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2021.08.17.
강호의 집. 병원에서 먼저 돌아온 강호가 옷을 갈아입고 주방에 들어섰다. 성준이 배송시킨 재료들이 도착해 채소라도 먼저 씻어둘 셈이다. 시간이 많이 드는 요리는 성준이 미리 만들어 가져오고, 여기선 전골 요리와 샐러드를 준비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음식 재료를 쓰기 좋게 정리할 때쯤 성준과 나린이 도착했다. 인터폰으로 문을 열어주고 1층에서 지하 차고로 이어진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강호는 잠시 멈춰 선 채 둘을 바라보았다.
“케이크는 내가 든다니까요.”
“나린 씨는 그냥 가만히 올라가기만 해요.”
“무겁잖아요, 이리 줘요. 차에 아직 짐 남아서 또 내려와야 하는데. 그냥 나눠서 한꺼번에 들고 올라가요.”
“내가 다시 내려오면 돼요. 괜찮아요.”
짐 들겠다고 실랑이하느라 1층엔 올라오지도 못하고 저대로 밤이라도 새울 기세다. 임신한 나린에겐 깃털 하나도 무겁다며 아무것도 못 들게 하는 성준이야 충분히 예상했지만 나린이 정말 의외다. 저렇게까지 사근사근하다고? 계나린이? 못 볼 꼴을 본 양 강호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문득 시선을 올린 나린이 계단 위쪽에 선 강호를 보았다. 바로 딸깍, 스위치가 눌린 듯 태도가 싹 바뀐 그녀가 입을 뗐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내려와서 빨리 짐이나 들어.”
온몸에 한기가 돌 만큼 싸늘한 음성이다. 강호는 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차가운 계싸가지, 확실히 ‘내 남자’에게만 따뜻한 그녀다.
◇ ◆ ◇ 소란이 집에 돌아왔을 때 식탁에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성준이 준비한 음식들과 나린이 주문해 가져온 예쁜 케이크, 강호가 준비한 와인까지 빈틈없는 생일상이다. 성준과 나린이 만나게 된 후로 넷이서 식사하는 자리는 처음이기도 했다.
“어서 앉아.”
강호가 그녀를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소란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렇게 행복한 생일을 맞이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삶은 무색무취였다. 늘 앞만 바라보며 아등바등 살아왔고, 성준과 등을 기댄 채 하루하루 견뎌냈다. 힘들어도 그게 힘든 건지도 몰랐다. 자각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기에 소란은 웃으며 버텨왔다. 그런데 강호를 만났다. 결혼했고,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행복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성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소란은 곧 고모가 된다. 첫 조카가 그렇게 예쁘다던데. 품에 안아볼 생각에 벌써 심장이 간질거렸다. 심지어 식당에만 머물던 성준이 세상 밖으로 나와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까지 했다. 주변 가득 사랑이 넘치는 요즘, 마치 여덟 살 이전 행복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설렜다.
“오빠, 고마워. 차리느라 고생했겠다. 괜히 언니까지 힘들었겠고.”
“난 별로 한 거 없…….”
“없지. 형님이 손도 못 대게 했는데.”
강호가 나린의 대답을 가로챘다. 과분한 줄 알라는 듯 타박이 이어졌다.
“우리 형님 같은 분 만난 걸 고마워하면서 살아야 해, 너는.”
언감생심 우리 형님은 꿈도 못 꾸게 하겠다던 다짐과 다르게, 강호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줬다. 덕분에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아기 때부터 이어온 정은, 현실 남매 같은 감정이다. 구박은 하지만 결국 아끼고 챙겨줄 수밖에 없는 사이다. 고마운 마음은 사실이지만 나린은 어쩐지 그런 강호가 얄미워졌다.
“우리 성준 씨를 두고 네가 왜 유세야? 이건 뭐 시집살이도 아니고, 백강호 등쌀에 내가 숨이 막혀 살 수나 있겠냐고.”
그 와중에 성준은 애틋한 눈빛으로 옆에 앉은 나린을 보았다. 우리 성준 씨랬다. ‘우리’, 성준 씨. 나린에게 그런 호칭으로 불린 우리의 성준 씨는 지금 밟고 있는 게 바닥이 아니라 구름인가 싶다. 그저 날 듯이 행복할 뿐.
