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생일 선물 (82/112)

#82화. 생일 선물2021.08.14.

소란의 생일이 돌아왔다.

“정말 같이 안 가도 되겠어?”

“다른 분도 아니고 할아버님 뵈러 가는 건데, 무슨 걱정이에요.”

강호는 반깁스를 풀기 위해 병원에 갈 준비를 하면서도 몇 번이나 물었다. 병원 스케줄을 미루고 소란과 함께 갈까, 해서. 백 회장이 혼자 오라고 했는데 굳이 함께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소란은 거절했다. 생일상은 성준이 와서 차리고 싶다고 했으니 집주인인 강호가 병원에서 먼저 돌아와 있어야 했다.

“잘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깁스 잘 풀고 와요.”

“그래.”

이내 강호가 수긍했다. 그나저나 깁스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간 소란이 하나하나 살뜰히 살펴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도 했다. 기간이 짧으니 선뜻 해준 것이겠지만 소란은 그의 얼굴에 로션까지 직접 발라줬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을 정도였다. 깁스 때문에 답답하고 불편한 것 따위 잊어버릴 만큼 참 좋았는데.

“다녀올게.”

꾀병이라도 부리고 싶단 마음을 겨우겨우 내리누르며 강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16615904829233.jpg

  수없이 해온 키스인데도 소란의 볼은 매번 발그레해지곤 했다. 그게 또 너무 예뻐서 깊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이따 전화해.”

“알았어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로는 잠깐의 헤어짐조차 힘들기만 하다. 몇 번이고 이어진 인사 끝에 강호는 먼저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대체 뭘 주시려고 소란을 따로 부르셨을까. 궁금하긴 하나 어차피 이따 알게 될 것이다. 강호는 조금만 참기로 했다. ◇ ◆ ◇

“너만 바쁘니? 어디서 사람을 오라, 가라 해.”

박 여사는 앙칼지게 말하며 핸드백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그녀의 세 남동생 중 첫째, 박후영의 사무실이다. 동생 주제에 윗사람이라도 되는 양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큰동생이 못마땅했다. 아버지에게 사업을 물려받은 후론 내리 그랬다. 하지만 아쉬운 건 박 여사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도 올 수밖에 없다.

“후우. 앉기나 하쇼.”

박후영은 머리가 지끈지끈 깨질 것 같은 얼굴로 박 여사 쪽으로 왔다. 그가 박 여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상황이 별로 안 좋아. 지금 다 올스톱이니까 누님도 그 일 그만둬.”

“무슨 소리야.”

성질이 확 솟구친 박 여사가 눈썹을 구겼다. 동생 박후영이 물려받아 운영하는 회사 ‘원진조경’과 ‘제풍코퍼레이션’. 그중 제풍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불법 사금융회사이다. 이 비밀기업의 뒤를 처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업체들은 둘째, 셋째 동생들이 건사하여 잡일을 도맡고 있다. 박 여사는 첫째 동생이자 수장인 박후영의 허락을 받아 오래전부터 제 개인적인 일에 이들의 힘을 은밀히 빌려 썼다. 그런데, 갑자기 그만두라니. 결실을 보기 위해 달려온 세월이 얼마인데.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이럴 때일수록 자중해야 한단 말이야.”

“나는 또 뭐라고. 고작 분위기 가지고 그러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그런 걸로 겁을 먹어, 먹길.”

박 여사가 한심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불법으로 시작해 불법으로 끝나는 일이 업이면서 뭐 저리 간이 작은가. 예전부터 네 남매 중 자신이 배포가 제일 컸다. 장녀로서 아버지 옆에서 밀착해 도우며 사업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체득하기도 했다. 박 여사는 회사가 당연히 제게 돌아올 줄 알았는데 딸이라는 이유로 절 배제하고 큰동생에게 사업을 물려준 아버지가 아직도 원망스러웠다. 잘 구운 생선 가운데 토막은 박후영이 독차지하고, 둘째, 셋째 동생과 박 여사 자신은 대가리와 꼬리만 겨우 나눠 먹은 형국이니 말이다. 아무리 결혼하여 가정을 이뤄 나갔다지만 요즘 시대에 아들, 딸 가리는 게 어디 있는가. 정작 자신은 제 아들 진상과 딸 진혜를 뼛속까지 차별하고 있지만 제 허물은 보지 못하는 법. 그녀는 보고 배운 대로, 본인이 혐오했던 짓을 해오는 중이다. 친정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무형의 재산이 박 여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식을 대하는 방식부터, 가면을 쓰는 법, 심지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까지도.

