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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미칠 듯 좋은 순간 (86/112)

#86화. 미칠 듯 좋은 순간2021.08.28.

강호가 서랍에서 꺼낸 건 길쭉한 주얼리 박스였다.

“생일 선물.”

그가 열어 보인 박스 안에는 화이트 골드 체인에 투명하고 영롱한 빛을 뿜는 보석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단순하고 고전적이지만 언제나 통하는 마법, 빛나는 다이아몬드.

“……너무 예뻐요.”

다만 협탁 서랍 속에 들어 있었다는 건 의도가 빤했다. 태초의 모습으로만 있을 때 목에 걸어주겠다는 거다.

“이걸 한 네가 더 예쁠걸.”

근사한 저녁 식탁 앞에서 받았대도 충분히 좋았을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이토록 야릇하고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받다니. 여지없이 심장이 날뛰어댔다. 목걸이를 천천히 빼내는 손가락 끝은 절제된 움직임이 더욱 섹시해 보였고,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 내린 눈빛은 지독하게 야했다. 그가 목걸이 끝을 벌려 소란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머리카락.”

목걸이를 걸어주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올리라는 말이다. 소란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그러쥐어 위로 올렸다. 가만히 뛰는 심장 소리까지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적나라하게 움직이는 제 상체에 그의 시선이 스미듯 닿았다가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밀어 눕히고 싶은 마음을 참는 눈빛이다. 꾹 누르는 감정마저 전해졌기에 소란의 달뜬 기대마저 더욱 증폭되었다. 가늘고 차가운 줄이 목 아래 닿았다. 강호가 안듯이 손을 뒤로 돌려 목걸이를 채워주는 느낌이 간질거렸다. 맨살에 닿은 금속과 상반되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열렬했기에 소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없는 흥분감에 몸이 무척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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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마침내 목걸이를 걸어준 그의 음성이 흩어졌다. 소란은 조그맣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할아버지가 너무 큰 선물을 주셔서 곤란하긴 한데.”

강호의 입술이 말과는 다르게 가벼이 움직였다. 사실 말하는 그 자신도 알고 있다. 할아버지와 자신의 선물은 전혀 다른 유의 것임을. 그러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소란을 놀리듯 하는 말이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목걸이 너무 예쁜데요. 어떻게 돈으로 비교해요.”

“목걸이도 비싼데.”

“아……, 그러니까 목걸이도 비싸긴 한데.”

“건물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쩐지 말을 할수록 꼬이는 기분이 든다.

“건물도 너무 감사했지만 역시 강호 씨 목걸이가 더…….”

“할아버지 건물은 별로였다.”

“아니이이, 그게 아니고.”

강호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사랑스러운 너를 어떻게 두고만 볼까.

“이리 와.”

그녀를 이끌어 화장대 앞에 앉혔다. 강호의 손에 끌려 순순히 움직이긴 했지만 부끄러웠다. 거울 앞에 앉은 소란의 볼이 발그레했다. 그러나 본연의 모습으로 있는 지금이 못 견디게 어색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거울 속엔 사랑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여자가 있다. 어두운 가운데 희미한 불빛만이 무대에 퍼뜨린 간접조명처럼 퍼졌다.

“어때. 예쁘지.”

소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걸이 말고, 너.”

날 살린 너. 날 살게 하고, 날 웃게 하고, 날 사랑하게 하는 너. 강호의 입술이 어깨로 내려왔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고, 드러난 흰 목에 그는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소란은 눈을 감았다. 전율이 온몸으로 퍼졌다. ◇ ◆ ◇ 맞닿은 살결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서로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는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밀려들었다. 연신 사랑을 속삭이고, 타버릴 듯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 안고 또 안았다. 아무리 품어도 부족한 듯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아, 죽을 것 같은데.”

