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백강호의 손바닥 위2021.08.07.
“언니 전에 오빠가 바람피운 적 몇 번 있잖아요? 그거 사실은…….”
옆을 돌아보던 진혜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소란을 구석 자리로 이끌었다.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 앉은 후에야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그거 사실은, 엄마가 보낸 여자들이에요.”
“……뭐라고요?”
소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엄마가 아들에게 보낸 여자들이라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언니랑 떨어뜨리려고 오빠한테 여자까지 붙인 거예요. 오빠는 또 거기에 홀랑 넘어가서 다른 여자 몇 번 만났던 거고.”
도저히 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라 소란은 어안이 벙벙했다. 일부러 붙인 여자라니.
“딴 여자 접근시키면 언니랑은 헤어질 줄 알았나 봐요. 그런데 멍청한 오빠가 다시 언니한테 찰싹 붙어버리니까 엄마도 약이 올랐겠죠. 뒤에서 그런 일까지 꾸몄으면서 정작 언니 앞에서는 헤어지라 마라, 한 적도 없었다면서요.”
내부고발자 진혜의 말에 소란은 과거를 떠올렸다. 제 앞에 나타난 박 여사는 대놓고 내 아들에게서 떨어지라 종용하지는 않았다. 교묘하게 사람을 깎아내리고 상처를 줄지언정 헤어지라고 한 적은 없기에, 싫으면 차라리 반대하지 왜 저러실까 생각했다.
“그거 다 오빠가 쓰러지거나 아니면 허튼 마음 품을까 봐 그러는 거였잖아요. 우리 엄마지만 진짜 무섭다니까.”
심지어 헤어진 후에도 찾아와 다시 만나라고까지 했다. 진상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면서 말이다. 게다가 식구가 되면 빌린 돈을 왜 받겠냐며 결혼을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아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반대하지 않았을 뿐, 실상 박 여사는 두 사람이 헤어지기만 바라고 있던 것이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숨겨진 이야기는 훨씬 더 너저분했다. 특히 일부러 여자를 붙였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걸 진상도 알게 된다면 아마 길길이 날뛸 테지. 자연스러운 헤어짐을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며 상황을 살폈을 박 여사를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듯했다.
“어쨌든, 오빠랑 기를 쓰고 헤어진 건 언니 정말 잘한 일이에요.”
마음에 드는 며느릿감도 아니면서 아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받아들였다가, 두고두고 어떻게 괴롭혔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백강호 오빠야 친척이라도 별로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우리 오빠보다는 그쪽이 훨씬 나은 건 분명해요. 언니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제 식구 감싸기’ 따위는 전혀 모르는 진혜의 냉혹한 평가를 듣고 있다가 소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 엄마가 다른 사람이랑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요. 내가 집에 있는지 몰랐나 봐요. 별 얘기를 다 하던데.”
박 여사를 향한 진혜의 감정은 골이 꽤 깊어 보였다.
“참, 오빠는 지난달 호주에 갔어요. 언니 결혼식 다녀온 후로 술 퍼마시고 시름시름 앓아서, 엄마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보내버렸거든요. 오빠가 여행은 또 좋아하니까. 그래서 순순히 가긴 했는데 지내기 괜찮다고 하는 걸 보니 좀 오래 있다가 올 모양이에요.”
어쩐지 조용했다. 진상은 다시 찾아오거나 연락하지 않았는데, 외국에 가서 그랬구나 싶었다. 어찌 됐든 다행이다.
“나이 서른이 넘어 취직도 안 하고, 아빠 회사 일도 안 배운다고 하고, 공부를 더 하는 것도 아니고, 집안 돈만 거덜 내는 식충이가 따로 없어요. 한심해, 진짜. 호주에서 돈은 또 얼마나 많이 쓰고 있게요. 분수도 모르고 비싼 호텔에, 비싼 차에, 아주 돈 무서운 줄 모르고 펑펑 쓴다니까요.”
진혜는 거침없이 제 오빠를 비난했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싼 위인이긴 했다.
“내가 우리 집 욕은 친구들한테도 쪽팔려서 못 해요. 언니니까 하는 거지. 생각을 해봐요, 저따위로 사는 인간한테 전 재산을 물려줄 생각 하는 우리 엄마가 정상이에요?”
“전 재산을 물려준대요?”
소란은 또 어이가 없었다.