“참! 아기는? 오빠, 처음 보니까 어땠어? 건강하지? 아들이야, 딸이야?”
소란은 두 사람이 병원에 함께 다녀온 사실을 두고 서둘러 물었다. 할아버지의 선물로 인해 정신이 쏙 빠진 터라 잠시 잊고 있었다.
“아아.”
내내 성준의 마음도 들떠 있다. 산부인과란 곳에 가본 것도 처음인데 그곳에서 자신의 아기를 초음파로 만나볼 수 있기까지 하니 처음엔 무척 긴장했다. 옆에 나린이 있다는 사실이 제일 떨렸다. 그녀와 마음이 통해 재회만 한 것만도 믿기지 않을 텐데, 두 사람 사이에 아기까지 있다니. “아빠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검은 화면에 웅크린 아기의 모습이 보이고, 여기가 손, 발, 이게 얼굴, 하는 설명을 들었다.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까지 들었을 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살아오며 가장 벅차게 느낀 감정이다. 아기와 나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어떻게든 두 사람을 반드시 지켜줘야겠다고 성준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아들이래.”
열무의 성별을 전하는 성준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그렇게 자세를 틀고 안 보여줘서 매번 아들인가, 딸인가 헷갈렸는데 오늘은 아빠 왔다고 아주 시원하게 보여주네요. 여기 보세요. 아들이에요, 아들.”
의사의 말대로 열무는 오늘에야 처음으로 자신이 아들임을 보여주었다.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
“아들이구나!”
소란은 드디어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기쁜 얼굴로 호응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다 예쁘겠지만, 두 사람을 닮은 아들을 생각하니 벌써 아기 왕자님이 태어난 듯 두근거렸다.
“이게 기분이 좀 묘하더라. 그냥 열무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아들인 것까지 알게 되니까 더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하나.”
벌써 임신 중기에 접어들었고, 예정일은 5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성준과 함께 보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선물은 뭐 주셨어?”
나린의 질문으로 화제는 백 회장의 선물로 돌아갔다.
“얼마나 대단한 걸 주시려고 너만 오라고 하신 거야? 안 그래도 통 큰 분이신데.”
“그게요. 잠시만요.”
소란이 엷게 웃어 보이며 침실 쪽으로 들어갔다. 선물을 받으러 간다기에 올 때는 커다란 쇼핑백쯤 들고 오지 않을까 했다. 구하기 어려운 가방이나 코트 같은 걸 주시려나 하고. 그런데 집에 온 소란은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나린이 궁금해하며 추측해보았다.
“보석이나 금 같은 거 아닐까. 아니면 금일봉.”
돌아온 소란이 보여준 건 핸드백에 넣느라 반으로 접은 서류봉투였다. 이에 강호, 나린, 성준 모두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이게 뭔데.”
강호는 소란이 건넨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를 본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다.
“……건물을 사주셨어?”
소란의 명의로 계약된 건물. 무엇을 상상했든 할아버지는 기대 이상이셨다.
“여긴…….”
계약서 안의 주소를 본 성준이 놀랐다. 은부동이란 동네 이름 뒤에 붙은 번지수까지, 낯익다. 어린 시절부터 남매의 터전이었던 곳인데.
“맞아, 우리 식당이 있는 건물.”
“건물 매입한다는 분이, 회장님이셨어?”
“응. 그 식당 계속 지켜나가고 싶다는 말 기억해주시고 선물해주신 거야, 오빠.”
그러니 단순히 건물을 사줬다는 사실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터전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힘들었던 삶이 온전히 존중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더 주고 싶고, 다 주고 싶은 게 할애비 마음이다. 너희 식구가 우리 강호와 이토록 귀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고마운 건 네가 강호 곁에 있어준다는 사실이지. 그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단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선했다.
“이렇게 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나 싶고, 아직도 얼떨떨해서…….”
강호가 옆에서 가만히 그녀의 등을 도닥였다.
“받을 자격, 충분해.”
