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네가 살린 사람2021.08.21.
“누가. 아니, ……아니, 언제.”
강호의 음성에 성준과 소란이 왜 그런가 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금부동 폐창고, 그게 언제입니까.”
강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잔뜩 굳어버린 얼굴과 미약하게 떨리는 손이 그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다.
“강호 씨.”
소란이 얼른 그가 들고 있던 차 트레이를 받아서 내려놓았다.
“왜 그래요?”
걱정스레 그를 살피는데 강호가 입을 열었다.
“폐창고 화재를 보고 신고한 사람이 너였고, 그 일과 형님이 다친 상황이 연관 있다는 거야?”
“아아, 그게 설명하자면…….”
아픈 기억이라 소란이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지금껏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에 성준이 나섰다.
“내가 말할게. 그날.”
그때까지만 해도 강호가 묻는 이유는, 그저 지난 일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 ◇ 소란은 열네 살이었다. 중학생이었던 소란은 학원 차를 놓치는 것도 모르고 자습실에 남아서 공부하고 있었다.
“으아, 혼나겠다.”
시계를 본 소란이 서둘러 일어났다. 아빠와 오빠의 잔소리가 벌써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얼른 가방을 챙겨 나오려는 길에 선생님에게 부탁해 학원 전화를 사용했다.
“오빠, 난데 지금 학원에서 나가.”
- 또 차 시간 놓친 거야?
성준이 전화를 받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헤, 빨리 갈게.”
- 알았어. 오빠가 마중 나갈 테니까 공사장 골목 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창고 지나서는 바로 큰길로 나와, 알겠지?
“응! 나 걸어가고 있을게.”
집까지 버스를 타면 한참 돌아가서 애매했다. 학원이 있던 금부동에서 은부동 집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어, 차라리 걸어가는 게 빨라 종종 걸어 다니곤 했다. 비록 새로 공장이 지어지는 공사 현장을 지나쳐야 했지만 어차피 그쪽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로 큰길로 나갈 수 있었다. 아무리 공사장 골목 쪽이 지름길이어도 밤엔 사람도 없고 어두우니 들어가지 말라고 누누이 주의받았던 바다. 그러면서도 아빠와 성준은 소란에게 걸어올 일이 있으면 데리러 나갈 테니 꼭 미리 알려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소란은 밝게 인사하고 학원을 나섰다. 성준과 자주 다닌 길은 하나라, 그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중간에 만날 것이다. 검은 밤하늘에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어, 비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어쩐지 스산해 소란은 가방을 단단히 메고 걸어 나갔다. 공사장 쪽으로는 안 들어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길이 있다. 그리 좁고 위험한 골목은 아니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폐창고 몇 개가 있는 곳이라 소란은 서두르려고 했다. 날씨와 분위기 탓에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르르 콰아앙!
“아, 깜짝이야.”
천둥이다.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는 건 소란의 열네 살 인생 중 처음이다. 아직 비가 내리지 않지만 곧 쏟아질 게 분명하니 소란은 얼른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한 창고의 살짝 열린 문 안쪽으로 막 치솟기 시작한 불길이 보인 것이다.
“불이 났나……?”
허둥대는 인영도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 설마 그냥 불이 난 게 아니라, 일부러 불을 지른 걸까? 아니면 불을 피웠는데 잘못되어 번지기라도 하는 걸까. 어느 쪽이라도 위험한 상황이다. 놀란 소란은 저만치 걸어가는 아주머니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저기, 아주머니! 휴대전화 있으세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길에서 만난 중학생이 대뜸 전화를 쓰자고 하자 아주머니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전화는 왜?”
“저쪽 창고에 불이 난 것 같아서요.”
“아, 그래.”
다급한 목소리에 아주머니는 얼른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소란이 서둘러 119에 전화하여 불이 난 위치를 알리고 신고했다. 이내 고마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돌려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여기 계속 있을 거니? 아줌만 지금 아이 데리러 가야 해서.”
“네, 저도 가보려고요.”
