길래 걱정이 되더구나. 제법 사는 줄 알았더니만.”
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었다. 자신이 일군 재산은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딸인 후길은 유복한 집안을 고르고 골라 시집보내는 것으로 할 일을 마쳤다 생각했다. 사돈집은 막상 실상을 들여다보니 뽑기에 실패한 것처럼 부실하기만 했고, 딸을 신뢰하고 아꼈던 아버지는 뒤늦게나마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네 시백부 쪽 슬하에는 외아들뿐이고, 그마저 집에서 반대하는 여자와 나가서 살림을 차렸다고 하더라. 내 일은 잘 짜두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죽어가는 마당에도 딸을 위해 큰 그림을 그려두었다.
“그 집에 대가 끊기면 이후 유산은 방계로 넘어올 거다. 네 시부 형제 관계는 2남 1녀가 끝이니 시백부 재산을 나머지 두 집에서 나눠 먹는다고 해도 덩어리가 꽤 클 테고. 하물며 시고모 슬하엔 자녀도 없다지. 애초에 손이 귀한 가문 아니냐.”
대가 끊긴다는 건, 즉 백 회장의 아들을 제거하겠단 뜻이다. 박 여사의 아버지는 죄책감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늙은이들이 어디 가서 애를 만들어 오지 않는 한, 결국 그 집안 재산은 너희 식구에게로 다 흘러들 거란 말이다.”
그게 박 여사의 아버지가 마련해둔 장치였다. 백 회장의 재산을 차지할 이유도, 충분하다는 믿음도 함께 준 건 당연했다. 애석하게도, 자신만만했던 아버지의 말과는 일이 다르게 흘러갔지만. 사고로 가장한 화재로 인해 백 회장의 외아들 내외가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그 아기가 홀로 살아남았다. 전혀 계산하지 못했던 결과만 남겨두고, 병세가 악화된 박 여사의 아버지 역시 숨을 거두었다. 대신 딸에게는 어떤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친히 가르침을 준 셈이다. 이후 박 여사는 제 아버지의 방식을 파악해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속으로써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올 재산은 달콤한 유혹이다. 누구도 그 죽음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대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남은 건 아기뿐이니 어쩌면 더 간단한 일인지 모른다. 비인간적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작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도 가족 간에 칼부림 나는 일은 왕왕 있지 않은가. 보험금을 노린 살인이라든가 존속 간 잔인한 살해라든가. 하물며 자신은 혈연관계도 아니다. 그저 모든 걸 제자리에 ‘질서 있게’ 되돌려놓는 것뿐. 오랜 기다림 끝에 아기가 자라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시도한 일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번엔 범행에 가담한 이가 너무 소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민의 신고까지 빠르게 들어갔다. 백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직계 혈족이 아무도 없어야 유산이 방계로 넘어올 텐데 번번이 살아남는 아기가 박 여사에겐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재시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티가 나지 않도록 목표물을 제거하는 데 방화와 화재만큼 뒤처리가 깔끔한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자주 쓸 방법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라든가 살해 등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하셨다. 너무 티가 나서였다. 덜미가 잡힐 수도 있다. 어쨌든 목적은 절차대로 상속을 받는 것이니까. 다시 도 닦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이제야 막바지 작업에 이르렀다. 박 여사가 서두르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오직, 아들 진상 때문이다. 이 모든 건 자신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안전하게’ 일을 도모하여 성공적으로 진상에게 물려줄 진짜 유산을 만들어내는 데 의의가 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엄마로서’ 자신은 강하다고 믿었다. 자식이 그런 악랄한 엄마도 엄마라고 고마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합리화하고 가면을 써도 본능적으로는 제가 잘못하고 있단 걸 알기에 박 여사는 남편과 자식들에게만큼은 철저히 본 모습을 감춰왔다. 제 아내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 모르는 백 사장은 답답한 심정에 아들을 걸고넘어졌다.
“집안 상황이 이런데 진상이 놈은 계속 놀러만 다니는 거야? 한국에 언제 들어온대?”
“진상이는 왜 찾아. 애한테 더 퍼주지는 못할망정, 집안 사정 어렵다고 부담 지울 일 있어? 그러고도 아빠라고. 쯧.”
“매번 그렇게 애를 감싸고 도니까 그놈이 서른 되도록 여태 제 밥벌이도 못 하는 거 아냐.”
“당신 밥벌이나 잘해. 내 친정에 빈대 들러붙을 생각 말고.”
꼭 이런 식이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말을.”
백 사장이 어휴, 거칠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벌컥 열고 나가는데 그 앞에 딸 진혜가 있다. 민망한 듯 다시 “내가 성질이 나서 원.” 중얼거리며 휙 지나쳐 서재 쪽으로 갔다. 진혜가 침실에 있는 박 여사를 슬쩍 바라보았다.
“또 싸워?”