“진혜 씨한테는요?”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나는 어디서 주워 온 자식이냐고요. 아니, 주워 왔어도 그러면 안 되지. 엄연히 나도 호적에 올라가 있는 자식인데. 물론 나한테는 콩알 하나 안 주고 몽땅 오빠한테만 몰아주겠다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오빠한테 다 주겠다는 거예요. 말끝마다 이게 다 네 재산인데 무슨 걱정이냐 그러거든요.”
제법 머리도 좋고 명문대 법대까지 나온 아들을 놀고먹는 식충이로 만든 건 바로 박 여사였다. 반면 진혜는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악바리로 살아가는 중으로 보였다.
“나한테는, 넌 잘하니까, 넌 똑똑하니까, 넌 앞가림할 수 있으니까, 이딴 소리만 하고요. 오빠는 사사건건 챙겨주는데 백진상 진짜, 반푼이가 따로 없어요.”
그녀의 말대로 참 노답인 집안이다. 이토록 내밀한 가정의 속내까지 알 수는 없었으니 하마터면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될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아찔하기만 했다.
“음, 백진상에게만 재산을 다 물려준다고 해도, 나중에 소송해서 진혜 씨 몫을 어느 정도 되찾아올 수는 있어요.”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 저도 알아봐놨어요.”
이미 진혜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진 않았을 터, 자라는 내내 뼛속까지 사무치는 차별로 괴로움을 겪었으리란 건 쉽게 짐작되었다.
“그런데 사실 상속이란 건, 부모가 죽어야 물려받는 재산이잖아요. 우리 엄마가 뭐, 당장 죽고 싶진 않을 거고, 눈앞의 오빠는 이렇게 지 밥값도 안 하고 놀기만 하니 미리 재산을 떼어주고 싶은 모양인데.”
진혜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증여 과정에 아무래도 불법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서요.”
“불법이요?”
“네. 오빠한테 증여하려는 아파트랑 토지가 있는데, 세금은 또 아까운가 봐요. 이렇게 저렇게 수를 짜더라고요.”
말을 하다 말고 진혜는 씩씩거렸다. 어째서 난 빼고 오빠한테만 다 줄 수가 있는 거냐, 잔뜩 성질이 오른 얼굴이다.
“이 불법 증여에 관해 고소하려면, 지금부터 증거를 잘 모아둬야 하겠죠?”
분기탱천한 그녀가 로펌 밀집 구역으로 달려온 이유였다. 엄마인 박 여사를 고소하기 위해 사전에 법률적 조언을 얻어 준비를 시작하려고. 상상도 못 한 진혜의 생각에 소란이 또 한 번 놀랐다. 어떻게 돌아가는 집구석인가. 야무지고 똑소리 나는 딸을 적으로 돌릴 정도라면 박 여사는 대체 어떤 인간인 건가. 마주한 현실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란은 당황해 헛숨을 내뱉고는 차분하게 일렀다.
“상담하러 가면 그쪽에서 자세히 얘기해주겠지만, 일단 진혜 씨는 어머니를 고소할 수 없어요.”
“왜요?”
“형사소송법 제 224조에 의하면, 자식은 부모를 고소할 수 없다고 되어 있어요. 본인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고소하지 못한다, 라고요.”
“부모가 죄를 지어도요? 아예 고소를 못 한다고요?”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에는 평등권과 권리 침해에 관한 쟁점으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직은 법으로 정해진 게 그래요. 물론 학대나 성폭력, 가정폭력 등은 특수한 경우라 예외지만, 이건 예외에 해당하는 게 아니라서 직접 고소가 실행될 순 없어요.”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는 건 불효다, 뭐 그런 거예요?”
“우리나라 정서가 그런가 봐요.”
법이 모두를 보호할 순 없고, 모두를 벌할 수도 없다는 점에선 어느 정도 씁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지켜지는 윤리와 사상이 있고, 이를 토대로 수호되는 법과 질서니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죄를 짓고도 벌을 안 받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니고요.”
소란이 분명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보나 신고를 통해 수사가 진행되도록 하면 돼요.”
딸이 엄마가 저지르는 불법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다는, 이 콩가루 향기가 폴폴 풍기는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지만 어쩌다 보니 소란은 무보수 법률상담을 성심껏 해주고 있었다.