소방차가 도착하고 화재가 진압되는 것까지 확인하면 좋겠지만, 혼자 그곳에 돌아가기엔 조금 무서웠다. 게다가 성준이 자신을 마중 나오는 길이다. 너무 늦어지면 오빠가 걱정할 게 분명해 소란도 더 지체할 순 없었다. 연신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가 쳐서 오싹하기도 했다. 콰앙!
“비가 엄청 오려나 보다. 너도 어서 집에 가렴.”
“네,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와 길이 갈린 소란은 혼자 은부동 방향으로 향했다. 소란의 친구들도 종종 지나곤 할 정도로 그리 위험하진 않았지만, 이 날따라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폐창고의 화재부터 스산했다. 그때. 뒤쪽에서 헥헥대는 숨소리, 질질 끌리는 신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누가 따라오는 거야?’
소란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큰길로 나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뛰어갈까. 그러다 더 빨리 쫓아오면? 잡히면? 어린 소란의 마음이 온갖 불안과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전속력으로 뛰려 마음먹던 순간, 그 ‘누구’가 뒤에서 소란의 어깨를 콱 잡았다. 우르르 쾅!
“꺄악!”
소리를 지르며 뿌리치려는데 바로 입이 막혔다. 거친 장갑을 낀 손으로 소란의 입을 막은 괴한은 공사장 쪽으로 끌고 가려 했고, 소란은 필사적으로 바둥거렸다.
“읍, 으읍!”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된 소녀가 성인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술 냄새가 훅 끼쳤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 소란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다시피 하여 질질 끌고 가 공사장에 다다르던 때였다. 퍽! 순간 절 붙든 손의 주인이 나동그라졌다. 단숨에 떨어져 나온 소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타난 사람은 성준이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소란은 켁켁대며 주저앉아 밭은 숨을 연신 토해냈다. 마침 나타난 성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성준의 목소리가 들리고 어깨를 감싸는 팔의 기운이 느껴지자 소란은 그제야 살았다고 생각했다.
“저리로 떨어져 있어.”
소란을 멀찍이 보내는데, 슬금슬금 몸을 일으킨 괴한이 휘청거리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공사 중인 건물 계단으로 도망쳐 올라갔다. 이대로 놓칠 순 없다. 잡아다가 경찰에 넘겨야 하겠기에 성준이 괴한을 따라 달려갔다. 천둥이 치더니 마침내 비가 쏟아졌다.
“따, 따라오지 마!”
잔뜩 쉬어버린 음성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이대로 놓치면 정체를 모르니 잡을 수도 없을뿐더러 혹시나 이쪽을 알아내 해코지하러 올 수도 있다.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아무리 고등학생이라 해도 성준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남자를 따라잡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곤죽이 되도록 더 패놓기도 전에 놈이 품에서 칼을 꺼냈다.
“주, 죽여버릴 수도 있어. 오지 마……!”
상대의 음성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왠지 크게 동요하며 두려워하는 듯하기도 했다. 저런 사람이 지나가던 소녀를 억지로 끌고 가려 했다니 믿기 어려웠다. 그만큼 괴한은 여러모로 비정상으로 보였다. 당시 남매는 알 리 없었다. 그 남자가 바로 폐창고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돈을 약속받고 어찌어찌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정신이 불안정했다. 납치, 감금에 살인, 방화까지 의뢰받았다. 어떻게든 맡은 일을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중압감, 죄책감, 두려움이 그를 괴물처럼 먹어치웠다. 도중에 그만둔다면 남은 돈을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가족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몇 차례나 사업에 실패하고 빚더미에 앉아 도망치며 희망을 놓아버린 이다. 빚을 다 갚아주고 가족들을 잘살게 해주겠다는 말에 무슨 일이든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자신은 쓰레기처럼 살 바에야 죽어도 좋았다.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다. 목표물은 이제 겨우 중3인 남자아이였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눈 한 번만 질끈 감기로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어.”