소란이 숨을 몰아쉬며 겨우 흘리는 말에 강호는 고개를 저었다. 죽으면 안 되지. 어떻게 널 만났는데. 수많은 말을 내뱉을 틈도 없이 연신 그녀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거센 파도처럼 몰아닥쳤다가도 단숨에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의 아래에서 소란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틈을 내어주는 강호가 버거우면서도, 완급 조절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그 때문에 소란는 그야말로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깍지를 끼어 맞잡은 손이 땀으로 젖었다. 뜨거운 숨에 섞인 소리가 터져 나오고, 아릿하게 저며오는 가슴에 사랑을 가득 품었다. 이대로 시간이 영영 멈추었으면. 부질없는 바람이 열기에 휩싸이고, 두 사람의 입술은 이 밤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찾아 깊이 탐했다. 미칠 듯 좋은 순간이다. ◇ ◆ ◇ 새벽녘. 잠에서 깬 강호가 습관처럼 손을 뻗었다. 그녀를 안으려던 손이 갈 곳을 잃었고, 빈자리를 느낀 그가 눈을 떴다. 어디 간 거지. 강호는 느릿하게 일어나 옆에 떨어진 로브를 몸에 걸치곤 침실에서 나왔다. 드레스룸과 욕실에도 기척이 없는 걸 보면 밖에 있다는 건데. 거실을 지나 복도 옆 서재로 쓰는 방문 사이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강호는 그쪽으로 향했다. 열린 문 사이 그녀가 보였다. 소란은 씻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둘둘 말고선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쓰고 있다.

“……뭐 해?”

“아, 깼어요?”

강호를 본 소란이 안 그래도 할 말이 많았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어요.”

“이상한 점?”

그가 서재로 들어와 소란에게로 갔다. 그녀가 무엇을 쓰고 있던 것인지 궁금했다. 가까이 가보니 정갈한 글씨로 무언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지난 일에 대한 정리였다. 그중 폐창고 화재사건에서의 노숙자에 동그라미, 공사장 괴한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둘 사이를 선으로 이어두었다.

“동일 인물 같아요.”

“……같은 날이라서?”

“네, 동 시간대에 움직인 사람이에요. 거리가 멀지 않았고요. 당시 절 위협했던 괴한은 잡히지 않았거든요.”

당시 폐창고 화재사건 범인은 두려움에 뛰쳐나와 경찰서로 가서 자수했다고 했다. 범인이 진술할 때 중간에 소란, 성준과의 사건이 있었다는 건 생략했다. 각기 다른 사건으로 보았기에 경찰 또한 이를 연결 짓지 못했다.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폐창고에 불을 지르고 죽으려 했던 노숙자가, 저승길 동무가 필요하다며 길 가는 남학생을 우발적으로 납치했다고 했다.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 보통 그런 경우라면 남학생을 납치하진 않죠. 중3 남학생 정도라면 이미 신체가 건장해서 성인 남성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게다가 강호 씨라면, 음……, 그때도 피지컬이 남달랐을 거고.”

실제로 그랬다. 중3인 그때 강호의 키는 이미 180에 가까웠으니까.

“그런 범행을 벌일 때 보통은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대상을 목표로 삼죠. 노인이나 어린아이, 여성과 같은.”

당시 범인의 정신이 하도 불안정해 보였기에 이성적인 판단 또한 통하지 않았다. 자수한 그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가 이루어졌고 재판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바라보는 소란의 눈엔 다르게 보였다.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이다. 이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그 말은, 누군가 강호의 목숨을 노리고 꾸민 일이란 소리다. 그때도 그런 가정이나 의심이 있긴 했지만,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 노숙자였던 범인의 의도 또한 단순하기만 했고.

“여기에 이상한 점 또 하나는.”

소란이 숨을 한 번 내쉬곤 말을 이었다.

“폐창고에서 나와 경찰서로 간 시간이 붕 뜬다는 거죠. 제가 불길을 보고 신고한 시간에 범인도 바깥으로 뛰쳐나왔을 텐데, 그길로 경찰서에 갔다면 비를 맞지 않았을 거예요. 시간이나 거리를 보았을 때.”

범인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땐 비를 쫄딱 맞은 상태였다고 했다. 강호가 이 일을 설명할 때 이야기했다. 비에 젖은 생쥐처럼 불쌍해 보이는 남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벌였는지 다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고.

“그건 바로 경찰서에 가지 않고 어딘가에 들렀다는 말이 돼요. 신고한 시간엔 천둥만 쳤었고, 비는 이후에 내렸으니까요.”

“동일 인물이라는 건, 그래서야?”

