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귀엽다고,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85/112)

#85화. 귀엽다고, 예쁘다고. ……사랑한다고.2021.08.24.

“그 날짜가 맞다면.”

“…….”

“네가 살린 사람이……, 나였어.”

믿을 수 없어 소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고, 성준의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세상 곳곳에는 우리가 알지 못한 우연이 무수히 숨어 있겠지. 지금 만난 사람과 지난날 같은 곳에서 서로 스쳐 지났을지 모를 일이고, 거짓말처럼 깊이 엮인 인연에 놀라워할 수도 있을 테고. 소란은 제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강호를 만난 후로는 온통 놀랄 일투성이다.

“그게 어떻게 강호 씨……, 하아, ……폐창고에 있던 사람이 강호 씨였다니……. 중학생 때 납치되었다던 곳이, 정말 거기였어요?”

겹겹이 쌓인 우연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래, 맞아.”

강호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 직전에야 알게 된 소란의 동네가 은부동이라는 사실에, 자신이 납치됐던 동네와 가깝다고만 생각했다. 화재 신고한 사람과는 연결되지 못했고, 강호가 납치된 학생이었다는 사실 또한 후일을 우려해 철저히 감추었으니까. 깊은 사정을 알기 전까진 서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납치됐었어?”

어느새 잠에서 깬 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도였다. 절친인 나린 또한 몰랐고, 그로 인해 강호가 촉각 방어라는 트라우마까지 갖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몰랐다. 유난히 예민하다고 타박하기만 했을 뿐.

“너만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

“홍찬규도 모른다고?”

“그래.”

나린은 처음 알게 된 친구의 아픔에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이들 남매와도 엮인 일이라는 게 놀라울 뿐이고, 성준이 그때 다리를 다쳤다는 것 또한 마음이 아팠다. 어느 사실 하나 가벼이 넘길 수가 없다. 모든 선택이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른 것이니 후회나 아쉬움은 뒤로 미루어야 했다.

“난 그때 폐창고에 있던 사람에게, 늘 감사했어.”

성준이 조용하고 차분한 어투로 덧붙였다.

“살아줘서.”

죄책감에 힘겨워했던 소란도 누군가를 위험해서 구했다는 사실만큼은 위안이 되는 듯, 그 존재를 떠올릴 때면 눈빛이 편안해지곤 했다. 성준이 그 사실을 꺼내 보일 때마다 소란은 제게 얼마나 대단한 가족이 있는지를 매번 절감했다. 아빠 역시 성준처럼 절 원망하지 않았다. 소란은 아직도 아빠가 그때 써주신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딸아. 넌 후회할 필요가 없단다. 진짜 후회는 지난날을 반성하고 개선해서 미래를 준비할 때 의미가 있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후회할 이유조차 없는 거야. 애초에 잘못한 일이 없으니까. 살다 보면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에 휘말리기도 하지. 흘러간 일은 놓아주어야 해. 강물은 이미 바다로 흘러갔고, 그 물은 다시 퍼낼 수 없어. 딸아, 아파하지 말렴. 내 아들의 인생은 결코 망쳐진 것이 아니란다. 그저 우리의 인생이 강물처럼 흘러갈 뿐이지. 어떤 바다로 갈지는 우리가 정하는 거야. 성준이의 바다는 아주 넓고 깊고, 성준이가 탄 배는 무척 튼튼할 거라고 아빠는 믿고 있어. 그러니 너도 걱정하며 슬퍼하지 않아도 돼. 항해는 언제나 막막하고 두렵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지 않는다면 바다 위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도, 검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도, 모두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을 거야. 오직 사랑과 믿음만이 멋진 바다를 만나게 해줄 테니까. 딸아. 흘러간 일의 결과는 선택할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지. 불행을 선택하지 말렴. 행복해지는 데 최선을 다해. 나와 성준이에게 너는 언제나 사랑이란다. 여덟 살에 엄마를 잃은 것도, 열네 살에 오빠가 다친 것도, 소란 스스로 몇 번이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그럴 때 사랑하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괜찮아, 너 때문이 아니야, 였다. 한두 번으로 그칠 게 아니라 수천 번, 수만 번, 말해주고 또 말해주어야 했다. 그걸 아버지와 성준은 해냈다. 소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세우지 않고 보드랍게 안아주어 마음이 얼어붙지 않게 해주었다. 가족이면 응당 그래야 하는 법은 없다. 서로 잔인한 상처를 입히는 가족도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고 감싸주는 것 또한 노력이다. 그럴수록 제게 돌아오는 것 또한 사랑이고 배려라는 걸 소란은 가족 안에서 배워나갔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형의 사랑이 훨씬 더 풍요로운 유산임을 체득했다. 금수저가 아니어도, 넘치는 사랑은 금보다 귀한 보석이다. 그 보석으로 밥을 먹고 자랐다. 반짝거리고 따스한 마음으로 무장한 소란은 강호를 만났고, 그를 너른 품으로 안아줄 수 있었다. 서로를 살린 셈이다. 우연이 아니다. 사랑만이 이뤄낼 수 있는 기적이다.