자신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남자아인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치밀하게 살인 계획을 짜서 의뢰할 정도라면, 어떻게든 일은 벌어지고 말 테니까. 그러니 밑바닥 인생을 끌어올릴 만큼 큰돈을 준다는 기회가 제게 온 이상 잡아야만 했다.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제 가족만큼은 더 이상 괴로운 지옥 속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내는 나약한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타깃을 납치하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런데 어째서 천둥이 친 걸까. 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으면 당연히 날짜를 오늘로 잡진 않았을 것이다. 방화 시나리오에 비가 웬 말인가. 그때부터 남자의 멘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더 깔끔하고 세련되게 일을 처리하는 전문가가 존재하겠지만, 그 괴한이 쓰인 이유는 하나였다. 노숙자로서, 여차하여 검거되더라도 혼자 벌인 우발적인 범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사주가 아닌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가장하기 위해 쓰이는 한낱 소모품일 뿐이다. 다만 변수가 생겼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건, 역시 그가 전문 살인청부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불까진 간신히 저지르고 뛰쳐나온 그는 달려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설마 했는데 쫓아가보니 신고를 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비가 올까 봐 미치겠는데 화재 신고까지 빨리 들어간다면 창고 안 남자아이는 살아 나올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다시 창고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회까닥 돌아버린 사내는 여학생을 따라왔다.
‘너 때문이야. 잘못되면 다, 너 때문이니까…… 망치면 너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사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이젠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움직였다. 극한의 두려움을 저보다 약한 상대에게 푸는 것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이에게 공격을 받았다. 보통 힘이 아니었던지라 사내는 이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쳐 칼을 꺼내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아직 공사 중인 건물이라 뒤쪽으로 더 가면 벽이 없어 절벽에 다다른 느낌이다.
“오, 오지 말라고……!”
성준은 신속하고 정확한 발차기로 사내의 손을 쳐내 칼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성준의 피지컬과 힘이 월등히 뛰어나다 한들 운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어둡고, 비가 내렸다. 사내에게 가려져 있던 쪽을 보지 못한 성준이 도망치는 그를 잡으려다 미끄러졌다. 아래로 떨어진 건 순간이었다. ◇ ◆ ◇ 성준과 소란은 나중에야 알았다. 화재 신고 덕분에 폐창고 안에 붙들려 있다가 목숨을 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소란이 본 수상한 인영은 알고 보니 노숙자였고, 애꿎은 사람을 데려다가 같이 죽으려고 했다던 묻지마 범행이었다. 소란이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비가 내리기 시작했더라도 안에서 번진 불길로 인해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나 그 사실을 바로 파악하진 못했다. 전해 들은 것도 한참 후였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면 다른 사정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맞았다. 성준이 그날 일로 인해 다리를 다쳤고, 이후 격변하는 상황은 남을 신경 쓸 만큼 한가롭지 못했으니까. 소란은 성준이 자신을 구하다가 다쳤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다.
“오빤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아?”
“네가 왜 원망스러워.”
나는 내가 미운데. 이렇게 싫은데.
“오빠가 그날 나 데리러 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나는 시간을 되돌려도, 내가 또 다친다고 해도, 널 데리러 갈 거야.”
안 그랬으면 네게 큰일이 났을 테니까. 성준은 그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버티기 힘들 때마다 생각했다. 새엄마의 웃음을 꼭 빼닮은 소란이 맛탕을 내밀며 “머거.” 하던 모습을. 어린 날에 받은 상처로 인해 제 삶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켜준 엄마와 소란이다. 성준은 그날 밤 소란을 데리러 나간 것을 후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엄마가 떠난 빈자리에는 이토록 귀한 사랑이 깊이 뿌리내렸다.
“소란아, 오빤 괜찮아. 세상에 나쁜 일만 있을 순 없어. 네가 학원 차를 놓친 덕분에 누군가는 살았으니까.”
큰 죄책감과 괴로움으로 버티는 소란에게 위안이 되는 말을 찾아 해주었다. 폐창고 안에 있던 사람이 살았다는 건 다행이다. 덕분에 소란의 마음이 피폐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남매로 인해 살게 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16년, 아니, 17년 전. 그러니까…….”
강호가 연도와 날짜까지 천천히 내뱉더니 먹먹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날짜가 맞다면.”
설마, 하는 얼굴로 소란이 숨을 삼켰다. 가슴을 꽉 메우며 치솟아 오르는 감정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네가 살린 사람이…….”
“…….”
“나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