“증거를 모아 국세청에 바로 신고할 수도 있고요. 부동산 거래에 관해 교란 행위를 감시하는 기관이 있어서 그런 곳으로 제보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실제 처벌에 이르기까진 쉽지 않을 거예요.”
“헐, 왜요?”
즉각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혜 씨 어머니도 많은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아까 수를 짠다고 했죠? 아마 그 분야에 탁월한 전문가들에게 거액을 주고 의뢰했을 거예요. 적발되지 않는 선에서 온갖 편법을 동원하겠죠. 혹시 위법이 드러난다 해도 벌금이랑 세금 좀 내고 마는 선일 테고요. 그 정도는 아마 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꼴 좋게 잡혀가 콩밥 먹고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거란 말이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니 일단은 이 정도로만 얘기할게요.”
진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조금은 김이 샌 목소리로 말했다.
“꼭 엄마한테 수갑을 채우고 싶고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그 정도로 잘못이라는 걸 알면 엄마도 마음을 좀 돌리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
소란은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오빠한테 재산 주려고는 갖은 애를 쓰고 별별 짓까지 다 하면서. 그딴 불법적인 과정에 펑펑 쓸 돈은 있어도 나한텐 십 원 한 장 아까워하는 모습이 너무 싫었거든요. 꼭 돈만이 아니라, 사사건건 오빠만 감싸고. ……나는 뭐 자식도 아니냐구요.”
낮은 울분이 진혜의 가슴으로부터 끓어올랐다.
“참, 언니. 명함 하나 주실래요?”
소란은 제 명함을 한 장 꺼내 진혜에게 내밀었다.
“드리긴 하는데, 상속이나 증여 문제는 그쪽으로 전문인 변호사와 이야기하는 게 더 좋을 거예요. 분야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저희도 평소 안 보던 쪽은 따로 공부가 필요하거든요.”
“네, 일단 예약해둔 곳에서 자세히 상담 좀 받아볼게요. 그거랑은 별개로, 언니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필요한 일 생기면 연락해요.”
소란은 엷게 웃어 보였다. 전남친 여동생과 이런 식으로 엮일 줄은 몰랐지만,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이날의 조우는 꽤 영양가 있는 만남이었다. ◇ ◆ ◇
“나린 씨. ……이 회사 다녔어요?”
‘비욘드 더 테이블’의 영상 콘텐츠 협업 건으로 회사에 방문한 성준은 기획팀 팀장이라며 나타난 나린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린의 얼굴을 보게 되어 환한 웃음이 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이런 장소에서의 우연한 만남에 더욱 가슴이 설렜다.
“매제가 얘기 안 하던데. 아……, 나린 씨도 말 안 했죠.”
“어느 회사 다니는지까지 말할 경황은 없었잖아요.”
얼떨떨한 음성으로 답하며 나린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강호와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얘기야 차차 하려고 했다. 그리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성준도 앉더니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웃었다. 그때 직원 하나가 서둘러 들어왔다.
“미팅 중에 실례합니다, 팀장님. 이거 방금 대표님이 보내주신 자료인데요. 바로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자료를 가지고 온 직원은 감탄하는 얼굴로 성준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들어올 때부터 이미 상기된 표정이다.
“‘준의 부엌’ 그분이셨다니 와……. 진짜 깜짝 놀랐어요. 저 채널 구독자인데요, 올리신 영상 빠짐없이 다 봤거든요.”
“아아, 네.”
“진작 얼굴 까고 방송하셨으면 단기간 십만 구독자 돌파가 아니라, 단기간 백만 구독자 기록도 껌이었을 텐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성준은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어색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여기요, 팀장님.”
직원이 나린의 앞에 내려놓은 자료에는 ‘준의 부엌’ 채널에 관한 소개와 기획에의 적합성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나린이 물었다.
“이걸 백강호 대표가 가져다주라고 했단 말이죠?”
“네. 방금 메일로 보내주셔서 뽑아오는 길이에요.”
나린은 이로써 확실히 알게 됐다. 집들이에서의 만남으로 끝이 아니라, 지금의 만남까지도 전부 백강호의 손바닥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린이 일부러 리스트에 ‘준의 부엌’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준의 부엌’이 성준의 채널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단 얘기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이미 만났는데도, 이젠 아예 떨어지지도 못하게 단단히 엮어버릴 심산인가. 빈틈없는 백강호의 굳히기 한판이다.