“누님,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경찰인지 검찰인지 이미 후성이, 후만이 회사부터 까뒤집고 다닌다는 소문 있어. 줄 타고 제풍까지 건너 들어오게 되면 이거 아주 큰일이라고.”

박후영의 표정은 무척 심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법적인 돈을 다루는 ‘제풍코퍼레이션’은 이미 짜인 시스템 안에서 워낙 철두철미하게 움직여왔다. 꼬투리가 잡힐 리가 없다. 오랜 기간 박후성, 박후만 형제가 쓰레기 처리를 도맡아 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꼬리가 밟힌 것이다. 꼬리를 자를 수도 없다. 이미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중이니 나중엔 자를 꼬리가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다. 희한한 접근이라 예측도 할 수 없다. 그저 숨죽이고 몸통을 감출 수밖에.

“어쩌다가?”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구정물이 새기 시작한 구멍의 주인공은 막내인 박후만이란 걸 그들은 알 수 없었다. 하필 태석에게 걸린 죄로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나 그토록 어이없게 터진 물꼬를 짐작이나 할 턱이 있나. 강력부 검사 한서윤이 제풍의 꼬리를 잡아 진행하던 일은 태석과의 만남으로 급물살을 탔다. 턱 밑까지 들어찬 위협의 기운을 박후영마저 느낄 정도였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다.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도록 재정비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누님도 지금 그 일 그만둬, 이제.”

“나는 네 회사랑 상관없잖아.”

박 여사는 냉랭하게 선을 그었다. 그만두라는 말은 그녀에겐 청천벽력 같았다. 오직 그것만 바라보고 달려온 시간이 아니던가. 손에 쥐는 것 하나 없이 이대로 떨어져 나갈 순 없다. ‘제풍코퍼레이션’을 겨냥한 거라면 말 그대로 저와는 상관없다. 박 여사는 그 불법 사금융 쪽에는 발가락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으니까.

“어차피 내가 잔챙이들 데리고 따로 일 보는 거야 너한테 별 영향도 없을 거잖니.”

박 여사는 일부러 더 태평하게 굴었다. 동생이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니 쌤통이다. 여태 분에 넘치는 걸 안고 있으니 사달이 나지. 동생에게 빼앗겨 원통했던 마음이 조금은 보상받는 기분이다. 아버지가 동생한텐 평생 먹어도 남을 물고기를 안겨주고는, 제겐 부러진 낚싯대 하나 던져주고 혼자 낚아보라며 거센 파도에다 몰아넣고 가시지 않았던가. 자신이 피고름 짜내며 물고기를 낚으려 진을 치는 동안 동생은 호의호식했다. 이제야 조금 탈이 난다니 참으로 고소한 일이다. 박 여사는 속으로 실컷 비웃었다. 박후영은 누나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똥줄이 탄 듯 버럭 소리쳤다.

“우리 애들 데려다가 하는 일이잖아! 지금은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는 거 아냐!”

첫째가 허락하긴 했지만 일에 직접 가담한 둘째, 셋째 동생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비록 한 번 실패하긴 했지만 그렇기에 여러 방면으로 더 철저하게 준비하는 중이다. 십수 년에 걸친 이 숙원 사업이 성공으로 끝나면 동생들의 몫도 떼어주기로 했다. 첫째인 박후영에게도 업체와 사람들을 쓸 수 있도록 선뜻 내어준 공이 있다. 모두가 한배를 탄 셈이다. 그러니 무조건 말릴 게 아니라 협조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박 여사는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준비한 일인지 모르니? 제풍이 벌집이 되더라도 이건 꼭 진행해야 해.”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자꾸 상관없다, 없다 하는데, 이게 어디 그럴 일이야?”