  ◇ ◆ ◇ 신혼부부를 남겨두고 성준과 나린이 그들의 집을 나섰다. 나린의 차로 성준이 운전하여 온 참이다.

“음, 우리 드라이브하러 갈까요?”

나린이 제안했고, 그녀가 내비게이션에 찍어주는 주소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서울 한복판의 나지막한 산을 따라 올라가는 길. 아직 짧은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내려앉고 오색으로 물드는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한눈에 서울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길을 타고 구불구불 올라갔다. 차를 세우고 내린 곳에 조그마한 커피 트럭이 있어, 성준은 레몬차 두 잔을 사 왔다. 노을이 번지는 하늘 아래 벤치에 앉은 나린은 그가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리를 조금 절어 불편해 보이긴 하지만 성준은 단 한 번도 초라하게 보인 적이 없다. 그게 잘생긴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미소도, 품위 있는 자세와 따뜻한 분위기도, 전부 저 잘난 이목구비 때문일 것이라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납득했다. 아니었다. 외모가 아니라 그의 내면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거다. 나린은 미남이야 주변에서 차고 넘치게 보았다. 단순히 잘생겼단 이유로 그에게 반하진 않았을 것이다. 성준만이 가지고 있는 반짝거림을, 나린은 발견했다. 내 아들의 인생은 결코 망쳐진 것이 아니란다. 그저 우리의 인생이 강물처럼 흘러갈 뿐이지. 어떤 바다로 갈지는 우리가 정하는 거야. 아까 소란의 집에서 그의 아버지가 써주었다던 편지를 함께 보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운동선수의 다리가 망가졌으니 어찌 괜찮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한낱 인간인데. 성인군자도, 예수도, 부처도 아닌 우리는 그저 인간일 뿐인데. 자식에게 닥친 불행을 두고 ‘너만 아니었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텐데, 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가장 쉬울 터다. 그렇게라도 분노의 화살을 돌려야 살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맹목적인 분노와 원망을 녹일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임을 아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자라났으니 성준과 소란의 마음이 탄탄하게 다져질 수 있었겠지. 아무리 어려움과 아픔이 닥쳐도 잘 이겨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도 안아줄 수 있으며, 어떤 상황이든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테고.  

“착한 것도 유전인가.”

  소란에게 말한 적이 있다. 성준과 소란이 의붓남매라는 걸 몰랐을 때다. 두 사람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였다. 결국 유전보다 강한 건 환경임을 알게 된 것이다.

“부럽네요.”

나린은 성준이 레몬티를 건네며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대뜸 부럽다는 말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요?”

“그렇게 좋은 부모님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 부럽다고요.”

나는 아니거든요. 항상 내 마음의 땅은 척박했어요. 아무리 좋은 걸 가져도 좋은 줄 몰랐으니 예쁜 씨앗을 심어도 뿌리내릴 수 없었죠.

“그래도 나는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꽤 괜찮은 편인데.”