소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증거가 없으니 확정 지을 순 없어도 정황상 그래요. 그 사람은 뛰쳐나오다가 저를 보고 따라왔을 확률이 높아요. 신고하는 절 해치려고 했겠죠. 그거야말로 우발적으로.”

“결국 같은 사람이었군.”

우연이 아니다.

“계획이 어그러지는 걸 두려워해서 우발적인 범행으로 이어졌을 거예요. 그 얘기는 즉, 납치와 방화, 그로 인한 살인 시도는 ‘계획’이었다는 말이고요.”

아직은 가정일 뿐이다. 차차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 누가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 죽이려고 했다면, 그 시도가 어그러진 후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째서 조용한 것인지도. 아니, ‘아직’ 조용한 것뿐인지 모른다. ‘계획’이 맞다면, 다시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실패한 일은 다시 시도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때 그 사람은 그대로 구속됐다고 했죠?”

“그렇지.”

“징역을 살고 나와서는 비명횡사했다고요?”

“그래, 출소한 날 바로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들었어.”

“그 사람 신원 확인할 수 있죠? 가족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까요?”

이제 그 ‘누군가’를 찾아야 할 때다. ◇ ◆ ◇ 박 여사의 집.

“뭐라고? 우소란? 하……. 어제 그랬단 말이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박 여사는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통화를 마친 후엔 더욱 커다란 한숨을 토해냈다.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우소란한테 그 건물을 줬다니.”

박 여사로선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애초에 소란을 진상에게서 떨어뜨리려고 꾸며낸 계책이었다. 막냇동생 박후만을 시켜 소란 오빠의 식당이 있는 건물을 매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밤중 화재를 내어 그 일로 최대한 압박을 가했다.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 한가하게 연애질이나 하진 않을 테니 친히 발등에 불을 떨어뜨려준 것이다. 그 식당이 남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박 여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아니, 목숨처럼 소중한 삶의 터전이라는 걸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니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잔인하게 이용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에도 바쁜 인생을 만들어주면 진상과 관계를 이어나가긴 어렵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면 사이가 소원해져 자연스레 헤어지리라 확신했다. 나서서 대놓고 갈라놓는 것보다 훨씬 돈도 품도 많이 들지만, 아들 진상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일이 제 뜻대로 흘러가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제 아들 진상이 정신없이 바쁜 소란을 이후로도 계속 따라다닌다는 건 박 여사의 계산에 없었다.

“그년이 뭐라고…….”

간과한 게 있었다. 애초에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도 없는 사이였다. 소란은 처음부터 진상을 향한 마음이 그리 뜨겁지 않았고, 공부나 집안일로 항상 바빴다는 사실을 박 여사는 알지 못했다. 오히려 소란의 그런 미지근한 태도가 진상을 더욱 안달 나 매달리게 한다는 사실도. 비정상적으로 이어져온 관계였기에 박 여사의 계산대로 헤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박 여사는 계획을 수정했다. 차라리 진상이 소란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게 옆에서 부추긴 것이다. 돈이 얽히는 순간 관계는 지저분해지고 만다. 이 또한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될 터였다. 행여 끝끝내 둘이 결혼이라도 하는 날엔 돈이 소란의 큰 약점이 될 것이기에 이로 하여금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원하는 바대로 상황을 짜고, 입맛에 맞게 사람을 장기 말처럼 움직이는 건 박 여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그 일 이후로 식당이 있는 건물은 쓰임을 다했다. 막냇동생인 박후만에게 꼬투리가 잡히기 전에 처분하라고 그리 일렀건만 푼돈에 집착하는 동생이 여태 끌어안고 있어 답답했다. 그런데 최근 매수자가 나타났다며 박후만은 싱글벙글했다. 그게 우소란, 정확히 말하자면 백 회장이었다니. 소란이 제 아들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건 기쁜 일이나, 그로 인해 진상은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런데 소란은 백 회장의 집에 시집을 가 호의호식하다니 기가 막혔다.

“웃기고들 있네.”

어차피 무용지물이 될 재산 가지고 이리저리 주고받는 꼴이 한심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들이 불쌍할 지경이다. 백강호와 결혼한다는 말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때 든 생각이 무엇이었던가. 같이 치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소란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 어디 마음껏 까불고 놀아보라지.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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