박후영이 씩씩거렸다.

“괜히 살인사건 주도한 거 걸리기라도 하면 우리까지 싸잡혀서…….”

“살인이라니?”

박 여사가 정색하며 말을 끊었다.

“엄연히 화재 사고인데.”

진실이 그러하다고 믿기라도 하는 듯 소름 끼치게 무덤덤한 얼굴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늙은이야 뭐, 살 만큼 살았으니 때가 되어서 가는 거고. 어차피 사람은 다 한 번씩 죽어. 뭐 대수라고.”

박후영은 아무리 제 누나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쁜 짓인 걸 뻔히 알면서 죄책감 하나 없이 행한다는 건 보통을 넘어선 수준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누나는 마음먹은 건 꼭 해야만 하는 사람인데. 여태껏 저 성질머리를 죽이고 살아온 세월만 봐도 보통 의지가 아니다.

“좀 잠잠해지면 다시 진행하든지. 그럼 될 거 아니야.”

“너는 설계 안 해봐서 몰라. 앞뒤가 다 맞게 시기까지 잡아놓은 걸 어떻게 틀어?”

박 여사는 자신만만했다.

“그렇게 티가 날 일이었으면 내가 십몇 년을 끌지도 못했어. 일 끝까지 해치우고도 아마 아무도 의심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이쪽은 신경 끄고 넌 네 앞가림이나 해. 알겠니?”

한 방에 해치울 수도 없다.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했기에 박 여사는 숨죽이고 몸을 낮추어 오늘까지 왔다.

“누님, 정말…….”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박후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표가 뚜렷한 누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쟁취하고 말 것이다. 고작 십만 원, 백만 원 때문에도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있는데, 백 회장의 전 재산이 걸렸다니 이만한 근성을 발휘할 가치가 있긴 했다.

“일단 상황은 알았으니 조심해서 진행하마. 뭐, 그럴 건더기야 있겠냐만.”

박 여사는 당당히 웃으며 일어섰다.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나는 성공한다. 반드시.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였다. ◇ ◆ ◇ 백 회장은 소란의 집으로 차를 보내주었다.

“타십시오.”

“아, 네, 감사합니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으려니 못내 불편한 소란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혹시 멀리 가나요?”

“아니요. 멀지 않습니다.”

궁금해 묻는 말에 기사가 답해주었다.

“어딘지는…….”

“그냥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착하면 아신다고요.”

역시나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는 달리고 달려, 소란에게도 익숙한 동네로 접어들었다. 점점 가까워질 때만 해도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그곳이다.

‘우리 동네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소란이 결혼하기 전에 살던 동네. 그녀의 오빠 성준이 지금도 사는 동네. 즉, 은부동이다. 차는 은부동의 한 공인중개사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할아버지의 비서로 종종 보았던 얼굴이다.

“네, 안녕하세요.”

소란은 당황해 인사하며 차에서 내렸다.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선물을 주시겠다며 만나자 하신 곳이 여기라니, 내내 어리둥절했다.  

“건물주가 바뀐다고?”

“응, 현지네 아주머니께서 부동산에서 직접 들으셨대. 건물 매입하려고 몇 번 다녀간 사람이 있는데 곧 계약할 예정이라고.”

“잘됐다. 새 건물주분은 좀 괜찮아야 할 텐데.”

  순간, 성준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들어가시죠.”

비서가 문을 열어주고, 안으로 들어서자 중개사 맞은편에 백 회장이 앉아 있었다.

“할아버님.”

“왔구나. 어서 오너라.”

소란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백 회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손주며느리를 맞이했다.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그녀에게 백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리 와서 앉지 않고.”

“그게……, 할아버님, 여긴 왜…….”

“선물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백 회장은 테이블에 쫘르르 놓여 있는 서류를 검지로 톡톡 두드려 보였다. 1층에 ‘달 뜨는 밥집’이 있는 건물. 그 건물의 매매계약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