나린은 두 손으로 컵을 쥔 채 성준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번엔 정말 대박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을 만난 것. 메마른 마음에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 같은 사랑, 당신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에요.

“열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성준 씨를 아빠로 만나게 한 거예요.”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 생각했어요. 내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도.

“나는 사실 자신이 없는데, 성준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성준이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에서 컵을 떼어 내려놓았다. 그리곤 온전히 제 눈을 바라보게 하였다. 순간 훅 들어온 얼굴 공격에 나린이 멈칫했다. 잠시도 잊을 수 없긴 하지만 이 남자 새삼스럽게 너무 아름답다, 정말.

“나한텐 나린 씨가 이미 최고의 선물이에요.”

성준이 내뱉는 말에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람이 정말, 담백하게 잘생긴 얼굴로 어쩜 말도 예쁘게 하지.

“좋은 아빠도 좋지만, 좋은 남편이 될게요.”

무서운 전염병보다도 전파력이 강한 건 사랑이다. 번지고 번져나간 사랑이 서로를 채우고 아픔을 치유하며 외로움을 녹일 것이다. 비록 사랑이 넘치는 부모에게서 자라지 못했다 한들, 나린은 그의 빛나는 사랑을 알아보았다. 덕분에 이제는 그 아름다운 빛깔로 남은 인생을 채울 수가 있게 됐다.

“우리, 결혼식 언제 할까요?”

성준의 말에 나린의 마지막 남은 얼음마저 완전히 녹아내렸다.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일이 새로웠지만, 막상 결혼식과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실은 미래를 사랑으로 물들인다는 추상적인 말보다, 이제 결혼하여 서로 남편과 아내가 될 거란 사실에 몹시 설레었다. 나린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터트렸다.

“내일. 아니, 모레. 아니……, 오늘.”

결혼식이고 뭐고, 그건 언제 하든 상관없다.

“오늘부터 그냥 같이 살아요.”

이 남자를 안 보고 어떻게 살려고 했을까. 그건 메마른 땅이 아니라, 죽은 땅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생기있게 살아난 땅엔 촉촉이 물기가 어리고 싹이 피어났다.

“지금 우리 집으로 가요. 성준 씨는 몸만 들어오면 돼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성준이 약간 눈썹을 구기듯 찡그리다가 미소 지었다. 그 역시 참을 수 없다는 듯.

“지금 나린 씨, 너무 귀여운 거 알아요?”

“내가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나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귀엽다니.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내가 앞으로 매일 해줄게요.”

심장이 계속 뛴다. 어쩌면 좋지.

“귀엽다고,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매일매일.”

예쁘게 말하는 입술이 가까워졌다. 나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달고 따뜻한 입술이 겹쳐들었다. 사랑, 너무 좋다. 노을빛 하늘 아래 두 사람의 키스가 한없이 오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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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성준과 나린이 돌아가고, 강호와 소란만 남은 밤. 신혼집엔 오롯이 둘뿐이다. 이보다 값진 생일 선물이 어디 있을까.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내리쏟아졌다. 지금껏 사랑했던 것보다 더 많이. 그 한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이. 침실엔 불을 켜지 않았다. 이미 내려앉은 어둠이 그윽하게 차올랐다. 침실 창밖 정원에 켜둔 조명만이 은은히 밀려들었다. 키스하는 동안 입술을 뗄 겨를도 없이 움직인 두 사람의 옷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강호가 잠시 몸을 떨어뜨렸다. 소란의 실루엣을 따라 미끄러지는 빛이 아름다웠다. 수없이 안았지만 새롭기만 하다. 질리거나 지치기는커녕 떨어져 있는 순간조차 그녀가 안고 싶고 그리웠다. 함께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게 미치도록 좋았다.

“잠깐.”

다시 안기려는 소란의 어깨를 살며시 누르며 그가 협탁 서랍을 열었다. 피임 용구가 든 서랍은 여전히 마르지 않는 샘이지만, 오늘따라 너무 빨리 꺼내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강호가 꺼낸 건 평소와 다른 것이다.

“이게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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