“싸우긴 뭘 싸워. 싸움이나 돼?”
박 여사는 마음 같아선 남편을 당장 내다 버리고 싶지만, 백 회장 재산을 끌어올 매개나 다름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백 사장과 이혼하면 다 헛수고가 되지 않나. 그러니 참는 수밖에.
“아빠 회사 그러다가 진짜 망하면 어떡하려고.”
망하면 망하는 거지. 성질이 나서 툭 내뱉으려다가 참았다.
“괜히 참견하지 말고 너는 네 일이나 알아서 해.”
“하여튼 엄마는 오빠 빼곤 다 관심 없지.”
“왜 관심이 없어. 너야 워낙 똑소리 나게 잘하니까 엄마가 걱정을 안 하는 거지.”
전혀 믿지 않는 듯 진혜가 헛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박 여사는 이미 딸에겐 신뢰를 잃은 것도 모르고 동생들을 만나 지시할 일만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 ◆ ◇ 며칠 후, 로펌.
“선배님 요즘 바쁘세요?”
태석은 오전에 할 일을 마치고 서둘러 나가다가 연희와 마주쳤다.
“얼굴 뵙기가 영 힘드네요.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요.”
“아아, 내가 요즘 좀 바쁘긴 하지.”
“뭐 도와드릴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말이라도 고맙다.”
때마침 태석의 전화가 울렸다.
“어어, 나 지금 나가. 아, 거참, 최대한 빨리 나가는 거라니까. 금방 가, 금방.”
얼른 전화를 받은 태석은 상대로부터 재촉을 받는 모양이다. 연희에게 찡긋 웃으며 인사한 태석은 통화를 계속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소란이 다가왔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다른 동료와 나오던 참이다.
“밥 먹으러 가자. 그쪽은 왜 그렇게 봐? 무슨 일 있어?”
소란은 엘리베이터 쪽을 가만히 쳐다보는 연희의 모습이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그냥 태석 선배님 요즘 뭔가 다른 것 같아서.”
“뭐가?”
“뭐라고 설명할 순 없는데, 지금도…….”
연희는 여전히 이상하단 얼굴로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 꼭 쩔쩔매는 느낌이란 말이지.”
“에이, 선배님이 왜?”
소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어떤 상황이든, 누구 앞에서든,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던 태석이 아니던가. 친절하고 자상하긴 해도 누군가에게 쩔쩔매는 일은 없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굽힐 필요 없이 살아왔던 그의 인생이 말해주듯.
“혹시 연애하시는 거 아닌가?”
동료 변호사의 말에 소란과 연희가 눈을 크게 떴다.
“연애?”
“대표님 대학 동기가 ○○지검 강력부 검사라는데, 요즘 그렇게 자주 만나신다던데? 본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야.”
“음, 일 때문에 만나는 거 아닐까?”
소란의 말에 동료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닐 거 같은데. 대표님이 일 때문에 강력부 검사 만날 일이 뭐 있어.”
하긴, 험한 일이랑은 상관없이 꽃밭에서 사는 분인데. 검사와 따로 만나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연희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강력부 검사라면 한서윤 선배님 얘기하는 건가?”
“맞아, 그런 이름이던데.”
“꺄, 대박.”
연희가 조그맣게 환호성을 지르곤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쌌다.
“왜? 왜?”
어렴풋이 그 이름을 떠올린 소란이 물었다. 네 살 위의 선배라 학교에서 볼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알고 있다. 줄곧 수석을 도맡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에, 카리스마까지 넘치는 선배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 선배님이 왜?
“예전에 한서윤 선배님이, 태석 선배님 좋아했었거든.”
“정말?”
“응, 고백은 안 한 것 같은데 눈치챈 사람 많았을걸. 워낙 태석 선배님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묻혔겠지만.”
“그럼 두 분 이제 잘되는 거야? 진짜 대박.”
“자주 만난다며. 지금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아무래도 그 선배님인 것 같고. 안 기다리게 하려는지 막 빨리 나가려고 하시던데?”
남들 썸 타는 얘기는 언제나 재밌다. 연애의 시작은 늘 설레니까.
그들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이 올 듯 말 듯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막 식당으로 들어가려는데 소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이름을 본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의 썸 얘기보다 더 설레는 건, 역시 본인의 신혼 아닐까.
“강호 씨.”
- 점심 아직이지?
지금 밥 먹으러 왔다는 얘기는 안 하기로 한다. 소중한 점심시간을 쪼개어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니까. 밤에도 보고, 아침에도 봤지만, 낮에는 더 보고 싶다. 종일 그 품에만 안겨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직이요.”
- 그럼 나랑 어디 좀 갔다가 먹자.
“어디요?”
강호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죽은 납치범, 그 가족을 찾았어.
소란이 만나고 싶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신혼도 좋지만, 엉킨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찾아낼 생각에 순간 그녀의 가슴이 뜨겁게 끓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