전부터 그가 자주 했던 말. 묵직한 힘을 실은 말이 소란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 ◆ ◇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은 오후. 공기 중에 반짝이는 빛이 영롱하게 번져갔다. 식사를 마친 후 함께 상을 치우는 동안 나린만 거실의 1인 소파에서 쉬게 하였다. 치우는 이가 셋이라 금방 끝나긴 했지만, 그새를 못 참고 나린은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어떡하지. 너희 저녁 전엔 우리도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깨우지 마.”
성준의 걱정에 소란은 그냥 나린을 쉬게 두자 했다.
“차는 우리끼리 드시죠.”
강호가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가고, 성준과 소란이 소파에 앉았다. 한 식구가 된 듯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웃음이 났다.
“좋아 보여, 너.”
“오빠도.”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꿈만 같다. 더 바랄 것 없이 그저 행복한 나날. 두 사람은 동시에 가장 행복했던 어린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다.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행복으로만 물들었던 하루하루였다. 극한의 행복 끝에 맞이한 엄마의 죽음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후로 한 번도, 이렇게까지 좋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 없이 살았다. 동화 속 꽃밭을 거닐던 남매에게 세상의 쓴맛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가혹한 불행 앞에서 어린 남매의 가슴엔 깊은 생채기가 났었다. 왜일까. 행복한 지금, 그런 순간이 떠오르는 것은.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두려운 마음을 꺼내놓는 순간 어떤 일이든 실제로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예쁘고도 위태로운 모습이다. 남매에게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오빠 다리만 조금 나아지면 더 좋을 텐데.”
“이대로도 괜찮아.”
소란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에 성준이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자신 때문에 소란이 죄책감을 느끼거나 불편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괜찮다는 말은 하도 많이 해서 성준의 입과 소란의 귀에 깊이 박혀 있다.
“그래도, 나중에 열무 태어나면 같이 운동도 하고 놀고 싶기도 할 테니까.”
함께 잔디밭만 뛰어다녀도 열무는 좋아서 까르르 웃을 텐데.
“내가 좀 더 알아볼게. 전에 미국 어디에 유명한 한인 의사분 계시다고 했었잖아. 종골 골절 치료에 권위가 높으시다는 분.”
병원에 있다 보면 온갖 정보를 다 듣게 된다. 그때도 성준의 케이스를 보고 주변에서 전해준 이야기가 많았지만 여유는 없었다. 주어진 치료를 받고 재활에 힘쓰긴 했지만, 그때 어떻게든 무리해서라도 또 다른 시도를 해봤다면 지금과는 좀 달랐을까 하는 후회가 남고는 했다. 당시의 소란은 어리기도 했다. 고작 중학교 1학년생이 그 상황에서 결정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야 생각해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국에 있는 유명한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를 받는 시도조차 엄두 내지 못했던 아버지는, 얼마나 더 괴로우셨을까. 가슴이 미어져 말도 할 수 없었겠지. 소란은 이제 자신이 해주고 싶다. 할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맞설 힘과 여유를 선물로 받았으니, 저 때문에 다친 오빠를 위해 나누고 싶다.
“사실, 자주 생각했어. 그때 내가 학원 차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금부동을 지나 걸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괴한을 만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오빠도 그렇게 다치지 않았을 텐데.”
이미 벌어진 일에 수많은 가정은 소용없다. 그럼에도 괴로운 마음은 어쩔 수 없으니 후회라도 해보는 것이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성준이 덧붙였다.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니잖아. 네가 한 행동에 따라오는 결과만 가지고 후회할 필요는 없어.”
착한 오빠는 제 몸보다 소란의 마음을 더 걱정했다. 수없이 많은 상처로 얼룩진 동생의 가슴이 제 몸보다 더 아플 것을 걱정했다. 그러니 몇 번이고 얘기해줄 수 있다. 너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후회할 필요 없어, 라고. 나쁜 일의 이면엔 또 다른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너 그날 금부동 폐창고 지나오면서 불난 거 신고했다며. 그때 안에 사람이 있었다니, 네 덕분에 그 사람은 큰일을 면한 거잖아. 금부동을 지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겠…….”
“누가.”
그때 옆쪽에서 심해처럼 깊은 음성이 뚝 떨어졌다.
“아니, ……아니, 언제.”
강호가 차를 담은 트레이를 든 채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금부동 폐창고, 그게 언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